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5화 (335/521)

*

“그러니까. 저 안에 무적에 가까운 재생력, 가르엘 경이 밀리고 요젠도 감당하기 힘든 공격력을 쌍으로 갖춘 괴물이 있다, 이 말입니까?”

“한 가지 정정하죠. 제가 밀리는 게 아니라 비슷한 수준인 겁니다, 루멘 경. 이건 아주 중요한 차이거든요.”

루멘은 가르엘의 항변을 가볍게 무시한 채 전방에 자리한 ‘암기 감옥’을 주시했다. 직육면체의 형태를 한 암기는 딱 한 사람이 들어갈 만한 크기였고, 실제로 저 안에는 딱 한 명의 마족이 자리하고 있을 테다. 아쉬브카만으로도 버거울 때에 이런 괴물이 추가됐다니. 그야말로 외면하고 싶은 현실이었다.

“그래서. 앞으로 몇 분이나 더 묶어 둘 수 있는 거지?”

대검을 땅에 꽂은 채 삐딱하게 서 있던 반이 묻자, 요젠이 답했다.

“5분. 안에서 반항을 시작한다면 2분 정도.”

“반항을 시작한다면? 지금은 반항 없이 얌전히 갇혀 있단 건가?”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아. 마기를 퍼뜨려서 내 암기를 살살 밀어 내고 있을 뿐이지.”

“지독하게 재수 없는 놈이군.”

짧게 혀를 찬 반이 가르엘을 돌아보며 말했다.

“굳이 이런 말을 하고 싶진 않지만, 절반은 같은 핏줄이잖습니까. 아는 약점 같은 거 없습니까?”

“안타깝게도 전혀요. 저보다 살짝, 아주 미세한 수준의 상위호환 능력자라는 것밖엔 모르겠군요.”

“미세한 상위호환이라. 진심입니까?”

“물론이죠. 아주 미세한 차이일 뿐입니다. 굳이 따지자면 살아온 세월의, 필연적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는 격차 같은 거죠.”

가르엘은 끊임없이 자신이 로렌스보다 못하진 않다는 것을 어필하려 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이는 없었다. 대신 반은 가르엘의 변명을 통해 한 가지 단서를 찾아냈다.

“그쪽이 재생하지 못하고 피를 흘렸을 때는 딱 한 번뿐이었죠. 멘델 할리에프의 응축된 마기에 당했을 때.”

“그렇죠. 제법 쓰라렸답니다.”

“둘이 비슷한 수준이라면, 로렌스에게 상처를 입힐 방법도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가볍게 가르엘을 턱짓한 그가 아주 간단한 방법을 제시하듯 말했다.

“저놈 모가지를 부러뜨릴 만한 마기를 응축시켜요. 시간은 얼마든지 벌어 줄 테니까.”

로렌스를 상처 입힐 만큼 짙은 농도의 마기. 지금으로선 반의 제안이 가장 현실성 있어 보였으나, 가르엘은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 없습니까?”

솔직히 말해, 없었다. 자신이 1년간의 수련에서 얻은 성과는 빛 마력과 마기의 혼용. 두 가지 힘 모두 부지런히 단련하긴 했으나, 하나의 힘을 집중적으로 단련한 이들과는 힘의 고점에서 차이가 나는 법이다.

잠시 맞댔던 로렌스와의 마기에서, 가르엘은 분명한 힘의 격차를 느꼈다. 과연 그 격차를 뛰어넘어 그의 목을 떨어뜨리는 것이 가능한가. 만약 시간을 벌어 주던 동료들이 부상만 얻게 된다면.

“그 정도의 마기를 응축시키려면 치유술을 사용할 여유도 없을 겁니다. 경들이 로렌스를 상대하는 과정은 절대 만만치 않을…….”

“자신 없냐니까 헛소리를.”

가차 없이 가르엘의 말을 끊어낸 반이 땅에 꽂아 둔 대검을 어깨 위로 걸치며 인상을 구겼다.

“내 신변 걱정은 단장만 할 수 있어요. 다른 사내놈한테 걱정 받아 봤자 두드러기만 올라옵니다.”

