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5화 (355/521)

그 손님의 얼굴을 본 순간, 카델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제프리 홀리벤?’

표독스럽게 올라간 눈꼬리와 짙은 고동색 머리. 요젠의 과거인 만큼 현재의 모습보단 훨씬 젊어 보였으나, 확실했다. 헬레나를 옆에 세워 둔 채 홍차를 홀짝이는 저 남자. 그는 분명 요젠의 오랜 타깃, 제프리 홀리벤이었다.

“헬레나……!”

“여, 여보.”

앤디는 하얗게 질린 헬레나의 모습을 보자마자 가져온 생선을 내던지며 그녀를 제 뒤로 끌어당겼다. 제프리를 내려 보는 시선에선 경계심과 희미한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누굽니까? 누구신데 말도 없이 남의 집에 불쑥 찾아온 거죠?”

제프리는 찻잔에서 입을 떼지 않은 채 앤디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생기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시체 같은 눈빛에 앤디가 눈썹을 꿈틀했다. 함께 눈치를 보던 헬레나는 틈이 생기자마자 급히 몸을 돌려 요젠에게 달려갔다.

“요젠,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렴.”

“네……?”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금방 끝날 거야.”

헬레나는 어리둥절하게 굳어 있는 요젠의 등을 떠밀었다. 하지만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요젠은 머뭇거리며 떠나지 않으려 했다. 그는 파리한 안색의 헬레나와 굳은 표정의 앤디, 그리고 비소를 머금은 채 마시던 잔을 내려놓는 정체불명의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내가 누구일 것 같소?”

“……가문에서 보낸 사람이겠지.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없을 겁니다. 저는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이곳에서 헬레나와 함께 여생을 보내는 게 제가 원하는 삶이니까요. 유산도 필요 없습니다. 가문의 것은 하나도 탐내지 않을 테니, 가족들에겐 저 같은 장남은 없는 셈 치고 살아가라 전하십쇼.”

“흐음…….”

제프리는 흥미롭다는 듯 매끈한 턱을 문질렀다. 이 일련의 상황 속에서, 카델은 어렴풋하게나마 앤디와 헬레나의 과거를 짐작할 수 있었다.

‘가문에서 반대하는 사랑을 이루기 위해 도망쳤던 건가? 이런 상황을 한두 번 겪은 게 아닌가 본데……. 제법 유명한 가문인가 봐. 루멘 쪽 집안처럼 장남에 집착하는 분위기인 것 같기도 하고.’

앤디에게서 귀족가 자제의 품위 같은 것을 느낀 적은 없었으므로, 카델로서는 꽤나 의외인 사실이었다.

“헬레나……. 저 여자의 이름이 헬레나인가?”

“그게 중요합니까?”

“아시다시피 나는 의뢰를 받고 왔소. 두 개의 의뢰지.”

“……두 개?”

“당신의 아버지, 카인 제이스틱의 몸 상태가 좋지 않소.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임종이 코앞이지.”

덤덤한 제프리의 음성에 요젠을 억지로 밀어 내려던 헬레나가 멈칫했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그녀는 자신을 향한 요젠의 불안한 시선을 인지하고서야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어서 나가렴, 요젠. 네가 들을 만한 이야기가 아니야.”

제법 단호한 어투에 요젠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문밖으로 걸어갔다. 요젠을 밖으로 밀어 낸 헬레나는 곧장 문을 닫고 걸어 잠갔다. 카델은 요젠이 문을 나서기 직전, 마음을 바꿔 앤디와 헬레나가 있는 집 안에 남았다. 요젠의 시점을 따라가면 밀폐된 공간을 들여다보기 힘들어진다.

헬레나는 축축하게 젖은 손바닥을 치맛자락 위에 문질렀다.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은 그녀가 뒤를 돌자, 식탁을 짚고 힘 빠진 몸을 지탱하는 앤디의 모습이 보였다. 제프리는 그런 앤디의 반응이 즐겁다는 듯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제이스틱 백작은 꼭 당신이 가문을 잇기를 바라더군. 내 의뢰인은 앤디 제이스틱, 당신이 집으로 돌아와 가문을 다스리겠노라 공표하길 바라오.”

