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6화 (336/521)

하늘을 뒤덮은 채 잿가루처럼 쏟아지는 마기의 파편. 이것은 로렌스의 기술 중 하나인 [무한 재생지대]였다. 말 그대로 범위 내의 아군에게 무한한 재생을 선사하는 회복 장판. 가르엘의 기술, [재생의 공간]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치유술이다.

로렌스라는 마족은 ‘히어로 오브 나이츠’에서 부동의 1티어라 평가되었던 가르엘 몬자시의 상위호환 버전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의 뜬금없는 등장은 치명적인 변수가 됐다. 로렌스는 가뜩이나 아득하기만 한 아쉬브카 토벌을 불가능으로 이끄는 원흉. 그럼에도 카델은 로렌스를 무시하고 아쉬브카 토벌에 집중했다. 모름지기 싸움에선 가정 먼저 치유사를 처리해야 함에도 그랬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공략했던 스테이지에서, 로렌스는 죽지 않는다. 무적이란 얘기가 아니었다. 게임 속 로렌스는 아쉬브카가 아닌 다른 고위 마족과 함께 등장한다. 그리고 일정량의 체력을 깎으면, 겉멋만 들린 심오한 발언을 남긴 채 퇴장한다.

그 후에 스테이지 내에서 로렌스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없다. 당시 그는 로렌스를 완전히 죽이지 못한 것이 찝찝해 정보를 찾았고, 놈의 최후가 스토리 컷신 내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즉, 이 전장에서 로렌스를 몰아내기만 한다면 그는 어차피 죽은 목숨이라는 것이다.

‘로렌스를 몰아내려면 아쉬브카를 먼저 해치워야 해.’

그것이 가능하려면 첫째, 아쉬브카가 재생을 시도하기 전에 즉사시켜야 했고. 둘째, 로렌스가 아쉬브카를 불사의 몸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이쪽도 치유술을 통해 아군의 전력을 보충해야 했다.

그리고 로렌스와 대적할 만한 치유술을 가진 자. 인간 쪽에 그런 힘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기사, 가르엘 몬자시뿐이었다.

“로렌스는 견제만으로 충분해. 날 믿고 아군이 아쉬브카를 상대할 수 있도록 광역 치유술을 전개해 줘, 가르엘.”

카델은 달려온 가르엘에게 로렌스를 버리고 치유사의 역할에 충실해 달라 부탁했다. 가르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요구일 테다. 그 역시 유능한 단장이었으니, 전쟁에서 우선시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 않겠는가. 자신의 지시가 못 미더울 법도 했다. 그러나 가르엘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요. 하지만 저쪽 호계 기사단의 단장 수준이라면 제 치유술이 흑마법이 아니라는 걸 눈치챌지도 모릅니다.”

“걱정하지 마. 내 암흑 마력도 같이 뿌릴 거니까. 혹시 엑토 경이 의심한대도 로렌스의 마기랑 헷갈린 걸 거라고 우기면 돼. 네가 신경 쓸 건 없어.”

엑토를 제외한다면, 이 난리 통에 자신을 치유하는 힘이 마기인지 흑마법인지 분간할 정신이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다. 고쳐 주면 감사합니다, 하고 다시 임전 태세에 들어가면 될 일이니까. 카델의 단언에 가르엘도 순순히 수긍하며 마기를 끌어모았다.

그리고 그동안, 카델은 다시 해일처럼 몰려드는 벌레 떼를 쳐 내기 바쁜 엑토에게 접근했다. 묵직한 열풍을 쏘아 내며 주위의 벌레 떼를 처리하자, 대검을 휘두르던 엑토가 카델을 돌아보았다.

“아쉬브카의 심장을 노립시다, 엑토 경.”

“좋소. 서둘러 죽이지 않으면 평생 이 징그러운 벌레들 틈에 갇혀 살겠군그래.”

카델과 같은 판단을 내린 듯, 엑토의 대답은 시원스러웠다. 그는 부하들을 노리는 흡혈충을 향해 검기를 날리며 드문드문 말을 이었다.

“내 계획은 이렇소. 호계 기사단이 아쉬브카의 사지를 결박해 움직임을 제한한 사이, 제국의 정예 기사가 단숨에 놈의 숨통을 끊어 내는 거지.”

“동의합니다.”

