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2화 (332/521)

“루멘!”

우렁찬 부름에 저도 모르게 넋을 잃고 있던 루멘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다가온 카델은 진지한 눈빛으로 루멘을 노려보듯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루멘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며 말했다.

“겁먹지 마. 겁먹어야 할 건 우리가 아니라 저놈들이란 걸 명심해.”

카델의 자신감은 기사단에 있어 언제나 맹목적인 전의를 불태우게 만드는 연설과도 다름없었다. 뚜렷한 시선과 두려움 하나 없는 똑바른 태도. 언제나와 같은 대장의 모습에, 루멘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의에 찬 푸른 눈동자를 훑어낸 카델이 그를 제치며 앞으로 나섰다.

‘아쉬브카.’

과연 그 평정심 강한 루멘이 초반부터 위축될 만한 위용이다. 하늘의 빛마저 차단한 육중한 몸뚱이는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 쓰러뜨릴 수 있을 만한 존재로 보이지 않았다.

난공불락의 성. 그 안에 머무는 것은 사람의 피와 기운을 뽑아 마시는 무한의 병정들이었다.

예상되는 막막한 전투에 기가 질릴 법도 하건만. 카델의 표정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아쉬브카의 덩치가 어떻든, 녀석은 그가 처음 상대해 보는 적이 아니었으니까.

‘저게 어딜 봐서 귀염둥이야? 귀염둥이라고 좋아하던 놈들 싹 다 데려다가 앞에 던져 주고 싶네.’

현실의 아쉬브카는 입이 떡 벌어질 만큼 거대했지만, 게임 속에선 이렇듯 과한 사이즈를 구현할 수 없다. 다른 마족들보다 1.5배 정도 크게, 펑퍼짐한 슬라임 체형으로 구현한 것이 전부였다. 움직임도 둔하고 체형도 곰처럼 둥글어서, 몇몇 취향 이상한 유저들은 그를 귀염둥이라고 부르며 좋아하기도 했다.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거무죽죽한 살가죽. 한 번의 깜빡임도 없이 관문을 빤히 응시하는 노란 눈동자. 태산 같은 몸뚱이를 뒤덮은 벌레들. 아무리 봐도 귀여움과는 거리가 멀다.

‘저 덩치가 원근법을 무시하고 있어서 그렇지, 아쉬브카와 관문 사이의 실제 거리는 꽤 멀어. 소환진은 어디 있지? 육안으론 확인이 어려운데……. 혹시 아쉬브카 아래에 깔린 건가? 소환으로 아쉬브카를 불러낸 거라면 가능성이 크지.’

그렇다면 고민할 것 없이 무조건 아쉬브카를 우선으로 해치워야 했다. 짧게 혀를 찬 카델이 아수라장이 된 관문의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르엘, 생존자들한테 치유술 부탁해.”

“진행 중입니다.”

“나머지는 일단 관문 너머로 흡혈충이 넘어가지 못하도록 막아!”

적린 기사단의 흑마법사가 뛰어난 치유사라는 소문이 돈 덕인지, 암흑 마력에 감싸진 마기가 침투함에도 부상자들은 발작하지 않았다. 그렇게 가르엘이 순조롭게 부상자를 치유하는 동안, 카델은 관문의 입구와 부하들의 몸 위로 ‘비늘 갑옷’을 둘렀다.

‘웬만하면 나머지 기사들한테도 둘러 주고 싶지만, 적룡의 힘에도 회복기라는 게 필요해서 말이야.’

관문을 날카롭게 둘러싸며 솟아난 비늘의 등장에, 입구를 방어하던 기사들이 주춤했다. 카델은 몰아치는 흡혈충을 화염구로 견제하며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생존한 마법사는 몇 명입니까? 어디 있죠?”

“카델 단장님…! 마, 마법사는 전부 몰살당했습니다.”

“……예?”

“소환진에서 마족이 빠져나오자마자 집중 공격을 당한 탓에……. 지능이 상당합니다. 저희 쪽 [울로]까지 전부 부숴 버려서, 지원 요청도 불가능해요.”

아쉬브카의 지능이야 이미 알고 있다. 팔 한쪽만 빠져나온 상태로도 가장 먼저 마법사를 격리했던 녀석이니까. 하지만 마법사가 이미 전부 죽었다는 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그럼 순전히 이쪽의 마력만으로 소환진을 해제해야 한다는 거잖아. 우리는 아쉬브카 토벌에 집중하려고 했는데…….’

전력이 분산된 상태로 싸워도 될 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카델은 끊임없이 달려드는 흡혈충을 떨쳐 내며 가져왔던 [울로]를 기사 한 명에게 던져 주었다.

“가능한 만큼 마법사를 지원해 달라고 하세요. 저 마족의 이름은 아쉬브카입니다. 이름을 말하면 없는 마법사도 긁어모아서 보내 줄 거예요. 일단은 적린 기사단이 소환진까지 가는 길을 터 보겠습니다. 소환진은 아쉬브카 아래에 있는 게 맞습니까?”