“……그럴 순 없습니다.”

“다 죽어 가는 아비의 마지막 부탁인데도 말이오?”

그 물음에는 앤디도 침묵했다. 그와 아버지의 관계가 어땠는지는 몰라도, 앤디는 유언과도 다름없는 아버지의 마지막 부탁을 단칼에 거절할 만큼 매정하지 못했다. 그것은 누구보다 앤디를 사랑하는 헬레나가 가장 잘 알았다.

그녀는 앤디에게로 다가와 식탁을 짚은 그의 손등을 감쌌다. 그러고는 앤디의 떨리는 시선을 묵묵히 마주 보았다.

“저는 괜찮아요.”

“헬레나.”

“당신과 함께하면서 넘치도록 행복한 시간을 보냈어요. 당신 덕분에 요젠도 만날 수 있었고요. 그러니…… 이젠 가도 돼요.”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나더러 당신을 버리고 가문으로 돌아가라고? 가서 새로운 부인이라도 맞으라는 거야?”

“오늘을 넘기면 당신은 분명 후회할 거예요.”

“가문으로 돌아가도 마찬가지야! 난 평생을 당신의 존재만 그리다 말라 죽어 가겠지. 난 당신 없인 못 살아, 헬레나.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지 못하더라도 나는……. 나는 절대 당신 곁을 떠나지 않을 거야.”

헬레나는 앤디의 미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 했다. 하지만 앤디는 단박에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고, 헬레나 역시 자신을 버리고 떠나라는 말을 두 번씩이나 뱉어 내진 못했다.

그들의 사랑은 열렬했고, 맹목적이었다. 하지만 제프리의 눈에는 그저 우스운 사랑놀이로 비치는 듯했다.

“이렇게 나올 줄 알았소. 백작도 예상하셨지. 여자 하나를 위해 모든 걸 버리고 산속에 은둔한 녀석인데, 아비 목숨을 인질로 삼는다고 순순히 돌아올 리가 없다더군.”

제프리의 웃음소리는 낮고 음침해 드는 것만으로도 불쾌해지는 구석이 있었다. 앤디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제프리를 주시하며 미간을 좁혔다.

“알았다면 포기하고 돌아가세요.”

“……아니, 아니. 그럴 수는 없지. 말하지 않았소. 의뢰를 받고 온 몸이라고.”

“날 납치라도 할 생각입니까?”

“글쎄. 납치해서 가문에 데려다 놓는다 한들, 다시 헬레나를 쫓아 달아나지 않겠소. 그렇다고 제이스틱 백작이 이 여자를 며느리로 맞이하겠다 할 리도 없고. 납치는 쓸모가 없지.”

“그럼…….”

“마침 좋은 생각이 났소.”

이죽거리는 얼굴이 헬레나에게로 조금씩 가까워졌다. 앤디는 헬레나를 보호하듯 앞을 가로막고 섰으나, 제프리는 손쉽게 그를 떨쳐 냈다.

“잠깐……!”

그러고는 놀란 헬레나의 목을 낚아채 반대편 벽까지 끌고 갔다.

“꺄아악!”

“헤, 헬레나! 당신 미쳤어? 뭐 하는 거야, 지금!”

제프리는 헬레나를 벽에 고정하고, 뒤에서 달려오는 앤디의 안면을 팔꿈치로 가격했다. 코를 움켜쥔 채 쓰러진 앤디를 일별한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 여자만 없으면 당신에겐 도망칠 곳도, 돌아갈 곳도 없어지지. 가문의 일에만 집중할 수 있을 거요.”

“미친 자식……! 손끝 하나라도 댔단 봐!”

“약점을 빤히 드러내 놓고는 찌르지 말라며 을러 대는 꼴이라니. 그게 들어먹히겠소?”

헬레나는 버둥거리며 제프리를 밀어 내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앤디의 발악도 마찬가지였다. 그 사랑스러운 부부가 서로를 위해 뭔가를 해 보기도 전. 제프리는 소리 소문 없이 꺼내 든 단검을 헬레나의 명치에 쑤셔 박았다.

