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도 안의 그 누구도 적의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했다. 하지만 딱 한 명. 요젠 바르딕타만은 달랐다. 그는 폐탄광에 들어선 순간부터 이곳에 기사단을 노리는 적이 있음을 감지했다.
앞을 보지 못하는 그에게 시각적인 요소는 쓸모가 없다. 기운과 기척. 그것만이 요젠이 사물을 구분하는 유일한 척도였고, 그렇기에 요젠에게 ‘볼 수 없는 존재’란 없었다.
‘……적은 하나인가. 움직임이 재빨라. 찰나의 폭발력만 따진다면, 루멘과 엇비슷한 속도다.’
요젠은 기사단과 거리를 유지한 채 적의 능력을 파악했다. 놈은 마족이었고, 공속과 이속이 모두 뛰어났으며, 파괴력 또한 상당했다.
조금씩 암기를 묻혀 생김새를 파악한 결과. 기묘할 정도로 얇은 몸, 갱도의 천장에 등을 대야 겨우 설 수 있을 만큼 큰 키, 천장에서부터 바닥까지 축 늘어진 여러 개의 팔을 가졌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카델의 말로는 투명화가 가능한 마족이라고 했지. 이 정도 적이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다면, 보통 인간이 상대하긴 힘들겠어.’
이미 그림자 기사단의 상당수는 죽거나 다친 듯했다. 빨리 수를 쓰지 않는다면 암담한 상황이 펼쳐질지도 모른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요젠은 무턱대고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마족의 위치와 움직임은 빤히 느껴진다. 하지만 기사들을 도우러 나선다는 선택지는 애초부터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돕고 싶지 않으니까.
그는 기사단의 목소리가 들릴 만큼의 거리를 유지하다, 그들이 행군을 멈춘 뒤엔 아예 암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도저히 모습을 드러낼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무리 위험한 적이래도 카델이 죽을 걱정은 없어.’
그에겐 뛰어난 단원과 적룡의 가호가 있다. 저깟 마족 하나에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 더 이상했다. 문제는 그림자 기사단에게 있었지만, 그쪽이야말로 요젠이 알 바는 아니었다.
그림자 기사단은 철저한 실력주의다. 그들은 단원의 과거가 어떻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신분과 실력. 그것이 갈취한 신분이든, 사람을 죽이며 쌓아 온 실력이든, 단장인 다스토 살라웰은 무관심으로 응수한다.
누군가는 그런 그림자 기사단을 사사로운 과거는 잊고 미래로 나아가는 진취적인 집단이라 평가할지 모른다. 하지만 요젠은 아니었다. 요젠에게 있어 그림자 기사단은 언젠가 한 번쯤 대대적으로 청소하고 싶은 이물질 덩어리에 불과했다.
그러니 이번만큼은, 카델이 부탁한대도 그들을 구하기 위해 힘을 쓰지 않을 작정이었다.
“좋아. 그럼 명령이야. 이번 작전이 끝나기 전까지 제프리를 죽이는 건 보류야.”
작전이 끝날 때까지 제프리를 죽이는 건 보류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더더욱 나설 마음이 없다. 오히려 저 마족을 응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림자 기사단이 열댓 명씩 죽어 나가는 동안, 저주스러운 제프리 홀리벤의 영혼은 여전히 이승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어차피 난 이해받지 못해.’
카델은 끝까지 자신의 선택과 행동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을 구하기 위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그처럼 밝고 눈부신 사내에게는 먼 나라의 일일 뿐이다. 입으로는 이해한다고 말할지 모르나,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과 같은 선택을 내리지 않으리라.