“…….”

“저 말엔 동감입니다, 가르엘 경.”

루멘 역시 암기 감옥에 둔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반의 말에 동조했다.

“경은 대답만 하면 돼요.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장담하지 못합니다.”

“할 수 없다는 건 가능성이 0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묻죠. 할 수 있습니까?”

여전히 자신은 없으나, 아예 승리할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이것은 가능성이 없더라도 해내야 하는 일. 존재를 인정하기 싫은 자신의 친척이 인간계를 부수러 왔으니, 보잘것없는 목숨이라도 던져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가르엘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를 일별한 루멘이 시원스럽게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그럼 믿고 버티겠습니다. 동료니까요.”

*

한편, 이동 관문 앞. 아쉬브카와의 전투에 한창인 제국의 동쪽에 새로운 지원군이 도착했다. 총 3대대의 인원에 달하는 대규모 기사와 고위 마법사들.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호계 기사단의 단장, 엑토 엔티.

시시각각 변화하는 전장의 흐름을 빠르게 낚아챈 엑토가 묵직한 대검을 빼 들며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마법사들은 장막으로, 기사들은 5대대의 후방으로 진군한다! 힘을 아끼지 마라. 전군 돌격!”

불시에 합류한 지원군의 정체를 확인한 카델의 얼굴이 밝아졌다. 호계 기사단의 단장이 직접 행차하다니.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강력한 아군의 등장이었다.

“엑토 경!”

“또 보는군. 반갑소.”

전장에서의 엑토는 그야말로 숙련된 노장의 면모를 보였다. 무수한 대원들에게 끊임없이 지시를 내렸고, 체스 말 바꾸듯 간단하게 진형을 변화시키며 최적의 전술을 찾아냈다.

가장 감탄스러운 것은, 그리 바쁘게 전장을 구성하며 조율하는 와중에도 언제든 유동적으로 계획을 비틀 수 있도록 정보를 수집하는 치밀함. 카델은 엑토에게 자신이 가진 마족의 정보를 성심성의껏 알렸다.

“흡기충이 흡수할 수 있는 마력엔 한계가 없소?”

“있습니다. 다만 그 수가 천문학적이다 보니 흡기충이 가진 개별적 한계는 별 소용이 없어요. 마력을 주입해 터뜨려 봤자 복구에는 1초도 걸리지 않으니, 낭비입니다.”

“그렇겠군. 물리적으로 떨쳐 내는 수밖에 없겠어. 일단은 소환진이 파괴될 때까지 흡기충을 집중적으로 공략하겠소. 경은 장막을 거두고 마력을 보존하시오. 나머지 작업은 이쪽 마법사들에게 맡기지.”

엑토의 말에 카델은 하늘에 있던 라이돈을 불러 곧장 장막을 거뒀다. 터널형 장막이 사라짐과 동시에 호계 기사단 마법사들의 장막이 생성되며, 또 다른 흡기충이 달려들었다. 미리 준비한 마법과 대기 중이던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흡기충을 공격했지만, 먹구름처럼 몰려드는 벌레 떼를 전부 떨쳐 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를 지켜보던 카델이 방어를 도우려 했으나.

“마력을 보존해 달라 하지 않았소. 경처럼 뛰어난 마법사는 그 수가 아주 드물거든.”

엑토의 우직한 등이 카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대검을 종으로 한껏 치켜든 채 흡기충에 둘러싸인 마법사들의 행렬을 주시했다.

“난 경과 같은 마법사를 보면 아껴 두고 싶어 온몸이 근질거려. 뛰어난 마법사는 모든 전술의 빈틈을 메울 수 있는, 일종의 히든카드거든. 그러니 날 위해 한 보 물러나 주시오, 카델 단장.”

엑토의 육체에서 무형의 기운이 몰아치는 것이 느껴졌다. 대기마저 진동시키는 기운의 흐름에 거슬리는 벌레를 소탕하겠다며 떠나 있던 라이돈까지 카델의 옆으로 돌아왔다.

