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루까진 괜찮았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과한 마력이었으니까. 얼음을 녹이는 준비가 필요한 것이리라 생각했다. 카델은 분명 얼음 안에서 뭔가를 시도하고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니 자신은 그런 카델을 도와 마력을 최대한 억누르고, 마법이 조금이라도 약해지게 도와야 했다. 차갑게 식은 그를 꽉 끌어안고, 연거푸 입을 맞췄다. 체온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틀째부터는, 겁이 났다. 얕은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자마자 해일처럼 전신을 덮쳐 오는 공포에 몸을 떨었다. 이대로 카델이 깨어나지 않는다면 어쩌지. 정말 자신이 기어코 모두를 죽여 버린 건가. 이 손으로 카델을 없앤 건가. 카델의 영혼은 이미 사라졌고, 사라지지 않는 얼음만이 그의 육체를 구속하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차라리 마법을 해제하지 않는 게 나아.
사흘째. 카델이 깨어났다. 외롭게 두어 미안하다 사과하는 그를 앞에 두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저 맞은편으로 시계탑이 보였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한 뼘씩 가까워졌고, 그 안에서는 또 다른 카델과 자신이 입을 맞추고 있었다. 벌써 열두 번째 환각이었다. 통제하지 못한 마력이 사지를 찢을 듯 부풀었으나, 인내했다. 몸이 망가지더라도 이 이상 마력을 내보내선 안 됐다.
나흘째, 라이돈은 깨달음을 얻었다.
‘내가 곁에 있어서 계속 얼어 있는 거야.’
[영구동토]는 광범위 마법이다. 그러니 시전자인 자신이 멀리 떨어진다면, 마법의 범위 정도는 바꿀 수 있을 테다. 카델을 녹이려면 우선 이 마법의 원흉인 자신부터 멀리 떨어져야 했다. 그 후엔…….
‘……언제까지 떨어져 있어야 하지?’
이대로 마력관이 고장 나 죽을 때까지 마법을 해제하지 못한다면? 자신의 주변은 언제나 꽁꽁 얼어붙을 것이다. 아무도 자신의 옆에 오려고 하지 않을 테고, 무엇도 제대로 볼 수 없게 된다. 어쩌면 평생 환각과 뒤섞인 새하얀 설원만을 보고 살 수도 있다. 카델도, 그 어떤 동료도 없이 홀로.
그건 싫다. 그런 경험은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혼자가 되지 않는다면, 카델은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
새벽부터 이어지던 고민은 대낮이 되어서도 해결되지 못했다. 라이돈은 카델의 옆에 쭈그려 앉아 멍하니 하늘을 올려보았다. 머리 위에 정오의 태양이 떠올랐다.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아플 지경이건만. 이 뜨거운 햇볕은 제 시린 손끝조차 녹여 내지 못한다.
“……카델.”
다 쉬어 버린 목소리가 카델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다리를 껴안고, 차가운 얼음에 뺨을 비볐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대답해 주지 않는다. 자신의 옆에서, 카델은 천천히 죽어 간다.
라이돈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그는 카델이 죽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자유롭고 재미있는 삶을 원했으나, 결국엔 카델이었다. 카델 없이는 어떤 경험도 무료했고, 자유는 쓸모를 잃었다. 그러니 그는 떠나야 했다.
매서운 칼바람에 부드러운 금발이 나부꼈다. 벌게진 눈가를 문지른 그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얼어붙은 동료들의 얼굴을 머릿속에 각인하듯 꼼꼼히 훑어냈다. 축 늘어진 손에 힘을 주어 꾹 주먹 쥐었다. 마지막으로 다시 카델의 모습을 담아낸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나 갈게, 카델. 멀리 떠날 테니까, 깨어나면 꼭 데리러 와 줘. ……약속이야.”
용감하게 나서긴 했다만,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날아가면 빠를 텐데도 굳이 걷기를 택한 라이돈은 삼 보에 한 번씩 관문을 돌아보았다.