“난 항상 제국에도 정예 기사단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전쟁에는 강력한 한 방이 필요한 법이지 않겠소. 우리가 뒤를 받쳐 줄 테니, 경의 기사들은 칼을 겨누도록 하시오.”

오랜 세월 동안 제국의 대표 기사단을 이끌며 수많은 전장을 누벼 온 사내였다. 그럼에도 그에겐 자신이 이 전장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도, 제 세력만이 주축이 되어야 한다는 오만함도 없었다.

그의 그림엔 기사 한 명 한 명이 빠짐없이 그려졌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축적된 노련함과 그 모든 경험을 단숨에 뒤엎을 만큼 우월한 결단력. 같은 단장으로서 탐나는 재능이 아닐 수 없었다.

“아쉬브카 처치는 제 부하 한 명만으로 가능합니다. 다른 한 명은 광역 치유술을 전개할 테니, 호계 기사단 쪽에서도 로렌스의 견제를 도와주십쇼.”

“방금 끔찍하게 질투 나는 발언을 들은 것 같지만 무시하겠소. 그럼 치유술을 시작하는 대로…….”

일순 말을 멈춘 엑토가 카델의 후방으로 검기를 날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것은.

“어딜 도망갔나 했더니. 여기 있었구나.”

자신을 붙잡아 두던 인간을 전부 떨쳐 내며 날아오른 로렌스. 그가 모든 것을 제쳐 두고 찾아온 대상은, 다름 아닌 가르엘이었다.

*

저주 같은 낙인을 찍고 태어난 대신, 웬만한 공격으로는 목숨을 위협당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가르엘은 카델이 연막처럼 뿌려 둔 암흑 마력 안에서 로렌스의 공격을 모조리 무시하려 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악에 받쳐 로렌스를 상대하는 것이 아닌, 전장의 모두를 살리는 일. 카델이 걷게 해 준 정도正道에 헌신하며 그의 지시를 따라야 했다.

“아쉬브카의 힘 앞에서 몇 명의 인간이 살아남을 것 같나? 쓸데없이 힘을 빼고 있구나. 그럴 시간에 네 하찮은 친구들 말처럼 날 공격해 보는 게 어떻냐. 그쪽이 훨씬 흥미롭겠군.”

“시끄럽네. 계속 떠들 거면 자릴 좀 비켜 줘. 아니면 내가 갈까?”

평소보다 짙고 어두운 마기가 그의 몸을 통과하며 땅 밑으로 빨려가듯 흘러내렸다. 로렌스와 맞먹는 범위의 치유술을 전개하기 위해선 준비가 필요했다. 앞으로 조금만 더.

가르엘은 로렌스가 장난처럼 휘두른 장검에 이곳저곳이 베여 나가는 짜증스러운 통증을 인내했다. 상처는 곧장 재생됐으나, 그것은 로렌스가 진심으로 가르엘을 공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마치 가르엘에게서 뭔가를 유도하듯 그를 자극해 댔다.

그리고 곧, 가르엘은 로렌스가 자신에게 무엇을 끌어내려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네 주변엔 왜 암흑 마력이 흐르고 있는 거지? 마치 네 모습을 숨기려는 것처럼 말이야. 혹시 저 열등한 종족들은 네 출신을 알지 못하나?”

“입 닥쳐.”

“이 우월한 힘에 보호받으면서도 그 힘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고? 이런, 불쌍한 나의 조카야. 마음이 아프구나. 네 짧은 생을 마무리 짓기 전에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을 줘야겠는걸.”

“……허튼짓은 관두는 게 좋아.”

로렌스는 자신을 동요하게 만들어 인간의 회복을 막으려 하고 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그것이 목적이었다면 단순히 자신의 목만 내리치면 됐을 일. 그의 목적은 자신의 죽음뿐 아니라, 인간들 틈에 혼란의 씨앗을 심는 것이다.

여기서 로렌스가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면 일은 돌이킬 수 없이 꼬여 버린다. 하지만 로렌스의 입을 다물게 하려면, 지금껏 치유술을 위해 모아 두었던 마기의 흐름을 끊어 내야 했다.

“이 마력을 거두고 모두에게 공개하는 거다. 너희 우둔한 종족은 감히 마족에게 대항하려 하나, 결국은 이 우월한 힘에 기대 연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가르엘이 최악의 갈림길 사이서 망설이던 때였다.

