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목전에서 되돌아온 아군은 아쉬브카 공격 재개를 위한 준비를 마쳤으나, 마법사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흡기충의 습격으로 상당량의 마력을 빼앗겼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 고작.
이런 때에 소환진 해제를 강행하는 것은 마법사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엑토는 소환진 파괴를 보류하고, 아쉬브카 토벌에 집중하기로 했다.
“놈의 손발을 묶어라! 적린 기사단에게 일격의 기회를 만들어 줘야 한다!”
카델은 분명 한 명의 단원만으로 아쉬브카의 목숨줄을 끊어 낼 수 있다고 했다. 쉬이 믿기 힘든 자신감이었지만, 허영 같은 자신감으로 그 많은 전투를 성공으로 이끈 것은 아닐 터. 그렇기에 엑토는 적린 기사단의 대부분이 로렌스 견제에 투입되었다는 것도, 아군을 감싼 치유술의 기운에서 이질감이 느껴진다는 것도, 모조리 뒤로 밀어 둔 채 카델의 약속을 믿기로 했다.
그리고 카델은, 제 약속을 실현해 줄 부하를 찾아갔다.
“한 방에 끝내야 해. 재생할 틈도 없이 단박에 숨통을 끊어 놔야 한다고. 할 수 있지?”
요젠은 제 어깨를 단단히 움켜쥔 카델의 손등을 감싸며 말했다.
“할 수 있어.”
덧붙이는 말도, 주저함도 없는 깔끔한 대답이었다. 카델은 든든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부하를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저쪽에서 신호를 줄 거야. 아쉬브카가 결박된 순간에 바로 심장을 노려.”
“좋아. 그런데…….”
순순하게 카델의 지시를 따르던 요젠이 머뭇거리며 말을 늘였다. 그를 의아하게 지켜보자, 뜸을 들이던 요젠이 버릇처럼 눈꺼풀을 문지르며 말했다.
“혹시 남는 붕대 같은 거 없어?”
“남는 붕대?”
“큰 기술을 준비해야 하니 슬슬…… 불편해서.”
불편하다니. 눈에 붕대를 두르지 않으면 불편하다는 걸까? 보통 반대가 아니던가. 붕대가 주는 압박감을 즐기는 걸지도 모르지만, 그 압박감을 편안하게 느낀다는 것 역시 이상하다. 카델은 눈을 문지르는 요젠의 손을 끌어 내리며 그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새로 생긴 상처는 없는 것 같은데. 혹시 다른 이유가 있어?”
“……강한 기술을 사용하면 기분 나쁜 모습이 돼. 그 모습을 보이는 게 싫어.”
“기분 나쁜 모습이라니?”
“……없으면 됐어.”
요젠은 대답을 회피하며 돌아서려 했지만, 카델이 가만두지 않았다.
“무슨 소리야. 붕대가 있어 봤자 눈만 가리는 게 전부잖아. 누가 너한테 기분 나쁘게 생겼대?”
“…….”
“이 얼굴을 보고 누가? 넌 네 얼굴을 못 보니까 객관적인 판단이 불가능한가 본데, 여기서 네 이마에 뿔이 다섯 개씩 자란다고 해도 넌 절대 기분 나쁘게 생길 수가 없거든.”
“그건 좀…….”
“언제 어디서 그딴 주둥이에 악귀 들린 놈을 만났는진 몰라도, 신경 쓰지 마.”
단호하게 일러둔 카델이 요젠의 손을 잡아끌어 제 얼굴에 댔다. 화가 났다는 걸 알리기 위해 바짝 힘을 준 눈가와 올라간 눈썹을 쓸게 하자, 주저하던 요젠의 표정도 유순하게 풀렸다.
「기사 ‘요젠 바르딕타’의 호감도가 2 상승했습니다.」
「현재 호감도: 64/100」
“알겠어. 신경 쓰지 않을게.”
“……좋아.”
겨우 이런 말로 호감도가 오르다니. 고요의 산맥에서 수련할 때부터 항상 이런 식이었다. 누군가에겐 당연한 배려와 위로에, 요젠의 감정은 과하게 반응했다.
묘하게 속상한 기분이 들었으나, 감정 변화에 민감한 요젠에게 제 심정을 알리고 싶지 않아 태연한 척 굴었다. 그렇게 카델이 보란 듯 요젠의 눈가를 문지르며 그를 다독이던 때.
“카델 경! 시작하시오!”
아군의 아쉬브카 포박 작전이 성공했다.
*
전장의 한복판에서 암살자가 완전히 기척을 숨기는 것이 가능한가? 그것은 단순히 꾸준한 단련이나 수많은 경험만으로 다다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의뢰 성공률이 96%에 달한다는 펜토 섬의 어느 암살자도, 300 대 1의 백병전에서 홀로 승기를 거뒀다는 떠돌이 암살자도, 아주 오래전 대국의 폭군을 죽여 쿠데타를 성공으로 이끌었다는 전설적인 암살자도. 같은 질문을 받았다면 모두 똑같은 대답을 내놓았을 것이다.