관문 바깥까지 나왔음에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제국은 여전히 얼어 있고, 안쪽의 인간들도 마찬가지다. 다시 정면을 바라본 라이돈이 빙산처럼 쌓인 마물과 경악한 채 얼어붙은 마족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공기가 찼다. 카델은 추위를 잘 탄다. 지금쯤 무척 추워하고 있겠지. 평소라면 자신이 달려가 꼭 안아 줬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 카델을 따뜻하게 해 줄 수 있음을 안다. 라이돈의 걸음에 간신히 속도가 붙었다.
하지만 그조차 오래 가진 못했다.
“카델이 날 못 찾으면 어쩌지.”
덜컥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카델이 자신을 버리지 않으리라는 건 안다. 하지만 위치를 알지 못하면 카델도 자신을 찾으러 올 수 없을 것이다. 가는 곳마다 몽땅 얼어 버릴 테니, 어느 인간도 소식을 전달해 줄 수는 없을 거다.
“너무 바쁘면 어쩌지.”
카델은 인간들을 소중히 여긴다. 그들이 다치는 것을 두고 보지 못하니, 제국을 지키느라 자신을 찾는 일은 뒷전으로 미룰 수도 있다.
우울한 상념에 젖어 있던 라이돈이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기다리는 것이라면 누구보다 잘할 자신이 있다. 몇 년이 걸린대도 기다릴 수 있다.
씩씩하게 다짐했으나, 진심은 달랐다.
“그래도 날 먼저 보러 와 주면 안 되나……?”
물기 젖은 중얼거림과 함께 입꼬리가 들썩였다. 울컥 차오른 눈물을 벅벅 닦아 냈으나, 소용도 없이 다시금 차올랐다.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 채 자리에 멈춰 고개를 푹 수그렸다.
울고 싶지 않았다. 그건 꼭 카델을 믿지 못해서, 버림받을 것 같아서 겁이 난 행동 같았으니까. 하지만 계속 눈물이 흘렀다. 관문을 빠져나올 때까지 꾹 참았던 만큼 흘렀다.
카델이 웃으며 약속해 줬으면 했다. 제일 먼저 찾아갈 테니,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놀다 오라고. 기왕이면 바닷가로 가는 건 어떻냐고. 찾아갈 때는 네가 좋아하는 사탕을 잔뜩 들고 가겠다고. 다정하게 말해 주기를 바랐다.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라이돈!”
처량하게 흐느끼던 라이돈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놀란 고개를 치켜든 그가 새빨개진 코를 훌쩍이다, 조심스럽게 뒤를 돌았다.
“라이돈! 가지 마!”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저 멀리서 달려오는 익숙한 인형에, 라이돈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꿈이라기엔 그의 외침과 헐떡이는 숨소리가 선명했다.
“카델…….”
이것이 꿈이 아닌 현실임을 실감할수록, 시야는 점점 좁아졌다. 오직 한 명, 자신을 향해 일직선으로 내달리는 한 명의 인간만이 뚜렷했다. 귀가 먹먹해지며 심장 소리가 부각됐다. 미친 듯이 뛰어 대는 심장의 고동이 머릿속을 둥둥 울렸다. 현기증이 일 만큼 어지러운 감각에 숨을 크게 들이쉬자, 또 한 번 선명한 외침이 들렸다.
“혼자 어딜 가려는 거야!”
카델이다. 진짜 카델이었다. 아직 얼어 있어야 할 그가, 자신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 사실을 인지한 라이돈이 곧장 그의 앞으로 날아들었다. 온몸을 부딪치며 카델의 어깨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반동에 밀려난 작은 몸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카델, 카델, 카델…….”
잔뜩 떨리는 목소리로 연신 그의 이름을 불렀다. 느껴지는 온기가 비현실적이었다. 귓가를 간질이는 숨소리가 믿기지 않았다. 라이돈은 카델의 어깨에 코를 박은 채 익숙한 체향을 깊이 들이마셨다. 혹여라도 환상처럼 사라질까, 모든 감각을 카델에게만 집중했다.
그리고 카델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힘으로 그를 끌어안았다. 서로를 터질 듯 마주 안고, 서로의 박동을 느끼고, 온기를 나눴다. 몇 번이고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다.
