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5화 (345/521)

카델은 가르엘을 끌고 늦저녁의 마을을 들쑤셨다. 그를 찾아 헤매던 동안 마을 지리에 익숙해져서, 원하는 곳을 바로바로 들를 수 있게 되었다.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옷 가게. 옷을 사기 위함은 아니었고, 창 너머로 진열된 가면들을 본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막상 들어가니 가면의 수는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깨진 가면을 대신해 시장에서 허겁지겁 고른 것보단 나을 테다.

“아무거나 마음에 드는 거 골라 봐. 사 줄게.”

“으음, 남자 취향은 있어도 가면 취향은 없는데요. 잘 가려지기만 하면 그만인…….”

“이왕 쓰는 거 예쁜 걸 쓰면 좋잖아. 봐, 이건 어때? 곡선도 잘빠졌고, 무늬도 금색이네. 네 머리카락 색이랑 잘 어울린다.”

“저한테 흰 가면은 좀 아니지 않나요? 흑마법사치곤 너무 밝은 느낌인데요.”

“선입견이야.”

“전 이게 나아요.”

처음엔 시큰둥한 반응이던 가르엘도 카델이 열성적으로 가면을 살피자 조금씩 장단을 맞추기 시작했다. 카델은 가르엘이 집어 든 검은색 가면을 보곤 인상을 찌푸렸다.

“칙칙해. 광도 없고 무늬도 없고. 얼굴도 너무 많이 가리는 거 아니야?”

“보통 가면은 얼굴을 가리려고 쓰는 거니까요.”

“저번 네 가면처럼 한쪽 눈만 살짝 가리는 디자인은 없나?”

“음…… 그런 건 없는 것 같은데요. 그렇게 제 잘생긴 얼굴이 가려지는 게 아쉽나요?”

“헛소리라고 하고 싶은데, 그런 마음도 없진 않다. 내 얼굴도 아닌데 괜히 아쉽달까.”

진지한 대꾸에 가르엘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떻게든 얼굴을 덜 가리는 가면을 찾기 위해 신중하게 눈을 굴리는 모습이 귀엽기만 했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가르엘은, 뒤편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가게의 점장이었다. 콧등을 덮은 주근깨와 붉은 기 도는 머리카락이 순박한 느낌을 주는 여자. 그녀를 발견한 가르엘이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까닥이자, 살짝 경직돼 있던 그녀도 바짝 힘주었던 어깨를 내렸다.

“적린 기사단 분들이시죠? 편하게 구경하시게 빠져 있으려고 했는데, 대화 소리가 들려서요.”

“이런, 저희 목소리가 너무 컸나요? 사과드리죠.”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잠시 쭈뼛거리던 그녀가 카델과 가르엘에게 양해를 구한 뒤, 가면 하나를 집어 들었다. 처음 가르엘이 골랐던 무난하고 칙칙한 가면이었다.

“이게 마음에 드시는 거죠? 그런데 가면이 얼굴을 너무 많이 가리진 않았으면 좋겠고. 맞나요?”

“뭐, 저는 상관없지만 저희 단장님은 그렇다시네요.”

“그럼 며칠만 시간을 주세요. 제가 기사님들이 원하는 크기와 모양대로 제작해 드릴게요.”

점장의 제안에 멀뚱히 그녀를 바라보던 카델이 놀란 눈으로 다가왔다.

“정말 그래 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죠! 적린 기사단 분들은 제국의 영웅이신 데다, 지금은 저희 마을도 지켜 주고 계신걸요. 이 정도야 당연해요. 3일만 주시면 원하시는 모양으로 제작할 수 있어요. 가면을 쓰고 전투를 하신다면, 평범한 것보다 튼튼하게 만들어 드릴게요.”

“그럼 부탁드릴게요!”

“네! 우선은 원하시는 디자인에 대해…….”

카델은 가르엘을 저만치 밀어 둔 채 점장이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가면의 모양새를 설명했다. 결과적으론 왼쪽 눈 부근을 제외하곤 모든 면적을 줄여 달라는 부탁이었다.

