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젠의 검은 눈동자가 급박하게 사위를 훑었다. 그의 눈짓은 뭔가를 탐색하는 듯도, 정신이 혼미해 아무 곳이나 분별없이 쳐다보는 듯도 했다.
그의 뒤로는 갈수록 수가 늘어나는 고블린 무리가 맹렬한 추격을 이어 가고 있었다. 놈들을 꼬리에 달고, 요젠은 당장 지쳐 쓰러질 것처럼 힘겹게 다리를 놀렸다.
금방이라도 따라잡혀 고블린 무리의 먹이가 될 것 같은 아찔한 상황이었다. 이곳에서 살아남았기에 요젠이 자신과 만났으리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카델은 터질 것 같은 불안감을 억누르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시선을 한 곳으로 고정한 요젠이 휙 방향을 꺾었다. 수풀이 우거진 샛길이었다. 가시덤불이 드러난 살갗을 사정없이 할퀴어 댔지만, 요젠에겐 고통을 인지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수풀을 빠져나온 요젠은, 곧장 한 그루의 나무 앞으로 달려갔다.
“데려왔어요, 단장님! 살려 주세요!”
공포로 갈라진 절박한 외침이 숲을 울렸다. 카델은 요젠의 입 밖으로 나온 호칭에 반사적으로 주춤했다. 하지만 그가 애타게 찾는 ‘단장님’은 자신이 아니었다.
‘램프……. 여기에 그 미친놈이 있다고?’
요젠은 처음부터 이 나무를 목적으로 한 것처럼 막힘없이 달려왔다. 하지만 정작 도착한 나무 근처에는 램프는커녕 그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비치지 않았다.
혹시 너무 두려운 나머지 헛것을 봤나. 도주를 포기하고 아무 데서나 살려 달라 호소 중인 것일지도 모른다. 걱정하며 요젠을 돌아본 카델은, 곧 그가 나무의 위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빠르게 시야를 이동한 카델이 램프를 찾아냈다. 그는 두꺼운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고블린 무리에게 포위당한 요젠을 응시하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이 새끼야. 빨리 안 내려가?’
카델은 당장이라도 램프의 멱을 딸 기세로 살벌하게 독촉했으나, 당연하게도 소용은 없었다. 요젠을 보는 램프의 표정은 살기가 느껴질 만큼 차게 식어 있었다. 이유 모를 적의마저 느껴졌다.
“소름 끼치는 새끼.”
나지막이 읊조린 그가 짜증스레 혀를 차며 걸터앉은 나뭇가지를 단단히 붙들었다. 램프는 애초에 요젠을 도울 생각이 아예 없는 것 같았다. 분개하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델은, 곧 램프가 보인 태도의 원인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요젠은 이 자식이 나무에 올라가 있다는 걸 아는 것처럼 바로 달려왔어. 요젠의 시점에선 보일 수가 없는 위치였을 텐데도.’
어쩌면 그것은 요젠의 타고난 재능 덕일 수도 있었다. 기척과 관련된 그의 능력은 꾸준한 노력만으로 얻어질 수준이 아니다. 타고난 재능 없이는 도달할 수 없는 경지. 그 재능이 요젠의 어린 시절부터 싹을 틔운 것이다.
‘그래. 단순 행운으로 지금껏 이 말도 안 되는 미끼 역할을 해냈을 리가 없지.’
또한 램프는, 요젠의 미래를 알지 못함에도 그가 가진 천재적인 재능을 감지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그의 재능을 위협으로 느낀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린애잖아. 구해 주지 않을 거야? 설마 이대로 내버려 두려는 건 아니지?’
본인들 배를 불리기 위해 아이를 사지로 몰아 놓고는, 최소한의 도리조차 지키지 않겠다니. 카델은 타들어 가는 속을 끌어안고 램프를 지켜보다, 다시 요젠에게로 시야를 돌렸다.
요젠은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나무 기둥에 바짝 붙어 섰다. 램프를 부르는 일도 포기했는지 그저 기도하듯 살려 달라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런 요젠의 주위로 몰려든 고블린들이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냈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요젠을 물어뜯을 듯 흉흉한 살기를 뿜었으나, 아이의 공포심을 즐기는지 아주 조금씩 거리를 좁혀들었다.