암살자가 전쟁에서 육탄전으로 활약할 수는 있다. 하지만 적들의 틈바구니에서 완전히 기척을 죽인 채 적장의 목만을 잘라 올 순 없다. 그건 재능이나 노력에 관한 것이 아니다. 불가능의 영역인 것이다.
하지만 요젠 바르딕타는 가능했다. 어느 정도의 협조와 적당한 타이밍만 챙긴다면, 그에게 불가능한 살생이란 없다. 바로 그것을 증명하는 하나의 기술.
‘오랜만에 사용해 보네.’
팔다리가 묶인 아쉬브카의 정면에 서 있으나, 누구도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다. 주위의 암기는 가까운 자들의 감각을 둔화시켰고, 멀리 있는 자들의 시야를 교란했다.
은신을 택한 그의 호흡엔 소리가 없다. 심장은 울림이 없고, 주위의 공기마저 굼뜨게 흐르는 듯했다. 코 옆을 스쳐 가면서도 아군과 벌레 떼는 요젠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의 과거엔 뛰어난 재능과 무수한 노력이 있었으나, 지금의 그를 완성한 토대는 다른 무엇도 아닌 ‘간절함’이었다. 그의 힘은 타인을 위한 것이지만, 그의 은신은 오로지 자신의 생존을 위한 것.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의미에서, 요젠의 생존욕은 이곳의 누구보다 강했다.
때문에 그의 은신이 풀린다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하나는 그가 자신의 생존을 확신했다는 것. 또 하나는, 그가 상대의 죽음을 확신했다는 것.
“더 많은… 인간을…….”
아쉬브카의 둔한 목소리가 서서히 사그라졌다. 그의 지저분한 눈동자가 자신의 앞에 자리한 요젠을 담아냈다.
곧장 마주치는 시선. 아니, 마주쳤다고 할 수 있을까. 요젠의 눈을 바라본 아쉬브카는, 이곳에 온 뒤 처음으로 동요를 드러냈다.
“……로렌스.”
인간들의 맹공으로 심한 손상을 입었으나, 로렌스의 마기로 조금씩 몸을 치유하는 중이었다. 굳이 흡혈충을 날리지 않아도 약간의 시간만 있다면 원상 복구될 테다. 그런데도 아쉬브카는 그 짧은 시간을 기다릴 수 없었다.
인간들의 차고 넘치는 원망을 먹고 살았다. 그들의 살의는 아쉬브카에게 있어 일종의 즐거움이었고, 쾌락이었다. 그들이 보내는 적의는 단 한 번도 아쉬브카의 기세를 꺾이게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인간은 어딘가 달랐다. 아득하게 깊은 공동처럼, 그 끝을 알 수 없는 새까만 기운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 두 눈을 채운 것은 단순한 암기가 아니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불길한 살기. 죄악을 심판하기 위한 더 큰 죄악처럼, 그것은 단지 시선만으로 아쉬브카에게 죽음을 점지하고 있었다.
“로렌…스…!”
아쉬브카의 음성에 조급함이 담겼다. 그는 궁지에 몰린 쥐처럼 묶인 팔다리를 바둥거렸으나, 회복이 덜 된 태산 같은 몸으로는 한 걸음 물러서는 것도 어려웠다.
그의 몸집에 비하면 그저 개미와도 같은 하찮은 크기의 인간일 뿐이다. 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갖췄다 한들 팔다리 한쪽 잘라 내는 것이 전부일 터.
하지만 그렇게 안심하기에는, 이미 전장의 모두가 요젠의 존재감에 압도당하고 있었다. 마치 처음 아쉬브카를 발견했을 때처럼, 어쩌면 그보다도 충격적인 등장.
요젠의 눈꺼풀 아래 작은 무저갱처럼 자리한 짙은 어둠. 그 위로 눈물 같은 암기가 흘러내렸다. 암기는 그의 새하얀 얼굴과 목덜미, 단복과 발끝을 적셨다.
온통 검게 물든 전신은 본래의 형태만을 간신히 찾아볼 수 있었다. 암기에 젖어 매끈하게 윤곽이 드러난 얼굴에선 평소의 미소 대신 차갑게 가라앉은 살기가 더해졌다. 그는 인간이라기보단 악과 독으로 이루어진 어떠한 치명적인 존재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가 작은 한 걸음을 내디딘 순간.
두웅―
전신의 뼈마디를 울리는 둔중한 파동이 공간을 잠식했다. 그가 걸음걸음을 옮길 때마다 파동은 늘어났고, 그를 버티지 못한 몇몇 기사들은 맥없이 쓰러지거나 간신히 중심을 잡으며 비틀댔다. 그마저도 요젠이 달음박질을 시작함과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뜀박질엔 소리가 없었고, 걸음마다 수십 개의 검은 잔상이 어지럽게 흐트러져 정확한 위치를 잡을 수도 없었다.
“로렌스……!”
아쉬브카는 로렌스의 이름만을 연신 불러 젖혔다. 그러나 로렌스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으며, 만약 주었다 해도 소용은 없었을 것이다.
