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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환진 해제는 확실히 까다로운 작업이었으나, 카델과 라이돈 정도의 마법사에겐 단순 마력 소모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구역을 나누어 차례차례 소환진을 해제했다. 그러는 동안 등장한 마물은 전부 반과 요젠의 몫.
적린 기사단은 청혈 기사단의 부가적인 도움 없이 척척 합을 맞추며 작업을 진행했다. 처음에는 그들에게만 모든 일을 맡길 순 없다며 두 팔을 걷어붙이던 아드몬은, 카델의 단언이 오만이 아니었음을 깨닫고는 연신 눈가를 훔쳤다.
“자기, 나 조금 어지러운 것 같아.”
소환진 해제가 막바지에 다다랐을 무렵. 라이돈이 이마에 손등을 올린 채 가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몸을 카델에게 기댄 그가 새초롬하게 눈을 깜빡였다.
“마력을 너무 많이 사용했나 봐. 어쩌지?”
“그래? 어쩌면 좋을까.”
“아무래도 충전을 위해서 뽀뽀를…….”
카델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신에게 기댄 거대한 남자의 멱살을 틀어쥐고 단숨에 입을 맞췄다. 진하게 입술 도장을 찍은 후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돌려 다시 해제 작업에 돌입했다. 그러자 기대하지 않던 입맞춤을 받은 라이돈이 잠시간 굳어 있다,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뒤로 꺾었다.
“너무해, 자기!”
“뭐가?”
“성의 없어! 애정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아! 세상에 이런 무성의한 뽀뽀를 받는 요정은 나밖에 없을 거야!”
“우리 요정은 왜 해 달란 대로 해 줘도 난리일까?”
“이렇게 성의 없이 해 줄 거면 혀라도 넣어!”
헛소리의 향연이었다. 설설 고개를 저은 카델이 라이돈의 칭얼거림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이렇게 무시한다면 라이돈의 투정이 점점 더 심해질 것을 안다. 그럼에도 굳이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앞으로 펼쳐질 일이 예상 갔기 때문이었다.
“멀리서도 네 유언이 들리더군. 쓸데없이 길어지기 전에 죽이러 왔다, 요정 놈.”
“뭐야, 반? 왜 나랑 자기 대화에 끼어들어?”
“그 ‘자기’라는 호칭은 하루빨리 내다 버리는 게 신상에 좋을 거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나야말로 내 인간을 뭐라고 부르던 반이 무슨 상관이냐고 말한 것 같은데. 혹시 그새 더 멍청해진 거야?”
반은 라이돈이 더 이상 카델에게 치근덕거리지 못하도록 그를 반대편으로 끌고 갔다. 저렇게 둘을 붙여 두면 소환진 해제는 전부 자신의 몫이 되리란 걸 알지만, 그래도 딱히 문제는 없다. 작업도 끝물인 데다, 라이돈의 마력보다는 자신의 마력을 쓰는 편이 나으니. 쿤라의 힘도 문제없이 끌어다 쓸 수 있다.
그렇게 카델이 묵묵히 작업을 재개하던 때.
“다른 애들한텐 입술을 잘 내어 주네.”
“아악! 깜짝이야!”
어느샌가 카델의 옆으로 다가온 요젠이 묘하게 싸한 느낌이 가득한 미소를 머금었다. 드러난 카델의 목덜미를 진득하게 주무른 그가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췄다.
“내가 해 달라고 하면 시간 없다고 미루기 바쁘면서. 라이돈한텐 쉽게 내주는 이유가 뭐야?”
어절 사이사이로 한기가 맺힌 느낌이었다. 카델은 붙잡힌 목을 움츠리며 소심하게 답했다.
“너는 뽀뽀로 안 끝나니까 그러지. 온종일 물고 빨려고 하잖아.”
“……그건 사실이야.”
“그래, 그러니까―”
“하지만 그게 기분 좋게 거절당할 명분은 못 되지. 바로 옆에 비교할 대상이 있다는 건 조금 피곤한 일이네.”
슬쩍 요젠의 표정을 살핀 카델이 마른침을 삼켰다. 시무룩한 태도였으나, 라이돈이 시무룩해질 때와는 느낌이 영 딴판이었다. 안 그래도 서늘한 인상에 잘못 건드렸다간 무슨 일이라도 치를 것 같은 예민함까지 더해지니, 당장 달래 줘야겠다는 조급함마저 느껴졌다.
“나, 나도 가능하면 너랑 계속 붙어 있고 싶어. 나한테도 그런…… 욕구 같은 건 당연히 있다고.”
“그런데?”
“하지만 너랑 그렇고 그런 일을 하면, 자제력이 떨어져 버리니까. 급한 일을 미뤄 두게 돼서, 나름대로 참고 있는 거라고.”