보기만 해도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 당사자인 요젠이 느끼고 있을 공포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제발…….’
이곳에서 카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누군가 그를 구해 주길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그 ‘누군가’가 쓰레기 같은 용병들일지라도.
그리고 궁지에 몰린 요젠이 다가온 죽음에 순응하듯 질끈 눈을 감은 순간.
“잡아!”
여태껏 요젠의 위험을 방관하던 램프가 신호탄을 쏘며 나무 아래로 착지했다. 그가 날린 신호에 풀숲과 나무, 바위 뒤에 숨어 있던 용병들이 단숨에 튀어나와 고블린들을 에워쌌다.
순식간에 역으로 포위당한 고블린들이 날 선 비명과 함께 무기를 치켜들었다. 요젠은 용병들의 모습에 긴장이 풀린 듯 힘없이 주저앉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죽여! 한 마리도 놓치지 마!”
용병과 마물의 전투엔 여유가 없었다. 서로에게 무기를 휘두르기도 바쁜 와중에 찬밥 신세였던 어린아이를 보호해 줄 틈이 있을 리가.
요젠은 제 머리 위로 날아드는 도끼를 피해 납작 엎드리고는, 싸움터 바깥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엉금엉금 기어가는 요젠의 살갗으로 흙과 돌이 쓸리며 상처를 냈다. 그는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용을 썼다. 그러나 그가 싸움터를 빠져나가기 직전.
“어딜 가, 이 새끼야.”
근처에서 고블린을 처치하던 램프가 요젠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도끼를 들지 않은 손으로 요젠을 덜렁 들어 올린 그가 피가 튀어 살벌해진 낯으로 요젠을 노려보았다. 요젠은 떨리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무, 무서워서…….”
“너 뭐 하는 새끼야.”
“네……?”
“내가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응?”
램프는 마치 해충을 보듯 오만상을 찌푸리며 요젠을 훑었다. 적의로 가득한 폭력적인 시선을 마주한 요젠은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 그냥요……. 소리가 들려서…….”
“무슨 개소리야! 일부러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갔어. 가장 높은 나무를 타서 숨소리도 죽이고 있었다고. 그런데 그렇게 단박에 날 찾아내? 말이 돼? 이 괴물 새끼, 좋은 말 할 때 무슨 수작을 부린 건지 불어.”
“드, 들린 거예요. 그냥 들린 거예요, 단장……!”
램프는 요젠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으며 그를 거칠게 흔들었다. 제가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몰아붙일 기세였다.
“제대로 말 안 하면 여기서 죽여 버릴 거야. 너같이 소름 끼치는 새끼를 내 용병단에 머무르게 할 생각은 없으니까.”
“정말이에요! 제발요!”
그는 상처투성이의 아이에게 일말의 자비도 비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는 이기심만이 존재했다. 변명할 여지 없는 최악의 쓰레기였다.
램프는 살려 달라며 비는 요젠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그러고는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을 부라리며 도끼를 치켜들었다.
“네깟 거 없이도 사냥은 할 수 있어. 네놈이 자라면 뭐가 될 줄 알고 내 부하들 틈에 끼워 키우겠어? 계속 입 다물고 있을 거라면 나도 널 살려 둘 이유가 없지.”
램프는 진심으로 요젠을 해치우려 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도끼를 휘둘렀고, 요젠은 힘 풀린 몸을 버둥거리며 비명을 질렀으며, 카델은 차마 그 모습을 지켜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램프! 뭐 하는 거야!”
그새 고블린을 전부 해치운 사이론이 달려와 그의 공격을 막았다. 사이론이 기겁하며 도끼를 쳐 내자, 램프가 격양된 목소리로 성질을 부렸다.
“비켜! 지금 죽여 버려야겠어.”
“미쳤어? 요젠 덕분에 사냥을 성공시켜 놓고 지금 죽이겠다고?”
“내 감이야. 이대로 두면 저 새끼는 괴물이 돼. 우릴 위험에 빠뜨릴 거다.”
“요젠이 없으면 사냥이 얼마나 힘들어질지 알잖아!”