“흐응, 아주 쓸모없는 놈은 아니었나 봐?”

라이돈은 카델을 지키듯 끌어안은 채 엑토를 응시했다. 기둥처럼 솟구친 기운은 주변에 있는 이들의 시야까지 어지럽힐 만큼 강대한 영향력을 자랑했다. 그리고 하늘을 가리키던 대검이 대지를 내리찍은 순간.

쿠우우우―

땅 위의 모든 생명이 무중력에 들어선 듯, 붕 뜬 고요가 이어졌다. 유체 이탈이라도 한 듯 정신이 멍해지는 찰나가 지나고. 멀어졌던 감각들이 몸속으로 뛰어듦과 동시에, 폭음을 동반한 충격파가 펼쳐졌다.

“크윽……!”

공간이 그대로 부서질 것 같은 날카로운 충격파였다. 전신을 휩쓰는 날카로운 감각은 온몸이 갈가리 찢겨야 마땅한 충격이었으나. 카델의 몸은 제자리에서 한 걸음도 밀려나지 않았고, 상처조차 남지 않았다. 라이돈의 품에 안겨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게…….”

강풍에 감았던 눈을 뜬 카델의 눈빛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단 일 검. 엑토의 일 검이 만들어 낸 충격파는, 마법사는 물론 근방에 있던 모든 아군의 곁에서 그림자처럼 드리웠던 벌레 떼를 단숨에 몰아냈다. 오로지 벌레 떼만을 밀어 낸 것이다. 떨친 벌레들은 충격을 버티지 못한 채 우수수 터져 나갔고, 그 덕에 짧게나마 사방이 탁 트이며 제대로 된 풍경이 드러났다.

조금씩 잘린 다리를 재생하며 몸을 일으키던 아쉬브카. 그 음울하고도 거대한 몸뚱이가 동작을 멈췄다. 끝도 없이 생성되던 벌레들 또한 부글거리는 살가죽 안에 머물렀다. 갑작스러운 타격에 재생을 멈춘 아쉬브카가 느릿느릿 고개를 돌렸다.

검은 피부 위, 침울하게 가라앉은 샛노란 눈동자가 자그마한 인간들을 내려다보았다. 그저 시선이 닿았을 뿐임에도 압도당하는 기분이 들 만큼 아쉬브카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온전히 드러난 아쉬브카의 모습에 아군의 긴장감이 높아졌다. 카델은 언제든 아군을 방어할 수 있도록 마력을 끌어 올렸으나. 이어지는 아쉬브카의 행동은 공격이 아니었다.

[로… 렌스…….]

몸이 짓눌릴 것 같다는 착각이 일 만큼 무겁고 어두운 음성. 아쉬브카가 인간계에 온 뒤 처음으로 낸 목소리는, 자신의 동족을 찾는 간절한 부름이었다.

*

지옥귀의 단말마와도 같은 부름에, 로렌스는 곧장 반응했다. 주위를 단단하게 감싸던 암기 감옥은 폭포처럼 쏟아지는 마기를 버티지 못했다. 암기 감옥을 폭발시키듯 찢어발기며, 잠시 고립되었던 로렌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적에겐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하늘 위로 양팔을 들어 올렸다. 부릅뜬 두 역안에서 불꽃같은 마기가 피어오르며, 펼친 양손 위로 칠흑의 어둠이 고였다.

“보자마자 기분이 더러운 게, 심상찮은 짓을 할 모양인데.”

로렌스의 범상치 않은 작태에 오라를 개방한 반이 곧장 몸을 날렸다. 단단한 검날이 무방비한 로렌스의 갈비뼈를 후려쳤다. 당연하게도, 그의 대검은 로렌스에게 생채기 하나 남기지 못했다.

생물의 뼈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강도. 게다가 로렌스는 자신을 공격한 반에게 일말의 관심조차 주지 않는다. 그가 자신에게 흠집 하나 남기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

하지만 반은 물러서지 않았다.