욕망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카델이 새빨개진 얼굴로 더듬더듬 말하자, 날카로웠던 요젠의 기세도 조금씩 누그러졌다. 이내 그는 협박하듯 문지르던 목덜미에서 손을 떼어 카델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헤집었다.
“그럼 네 말은, 나랑 하는 키스가 좋다는 거야?”
“……그래. 꼭 이렇게 말을 해야 알아? 이런 것도 그냥 내 심장 소리나 표정이나, 뭐 그런 걸로 알아서 척척 짐작하란 말이야.”
“너한테서 직접 듣고 싶어. 그게 좋아.”
금세 풀어진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카델은 한숨 같은 탄식을 뱉으며 눈가를 문질렀다.
“날 음담패설 변태로 만들고 싶은 거지.”
나지막한 웃음소리에 괜스레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카델에게서 만족스러운 반응을 얻어 낸 요젠이 근방에 출몰한 마물을 손보기 위해 떠나고. 카델은 잔뜩 시달려 힘이 빠진 몸에서 열심히 마력을 짜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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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네 시간의 작업 끝에, 마이뉴 왕국을 위협하던 소환진을 전부 해제하는 것에 성공했다. 일시적인 해제라지만 청혈 기사단으로서는 근 3일 만에 맞이한 평화로운 밤이었다.
“진심으로 고맙소. 청혈 기사단과 마이뉴 왕국은 오늘의 도움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오.”
“동맹국과 제자가 가진 도리를 다했을 뿐입니다.”
“참으로 겸손하시구려. 마밀 키파에게서 경 같은 제자가 나오다니……. 아, 경의 스승을 폄하하려던 것은 아니오. 워낙 오래 알고 지낸 사이다 보니, 스스럼없이 말하게 되는군.”
“괜찮습니다, 아드몬 경.”
아드몬은 여전히 피로가 가시지 않은 모습이었으나, 얕은 안도감이 그에게서 마지막 기력을 짜내고 있었다. 아드몬은 한참 동안 카델과 그의 기사들을 향한 칭찬을 퍼붓다,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막사를 가리켰다.
“마밀은 저곳에서 쉬고 있소. 적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안전할 테니, 그간 묵혔던 회포라도 푸시오. 원한다면 술도 준비해 보지.”
“술은 괜찮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아드몬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넨 카델이 곧장 마밀의 막사를 찾았다. 붙어 오는 부하들은 전부 떼어 냈다. 마밀에게 모두를 소개한다면 분명 즐거운 시간이 될 테지만, 휴식을 취해야 할 사람에게 달갑지 않은 소음을 안겨 줄 필요는 없었다.
“마밀 님, 들어갈게요.”
대답도 듣지 않고 냅다 몸을 들이밀자,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마밀의 모습이 보였다. 느릿느릿 눈꺼풀을 올린 그가 카델의 얼굴을 보자마자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네 등장이 반가운 날이 다 오는구나.”
“스승님, 그간 평안…….”
격식을 차리려던 카델이 머쓱한 표정으로 이마를 긁적이더니, 이내 밝게 웃으며 말했다.
“보고 싶었습니다, 스승님.”
“……오냐.”
제국에서의 마지막 만남 이후, 그들은 이렇다 할 편지도 주고받지 않은 채 각자의 삶을 살았다. 서로에 대한 소식은 소문으로 건너 들은 것이 전부. 그다지 애틋함이 느껴지는 사제지간은 아니었으나, 이것이 두 남자에게 적절한 거리였다.
“고생이 많으셨다고 들었어요.”
“그래. 그간 수많은 전장에 끌려가 봤지만, 이번처럼 무의미한 체력 소모가 최선인 싸움은 처음이다. 능력이 뒤떨어지면 먼저 쉬기라도 하지. 나이를 먹으니 책임만 막중해지는군.”
당장이라도 부담을 팽개치고 요양이나 하러 가고 싶다는 듯한 태도다. 하지만 카델은 알고 있었다. 마밀은 이 전쟁이 끝나기 전까진 결코 왕국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세상만사 모든 일에 권태를 느끼는 것처럼 보여도, 마밀은 제 어깨에 얹어진 생명의 무게를 못 본 체하지 않는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 사랑스러운 제자가 스승님을 도우러 달려왔지 않습니까.”
“적룡의 힘까지 등에 업고 말이지.”
“최선을 다해 도울게요.”
마밀의 시선이 카델의 펜던트에 가 닿았다. 잠시 펜던트를 응시하던 마밀이 낮은 한숨과 함께 눈꺼풀을 문질렀다.
“소환진의 재생을 멈출 방법을 알아내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너 또한 마력이 바닥날 때까지 쥐어짜이기만 할 테지.”
“짐작 가는 원인은 없나요?”
