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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환진을 분석해 소멸의 단서를 잡는 일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그 모든 것이 술식의 일부라고 가정했을 때, 마법진이 발동하기 전에 파훼법을 알아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절로 막막해졌다.
‘소환진 때문에 마이뉴 왕국은 평화의 돌 수색도 제대로 진행하지 못했어.’
원래라면 탐색에 동원되었어야 할 인력이 왕국 방어에 몰렸다. 아마도 이런 상황을 노린 마계의 술수일 테지.
‘둥켈하이 왕국은 평화의 돌이 있던 갱도에서 마족의 방해 공작이 있었으니까. 비슷한 맥락이라고 친다면, 마이뉴 왕국의 평화의 돌은 이곳과 멀지 않은 장소에 있을 확률이 높다.’
그러지 않고서야 적진 한가운데에 전력을 뿌릴 이유는 없다. 연속된 마물의 출현으로 기사들은 착실하게 지쳐 갔지만, 그것만을 노렸다기엔 너무 많은 마물이 죽었다. 마물도 엄연한 마계의 전력. 근처에 평화의 돌이 있어 수색을 방해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마계에선 이득 볼 것이 없는 싸움이었다.
‘내 생각보다 마계의 수색 속도가 빠른 모양인데. 인간들보다 먼저 평화의 돌이 있는 위치를 알아낸 것 같아. 하지만 단순히 수색 방해를 위해 이런 복잡한 마법진까지 대동하는 건 너무 과한 전술 아닌가?’
마법진이 발동되었을 때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몰라도, 왕국의 존망이 걸릴 만큼 위험한 사건이 벌어지리란 건 자명했다. 그렇다면 에밀리아는 방해 공작과 더불어 마이뉴 왕국의 몰락까지 노리는 걸까.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마법사들을 끌어모을 생각이었는지도 모르지.’
술식의 근본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무식하게 마력을 쏟아부어 일시적으로 저지하는 것이 최선인 소환진. 인간들이 간단히 술식을 파악하지 못하리라는 걸 예상하고, 마법사들의 진을 빼 두려는 계략일지도 모른다.
‘이곳에 모인 마법사들을 일망타진하려는 목적일지도. 에밀리아 입장에서는 마계 소환진을 분석할 정도의 마법사들만 남기는 편이 안전하겠지. 전쟁에서의 승률도 오를 테고. 그리고 마법사인 내 존재를 신경 쓰는 것 같으니, 겸사겸사 미끼를 던질 걸 수도 있…….’
신중하게 에밀리아의 속내를 파악하며 걷던 카델이 일순 걸음을 멈췄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에 균열이 이는가 싶더니, 이내 거칠게 가슴께를 움켜쥐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시, 심장이…….”
갑작스레 닥쳐온 극심한 격통. 심장을 쥐어짜이는 듯한 괴로운 감각에 카델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삽시간에 오한이 들며, 온몸에서 비 오듯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유도 알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카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바닥에 웅크린 채 헐떡이는 것뿐이었다.
‘익숙한 고통이다…….’
쿤라가 도망치듯 떠나기 전, 그의 기운을 받아들이다 맞닥뜨린 고통과 비슷했다. 강도는 그때보다 훨씬 심했지만.
‘쿤라의 기운을 받아들인 부작용인가? 하지만 이런 부작용에 대해선 전해 들은 게 없는데.’
고통이 심해질수록 사고력이 저하됐다. 쓰러진 카델에겐 앞으로 기어 나갈 힘도, 누군가를 불러 도움을 요청할 기운도 없었다. 늦은 밤인 터라 카델을 도와줄 만한 기사도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혼절했다간 다음 날 시체로 발견될지도 모른다. 끔찍한 상상을 하며 어떻게든 혼미한 정신을 잡아 보려던 때.
“단장!”
멀리서부터 놀란 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이 오지 않아 몸이나 움직일 겸 인적 드문 곳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문득 단장의 막사를 발견해, 잠시 들러 이야기를 나눌 생각으로 이동하던 길이었다.
“여환아! 정신 차려 봐!”
쓰러진 카델의 몸을 흔드는 반의 시선이 부산스럽게 그의 상태를 살폈다. 마밀의 막사에 들어갈 때만 해도 약간의 피로감이 비쳤을 뿐, 평소와 크게 다른 점은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갑자기 쓰러질 만한 징조는 어디에도 없었는데.
카델은 반의 팔 위로 몸을 축 늘어뜨린 채 풀린 눈으로 그를 담아냈다. 느리게 끔뻑이는 눈꺼풀은 언제 감긴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였다. 금방이라도 의식을 잃을 듯한 위태로운 모습에, 반이 다급히 그를 안아 들었다.
“가르엘 경한테 데려다줄게요. 조금만… 조금만 버텨 봐요.”
정작 정말 힘겨운 이는 카델이건만. 반은 아픈 카델보다도 정신이 없어 보였다. 늘어진 몸을 꼭 끌어안은 채 허둥지둥 근방을 활보하던 그가 이내 한 막사의 입구를 거칠게 젖혔다.