그러니…… 그래. 지금 자신은 카델의 명령에 토라져 먼발치에서 대기하고 있을 게 아니라, 이 혼란을 틈타 제프리를 제거해야 했다. 카델이 뭐라고 말을 하든, 영영 자신을 이해하지 못할 사람의 기분을 헤아리며 일평생 억눌러 왔던 분노를 다스릴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도 자신은 마족에게 제 오랜 복수를 대신 해 달라는, 터무니없는 소원을 빌고 있다. 카델에게 미움받지 않고, 제프리도 죽일 수 있는. 그야말로 허황된 꿈이었다.
“……뭘 하고 있는 거야, 나는.”
해야 하는 일이 뻔한데도 온 힘을 다해 회피하고 있다니. 자신답지 않았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카델과 조금이라도 관련된 일이면, 자신은 꼭 과거를 잊은 사람처럼 굴었다. 과거의 일을, 그때의 감정과 각오를. 모조리 내다 버린 것처럼 한없이 풀어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카델과 멀어져야 옳다. 그를 떨쳐 내고, 그의 인생을 응원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제 길을 떠나야 옳았다.
그러지 못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야.’
카델과 암살자로서의 삶을 저울질한다면, 당연히 후자였다. 악인을 처단하는 것이 유일한 삶의 목적으로, 그것이 없다면 자신은 살아갈 이유가 없다. 그러니 암살자로 살아가기 위해선 하루빨리 카델의 곁을 떠나야 한다. 필요한 것은 약간의 시간. 여태껏 카델과 함께하며 얻었던 불필요한 안정감을 떨쳐 낼 기간이 필요했다.
조금만 더 곁에 있다가, 조금만 더 그를 기억하다가. 짧은 추억을 기록한 채 본래의 삶으로 떠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요젠!”
갱도 깊숙한 곳에서부터, 익숙한 외침이 들려왔다.
*
예상보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모두에게 장막을 둘러 줬음에도 포트의 공격은 유효했다. 놈은 장막의 작은 빈틈을 찔러 왔고, 그것에 대응할 새도 없이 단숨에 기사들을 공격했다. 장막이 완충재 역할을 한 덕에 즉사는 면할 수 있었으나, 놈의 공격은 기사들을 조금씩 궁지로 몰아갔다.
육체적인 문제뿐만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적과의 전투는 그들의 정신력을 착실하게 좀먹어 갔다.
“도, 동쪽에 있습니다! 동쪽!”
“무슨 개소리야! 남쪽에서 부상자가 발생했다고!”
“하지만 여기서 소리가 들렸단 말입니다!”
혼란은 그림자 기사단에게 가장 먼저 찾아왔다. 그들은 많은 동료를 눈앞에서 잃었고, 오로지 카델의 장막과 마도구에 목숨을 의존해야 했다. 평생 상대의 기척을 감지하여 선제공격을 강행하고 기습을 일삼아 온 그들이다. 존재를 느낄 수 없는 상대의 끊임없는 습격은 타격이 컸다.
가장 평정을 유지해야 하는 때에, 그들은 단장인 다스토의 명령에도 쉬이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흐응, 머저리들이 따로 없네. 시끄러운데 그냥 다 죽어 버리면 안 되나.”
그런 그림자 기사단을 지켜보던 라이돈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들은 서로 등을 맞댄 채 둥글게 뭉쳐 있었으나, 포트의 공격은 아직까지 적린 기사단이 선 방면을 향하지 않았다. 때문에 이쪽은 제대로 된 반격도 해 보지 못하고 신출귀몰한 포트의 움직임을 전해 듣는 게 전부였다.
“조용히 해, 라이돈. 여기서 성질 긁으면 우리까지 피곤해져.”
“이미 충분히 피곤해졌는걸! 그냥 여길 통째로 얼려 버리면 안 돼? 투명하다고 형체가 없는 건 아니잖아. 얼려 버리면 뭐라도 보이지 않겠어?”
“그 정도 마법을 사용할 낌새가 보인다면 포트도 수를 쓸 거야. 괜히 자극했다간 더 위험해질 수 있어.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한, 공격은 불가능하다고 봐야지.”
