소설리스트

325화 (325/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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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몇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굼뜨게 눈을 깜빡이며 멍한 감각을 되돌렸다. 결국 기절해 버린 건가. 몸이 터져 나가지 않은 걸 보면 기절한 새에 폭주가 진행된 것 같진 않다.

묵직한 몸에 힘을 주어 바닥을 짚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손바닥 위로 시린 냉기가 퍼졌다. 짜증스러운 한숨과 함께 뿌연 입김이 새어 나왔다.

“추워.”

추위에는 제법 면역이 있음에도 찬기에 소름이 돋았다. 덕분에 흐리멍덩했던 정신은 빠른 속도로 되돌아왔다. 몸을 일으켜는 데 성공한 그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추락을 피하고자 급히 몸을 던져 넣었던 곳. 자세히 살펴보니 이곳은 시계탑이었다. 예전 카델과 함께 시간을 보냈던 장소. 그 추억의 장소는, 온통 투명한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나 때문인가.”

폭주를 제어했다고는 해도 그 여파가 없을 리는 없다. 의식을 잃은 동안 새어 나간 마력이 시계탑을 얼린 듯했다. 무심한 눈빛은 금세 출구를 찾아 움직였다. 아무리 추억의 장소래도 카델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

처음 들어왔던 구멍을 발견한 라이돈이 망설임 없이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쓰러진 시간이 길지 않다면 지금쯤 인간들은 카델의 보호 아래 얼어붙은 마족을 깨부수고 있을 테다. 카델 혼자 무리하게 둘 순 없으니 어서 도와야 한다. 겸사겸사 칭찬도 요구해야지. 그리 생각하며 힘차게 날개를 펄럭였으나, 기세는 얼마 가지 못했다.

“응……?”

무척 적막했다. 들려오는 것이라곤 날 선 칼바람 소리가 전부. 전장의 함성이나 고통의 비명, 다급한 지시 따위는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이유는 굳이 찾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얼어붙은 것은 시계탑뿐만이 아니었다. 주위의 저택과 노점, 술집, 대장간, 건물이란 건물은 전부 얼음으로 뒤덮였다. 잠시 당혹감을 달래듯 눈을 깜빡이던 라이돈이 비행의 고도를 낮췄다.

하얗게 얼어붙은 거리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전부 대피했을 테니 당연했다. 그 당연한 사실을 몇 차례 중얼거리다, 다시 고도를 높여 어딘가를 향해 급히 날아갔다. 장벽이었다. 그곳에선 분명 기사들이 전투에 한창일 테다.

“……뭐야.”

하지만 도착한 장벽에서 라이돈이 발견한 것은, 역동감 있는 전투의 현장이 아니었다. 조각처럼 얼어 버린 수많은 기사. 그들의 얼굴은 갑작스러운 재앙이라도 맞닥뜨린 듯 혼란스럽게 일그러져 있었다.

이 인간들은 어째서 얼어 있는가. 장벽 아래 빙산처럼 얼어붙은 마족 무더기들은 상관없다. 애초에 그들을 얼리기 위해 전개한 마법이니까. 하지만 이 인간들은 얼어선 안 됐다.

황망한 눈으로 장벽을 걸어가던 라이돈의 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곧 달려들 듯 정면으로 날아간 그가 어느 얼음 조각 앞에 멈춰 섰다.

“루멘? 왜 이러고 있는 거야?”

루멘은 하늘을 올려 보고 있었다. 무엇을 보고 있었던 건진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표정은 불안하게 굳어 있었다.

“……아하하! 설마 카델한테 버려진 거야? 안 됐네, 루멘! 그러게 평소에 잘했어야지.”

루멘의 눈앞으로 장난스레 손을 흔들었다. 딱딱한 얼음덩이를 괜스레 툭툭 건드리기도 했다. 슬쩍 마력을 불어넣어 얼음을 깨 보려 했지만, 변화는 없었다.