쓸데없이 길었던 요구 사항을 모두 전한 뒤. 가르엘은 개운하게 가게를 나서려는 카델의 뒤에서 점장을 돌아보았다.

“너무 부담 가지지 말고, 편하게 만들어 주세요. 결과물이 마음에 안 든다고 저주를 내리는 치졸한 인간은 아니거든요. ”

흑마법사라 알려진 자신이 타인에게 어떻게 비치는지를 알고 뱉는 농담이었다. 호의로 무장한 그녀에게 괜한 부담감을 얹어 주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장은 예상외의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아무도 생명의 은인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기사님. 이 가면도 저희 마을 사람들의 고마움을 담아 최선을 다해 만들 거고요.”

“…….”

“그럼 3일 뒤에 봬요!”

점장의 밝은 인사를 마지막으로, 가르엘과 카델은 가게를 나섰다. 카델은 자연스럽게 그를 다음 목적지로 이끌며, 꽉 다물린 입술과 내리깐 눈을 일별했다.

“새삼스럽게 감동받았어?”

“솔직히 말하자면…… 네. 이런 곳에서 들을 줄은 몰랐던 말이라.”

“넌 전장의 최전방에서 수많은 사람을 지키고 있는 거야. 그 보답이 핍박일 만큼 세상이 썩지는 않았어.”

“……알아요. 그래서 지키고 싶었던 거니까.”

카델은 조금씩 풀어지는 가르엘의 표정을 확인하며 함께 미소 지었다.

다음에 들른 곳은 주점이었다. 자신이 그렇게 술만 마시는 사람인 줄 아느냐며 토라진 척을 하려던 가르엘은,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쏠리는 수많은 시선을 마주하곤 주춤했다.

혹시 이쪽 사람들은 옷가게 점장관 달리 흑마법사의 등장을 꺼리는 걸까. 확실히 자신이 술맛이 돌 만한 존재는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복한 저녁을 지켜 주기 위해 슬쩍 발을 빼려던 순간.

“술을 준비해라!”

“최대한 많이! 제일 좋은 걸로 내와!”

술집 주인과 점원, 심지어는 가게 안의 손님까지 서둘러 술을 내오라며 고성을 질러 댔다. 소란 속에서 튀어나온 손님 하나는 가르엘을 끌어 빈자리에 강제로 착석시키기까지 했다. 그는 태연하게 맞은편 자리를 차지한 카델을 당혹스럽게 바라보았다.

“뭡니까, 이 상황은……?”

“네가 식당도 안 들르고 수련만 해 대서, 식당 사장님이 굉장히 속상해하셨거든. 혹시 음식이 입에 안 맞아서 안 오시는 걸까, 시무룩하게 계시길래 넌 원래 주식이 술이라고 말해 뒀어. 그게 온 주점에 소문이 난 모양이야.”

“이럴 줄 알고 데려온 거예요?”

“어느 정도 짐작은 했는데, 나도 이렇게나 반겨 주실 줄은 몰랐네.”

그나마 카델은 식당에서 한차례 호들갑을 겪어 본 몸이었기에 차분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반면 예상치 못한 과한 환대를 맞닥뜨린 가르엘은 양옆으로 척척 쌓여 가는 큼직한 술통을 보며 얼을 빼고 있었다.

“자자, 저희 가게에서 제일 좋은 술로 대접해 드리리다. 전부 공짜이니 걱정 말고 즐겨 주십쇼!”

“어…….”

“안주도 기깔나게 만들어 드릴 테니까, 속 버릴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기 안주가 정말 맛있습니다, 기사님! 10년 단골인 이 마티스가 보장하죠!”

어느새 두 남자의 주변으로 옹기종기 모여든 주민들이 거리낌 없는 관심을 쏟아부었다. 상대가 제국의 정예 기사단이니 거리감을 느낄 법도 하건만. 술기운으로 무장한 인간들에겐 평소엔 낼 수 없던 용기가 가득 들어찼다. 그들이 내뿜는 순박한 친밀감에, 굳어 있던 가르엘도 헛웃음을 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제가 술을 좋아한다지만, 이 많은 걸 다 마시긴 힘들거든요. 다들 한 잔씩 하시죠.”