“지금 누구 부하를 너 따위랑 동급으로 취급하는 거야.”

암흑 마력을 뚫고 나타난 [화련]이 비행 중인 로렌스의 두 다리를 옭매었다. 뒤이어 나타난 이는 카델. 그는 로렌스와 가르엘 사이에 끼어들어 사납게 눈을 치떴다.

“네가 뭐라고 지껄이든 가르엘이 인간의 적이 될 일은 없어. 그러니 수염 난 주둥이 놀릴 시간에 살 궁리나 하시지.”

“……이름이 가르엘이었나.”

“함부로 부르지 마. 너한테 불리려고 예쁜 이름으로 태어난 게 아니거든.”

“거절하지.”

[화련]은 강한 열기로 로렌스의 살갗을 불태웠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으나, 로렌스는 아주 미세한 차이로 간신히 재생하며 무적의 상태를 유지하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를 고수했다.

“가르엘, 치유술을 멈추지 마. 네 짜증 나는 친척은 내가 상대할게.”

“……알겠어요.”

“한 마디도 휘둘리지 말란 소리야.”

로렌스는 두 남자를 느긋하게 훑어 냈다. 새로 나타난 사내는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눈여겨본 마법사였다. 범상치 않은 실력을 갖춘 데다, 상대의 심리를 파악하는 데도 꽤 재능이 있어 보였다. 저 마법사의 경고대로, 가르엘은 이미 자신에게 휘둘리기 시작했으니.

“가르엘이 인간의 적이 될 일은 없다고 했나?”

“아직 이름을 모르는 줄 알았다면 절대 말 안 꺼냈을 텐데.”

“진심으로 그러길 바라지. 사랑으로 태어난 아이이니, 마계가 버렸으면 인간계라도 받아 줘야지 않겠나.”

“뭐?”

자, 보라. 원망 위에 얕은 뿌리를 내린 저 반쪽짜리 핏줄은 갑작스러운 충격에 맥을 추리지 못하고 흔들린다.

“……입 다물라고 했잖아.”

카델의 너머, 살기 어린 눈빛과 요동치는 마기를 담아낸 로렌스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리도 정신없고 숨 가쁜 전장 속에서 제대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러니 자신의 백부, 로렌스에게서 들은 탄생의 비화 따위, 저만치 밀어 둔 채 전투에만 집중하려 했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정신을 다잡는 일이 마음대로 됐다면, 매일 밤 한심했던 과거를 후회하는 피곤한 짓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아무나 골라서 원망하면 되겠네요. 원망에 기대서라도 살란 말입니다.”

“살아서 증명해야죠. 당신들이 날 이렇게 낳았지만, 그래도 나는 올바르게 살았다. 무수한 인간을 사지로 몰아넣었던 힘으로 무수한 인간을 살렸다. 그러니 내 인생은 잘못되지 않았고, 태어나서 다행이었다.”

원망에 기대어 살기로 했다. 부모가 나의 삶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었으니, 그들에게 복수하듯 살아가리라 다짐했다. 생사도 알 수 없는 부모를 증오하는 대가로 이 저주 같은 힘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처음으로 알게 된 부모의 존재는, 원망의 대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내 동생의 눈물겨운 부성애와 네 하찮은 어미의 희생으로 태어난 삶은 어떠했나?”

그들은 그저, 무책임했다. 자신들의 사랑이 낳을 결과물이 어떨지 뻔히 알고 있었음에도 그대로 행했으며, 결국 그 욕심의 최후를 감당하지도 못했다. 감당하지 못하고 죽어 버렸다.

그들의 나약함을 원망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곧 그들과 똑같이 나약하고, 대책 없는 사랑을 시작해 버린 스스로를 원망하는 것과 같았으므로.

증오로 만들어진 발판이 흔들렸으나, 아직 삶의 의미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니 날 따라와요. 당신의 생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 줄 테니, 나와 같은 길을 걸어 봅시다.”

카델이 있으니 괜찮았다. 어둠으로 가려진 길을 밝혀 줄 등불만 있다면, 어떻게든 살아 걸어 나갈 수 있다. 그가 바로 삶의 의미니까. 그리고……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르윈은 네 어미를 사랑한다고 하더군. 사랑하는 이가 목숨 바쳐 낳은 아이이니, 자신과 함께 마계로 돌아갈 수 있게 해 달라고 애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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