“그 녀석이 눈치채기 전에 확 얼려 버려도?”
“그게 됐으면 내가 진작에 사방팔방 화염 방사를 하고 다녔겠지.”
투명 마족, 포트. 녀석이 [투명화] 상태에 돌입하면, 플레이어는 적을 타겟팅할 수 없게 된다. 모든 공격을 회피하는 것이다. 유효타는 놈의 [투명화] 버프를 해제해야만 가능한데, 그걸 위해서는 암살자 캐릭터가 필요했다. 그들이 가진 고유 기술을 통해서만 포트를 타겟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혹시나 했지만 주인공의 동료가 아니면 아무리 비슷한 포지션이래도 [투명화]를 해제할 수 없나 보군. 설마 단장인 다스토까지 고전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주인공인 카델 라이토스의 사람만이 위기를 개척할 수 있다는 걸까. 게임과는 다른 현실인 듯 굴면서도, 이런 때에는 고집스럽게 주인공 위주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요젠!”
그림자 기사단에게선 도움을 바라기 어려웠고, 반과 루멘, 가르엘, 라이돈만으로는 포트를 공략할 수 없다. 그에겐 요젠이 필요했다. 결론을 내린 카델이 큰 소리로 요젠의 이름을 외쳤다.
난데없는 부름에 그림자 기사단이 동요하는 게 느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연달아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런 때까지 숨어 있을 녀석은 아니야. 비록 어젯밤 이후로 목소리 하나 들려주지 않았지만……. 제발 부탁이다, 요젠.’
이젠 제프리나 다스토가 요젠의 정체를 알아내든 말든 상관없었다. 갱도에 시체의 산이 쌓이게 생겼는데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여차하면 가장 위험한 제프리의 눈에 암흑 마력을 뿌려 두면 된다.
그러나 간절한 외침에도 요젠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무런 반응 없는 처량한 부름에 카델은 물론 부하들과 다스토마저도 당혹감을 드러냈다.
“카델 경. 요젠이라는 자가 경의 부하라면, 이미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당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리 없습니다.”
“그런 게 아니라면 왜 나타나지 않는 겁니까?”
왜겠는가. 카델은 반사적으로 제프리를 노려보고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대장, 다스토 경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 기척이 없는 놈이니 이미 당했다고 해도 우리가 알아챘을 확률은 낮아. 돌아가서 확인하고 와 보는 게…….”
“그럴 일은 없으니까, 움직이지 말고 여기 있어.”
부하들은 감감무소식인 요젠의 안위가 걱정스러운 듯했다. 언제든 카델의 부름이면 곧장 모습을 드러내던 사내였으니. 카델 또한 요젠이 이렇게까지 완고하게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혹시 처음부터 동행하지 않았던 거라면? 전부 끝날 때까지 제프리고 단장이고 전부 꼴 보기 싫어서…….’
제프리는 요젠을 어둠의 길로 들어서게 한 장본인이었고, 자신은 그 원수를 지켜 낸 배신자나 다름없다. 죽이지 않기 위해서는 아예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에서 평정을 다스려야 했을 수도 있다.
‘만약 그런 거라면 정말 최악인데.’
정말 요젠이 이곳에 없는 거라면, 한시라도 빨리 다른 수를 강구해야 했다.
‘……아니, 다른 방법은 없어. 무조건 요젠이 있어야 한다. 있을 거야. 근처에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굴고 있는 게 뻔해. 그렇다면.’
딱 한 가지. 그를 그림자 속에서 빼내 올 수단이 있었다.
카델은 자신을 보호하던 모든 장막을 해제했다. 비늘 갑옷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방어 수단을 내려 두고, 시야를 밝히던 불덩이도 꺼뜨렸다. 갑작스레 찾아온 어둠에 불안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카델은 아군의 동요 속에서 단호하게 외쳤다.
“이제 보이지 않는 건 너도 마찬가지다, 포트!”
