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0화 (330/521)

“라이돈 님 덕에 보전한 주둥이를 아주 자유분방하게 놀리는군그래! 난 경이 예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사람 성가시게 하는 덴 도가 텄지. 라이돈 님 말이 틀린 게 하나 없거든!”

두 대대장이 언성을 높이자 가뜩이나 피로감으로 예민했던 분위기엔 금세 불이 붙었다. 그 싸움판이 즐거워 보인 라이돈이 난입하며 피에르를 조롱한 탓에, 얌전히 밥을 먹고 있던 카델까지 달려와 중재를 시도해야 했다. 그리고 여기서 또 한 번 문제가 발생한다.

“부하 하나 제대로 간수 못 하는 단장의 역량도 뻔하지! 애초에 비실비실한 마법사가 무슨 기사단을 이끈단 말이오! 폐하의 은혜 덕에 공로를 인정받았으면 문제 일으키지 말고 얌전히나 있으라고!”

흥분으로 눈에 뵈는 게 없던 피에르가 카델을 모욕한 것이다. 당사자인 카델은 그다지 타격이 없었으므로 무시하고 조용히 넘어가려 했으나. 쓸데없이 귀가 밝았던 반과 루멘은 물론, 드레프까지 싸움판에 합세해 버렸다.

“네놈 하나 없어도 전쟁판은 잘 돌아갈 것 같은데. 어디 그 두툼한 입술 한번 썰려 볼래? 입을 열 때마다 악취가 진동하니 차라리 통째로 파내자고. 마침 내 대검이 네 주둥이에 처넣기 딱 좋은 사이즈야.”

“무, 뭐라고! 카델 단장! 지금 경의 부하가……!”

“피에르 경. 아무리 흥분했다곤 해도 예의는 지키시죠. 일개 대대장이 제국의 정예 기사단을 이끄는 단장에게 고함이라니……. 못 배운 티를 내고 싶으면 좀 조용히 내시든가.”

“그래, 피에르! 남의 기사단 건들 시간에 네 부하 훈련이나 시키는 게 어때? 오늘 싸울 때 보니까 영 맥을 못 추리던데. 그게 2대대씩이나 되는 놈들의 실력이냐? 천시 기사단 놈들, 요새 기강 빠진 건 알았지만 전쟁에서까지 이 지경이라니.”

괜찮으니 싸우지 말자는 카델의 간절한 외침은 빠르게 묻혔다. 그 와중에 소란에 지쳐 버린 요젠은 전부 죽이기 전에 떨어져 있겠다는 말과 함께 도주를 시도했다.

결국 카델은 피에르에게 달려들려는 반을 제지하고, 대련을 빙자한 폭행을 시도하려는 루멘을 진정시키고, 싸움을 부추기는 라이돈을 혼내고, 간신히 붙잡은 요젠을 달래 가며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겨우 싸움을 끝냈을 즈음엔 이미 밤이 깊어 버려, 이렇게 늦어도 한참은 늦은 휴식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적이랑 싸우기도 바빠 죽겠는데 왜 지들끼리 싸우고 난리냐고.’

그나마 다행인 점은, 각 대대장과 단장에게는 개인 천막을 내주었다는 것이었다.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으니 지금이야말로 여유롭게 피로를 해소할 수 있을 테다.

흐물거리는 다짐과 함께 터덜터덜 천막으로 향하던 카델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지친 시선의 끝으로 천막과 멀리 떨어진 곳에 우두커니 선 가르엘이 걸렸다. 잠시 망설이던 카델이 그에게로 다가가자, 하늘을 올려다보던 가르엘이 가볍게 고개를 돌렸다.

“……단장님?”

살짝 미소 지은 그가 다가온 카델의 앞으로 들고 있던 술병을 흔들었다.

“같이 한잔하실래요?”

“별이 안 보이네요. 아쉬워라.”

가르엘이 따라 준 술을 홀짝이며 함께 하늘을 보았다. 깊은 밤, 뿌옇게 번진 구름이 빛을 가리고 있었다. 확실히 아름다운 밤하늘은 아니다. 동조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흙바닥에 제 망토를 펼친 그가 카델을 건드렸다.

“여기 앉으세요.”

“……뭐야. 이런 배려는 필요 없어.”

“서 있는 거 잘 못하시잖아요, 단장님은.”

“맞는 말인데, 그냥 바닥에 앉아도 되거든. 괜히 옷 더럽히지 말고 가져가.”

“으음, 또 제 승부욕을 자극하시네.”