“몇 가지 있기는 하다.”
이 오랜 시간 동안 마밀이 소환진 해제에만 몰두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해제해도 끊임없이 재생되는 소환진이라면, 그 근본을 찾아 뿌리 뽑아야 하지 않겠는가. 급박한 상황이었던 터라 철저한 조사는 어려웠지만, 몇 가지의 가설은 세울 수 있었다.
“하나는 근처에 고위 마족이 있다는 가정. 보이지 않는 곳에서 왕국을 감시하며, 소환진이 해제되는 즉시 재생을 준비하는 거지. 하지만 이 가정은 가능성이 적다. 이미 근방을 수차례 탐색했지만, 그런 일이 가능할 정도의 마족은 발견하지 못했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조종하고 있을 확률은요?”
“마법을 사용하는 마족의 마기는 인간의 마력과 활용법이 흡사하지. 너는 맨눈으로 살피는 것이 불가능한 거리에서 원격으로 소환진을 설치할 수 있느냐?”
“그건…… 아무래도 어렵겠죠. 몇 주씩이나 유지해야 한다면 더더욱.”
“그러니 이 가정은 틀렸다고 봐도 무방해.”
다음은 재생되는 소환진 자체가 마법진이 가진 술식의 일부라는 가정이었다.
“소환진 해제를 기점으로 차례차례 발동되는 마법진일 확률. 가장 성가시기는 하지만, 가장 현실성 있는 가정이기도 해.”
“……차례차례 발동되는 마법진이라면, 이미 한번 경험한 적이 있죠.”
마계 도시를 통째로 소환하려 했던 에밀리아의 대마법진. 완전히 같은 종류라고 볼 순 없지만, 같은 줄기에서 파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대마법진은 마법진 조각의 발광과 동시에 발동이 시작됐다. 만약 소환진의 재생 역시 마법진 발동 조건의 일부라면.
마밀의 가정을 곱씹던 카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대로 마법진이 발동된다면, 마물보다 위험한 것들이 소환될지도 몰라요. 어떻게든 막아야 합니다.”
“나도 알고 있다. 문제는 내 가정이 사실이라고 해도, 발동 전의 마법진을 해제할 방법을 찾지 못하겠다는 거지.”
해제와 재생의 반복으로 술식을 완성하는 기묘한 마법진. 확실히 듣기만 해서는 어떤 원리인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마계 대마법진도 발동이 되기 전까진 아예 건드릴 수 없었으니.
‘아마 이것도 에밀리아의 작품 중 하나겠지.’
셀레브가 알려 준 마계 소환진조차 아직 인간들의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 마족의 마법진은 인간의 것관 힘의 근본부터가 다르다. 인간의 마력으로 원리를 파악하기 위해선 보통의 마법진보다 몇 배는 되는 시간이 필요했다.
‘실력 하나는 알아줘야겠어.’
마밀의 가정을 실제라고 생각했을 때, 마이뉴 왕국을 위협하는 마법진은 하나의 거대한 덫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왕국은 이미 그 덫에 걸려 서서히 죽어 가고 있다.
“내일이면 다시 소환진이 재생될 거다. 마물이 나타나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있으니, 그 틈을 노려 같이 소환진을 살펴보자꾸나.”
“그러죠. 곧 다른 마법사들도 합류할 테니, 조사가 수월해질 거예요.”
“그 전에 마법진이 발동되지 않는다면 말이야.”
마밀은 골치 아프다는 듯 미간을 문지르고는, 깊은 한숨을 쉬며 카델을 보았다.
“보다시피 내 마력은 이미 한계까지 몰렸다. 마력 고갈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가고 있지. 네 역할이 중요하다, 카델.”
“알고 있어요. 최선을 다할게요.”
“……이러나저러나, 이곳은 내가 선택한 땅이니 말이다. 제자의 손을 빌려서라도 지키고 싶구나.”
그리 말하는 마밀의 눈빛에선 단호한 결의마저 느껴졌다. 카델은 스승의 의지를 마주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밀의 과거에 대해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어떤 마음으로 고향을 떠났는지는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소중한 존재의 죽음을 떨쳐 내고자 새롭게 찾아낸 삶의 터전. 그 안식처가 무너지는 것을 멀뚱히 지켜만 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마밀은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지킬 힘을 주었다. 그러니 자신 또한 그의 소중한 것을 지켜 보답하고 싶었다. 이것은 메인 퀘스트를 위함이 아닌, 스승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찾아올게요. 그때까지 푹 쉬어 두세요.”
“그게 좋겠군.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이 지겨운 싸움이 끝난 뒤에나 나누자꾸나.”
카델은 지친 마밀을 위해 먼저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에게 해 주고픈, 듣고픈 이야기가 많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