“미안해. 많이 무서웠지?”
“……응.”
“늦게 와서 미안해. 불안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라이돈.”
카델은 조심스럽게 몸을 물려 자신에게 딱 달라붙은 라이돈을 떨어뜨렸다. 떨어지기 싫다며 울먹이는 그의 얼굴을 감싸 쥐고 눈을 맞췄다. 투명한 눈물이 고인 붉은 눈이 서럽게 떨렸다.
“약속할게. 네가 어디 있든 난 널 데리러 갈 거야. 그리고…….”
울음으로 뜨거워진 뺨을 끌어당긴 카델이 그대로 라이돈의 아랫입술을 머금었다. 혀끝으로 짭짤한 눈물의 맛이 번졌다. 그의 슬픔을 모조리 닦아 내겠다는 듯 다정하게 입술을 훑어 내고, 살짝 벌어진 틈새로 혀를 밀어 넣었다. 잔뜩 열 오른 살덩이를 건드리자, 얕은 신음이 들려왔다. 이내 카델의 어깨를 끌어안고 있던 팔이 허리께로 내려오며, 라이돈이 훅 무게를 더해 왔다.
그는 짓눌려 꺾인 카델의 허리를 단단히 고정한 채 슬픔에 둔해졌던 태도를 바꿨다. 순진하게 굳어 있던 혀가 뿌리째 파고들어 마구잡이로 카델의 입안을 휘저었다. 깊숙이 들어찬 살덩이가 빠듯하게 입안을 채우며 마른 입천장을 쓸고, 연한 점막을 거침없이 자극했다. 정신없이 뒤엉키는 혀의 움직임을 따라 카델과 라이돈의 숨이 거칠어졌다. 그들은 서로의 뺨을 감싸고, 머리를 헝클이고, 이 저돌적인 입맞춤에 빠져드는 와중에도 집요하게 눈을 맞췄다.
라이돈은 제 안에 카델의 존재를 새기려 했고, 카델은 라이돈에게 약속의 증명을 해내려 했다. 숨이 찬 카델이 살짝 고개를 틀어 입술을 떼어 내면, 그새를 참지 못한 라이돈이 카델의 들숨과 함께 제 혀를 밀어 넣었다. 그 탓에 호흡이 부족해져도 카델은 그대로 입맞춤을 이어 갔다. 숨이 가빠 가슴이 답답해져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라이돈의 욕심만큼 자신을 내어 주고 싶었다. 그가 받고 싶어 하는 사랑의 배를 내어 주고, 쉼 없이 아껴 주고 싶었다. 그가 괴롭게 삭여야 했을 기나긴 고통을 잊게 할 수만 있다면.
온통 얼어붙은 세계 속, 오직 둘만이 살아 있는 감정을 나눴다. 점점 거세지는 칼바람에 드물게 떨어지는 입술 새로 입김이 새어 나왔다. 잠잠해졌던 눈발이 다시 휘날려, 열렬한 접촉에도 살갗에는 금세 한기가 맺혔다.
카델은 영원히 입맞춤을 끝내지 않을 것처럼 붙어오는 라이돈을 달래듯 살살 그의 눈가를 쓸었다. 빠져나온 붉은 혀를 진득하게 빨아올린 그가 상기된 라이돈의 얼굴 곳곳에 입을 맞췄다.
사랑스러운 코끝과 너무 울어 헐어 버린 눈꼬리, 눈꺼풀, 단정한 눈썹, 많이 아팠을 뺨과 슬퍼하는 순간에도 여전히 귀엽게 끝이 올라간 입꼬리. 마지막으로 흥분에 젖어 헐떡이는 입술에 꾹 입을 맞춘 그가 반쯤 풀린 라이돈의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널 좋아해. 네 운명을 사랑해. 함께할게. 계속, 계속 옆에 있을게. 하나부터 열까지, 네가 모르는 건 전부 알려 줄 테니까. ……너도 약속해 줘.”
오래전, 그가 건넸던 고백은 여전히 가슴 속에 머무르고 있다. 그 대답을 이제야 돌려준 것이 못내 미안했지만.