장난스럽게 중얼거린 그가 훅 몸을 숙여 카델의 오금과 등허리를 받쳐 들었다. 난데없이 들리는 몸에 반사적으로 가르엘의 목을 감싸 안자,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뭐야!”

“제 망토가 단장님에게 더럽혀지고 싶다잖아요.”

바둥거리는 몸을 단단히 끌어안은 그가 깔아 둔 망토 위로 카델을 내려놓았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조금 황당한 기분이 된 카델이 헛웃음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너도 깔아 줘?”

“전 맨바닥이 편해요.”

“……진짜 어이없는 놈이야.”

카델의 옆에 바짝 붙어 앉은 가르엘이 가볍게 눈을 휘었다. 이럴 때 짓는 그의 미소는 만족한 고양이처럼 나른한 분위기를 풍겨서, 뭐라 더 말을 얹기도 힘들게 만든다.

갑자기 운반 당하느라 술이 흘러넘친 손등을 닦아 낸 카델이 다시 하늘을 올려 보는 가르엘에게 말했다.

“고민 있을 때 흐린 하늘 보는 거 아니야. 기분만 더 우중충해져.”

“……제가 고민이 있다고 했던가요?”

“네 성격에 다른 사람들 틈에 안 끼고 혼자 나도는 것만 봐도 뻔하지.”

임시 술잔이 된 물통의 뚜껑을 내밀자, 가르엘이 뚜껑 가득 술을 따라 주었다. 그래 봤자 두 모금 마시면 끝날 양이다. 가르엘이 마시는 술은 항상 지독하리만치 도수가 높아서,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저 그렇게 사람 좋아하는 이미지였나요? 나름대로 흑마법사 컨셉에 충실하는 중인데.”

“말하기 싫으면 관둬. 혼자 생각하고 싶은 일도 있는 거니까.”

말하기 싫다면 적당히 술 상대가 되어 주다, 천막으로 돌아가 잠을 청하면 될 일이다. 덤덤하게 말하며 쓰다 못해 혀가 아려 오는 술을 들이켰다. 이런 걸 매번 어디서 구해 오는지 신기하기만 했다.

둘 사이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가르엘은 더 이상 하늘을 보지 않았다. 대신 새 모이만큼 조금씩 술을 맛보는 카델의 옆모습에 시선을 고정했다.

언제든 고민을 나눌 준비가 되었으니, 혼자 떠안지 말고 꺼내 보라는 듯하다. 강요의 기색이라곤 전혀 없는 차분한 눈빛.

“이상하게 생각이 많아지네요.”

“…….”

“영원히 제 삶을 좀 먹을 거라고 여겼던 마기로 수많은 인간을 살렸습니다. 아직도 그때의 감각이 생생해요.”

가르엘은 라니아에서의 일을 떠올리고 있는 듯했다. 1년간의 혹독한 수련 속에서 그는 마기와 빛 마력의 혼용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 외의 시간은 전부 마기의 치유력을 향상하는 데 썼다. 어찌나 시간을 쪼개고 쪼개 전념하는지, 1년 동안 가르엘이 쉬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을 정도였다. 성장을 위한 그 나름의 노력이었다.

삶을 포기하게 할 만큼 거대했던 자괴감을 무너뜨리고, 자신의 ‘선’을 증명하기 위한 몸부림. 잔인한 운명을 거스르기 위해 가르엘은 누구보다 열심히 단련했다. 그리고 그의 노력은, 이번 전쟁에서 비로소 빛을 보았다.

“단장님의 말이 사실이었어요. ……당신의 옆에 있으니, 비로소 나아가는 기분이 듭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네?”

“뒤따라와 주는 사람이 있으니 나아갈 수 있는 거라고. 혼자서는, 절대 못 걸었을 거야.”

고개를 돌리자 곧장 가르엘과 눈이 마주쳤다. 거추장스러운 가면을 쓰고 있음에도 그 속에 자리한 눈동자는 무엇보다 맑게 빛났다. 잠시 그 눈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그의 가면을 벗겨 냈다.

“……아직 저쪽에 사람들이 있어요.”

“어두워서 못 볼 거야.”

“…….”

“걱정하지 마.”

진득한 시선이 오가고, 몸을 기울인 가르엘이 천천히 다가왔다. 가까워지는 서로의 숨결을 따라 싸한 알코올 향이 풍겼다. 하지만 고개를 기울인 가르엘의 입술이 카델에게 가닿기 직전.

“그래서. 고민은 계속 숨겨 둘 작정?”

빼앗은 가면으로 입을 가린 카델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졸지에 제 가면에 입을 맞추게 된 가르엘이 억울하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이런 식으로 신문을 한다고요? 너무 잔인한 거 아닌가요?”