“역시 제국의 기사님이셔. 너그럽기가 이루 말할 데 없군! 들었지, 모티? 기사님이 우리도 함께 마시라고 하셨다고!”

“그래, 그래! 우리가 언제 또 기사님들이랑 어울리겠어? 마음껏 마셔!”

과도한 친절에 잠시 주춤하긴 했으나, 가르엘은 태생적으로 붙임성이 좋은 사내였다. 상대가 먼저 벽을 허물자, 그도 거침없이 사람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크하! 역시 기사님은 주량도 범상치가 않으시네. 이게 영웅의 기개라는 건가?”

“뭐, 그런 편이죠. 그러는 마티스 씨도 만만치 않으신데요?”

“제 음주 경력이 자그마치 20년입니다, 20년!”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신나는 음악, 넘쳐나는 술친구와 그보다도 많은 양의 술. 모든 것이 가르엘의 마음에 쏙 들었는지, 그에게선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카델은 한껏 즐거워 보이는 가르엘의 얼굴을 응시하다, 입가에 장난기를 매단 채 그의 잔을 툭 건드렸다.

“음?”

“나랑 놀자고 데려왔더니 혼자서 아주 신났네?”

“이런, 질투하는 건가요? 단장님의 질투라니, 너무 달아서 안주가 따로 필요 없겠어요.”

“웃기고 있네.”

“조금만 기다려 줘요. 다 쓰러뜨리고 올 테니까.”

쓰러뜨리다니. 난데없이 술집에서 힘겨루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떠오른 의아함은 얼마 가지 못해 해소되었다.

가르엘이 택한 것은 힘겨루기가 아닌 주량 겨루기였다. 그는 손님 한 명, 한 명과 대작하며 술 내기를 해 댔고, 자동 숙취가 되는 몸을 무기로 점장을 포함한 주점의 모든 이들을 녹다운 시키는 데 성공했다. 지켜보는 사람이 질릴 만큼 화려하게도 마셔 대서, 기다리는 게 지루할 틈도 없었다.

카델은 가게 곳곳에 널브러진 사람들을 훑어보며 혀를 내둘렀다.

“넌 진짜……. 이걸 뭐라고 해야 해. 술고래? 술 먹는 하마?”

“타고난 주당이라고 해 주세요.”

“……그래. 대단하다.”

사방에서 술 냄새가 진동을 하니 되레 술맛이 떨어졌다. 카델은 조금씩 홀짝이던 잔을 내려 두고 가르엘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과음을 하긴 한 건지, 평소보다 얼굴이 발그레했다.

“기분 좋아 보이네.”

“술자리는 언제나 절 즐겁게 하니까요.”

“너처럼 즐겁게 술 마시는 사람도 드물 거야.”

“……고마워요, 단장님.”

“뭐가?”

“덕분에 개운해졌습니다. 쓸데없는 걱정도, 자괴감도, 불안도……. 덕분에 잊을 수 있었어요.”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댄 가르엘이 나른하게 목을 꺾었다. 오랜만에 미친 듯이 술을 마셔 댄 탓인지 정신이 흐려지는 것도 같았다. 긴 날숨과 함께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귓가로 카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그거면 됐어.”

천천히 시선을 내리자 평온하게 풀어진 얼굴이 비쳤다.

“내가 일일이 네 걱정거리를 찾아내서 전부 해결해 줄 순 없겠지. 하지만 나는 네가 좋아하는 것들이 뭔지 알아. 힘들다고 느껴질 때면 언제든 말해. 너의 하루를 온통 행복으로 채워 줄게.”

“……그럼 우리 단장님의 하루는 어떻게 해야 행복으로 채워질까.”

“난 이미 채워졌어. 매일매일 채워져 있어.”

그래서 항상 행복해.

살포시 웃으며 말하는 카델의 얼굴은, 그가 아는 모든 것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웠기에. 가르엘은 취기인지 사랑인지 모를 것으로 몽롱해진 머릿속 깊이, 그의 잔잔한 미소를 새겨 넣었다.

“오늘을 영원히 잊지 못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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