사이론은 요젠의 목숨을 구했으나, 그 이유는 오로지 용병단의 득실에 있었다. 그는 그저 미끼로서의 요젠이 활용도가 높기 때문에. 그가 있으면 사냥이 수월해지고, 돈을 벌기 쉽기 때문에 살려 두려는 것뿐이었다.
요젠에게 미끼로서의 가치가 없어진다면, 사이론 또한 더 이상 램프로부터 그를 지켜 주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은 고작 며칠간 용병단을 지켜본 카델조차 알 수 있었으므로, 평생 주변의 눈치를 보고 자란 요젠이 깨닫지 못할 리 없었다.
요젠은 숨을 헐떡이며 두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고, 공황에 빠진 눈을 몇 차례 깜빡였다. 서로 밀어 내고 당기며 옥신각신하는 그들에게선 핏물을 뒤집어쓴 요젠보다도 역겨운 악취가 풍겼다.
이곳에 있다가는 죽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 사실을 깨달은 요젠이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한 가지뿐이었다.
“저……! 젠장, 비켜! 저 새끼가 도망가잖아!”
“제발 좀 참아! 어차피 갈 데도 없는 애야. 알아서 돌아올 거라고!”
요젠은 고블린의 추격을 피할 때보다도 성급하고 간절하게 내달렸다. 목적지도 없고, 도망친 뒤에 무엇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없다. 다만 코앞의 지옥에서 벗어나고자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다.
요젠은 산비탈을 타고 끊임없이 내달렸다. 어디서 나온 체력인지, 한 번 쉬는 법도 없었다. 그렇게 완전히 날이 저물고, 발밑도 제대로 보이지 않아 한 걸음 떼기가 조심스러운 밤이 되었을 때.
그의 앞으로 또 한 명의 어른이 나타났다.
“꼬마야, 이 시간에 왜 여기……. 길을 잃었니? 부모님은?”
요젠의 앞에 나타난 이는 중키에 서글서글한 인상을 가진 젊은 남자였다. 그는 발광석을 끼운 등불을 들어 요젠을 비췄다. 은은한 불빛을 따라 피와 잎사귀가 엉망으로 엉겨 붙은 처참한 모습이 드러났다. 그에 남자는 경악에 찬 숨을 뱉으며 한 발짝 다가섰다.
“괘, 괜찮니? 많이 다친 거야? 어디서 구르기라도 한……. 잠깐! 어딜 가려는 거야!”
그러나 누군가의 관심을 덤덤히 받아 내기에, 요젠은 너무도 예민해진 상태였다. 그에게 있어 어른이란 자신을 보호해 주는 대상이 아닌, 언제든 저를 이용하고 죽여 버릴 수 있는 공포의 대상.
남자는 겁에 질려 도망가는 요젠을 쫓기 시작했다. 오래도록 미끼 역할을 수행해 온 요젠의 달리기 실력은 상당했다. 하지만 요젠은 이미 긴 시간을 달려온 상태였고, 밤길이 어두워 낮처럼 마음대로 길을 찾을 수도 없었다.
반면 남자는 등불을 통해 시야를 밝히며 제법 빠른 속도로 요젠과의 거리를 좁혀 왔다. 손만 뻗으면 언제든 요젠을 낚아챌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 그럼에도 남자는 요젠을 억지로 붙드는 대신, 자신의 무해함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널 해치려는 게 아니야! 다친 것 같으니 치료를 받자는 거지! 근처에 내 집이 있어. 오늘은 밤이 깊었으니 그곳에서 쉬고, 날이 밝는 대로 부모님을 찾아가자. 도와줄게, 꼬마야.”
어떻게든 아이가 겁먹지 않도록 조심해서 말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진심이 요젠에게도 통했는지, 이를 악물고 달리던 요젠의 눈빛이 작게 떨렸다. 두려움에 굳은 얼굴로 망설임이 스쳤으나, 오래 가진 않았다.
“도와줘도 난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요!”
“뭐?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아니, 꼬마야, 그만 좀 달리고……!”
질주하며 말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큰 체력을 소모했다. 턱 끝까지 숨이 차오른 남자는 설득을 포기하고 요젠을 잡아채는 일을 고민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정신없이 달려가던 요젠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이런, 꼬마야!”