“말 돌리는 거 보니까 괴롭히고 싶어져서.”

“하아…….”

낮은 한숨과 함께 물러난 그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잔인하지만 확실한 방법이다. 발칙한 단장님 덕에 맥이 풀려 버려, 꽁꽁 묶어 두었던 고민이 아무렇지 않게 입 밖으로 떠돌았다.

“마계 전쟁이니까요. 수많은 마족을 만나게 될 것 아닙니까.”

“…….”

“그러다 내 부모를 아는 마족이라도 만나면 어쩌나. 아니, 사실 내 부모는 죽지 않았고, 마계로 돌아가 살고 있던 거면 어쩌나. 그렇게 내게 마족의 피를 섞은 부모를 만나게 되면, 난 어떻게 해야 하나. ……뭐, 그런 고민을 했습니다.”

가르엘은 부모에 대해 아는 것이 적었다. 어렸을 때부터 외가 쪽 친척 집에서 키워졌고, 그를 맡아 준 친척도 형제의 죽음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어엿한 인간 친척이 있다. 그러니 마족의 피를 섞은 건 아버지가 아닐까. 막연히 추측했으나, 훗날 어머니가 몬자시가의 수양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는 집 밖으로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형제들 사이에서도 미스테리한 인물이었다고 하니. 진실을 밝혀낼 방도가 없었다.

정보가 부족하니 불길한 상상은 끝도 없이 몸집을 불렸다. 대부분의 상상 속에서 가르엘은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했고, 그러니 마땅한 돌파구를 찾아낼 수도 없었다.

“당연히 죽여야겠죠. 마족이잖아요. 부일까요, 모일까요? 아버지가 마족인 게 나아요. 강제로 범했을 게 뻔하니, 죄책감 없이 아주 괴롭게 죽일 겁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마족이라면, 어째서 나를 만든 건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답답하다는 듯 술을 들이켜는 그의 옆에서, 카델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가르엘 몬자시는 게임 내에서 자신이 가장 아끼던 기사였다. 그렇다면 제대로 애정을 쏟았어야 했다. 다른 사람처럼 기사의 과거도 꼬박꼬박 챙겨 보고, 설정도 읽어 보고. 그랬다면 지금처럼 불확실한 과거에 괴로워하는 가르엘에게 쓸모 있는 위로를 전해 줄 수 있었을 테다.

지금이라도 천막으로 달려가 그의 과거를 보아야 하는 걸까. 고민하던 카델은, 지금 당장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위로를 택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네가 부모를 만나든, 부모를 아는 마족을 만나든. 넌 지금처럼 행동하면 돼. 계속해서 마기로 사람을 구하고, 마족에게 대항하고. 사람들을 지킬 힘을 줘서 고맙다고 웃으면 그만이야.”

“…….”

“물론 마음껏 화내도 괜찮아. 울어도 못 본 척해 줄게. 네가 무슨 반응을 보이건, 넌 변함없는 내 사람이니까. 네가 걸어야 할 길이 내 옆에 있다는 것만 기억하면 돼.”

고작 몇 마디 말로 가르엘이 가진 불안을 해소해 줄 순 없겠지만. 이젠 그에게 언제든 돌아올 안식처가 있다는 사실만은 알려 주고 싶었다. 예전처럼 홀로 비밀을 떠안은 채 끙끙대지 않아도 된다.

가르엘은 홀린 듯이 카델을 바라보았다. 어둠에 가라앉아 까맣게 빛나는 카델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 안에 담긴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는 따스한 애정.

“단장님은, 절 정말 많이 좋아하는군요.”

“……갑자기 뭔 생뚱맞은 소리야.”

“이런 몸으로 이렇게까지 사랑받을 줄 몰라서. 그래서…… 정말 많이, 고마워서.”

「기사 ‘가르엘 몬자시’의 호감도가 3 상승했습니다.」

「현재 호감도: 87/100」

가르엘은 뭉쳐 두었던 어두운 상념들을 저 멀리 날려 보냈다. 카델의 깊은 애정 앞에서, 이토록 어두운 감정은 어울리지 않는다.

“변태인데도 이렇게 예뻐해 주는 걸 보면 몰라? 일일이 고마워할 필요 없어. 너도 날 좋아해 주면 되는 거니까.”

눈부신 그의 곁에는 어떠한 그림자도 자리 잡지 못하도록. 다짐하듯 카델의 손을 꽉 움켜쥔 그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미 매일매일 넘치도록 좋아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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