포트는 지금껏 이쪽의 불꽃에 의지해 인간을 ‘골라서’ 죽여 왔다. 증거는 확실하다. 지금껏 그림자 기사단에서 나온 사망자는 전원 입단이 2년이 넘지 않은 신입 기사. 비교적 약하기에 가장 먼저 처리당한 것이다.
반면 적린 기사단은 반과 라이돈이 얕은 절상을 얻었을 뿐이다. 자신의 공격이 쉽게 먹혀들지 않자, 포트는 적린 기사단을 뒤로 밀어 둔 채 다시 그림자 기사단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둥글게 뭉쳐 사위를 경계하고 있음에도, 공격의 대상은 여전히 그림자 기사단 쪽이었다. 더 약한 이가 누구인지 골라내고, 그들부터 죽여 쪽수를 줄이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만약 그 정도 분별력을 가진 포트의 시력을 빼앗는다면? 그는 감각에 의존해 가장 ‘쉽게 죽을 것 같은’ 인간을 찾아내려 할 것이다.
그리고 이윽고, 놈은 발견할 것이다. 한 겹의 장막도 두르지 않은 맨몸으로 어둠 속에 파묻힌 한 명의 인간을.
‘와라.’
포트의 움직임엔 소리가 없다. 유령의 습격을 기다리는 것처럼, 카델은 조금씩 어둠에 익숙해지는 시야 속에서 정면을 응시했다. 부하들은 카델이 장막을 해제했다는 것을 상상도 못 한 채 제 앞에만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이 갑작스레 카델의 앞으로 뛰어들어 대신 공격을 맞을 일은 없다.
‘만약 내 예상이 어긋난다면 꽤 골치 아픈 상황이 발생하겠지만…….’
차분하게 숨을 골랐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느리게 울리는 심장 박동을 느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후우웅―
낮은 바람 소리가 카델의 귓가를 울렸다. 속삭임 같은 짧은 파공음이 스치며, 카델은 자신이 포트의 타깃이 됐음을 직감했다. 공격이 시작된다. 뒤이어 따라올 고통을 예감하듯 입술을 깨물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느껴지는 고통은 없었다.
“……제정신이 아니야.”
나직하면서도 어딘가 격양된 음성이었다. 그제야 굳었던 어깨에 힘을 풀며 낮은 한숨을 내뱉었다. 천천히 눈을 뜬 카델이 제 앞에 선 사내를 올려 보았다. 눈앞을 가린 단단한 등과 희끗하게 비치는 하얀 붕대. 요젠이었다.
“네가 구해 줄 줄 알았어.”
순진한 대답에 요젠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무언가를 버티듯 단검을 든 채로 힘을 주었다. 이내 반대편으로 강하게 단검을 떨쳐 내자, 여태껏 한 번도 들리지 않던 괴상한 울림이 퍼졌다. 포트의 비명이었다.
포트의 비명은 묵직한 진동처럼 내부의 공기를 무겁게 울렸다. 그 소리에 반응한 기사들이 포트를 찾아 부산하게 움직인 탓에, 약간의 혼란이 찾아왔다.
카델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요젠을 잡아끌었다. 사람들과 떨어진 곳으로 요젠을 데려가려 했으나, 앞이 잘 보이지 않아 기사들에게 이리저리 치이기만 했다. 그를 참다못한 요젠이 직접 카델을 끌어 구석으로 이동했다. 그러고는 그를 벽 위로 떠밀며 말했다.
“내가 오지 않았다면 넌 크게 다쳤을 거야.”
“하지만 왔잖아.”
“오지 않으려 했어.”
“결국엔 날 구해 줬지.”
“…….”
“네 도움이 필요해, 요젠.”
할 수만 있다면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한시라도 빨리 포트를 없애지 않으면, 갱도 안의 모두가 위험해진다.
그랬기에 카델은 곧장 본론을 꺼냈으나. 요젠은 그가 원하는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돕지 않을 거야.”