퍽 소리가 날 만큼 세게 넘어졌음에도 요젠은 허겁지겁 몸부터 일으키려 했다. 그제야 요젠을 앞지른 남자가 몸을 잡고 직접 일으켜 주었다. 등불까지 내던진 그가 황급히 요젠의 상태를 살폈다. 지척에서 역한 피비린내가 진동함에도 신경 쓰는 기색은 없었다.
등불의 빛이 남자의 얼굴 위로 아른거렸다. 빛이 어루만지는 얼굴에선 가식이나 계산 없는 따뜻한 걱정만이 떠올랐다. 요젠이 살면서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전해 받지 못한 감정. 그랬기에 더욱 잘 알 수 있었다. 눈앞의 남자는, 그가 지금껏 만나 왔던 어른들과는 뭔가가 다르다.
악의 없는 행동에 요젠의 경계심도 조금씩 허물어졌다. 요젠은 남자의 이런저런 질문에 고갯짓으로만 대답하면서도, 더는 도망치려 하지 않았다. 대신 순순히 남자의 등에 업혀 산속에 있다는 그의 집으로 향했다.
*
남자의 이름은 앤디. 그의 집은 작지만 튼튼한 오두막이었다. 혼자 살고 있을 것이란 예상과는 달리, 그에게는 부인이 있었다.
“어머, 세상에! 괜찮니, 아가? 앤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그녀는 남편이 난데없이 데려온 어린아이의 상태가 몹시도 충격적인 듯했다. 그럴 만도 했다. 환한 조명 아래에 선 요젠은, 인간이라기보단 학대당한 어린 짐승의 모습에 가까웠으니.
그녀는 앤디에게 목욕물을 준비해 달라 부탁하고는, 요젠의 상처를 꼼꼼히 살폈다. 피가 굳은 탓에 살갗도 제대로 보이지 않아, 그녀의 표정은 갈수록 심각해지기만 했다.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요젠이 급격히 가라앉은 눈을 내리깔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전 괜찮아요.”
“……응?”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알아서 잘할 수 있어요. 귀찮게 안 할게요.”
“너…….”
꼭 학습된 것처럼 줄줄이 나오는 발언에 그녀의 눈이 작게 벌어졌다. 잠시 멍하게 요젠의 얼굴을 응시하던 그녀는, 이내 침착하게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름이 뭐니?”
“……요젠이요. 요젠 바르딕타.”
“좋아, 요젠. 내 이름은 헬레나야. 그리고 나는 피를 뒤집어쓴 아이를 돌보는 걸 조금도 귀찮다고 생각하지 않아. 내 반응이 널 무섭게 만들었다면 사과할게. 걱정이 돼서 그랬어.”
“……걱정.”
“그래. 그러니까 아픈 곳이 있다면 숨기지 말고 말하렴. 피가 눌어붙어서 상처를 확인하기가 힘들어. 다행히 이게 전부 네 피는 아닌 것 같지만.”
헬레나는 차분하게 요젠을 어르고 달랬다. 아이를 상대하는 것이 제법 익숙해 보였다.
‘괜찮은 사람 같아 보인다. ……다행이야.’
앤디와 헬레나에게선 별다른 낌새가 느껴지지 않았다. 적어도 아직까진 그랬다. 혹시 요젠이 크게 다치기라도 할까 봐 내내 전전긍긍했던 카델은, 새로운 인물들의 친절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요젠은 완전히 경계심을 거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호의를 거부하지도 않았다. 그는 목욕물을 준비했다는 앤디의 부름을 듣고 머뭇머뭇 욕실로 들어갔다.
요젠을 따라 들어갈까, 고민하던 카델은 결국 바깥에서 헬레나를 지켜보기로 했다. 아무리 어린 시절이라지만 홀딱 벗고 목욕하는 부하의 모습을 관람하는 건 어딘가 찜찜했다.
“수프를 만들어야 하나? 지금 만들기 시작하면 너무 늦을 텐데……. 어머, 재료가 이렇게 없다고?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시장에 다녀올걸!”
헬레나는 요젠에게 먹일 음식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좁은 부엌을 분주히 돌아다니며 재료를 찾고, 지친 아이를 위한 레시피를 떠올리려 머리를 쥐어짰다.