“뭐……!”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이었다. 제프리의 손속에는 자비가 없었고, 그의 의뢰 수행 능력은 뛰어났다. 짧은 시간 안에 모든 판단을 끝마친 그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죄 없는 여자를 죽였다.

제프리는 무력하게 꿈틀거리는 헬레나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찢어지는 비명이 이어지며, 다급하게 헬레나를 끌어안은 앤디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떨리는 손이 엉성하게 상처를 지혈했으나, 헬레나의 얼굴에선 빠르게 핏기가 가시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헬레나……. 제발…….”

너무도 허무한 죽음이었다. 앤디의 품에서 몇 차례 희미한 호흡을 이어 가던 그녀는, 짧은 유언조차 남기지 못한 채 그대로 절명했다.

카델은 그 모든 장면을 멍하니 지켜보기만 했다. 다정하게 요젠을 보듬어 주던, 소박한 삶의 유지를 위해 최선을 다하던 여자였다. 이런 곳에서 누군가의 욕심 탓에 허망하게 죽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피해자였고, 이 일방적인 탐욕의 현장에 일순 구역질이 치밀었다.

“헬레나……. 눈 좀 떠 봐요…….”

앤디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제 품에서 서서히 식어 가는 부인의 육신을 놓지 못하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깨어나라는 말만을 반복했다.

그러는 동안 제프리는 태연하게 식탁보를 끌어 단검에 묻은 피를 닦아 냈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던 그가 여유로운 걸음으로 집 밖을 나섰다. 누군가를 찾듯 두리번거리던 그는 이내 어느 방향을 향해 척척 나아가기 시작했다.

“여기 있었구나, 꼬마야.”

그가 찾아낸 이는 요젠이었다. 요젠은 오두막과 떨어진 어느 나무 아래서 할 일 없이 땅에 난 풀을 뜯어내고 있었다. 무료함에 젖어 있던 요젠의 표정 위로 선명한 거부감이 떠올랐다. 그의 시야에 담긴 것은 제프리의 얼굴이 아닌, 그의 셔츠 자락에 튄 선명한 핏자국.

“볼일이 끝났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지.”

“…….”

“협조해. 쓸데없이 힘 빼는 건 딱 질색이야.”

요젠은 본능적으로 뭔가 위험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감지했다. 제프리에게서 나는 피 냄새와 미처 숨기지 못한 살기, 묘한 고양감. 빠르게 일어난 요젠이 제 허리춤으로 손을 뻗었다. 단검으로 제프리를 상대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왜 한번 말하면 좋게 들어먹질 않는지.”

아무리 요젠이 암살에 필요한 천부적인 재능을 갖췄다 한들. 그는 아직 사람을 죽여 본 적 없는 일반인에 불과했다. 단숨에 급소를 가격당한 요젠의 눈이 까뒤집히며, 몸이 기울었다. 제프리는 요젠이 기어코 땅에 얼굴을 박고 쓰러진 뒤에야 그를 짐승처럼 들어 다시 오두막을 향했다.

쓰러진 요젠을 챙겨 다시 나타난 제프리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앤디를 협박하는 것이었다. 그는 앤디의 안식처인 헬레나를 죽이고, 유일하게 남은 가족인 요젠의 목숨을 들먹이며 그가 가문으로 복귀하도록 강요했다.

앤디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지저분한 혹 덩이를 달고 오긴 했다만……. 그래도 기쁘구나. 이제 마음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겠어.”

요젠은 수척해진 앤디의 옆에서 침대에 누운 늙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지금껏 요젠이 만나온 모든 사람을 통틀어 가장 값비싼 것에 둘러싸여 있었으나, 그에게선 죽음을 코앞에 둔 자만의 지독한 악취가 풍겼다.

“나를 원망하진 말거라, 앤디. 망자의 앞길에 원망을 뿌리지 마. 전부 널 위한 일이었다는 걸 잊지 말아다오.”