“귀족이든 마족이든, 거만한 놈들은 다 똑같아. 한번 자기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면, 그 녀석은 절대 자기를 해치지 못할 거라고 방심하거든.”

개방된 오라가 점점 양을 불리며 사납게 일렁였다. 로렌스의 마기에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예전에는 마기와 닿기만 해도 맥을 추리지 못하며 발광하던 힘이었으나, 이제는 다르다. 지금의 반은 상대의 마기를 통해 오라의 힘을 증폭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난, 너 같은 놈들의 거만한 상판을 짓밟는 걸 좋아해.”

로렌스의 갈비뼈를 누른 대검 위로 붉은 오라가 모여들었다. 빠른 속도로 흘러든 오라는 곧 대검을 핏빛으로 물들인 채 스산한 공명음을 냈다. 마찬가지로 붉게 물든 반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치며, 꽉 다문 턱 근육이 도드라졌다.

그리고 조금씩, 검날이 로렌스의 살갗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기다렸다는 듯 얕은 상처 위로 마기가 피어올랐으나, 그때마다 더욱 많은 오라가 응축되며 몸집을 부풀렸다.

그렇게 이곳에 온 뒤 처음으로 흐른 로렌스의 핏방울이 반의 대검에 흡수된 순간.

콰아아―

거인이 기지개를 켜듯, 로렌스의 손바닥 위에 머물러 있던 어둠이 하늘을 가로지르며 퍼져 나갔다. 뭔가의 대책을 세울 틈도 없이 순식간에. 온 하늘이 짙은 어둠에 삼켜졌다.

심연처럼 어둡게 응축된 마기였다. 갑자기 어두워진 시야에 당황하기도 잠시. 기사들 틈에서 절규와도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아쉬브카의 다리가 완전히 재생됐습니다!”

그 충격적인 외침에 가르엘의 시선이 움직였다. 어둠에 그림자 진 아쉬브카의 윤곽을 훑어 내자, 언제 잘려 나갔냐는 듯 멀쩡하게 재생된 다리가 보였다. 좀 전의 충격파로 아쉬브카가 피와 기운을 흡수할 벌레들은 모조리 밀려나 죽었다. 그러니 이 뜬금없는 재생의 원흉은 분명.

“로렌스…….”

하늘을 뒤덮은 마기의 막에서 가루처럼 분해된 기운이 떨어져 내렸다. 하늘거리며 떨어진 기운은 아쉬브카의 몸체에 흡수되며, 그가 지금껏 입었던 모든 피해를 무로 돌리고 있었다.

조금은 사그라들었다고 생각했던 아쉬브카의 기세가 타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루멘은 여전히 로렌스와 대치 중인 반과 협공에 돌입한 요젠을 바라보며 가르엘의 옆에 섰다.

“경의 치유력을 적으로 만나니 확실히 암담하긴 하군요. 왜 다른 마족들이 그렇게 치를 떨며 달려들었는지 이해가 갑니다.”

“……아쉬브카와 로렌스. 둘 중 하나를 완전히 해치우지 못하면 이 전투는 패배로 나아갈 겁니다. 물론 제가 힘내서 로렌스를 빠르게 처리한다면 좋겠지만, 그만한 기운을 모으기까진 시간이 걸려요.”

“필요한 만큼 로렌스를 묶어 둘 수 있습니다.”

“물론 믿습니다. 문제는…….”

자신의 힘은 다른 동료들처럼 파괴에만 집중된 것이 아니었다. 치유력. 카델이 자신을 원했던 가장 큰 이유. 성기사로 살아온 세월 동안 전장에서 치유사가 가진 중요성이 얼마나 큰지 몸소 깨우쳐 왔다. 만약 자신이 로렌스를 해치우는 데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그동안 치유술은 전혀 사용할 수 없게 된다.

로렌스를 단박에 죽일 만큼 순도 높은 마기는 단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부재가 전장의 흐름, 카델의 판단에 큰 변수가 될까 봐. 가르엘은 섣불리 행동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가르엘의 갈등을 해결해 주겠다는 듯, 건너편에서부터 카델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가르엘! 이쪽으로 와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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