“아니요, 뒤편에 있습니다. 그리고 카델 단장님. 마족은 아쉬브카 하나뿐이 아닙니다. 뒤에 있는 소환진에 다른 한 놈이 더 있어요.”

“한 놈이 더 있다고요?”

마계 전쟁 퀘스트에서 여러 고위 마족이 뭉쳐 나오는 일은 부지기수지만, 아쉬브카의 경우엔 달랐다. 그의 등장은 단독이다. 기술이 사기적이니 밸런스를 위해선 혈혈단신으로 나타나는 게 타당했다. 그러니 현실도 똑같으리라 생각했건만.

여전히 보이는 것은 아쉬브카의 흡혈충뿐이다. 다른 마족의 공격은 감지되지 않는다. 혹시 조금 특이한 마계의 마물을 마족이라고 착각한 것은 아닐까.

“다른 적에게서 날개를 봤습니까?”

“날개는……. 가까이서 보지는 못했습니다. 소환진 근처에 있던 기사들은 이미 전부 죽었거든요.”

당시의 공포를 씹어 삼키듯 이를 악문 기사가 다급하게 덧붙였다.

“하지만 아쉬브카 말고도 다른 적이 함께 등장했다는 건 확실합니다!”

“……유념하죠.”

착각일 가능성이 높았다. 적어도 고위 마족은 아닐 것이다. 전쟁 초반에 맞닥뜨린 소르와 베리조차 등장 순서는 달라도 조합만큼은 같았다. 라니아에서 보았던 마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비단 마계 전쟁뿐만이 아니더라도, 이전의 퀘스트 역시 상대해야 할 적의 수가 늘어나진 않았었다.

그런데도 느껴지는 이 불길함은 대체 뭐란 말인가. 카델은 짙게 펼쳐진 흡혈충 너머, 끊임없이 벌레를 쏟아 내는 아쉬브카의 거대한 그림자를 주시했다.

‘지금은 일반 마물일 거라고밖에 여길 수 없어. 다른 고위 마족이었다면 아쉬브카가 이렇게 활개를 치는 동안 관문을 부숴 버렸을 테니까. 아직까지 얌전히 숨어 있는 이유가 궁금하긴 하지만…… 거기에 매달리고 있을 여유는 없다.’

애써 불안감을 지워 낸 그가 다시 부하들에게로 돌아갔다.

“지금부터 우리는 아쉬브카 토벌에 집중한다. 완전히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소환진과 이어지는 길을 터놔야 해.”

“웬만한 공격은 먹히지 않을 거야. 저번에 잘라 놓은 팔이 멀쩡히 붙어 있는 걸 보면 재생력도 상당한 것 같군.”

“그래. 그러니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야. 지원군이 오는 타이밍에 맞춰 놈의 하반신을 뚫고 소환진까지 달려가든가, 재생이 불가능한 심장을 노려 즉사시키든가.”

“으음, 후자의 난이도는 그렇다 치고. 전자는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부터가 문제인데요.”

흡혈충의 위험도야 말할 것도 없고, 아쉬브카가 흡기충을 소환한다면 장막의 효력이 줄어든다. 아쉬브카와 근접한다는 것은 대량의 벌레들 틈에서 피와 기운을 빼앗기며 버텨야 한다는 말이었으니. 실현 가능성이 낮은 선택지였으나, 그것이 전부인 상황이었다.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아쉬브카의 마수가 제국 내부까지 뻗친다면, 이 넓은 땅덩어리가 거대한 관짝이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제가 처리해 볼게요.”

무거운 분위기를 뚫고 반이 나섰다. 그는 어깨에 대검을 걸친 채 카델과 눈을 맞췄다.

“흡혈이라면 저도 자신 있거든요. 우리가 선 범위 정도라면 저 징그러운 벌레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할 수 있어요.”

“……피는 충분해?”

“이 녀석들이 힘 좀 써 줘야죠.”

반이 뒤편의 동료들을 턱짓하며 말했다. 카델은 그런 반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곤, 비늘 갑옷을 덮는 화염 장막을 둘러 주었다.

*

남쪽 관문의 주둔 병력은 적린 기사단이 이동 관문을 넘기 전부터 [울로]를 켜 두고 있었다. 가장 먼저 동쪽 관문의 긴급한 상황을 전해 들은 그들은 즉시 마법사들을 불러 모았다. 드레프의 대대에는 마법사가 없었으므로, 제리엘의 대대에서 마흔이, 피에르의 대대에서 열다섯이 소집됐다.

“열다섯으로는 부족해. 관문 작동시킬 인원만 남기고 마법사는 싹 다 보내라니까?”

자신과 함께 이동 관문을 넘을 대원들을 모아 둔 드레프가 피에르의 옆에서 언성을 높였다. 그 역시 일부라지만 아쉬브카를 상대해 본 적 있는 사람이었다. 마법사들의 보호막 없이는 제대로 된 전투가 불가능하다는 걸 이곳의 누구보다 잘 알았다.