그렇게 그녀가 부드럽게 구운 채소 위에 녹인 치즈를 올리고 있을 무렵. 한바탕 목욕을 끝낸 앤디와 요젠이 나타났다.
환한 얼굴로 요젠을 돌아본 헬레나가 반사적으로 멈칫했다. 깨끗하게 피를 씻어 낸 아이의 얼굴 곳곳에 큰 멍이 번져 있었다. 더불어 온몸에 자리한 상처와 헐렁한 옷 아래로 드러난 앙상한 어깨까지. 그녀를 당혹스럽게 만들지 않는 부분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요젠이 기가 죽을 것을 염려해 빠르게 표정을 바꾸었다. 앤디와 짧게 시선을 맞춘 그녀가 준비한 음식을 내오며 살갑게 말을 붙였다.
“배고프지? 속이 불편할 수도 있으니까, 최대한 덜 자극적인 음식으로 준비해 봤어. 내일은 아침 일찍 시장에 다녀올 생각이니, 혹시 먹고 싶은 게 있다면 말하렴.”
“내일이요……?”
“그럼! 해가 뜨자마자 가 버릴 건 아니잖아? 배를 든든히 채워야지.”
내일까지 이곳에 머무를 수 있는 건가.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편안하게 지내도 되는 걸까. 나중에 뭔가를 요구한대도 거절할 명분은 없을 것이다.
우울한 걱정들이 요젠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게 빤히 들여다보였다. 그러나 헬레나는 쓸데없는 걱정은 말라는 듯 밝게 웃으며 요젠을 식탁 앞으로 끌어당겼다.
“오늘은 아무 생각 마. 잘 먹고 푹 자는 게 중요하니까. 자초지종은 내일 들어도 돼.”
다정한 말에 일일이 눈치를 보면서도, 요젠은 앞에 놓인 음식을 허겁지겁 해치웠다. 제대로 먹은 것도 없이 움직여 댔으니 허기가 심했을 테다. 헬레나와 앤디는 그런 요젠에게 제 몫의 식사까지 덜어 주었다. 식사를 마친 그에게 따뜻한 우유를 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보, 잠깐 이리 와요. 할 얘기가 있어요.”
헬레나는 요젠이 우유를 마실 동안 앤디를 불러냈다. 요젠에게 편안하게 있으라는 이야기를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헬레나가 앤디를 방으로 불러들인 뒤, 요젠은 눈에 띄게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컵을 쥔 손끝이 하얗게 질리고, 어깨가 잘게 떨렸다.
‘용병단처럼 자기를 이용하거나 해칠까 봐 두려워하는 거야.’
고작 몇 번의 배려로 일평생 받아 온 상처가 아무는 것은 불가능하다. 요젠은 두 어른이 사라진 방문을 힐끔거리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는 작은 기척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아이였다. 그러니 아무리 소리 죽여 대화한대도, 어느 정도는 내용을 알아들을 수 있으리라.
카델은 요젠이 듣고 있을 이야기를 함께 듣기 위해 두 남녀가 들어간 방으로 다가갔다. 문이 닫혀있어 내부는 들여다볼 수 없지만, 둘의 목소리는 들렸다.
“학대당한 게 틀림없어요. 겁을 먹고 도망친 걸 거라고요.”
“그냥 산에서 길을 잃은 것뿐일 수도 있어. 산속을 헤매다가 다친 거라면, 아이 부모님이 걱정하고 있을 거야.”
“정상적인 부모 아래서 자랐다면 보일 수 없는 반응들이었다고요! 게다가 어떤 아이가 핏물을 뒤집어쓰고 산을 헤매요? 뭔가 이상해요.”
“……그건 그렇지. 하지만 부모가 멀쩡히 살아 있는데도 데려다주지 않는 건 납치나 다름없어.”
“……일단 아이 부모는 찾아봐야겠죠. 대신 요젠의 의견을 우선시해요. 만약 아이가 돌아가는 걸 원치 않고, 아이의 가정이 위험한 환경이라고 판단된다면…….”
한참이나 뜸을 들이던 헬레나가 결심한 듯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보호해요, 앤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