미소를 머금었던 입가가 서서히 경직되며,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던 입이 다물렸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라이돈이 얼어붙은 루멘을 땅에서 떼어 내 다시금 날아올랐다.

“내가 특별히 카델한테 부탁해 볼게. 계속 그렇게 얼어 있으면 재미없으니까.”

동료들이 있던 곳으로 비행했다. 빠르게 날아가는 와중에도 강박적으로 아래를 살폈다. 전부 똑같은 풍경이었다. 꼭 얼음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조형물을 보는 듯했다. 생명력이라곤 털끝만큼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이 무엇보다도 라이돈을 두렵게 만들었다.

“……괜찮아. 조금, 아주 조금 잘못된 거야. 금방 고쳐 줄 거야.”

카델이 이 사태의 대책을 마련했을 거다. 어쩌면 왜 이렇게 일을 과하게 벌여 놨냐며 보자마자 잔소리를 할지도 모르겠다. 약간은 서운하겠지만, 상관없다. 그냥 들어 주겠다. 사과할 마음도 있었다.

“…….”

동료들이 모여 있던 건물의 꼭대기에 도착했다. 라이돈은 힘들게 들고 온 루멘을 바닥에 세워 놓고, 살짝 거칠어진 숨을 골랐다. 한 발짝씩 신중하게 다가갔다. 미끄러운 땅에 몇 번씩 미끄러지면서도, 용케 중심을 잡고 나아갔다.

그러는 동안 시선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사실은 여전히 기절한 채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도통 현실감 없는 모습이었다. 이것이 현실이 아니기를 바랐다.

“카델.”

전부 얼어 버린 동료들 사이, 카델이 있었다. 그 역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앞에 멈춰 고개를 숙이니 얼추 시선이 맞았다. 바라던 반응은 없었다. 그는 큰일을 해내고 온 자신을 안아 주지도, 타박하지도, 걱정해 주지도 않았다.

그저 단단하게 얼어붙은 채, 이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먼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카델…….”

어째서. 너라면 내 마법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었을 텐데. 매번 잔소리하면서도 어수룩한 내 행동을 수습해 줬으니까, 그러니까 이번에도…….

“카델……?”

굳어 있던 라이돈의 눈매가 서서히 일그러지며, 울음기 섞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보채듯 카델의 이름을 불렀다. 차가운 어깨를 흔들어 보기도, 조심스럽게 끌어안기도 했다. 하지만 끝내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얗게 얼어붙은 도시 속, 숨 쉬는 것은 오직 라이돈뿐이었으니.

「육체와 혼의 결속력 약화. 회복 모드가 활성화됩니다.」

「회복 진행률: 28%」

「완료까지 남은 시간: 38시간 11분」

빛이라곤 시스템 창의 불빛뿐인 삭막한 공간은,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카델은 바닥 없는 허공에 정좌를 튼 채 차분히 바깥 상황을 예상해 보았다.

‘내가 죽지 않았으니 다른 사람들도 당장 목숨이 위험하진 않을 거야. 쿤라의 힘을 사용하길 잘했어.’

라이돈이 폭주를 막기 위해 어떤 마법을 택했는지는 몰라도, 일반적인 마법이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 수 있었다.

아직까지도 온몸을 얼어붙이던 냉기와 시야 확보가 불가능할 정도로 휘몰아치던 눈보라, 그 속에 담긴 말도 안 되는 농도의 마력이 생생했다.

빙판이 된 대지와 기어코 얼음에 잡아먹힌 두 다리를 발견한 순간. 카델은 쿤라의 힘을 모조리 끌어다 방출했다.

결과적으론 라이돈의 공격 범위를 수비하는 보호막을 생성하는 데 성공했지만, 완벽한 보호에는 실패했다. 자신이 무의 공간에 들어선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과하게 범위를 늘리느라 효력이 약해진 보호막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는 데에서 역할을 그쳤다.