“제리엘 경의 대대에서 이미 절반 이상의 마법사를 떼어 냈네. 가뜩이나 부족한 마법사를 몽땅 보내면 혹시 모를 습격에 대비할 수…….”

“찔끔찔끔 보내 봤자 보내는 족족 죽어 나갈 거다. 부하를 아낄 땐 시기와 장소를 가려야 하지 않겠어, 피에르?”

“……건방 떨지 말게.”

“너야말로 아쉬브카를 겪어 본 적도 없으면서 얕보기부터 하는 거냐? 아주 자신만만하시군그래.”

“그러는 자네의 자신감은 그 귀한 핏줄에서 나오나 보지? 엑토 경의 아들이라는 출생만 믿고 타 기사단의 대대장에게까지 억지를 부리는 거라면…….”

“입 다물어.”

피에르의 코앞으로 바짝 다가선 드레프가 당장이라도 멱살을 틀어쥘 듯 흉흉하게 안광을 빛냈다. 그는 금세 도발에 넘어온 드레프를 비웃으며 코웃음을 쳤으나, 다가온 제리엘이 둘을 중재했다.

“지금이 태평하게 말싸움할 때는 아닐 텐데요.”

“……좋네. 확실히 아쉬브카를 상대해 본 적 없는 내 판단보단 경의 의견이 정확하겠지.”

드레프의 말대로 이동 관문을 작동시킬 최소한의 마법사를 제외한 모든 인원이 모였다. 남쪽 관문의 지휘는 피에르가 맡게 되었으며, 드레프는 마법사와 절반의 대원들을 대동한 채 지원군의 대장으로 나서게 되었다.

“서두르자고. 마법사들은 이동 관문을 넘자마자 전 대원에게 장막을 둘러! 조금만 늦어도 송장 꼴 날 테니 죽기 싫으면 뜸 들이지 마라!”

아쉬브카가 제국을 덮치게 둘 순 없었다. 물론 그 빌어먹게 잘난 마법사가 제국이 몰락하도록 순순히 놔두진 않겠지만, 혼자 활약하도록 두지도 않으리라.

그러나 의욕과 긴장감으로 가득하던 드레프의 기세는 얼마 가지 못했다.

촘촘하게 짜인 피륙처럼 드리운 무수한 벌레와 송장이 된 채 널브러진 아군. 처참한 패배의 잔향이 풍기는 관문의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으나, 저 너머의 풍경에 비할 바는 못 됐다.

“저게 대체…….”

드레프는 넋이 나간 채 전방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홀로 어둠을 헤치고 솟아난 적월赤月이 있었다.

불꽃은 아니다. 그것은 타오르지 않았고, 오히려 물결처럼 일렁였다. 하지만 물결을 볼 때와 같은 잔잔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적월은 자아를 가진 힘처럼 불길하게 구불거리며 공명하고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이쪽에까지 파동이 닿아 몸이 징징 울릴 정도였다.

적월의 주위로는 날벌레 한 마리도 얼씬하지 못했다. 아쉬브카의 벌레들은 달의 범위를 피해 바쁘게 넘실거렸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 장면이건만. 마른침을 삼킨 드레프가 천천히 눈을 굴렸다. 적월의 옆, 그만큼이나 거대한 몸집을 가진 생명체. 아마도 아쉬브카일 마족이 육중한 몸을 이끌어 적월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두툼한 손가락이 불빛에 이끌리는 나방처럼 홀린 듯이 적월을 만지려 했다.

하늘을 가린 아쉬브카와 벌레 떼가 만들어 낸 컴컴한 배경 속, 유일하게 빛나는 피의 달. 그리고 그것을 집어삼키기 위해 손을 뻗는 거대 마족. 이 두 가지 장면의 혼합은, 어느 기괴한 명화를 보는 것처럼 기분 나쁜 혼란을 선사했다.

드레프는 물론 그 뒤를 따라 도착한 지원군 역시 그 압도적인 장면에 말을 잇지 못했다. 일순 본래의 목적마저 잊게 할 만큼 소름 끼치는 광경이었다.

“……장막을 준비해.”

하지만 드레프는 자신을 잠식하려 드는 공포를 이겨 냈다. 그를 깨어나게 한 것은 어느 강한 의지나 투쟁심이 아닌, 단순한 경쟁심. 적월과 아쉬브카의 코앞에 자리한 한 줌의 무리로 인한 것이었다.

무리의 중심에는 카델이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카델은 정확히 지원군이 도착한 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두려움에 쪼그라든 아군을 질책하듯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저 마법사에게 능력이 뒤처질지언정 투쟁의 용기마저 뒤처지고 싶진 않았다.

“장막 준비하란 소리 못 들었어? 정신 똑바로 차려! 눈앞에 있는 건 우리가 해치워야 할 적이다! 두렵다면 눈을 감고서라도 싸워!”

스스로를 채근하듯 혹독하기까지 한 외침에 기사들이 하나둘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법사의 영창을 따라 조금씩 생성되는 장막을 느끼며, 드레프가 망설임 없이 검을 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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