아쉬브카의 기울어진 몸을 타고 내달리던 요젠이 어느 지점에서 멈춰 섰다. 아쉬브카의 심장 위. 벌레 떼가 바글거리는 요란한 몸속, 그 무한한 날갯소리를 뚫고 나오는 심장 소리. 공포에 질린 자의 울림이었다.
무감하게 식어 있던 요젠의 표정으로 희미한 희열이 떠올랐다.
“듣기 좋네.”
작게 중얼거린 그가 양손을 들었다. 그러자 손끝으로 흘러내린 암기가 형태를 갖추며, 곧 기다란 검날을 가진 단검 한 쌍이 생성됐다.
두 개의 단검에선 귀곡성 같은 괴이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금방이라도 귀가 찢길 것 같은 소름 끼치는 괴성이었으나, 요젠은 되레 흥분했다. 그는 오로지 살의만이 느껴지는 미소를 머금은 채 거침없이 쌍검을 휘둘렀다.
[필사必死].
아무런 전조도 없이, 허공으로 아쉬브카의 몸을 통째로 가로지르는 거대한 X자의 잔상이 새겨졌다. 아쉬브카의 몸체보다 검고 어두운 잔상. 그것은 마치 대상이 이승에서 지워질 존재임을 암시하듯 불길하게 일렁였다. 그리고 조금씩 흐려지던 잔상이 사라지기 직전.
사아아―
잔상의 교차점. 정확히 아쉬브카의 심장을 가리키던 교차점의 공간이 사라졌다. 뻥 뚫린 심장 너머, 소낙비처럼 추락하는 벌레 떼의 모습이 한가득 들어찼다.
우렁찬 단말마나 요란하게 튀는 핏물 따위는 없다. 죽음을 부정하며 도망칠 새도 없이, 그저 그렇게. 아쉬브카는 심장을 빼앗겼다.
임무를 마친 요젠이 암기를 씻어 내고 지면에 착지할 때까지. 적은 물론 아군까지도 눈앞의 일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정지하듯 멈춰 버린 전장의 흐름을 되돌린 것은 명을 다한 고깃덩이가 만들어 낸 육중한 울림이었다. 우람한 몸뚱이가 죽음을 증명하듯 맥없이 고꾸라지며 땅을 흔들자, 굳어 있던 기사들이 움직임을 재개했다.
가장 위협적이던 적이 죽었으므로, 그들의 다음 타깃은 여태껏 적린 기사단이 묶어 두고 있던 로렌스.
‘대체 어떻게……!’
몰아치는 검기와 오라, 마법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비행하는 그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시선 끝에는 한순간에 심장을 잃고 절명한 아쉬브카의 시신이 있었다.
물론 그 암살자는 위험한 힘을 가지고 있긴 했다. 하지만 아쉬브카의 목숨을 단박에 앗아 갈 만큼, 그 고점을 측정하기도 어려울 정도의 강자일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가르엘의 존재 때문인가. 그를 교란하려 했지만, 되레 이쪽이 신경을 빼앗겨 인간 측의 전력을 확실히 파악하지 못했다.
‘아쉬브카를 잃다니. 이건 엄청난 실책이다.’
아쉬브카의 부름을 들었으나 곧장 돕지 못했다. 자신을 견제하던 두 명의 인간과 요정 하나 때문이었다. 그들은 자신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는 없었지만, 자유로운 움직임을 허락하지도 않았다.
‘특히 그 광전사……. 그 정도 농도의 오라는 나조차도 처음 경험했다. 생각보다 너무 많은 변수가 있었어. 가르엘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마계의 핵심 전력 중 하나를 잃었고, 가르엘을 죽이지 못했으며, 제국 또한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대로 마계에 복귀한다면 에밀리아가 내리는 형벌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로렌스는 소환진이 아직 파괴되지 않았음을 확인하자마자 복귀를 택했다. 인간들이 두려워 차라리 에밀리아에게 벌을 받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적린 기사단, 이라고 했지.’
그가 전투를 치르며 성가심을 넘은 충격마저 느꼈던 존재들. 그들의 소속을 알아냈고, 몇몇은 이름까지 기억해 두었다. 그들의 정보를 에밀리아에게 넘긴다면 무거운 형벌만큼은 간신히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잘만 구슬린다면 두 번째 기회를 얻을 수도 있을 테지.
기어코 소환진에 다다른 로렌스가 그 위로 마기를 불어넣었다. 기둥처럼 솟구치는 짙은 마기 너머, 멀찍이서 자신을 응시하는 가르엘이 있었다. 우스꽝스러운 가면을 쓴 채 정체를 감추려 애쓰는 자신의 조카.
마찬가지로 그를 응시하던 로렌스의 시선이 작게 움직였다. 마계로 돌아가기 직전, 그가 담아낸 인간의 모습은 가르엘이 아닌 카델이었다.
적린 기사단의 단장. 로렌스가 파악한 인간계의 주요 전력 중 한 명이자, 조카의 정신적 지주. 그를 무너뜨리는 것이 이 전쟁의 승리를 위한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되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다음을 기약하마, 사랑스러운 조카야.’
그렇게 로렌스는 도주에 성공했으며, 그를 복귀시키는 데 성공한 소환진은 모든 효력을 잃은 채 전쟁의 흉터로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