“……네가 없으면 저 마족을 상대할 수 없어. 알잖아. 이곳에서 저 마족, 포트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포착할 수 있는 건 너뿐이야.”
“돕고 싶지 않아. 그 녀석을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참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요젠은 허리를 숙여 카델과 눈높이를 맞췄다. 카델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고, 딱딱하게 굳은 입꼬리를 씰룩이며 경고하듯 읊조렸다.
“난 저들이 전부 죽는대도 상관없어.”
적의와 살기로 가득 찬 음성이었다. 언제나 유순하던 태도와는 달리 잔뜩 날이 서서, 평소의 요젠과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절로 몸이 위축됐다. 하지만 카델은 굴하지 않았다. 되레 오기가 생긴 것처럼 요젠의 멱살을 움켜쥐어 더욱 바짝 끌어당겼다.
“거짓말하지 마. 이대로 돕지 않고 사람들이 죽게 내버려 둔다면, 넌 분명히 후회할 거야.”
“네가 뭘 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데?”
“넌 인간을 살리고 싶어 하니까. 못된 인간을 없애는 것도, 결국 다른 인간이 살기를 바라서잖아. 네 인생 따윈 안중에도 없을 만큼 지독하게 타인의 삶을 신경 쓰는 녀석이니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넌 지금 제프리를 구하고 싶지 않아서, 녀석과 함께 있는 다른 인간들을 네 살인의 기준에 억지로 끼워 맞추고 있을 뿐이야. 그들이 살려야 할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이 제프리까지 구해야 할 테니까. 틀려?”
“…….”
“그러니까 결국 넌 후회하게 될 거야. 그리고 또다시 스스로를 좀먹으면서 홀로 모든 걸 감당하려고 하겠지. 더 많은 사람을 죽이고, 더 많은 사람을 살리겠다면서.”
크게 소리칠 수 없었기에 카델의 목소리는 점점 억눌려 갔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감정을 다스리느라 목이 갑갑했다. 그는 요젠의 멱살을 틀어쥐었던 손을 옮겨 눈을 가린 붕대를 쓸어내렸다.
살육의 길을 택한 그가 세상과 동떨어지기 위해 가장 처음으로 버렸던 것. 두려움을 이겨 내고자 고통을 끌어모았던 그의 삶은 분명히.
“행복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제프리를 용서하지 못하더라도, 결국엔 그를 죽이게 될지라도. 요젠이 할 복수의 끝에 쓸데없는 죄책감을 얹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옆에서 최선을 다해 인간들을 구할 것이다. 그 행위엔 살인의 고통 따윈 필요하지 않다.
단호한 일갈에 카델과 닿은 몸이 움찔 떨렸다. 그는 잠시 침묵하며 눈꺼풀 위로 느껴지는 카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러다 이내, 조소 같은 숨을 터뜨리며 카델의 손목을 잡아 끌어 내렸다.
“행복하지 않아도 돼. 내 행복은 누구에게도 필요치 않으니까.”
자신의 행복이 누구에게도 필요치 않다니. 그 황당한 발언에 카델이 곧장 반박하려 했으나, 그보다 요젠의 말이 더 빨랐다.
“하지만, 그래. 네가 옳아. 여기서 모두를 죽게 만든다면 그건 분명 내 신념을 배반하는 일이겠지. ……할 수 있는 데까진 도울게.”
그리 말한 요젠이 조금씩 물러났다. 멀어지는 거리에 카델이 다급히 발을 뻗은 순간, 단장의 부재를 눈치챈 부하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젠은 동료들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채 말했다.
“불은 다시 켜도 상관없어. 어차피 아무것도 안 보일 테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의문을 해소해 주지도 않은 채, 요젠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카델은 당황하며 어두운 갱도를 두리번거리다, 결국 요젠을 찾아내지 못한 채 부하들에게 돌아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