가문으로 복귀한 후, 앤디는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가족들의 환대, 그 틈에 섞인 의심과 시기, 한심하다는 듯한 시선까지도 모조리 무시했다. 아주 가끔, 자신을 올려 보는 요젠의 머리를 말없이 쓰다듬어 줄 뿐이었다.

요젠은 헬레나의 죽음을 목격하지 못한 채 곧장 가문으로 끌려왔으므로, 여전히 헬레나가 죽었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했다. 그랬기에 그는 울지 않았다. 다만 제프리 홀리벤. 그 젊은 남자가 그들의 행복했던 시간을 모조리 망가뜨렸다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제가 없앨게요. 아주머니를 죽인 그 남자.”

어느 적막한 밤, 앤디의 침실을 찾은 요젠은 그리 말했다. 한순간에 바뀐 환경과 떨쳐 낼 수 없는 괄시의 시선, 완전히 달라진 앤디의 태도. 그 모든 것이 요젠의 하루하루를 숨막히게 만들었다. 짧은 행복을 맛봤던 아이는 어떻게든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 칼을 들었다.

그리고 그의 필사적인 의지는, 멈춰 있던 앤디의 시간을 움직였다.

“그럴 수는 없어.”

그는 말라붙은 입술을 떼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경직된 요젠의 어깨를 당겨 끌어안고, 분해하는 아이의 등을 두드렸다.

“왜요? 강해질게요, 저. 그 남자를 죽일 만큼 강해지면 되잖아요.”

“안 된다.”

“왜냐고요!”

요젠은 앤디를 거칠게 밀쳐 내며 씩씩거렸다.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던 거칠고 격양된 모습이었다. 요젠의 눈에서 조금씩 눈물이 차올랐다. 조용히 그 서러운 얼굴을 응시하던 앤디가 서글픈 미소와 함께 말했다.

“그 남자를 죽이면, 너는 행복해질 수 없으니까.”

“그 남자를 죽여야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어요.”

“사람을 죽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요젠. 넌 많은 것을 잃게 될 거야. 나는 네가 피로 물든 삶을 살길 원치 않는다. 넌 누군가의 악의로 피를 뒤집어쓴 채 산길을 헤맸지만, 그 악의를 이어 갈 필요는 없어.”

“……그럼 아저씨는 그 남자를 용서할 거예요? 아주머니를 죽였잖아요. 헬레나를 죽였잖아요!”

“나의 용서로 네가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앤디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얼굴을 푹 수그리더니, 자신을 밀쳐 낸 요젠을 다시 끌어당겨 안았다.

“나는 용서할 거다. 네가 나의 증오를 이어 가지 않도록, 전부 품고 갈 거야. 그러니 요젠. 사람을 미워하지 마. 네가 알아야 할 감정은 사랑만으로 충분해.”

사랑. 그것만을 소중하게 지키기에, 요젠에게 주어졌던 행복의 시간은 너무도 짧았다. 행복은 언제나 그와 가장 먼 곳에 있었고, 손끝에 닿았다 싶으면 언제 가까이 있었냐는 듯 저 멀리 달아났다.

그런 요젠에게도 겨우 사랑이란 감정을 알려 줄 사람이 나타났지만, 그 또한 찰나였다. 요젠에겐 여전히 사랑이 허락되지 않았다.

“왜 또 내 앞에 나타난 겁니까.”

앤디가 가문으로 복귀하고 정확히 한 달 뒤. 그의 아버지 카인 제이스틱은 세상을 떠났다. 예정대로라면 장남인 앤디가 가문을 물려받아 영지를 다스리게 될 터였다. 그러나 카인의 장례식을 마친 늦은 밤.

“말했지 않소. 내게는 두 개의 의뢰가 있다고.”

그의 앞에 제프리가 찾아왔다. 앤디의 침대맡에 자리를 잡고 앉은 그가 단검을 허공에 던졌다 받기를 반복했다.

“하나는 제이스틱 백작의 의뢰지. 알다시피 당신을 가문으로 복귀시키라는 의뢰였소. 보상이 아주 두둑했어. 다른 하나는 뭘 것 같소?”