하지만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가. 이 새로운 고민거리는, 계속해서 변동하는 시스템 창의 숫자에서 비롯되었다.

「회복 진행률: 21%」

「완료까지 남은 시간: 56시간 54분」

회복 진행률과 완료까지 남은 시간이 줄어들고 늘어나길 반복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라이돈이 여전히 제 마력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아직 그의 마음대로 마법을 해제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게 가능했다면 자신의 요정은 누구보다 먼저 단장을 풀어 주었을 테니.

‘……많이 놀랐겠지.’

다른 사람들은 물론이고 기사단까지 얼려 버렸다는 데에 큰 혼란을 느끼고 있을 거다. 자신도 그랬으니까.

라이돈의 힘을 얕본 건 아니었다. 다만, 증폭된 그의 마력이 제국을 통째로 얼릴 만큼 대단할 줄은 몰랐다. 그걸 알았다면 [빙결의 핵]은 무조건 자신이 먹었을 것이다. 무리한 힘을 주입해 소중한 부하를 다치게 하지 않도록.

‘라이돈이 빨리 [빙결의 핵]의 힘을 소진해야 해. 눈치채 줬으면 좋겠는데.’

[빙결의 핵]은 일정 시간이 지나거나, 일정량 이상의 마력을 소모하면 자연스레 소멸한다. 보통 [빙결의 핵]을 먹인 캐릭터는 아이템 버프가 사라질 때까지 스킬을 몰아 쓰곤 했다. 스킬을 낭비하지 않고 쓴다면 유지 시간을 꽉 채울 일은 없다.

버프는 스테이지를 진행하는 동안 내내 유지되지만, 연속으로 기술을 쓰면 보스 하나를 잡는 데에서 끝난다. 그 시간을 현실로 치환해 대강 계산한 것이 열 시간이었다.

‘마력이 계속 차오를 테니까, 폭주를 제어하려면 어쩔 수 없이 마법을 사용해야 할 거야. 조금씩이라도 마력을 꾸준히 방출하다 보면, 심각한 상황까진 가지 않을 거다.’

라이돈의 마력이 예상보다 방대하고, 모두가 얼어 버린 상황에서 그가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이 걸리긴 하지만.

‘……알아서 잘하겠지.’

심심하면 무슨 짓이라도 저지르는 녀석이다. 반응 없는 동료들이 깨어날 때까지 할 일 없이 서 있기보다는, 어디 멀리 떨어진 마족이라도 찾아내 싸울 확률이 높다.

언제나 활기차던 라이돈의 수많은 말썽을 떠올린 카델이 빠르게 평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원래 성격대로 날뛴다고 해도 몇 시간은 걸릴 것 같은데 말이야.’

여전히 격변 중인 시스템 창의 숫자를 응시하던 카델이 작게 중얼거렸다.

“라이돈의 과거……. 한 번 볼 때가 되긴 했지.”

회복 모드 역시 일종의 무의식 상태지 않은가. 수련 기간 내내 쉴 틈 없이 살아왔기에, 과거 스토리를 볼 여유가 없었다. 이렇게 미루고 미룬 과거를 전쟁 중에 본다는 것이 어이없긴 했지만, 마침 적절한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갈피를 잡을 수 없이 통통 튀어 대는 녀석의 속내를 파악할 기회니까.

시험 삼아 ‘스토리 열람’을 소리 내어 말하자, 곧장 새로운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무의식 상태에 돌입하였습니다.」

「시청 가능한 스토리가 존재합니다.」

「라이돈의 기억 – 과거 스토리(호감도 70 돌파)」

「가르엘 몬자시의 기억 – 과거 스토리(호감도 70 돌파)」

아직 요젠의 호감도는 70을 넘기지 않아, 볼 수 있는 스토리는 라이돈과 가르엘의 것뿐이었다. 짧게 입맛을 다신 카델이 라이돈의 스토리를 선택하고. 몸이 쑥 꺼지는 감각과 함께, 시야가 점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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