“……사랑해, 카델.”
또 한 번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 자신의 요정은, 이미 충분히 행복한 듯 보여서.
「기사 ‘라이돈’의 호감도가 10 상승했습니다.」
「현재 호감도: 90/100」
카델은 잠시나마 모든 염려를 내려 둔 채 환하게 웃었다.
*
“나도 같이 가면 안 돼?”
카델의 옷자락을 살짝 움켜쥔 라이돈이 불쌍하게 눈꼬리를 내렸다. 훌쩍이며 애원하는 낯이 둘도 없이 사랑스러워 당장 옆에 따라붙지 않고 뭐 하냐며 윽박지르고 싶어졌으나, 카델은 어른스럽게 참아 냈다.
“네가 옆에 있으면 얼음을 녹이는 데 더 많은 마력이 필요해. 몇 명만 녹이고 올 테니까, 넌 여기서 마력 제어에 집중하고 있어. 절대 몸 상할 짓 하지 마.”
“하지만…….”
“이리 와, 라이돈.”
옷자락을 쥔 라이돈의 손목을 훅 끌어당긴 그가 거침없이 입을 맞댔다. 짧은 입맞춤에도 여전히 뚱한 얼굴이자, 쪽쪽 소리가 날 만큼 여러 번 입술을 간지럽혔다. 그제야 살포시 눈매가 접혔다. 카델은 그런 라이돈이 귀엽다는 듯 머리를 헝클이곤 손목을 놓아 주었다.
“기다릴 수 있지?”
“응.”
“좋아. 다녀오면 내가 먹인 그 빌어먹을 마력 덩어리 좀 해결해 보자.”
“빨리 갔다 와, 카델!”
과거 스토리가 끝난 후, 다시 회복 모드로 진입하려는 그 짧은 찰나. 카델은 라이돈의 마법으로부터 제국인을 지키기 위해 사용했던 쿤라의 힘 일부를 회수했다. 육체와 혼이 완전히 시스템에 구속되기 직전의 짧은 틈을 이용한 도박이었다.
다행히 시도는 성공으로 돌아갔고, 쿤라의 힘은 그를 라이돈의 마법에서 자유롭게 만들었다. 그리고 카델은 깨달았다. 바깥에서 무료함을 달래려 마음껏 활보하고 있을 줄 알았던 요정은, 본인의 힘을 두려워하며 마력을 억누르고 있었다는 것을.
간신히 폭주에서 벗어난 몸을 혹사하며 마력을 가둬 두고 있었던 거다. 그 탓에 [빙결의 핵]이 가진 힘은 쓸데없이 오랜 시간 유지되고 있었다. 이 얼어붙은 세계를 녹이기 위해선 [빙결의 핵]의 마력을 전부 소모해야 한다.
그러나 당장 마법을 해제한다면 적을 막아 내던 장벽은 허물어지고, 진영은 붕괴한다. 지원군은 아직도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이곳에 남은 병력만으로 제국을 방어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게다가 라이돈의 말대로라면 벌써 4일이 지났어. 그런데도 지원군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돼.’
확인해 본바, 라이돈의 마법은 인간과 마족은 물론 제국의 마법진 조각까지 얼어붙였다. 쿤라의 힘으로도 방어가 어려운 마법이었으니, 지원군이 도착했다고 한들 가까이 접근할 수는 없었을 테다. 이렇듯 답이 없는 제국의 상황에 아까운 병력을 방치해 뒀을 리는 없다.
‘지원군을 다시 불러들이고, 제국을 녹이기 전에 마족의 수를 최대한으로 줄여야 해. 그동안 [빙결의 핵]의 힘을 조금씩 소모한다면, 라이돈의 몸에도 무리가 없겠지.’
자신의 마법으로 고위 기사들을 먼저 깨운다면 일은 더 수월해질 테다. 그리고 이 모든 계획 실행을 위해서는, 현 제국의 상황을 동맹국에 알릴 황제가 필요했다.
카델은 라이돈이 오래 기다리지 않도록 서둘러 이동 마법진을 발동해 성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