“…….”

“당신 남동생의 의뢰요. 아비가 형을 불러들여 가문을 잇게 할 것 같으니, 그 전에 죽여 달라지 뭐요. 가문의 주인은 일평생 집안에 헌신해 온 자신이 되어야 한다며…….”

제프리의 말을 들은 앤디의 표정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그는 가족이 자신을 해치리라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없는 듯, 남동생이 제프리에게 의뢰를 넣었다는 사실에 큰 동요를 드러냈다.

“나야 뭐, 일개 살인 청부업자가 아니오. 돈 많이 주는 의뢰를 가려 받을 필요는 없지. 마침 첫 번째 의뢰인의 목숨이 간당간당해 보이니, 타이밍만 잘 맞추면 큰돈을 벌어들일 수 있을 것 같더군. 그리고 내 생각이 맞았어.”

“……날 살려 주면 동생이 말한 액수의 두 배를 주겠어.”

“나쁘지 않군. 대신 당신의 남동생이 죽게 될 텐데 괜찮겠소?”

“뭐?”

“이런 업계일수록 배신의 대가는 혹독하오. 의뢰를 포기하고 타깃이었던 자에게 붙으려면, 처음 의뢰인을 처리해 이름값이 떨어지는 걸 막아야 하지.”

“그게 무슨…….”

“어차피 당신을 죽이려 한 동생 아니오. 그런 놈을 죽인다고 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낄 것 같진 않은데.”

제프리의 말은 잔혹했으나, 어찌 보면 타당했다. 형을 죽이려 한 동생이다. 여기서 앤디가 살아남는다 한들, 동생이 있다면 언제든 목숨의 위협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앤디는 그 쉬운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내 의뢰도 받아 주겠습니까?”

“……의뢰?”

“남동생의 의뢰를 성공하게 해 줄 테니, 바깥의 저 아이는 건들지 마세요. 누구의 의뢰를 받는대도, 저 아이만큼은 지켜 줘야 합니다.”

속삭임에 가까운 앤디의 음성에 제프리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작게 열린 문틈 너머를 향했다. 그곳엔 벽에 몸을 붙인 채 언제든 달려 나갈 기세로 귀를 기울이는 요젠이 있었다.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제프리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앤디의 제안을 승낙했다.

“돈이나 문서, 뭐든 받소. 지급하는 즉시 의뢰를 처리해 드리지.”

앤디는 부러 밝게 웃으며 행동했다. 바깥에 있을 요젠이 자신들의 기류에 혼란스러워하며 섣불리 행동하지 못하도록.

그는 제프리에게 영지의 일부를 넘기겠다는 문서를 작성했다. 제프리가 계약서를 꼼꼼히 정독하는 동안, 텅 빈 눈으로 창밖의 밤하늘을 응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제프리가 계약서에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즉시.

“아저씨!”

앤디는 헬레나처럼 급소를 찔렸고, 앤디의 의도대로 섣불리 나서지 못하던 요젠이 다급하게 문을 박차고 들어섰다.

요젠은 쓰러진 앤디를 돌보지 않았다. 그는 단검을 치켜든 채 곧장 제프리에게로 달려들었다. 요젠의 눈빛에선 그가 맛본 짧은 행복을 가차 없이 짓밟은 남자에 대한 복수심만이 가득했다.

요젠은 다른 아이보다 날쌨고, 기척을 감지하고 조절하는 데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압도적인 능력 차를 가진 어른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

“죽어! 죽어 버려!”

“……이래서 어린애가 싫다니까.”

제프리는 몹시도 간단하게 요젠을 제압했다. 벌게진 눈으로 발악하며 달려드는 아이의 손에서 단검을 빼앗고, 목덜미를 가격해 기절시켰다.

요젠은 헬레나의 죽음 앞에서도, 앤디의 죽음 앞에서도 무력했다. 그의 곁에는 이제 아무도 남지 않았다. 빠르게 감기는 눈꺼풀 너머, 이미 시체가 된 앤디의 얼굴이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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