“치유술! 당장 치유술을 준비하십쇼!”
“반 경……?”
난데없는 불청객의 등장에 잠들었던 가르엘이 부스스하게 일어났다. 미처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반을 바라보던 그는, 품에 안긴 익숙한 인물을 인식하곤 눈을 크게 떴다.
“단장님?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쓸데없는 소리 할 시간에 치료부터 하란 말입니다!”
잔뜩 날 선 태도에 기분이 상할 법도 했으나, 가르엘 역시 반의 노성 따위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오로지 반의 품에 안겨 힘없이 늘어진 남자. 그 남자의 안위를 걱정하느라 다른 요소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르엘은 반이 카델을 눕히자마자 곧장 치유술을 전개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치유술임에도 심장이 불안하게 뛰며 진땀이 났다. 이미 완전히 의식을 잃은 듯한 카델. 그의 무력한 모습에 과거의 악몽 같은 기억이 떠오른 탓이었다.
“상태가 어떤 겁니까. 심각한 겁니까?”
그때의 카델은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고, 깨어난 후로도 제법 오랫동안 우울에 잠겨 있었다. 정확한 이유는 끝까지 알려 주지 않았으나, 가르엘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반 헤르도스의 부재에 괴로워했다. 본인이 다 죽어 가던 때에도, 겨우 눈을 떴을 때도 그림자 하나 비치지 않던 그 남자를. 언젠가 생각해 본 적이 있다. 혹시 그때의 부상은 반 헤르도스에게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하고.
“뭐라도 말 좀 해 보십쇼. 괜찮은 거냐고…….”
신중하게 마기를 흘려보내던 가르엘의 미간에 금이 갔다. 건드려선 안 될 것을 건드린 것처럼, 순식간에 불이 붙은 그가 벌떡 일어나 반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언제나 여유롭던 눈빛이 흉흉하게 번뜩이며, 나른하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네 탓인 거 아닌가?”
“……뭐라고?”
“기운이 엉망진창이야.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은 사람처럼 쇠약해졌다고. 조금 전만 해도 이런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어. 그런데 멀쩡하던 단장님이 갑자기 쓰러지고, 그걸 하필이면 네가 발견해 데려와?”
“단장이 쓰러진 게 나와 관련 있다고 의심하나 본데, 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절대 단장을 해치지 않아. 그러니 죽고 싶지 않으면 이거 놓고…….”
“네가 의도하지 않았대도 영향을 끼쳤을 수 있지. 팔라익과의 싸움에서 단장님은 죽음의 고비를 넘겨야 했어. 간신히 깨어난 뒤엔 갑자기 네 이탈 소식을 전했고. 그땐 캐묻지 않고 넘겼지만, 단장님은 그렇게 순순히 당할 인물이 아니거든. ……부하와 관련된 일에 정신이 팔렸다면 몰라도.”
자신을 몰아세우는 날카로운 말투에도 반은 더 이상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했다. 단장이 팔라익과의 전투에서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니? 그런 소린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때의 전투에서, 자신은 맡은 바 소임을 다했다. 여환이 곤란해질 일을 막기 위해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최선을 다해 역할을 수행했다.
“단장이…….”
정말 크게 다쳤던 걸까? 얼마나? 그 이유가 뭐지? 가르엘의 말대로 카델은 쉽게 쓰러질 인물이 아니었다. 석화된 상태로도 단원들을 끝까지 보호하던 사람이었으니까.
설마 방심했던 걸까? 여환이 자신의 이탈 사실을 그렇게 빨리 알았을 리는 없다. 그러니 만약 방심했대도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 때문일 리 없다.
그런데도 반이 충격을 받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자신이 마음을 다잡지 못해 방황하고 있을 동안, 여환은 죽음의 경계선에 서 있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은 그런 여환의 곁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 이토록 무능한 부하를 여환은 다시금 찾아와 손을 내밀어 주었다. 그때의 그는 대체 어떤 심정으로 진심을 전했던 걸까.
말문을 잇지 못하는 반의 앞에서, 가르엘은 털어 내듯 멱살을 놓으며 일갈했다.
“경의 탓이 아니래도 사과는 않겠습니다. 나가십쇼. 집중하는 데 방해되니.”
쓰러진 여환을 앞에 두고 떠나기는 싫었다. 하지만 고집을 부리기엔 이곳에서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반은 주먹을 그러쥔 채 눈을 감은 카델의 얼굴을 응시하다, 이내 말없이 막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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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카델의 소식을 전해 들은 루멘과 라이돈, 요젠이 차례차례 막사에 들렀으나, 가르엘은 누구도 들여보내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카델의 상태를 알리고, 걱정에 대꾸해 줄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밀과 아드몬 역시 처지는 같았다. 치유술은 마기를 통해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출입은 나머지 단원들이 나서서 막았다.
그렇게 가르엘이 새벽 내내 치유술을 전개하며 극진히 보살핀 결과. 여명이 밝기 전, 카델은 무사히 눈을 뜰 수 있었다.
“……가르엘.”
잔뜩 잠긴 목소리에 걱정이 가득하던 낯에 짙은 안도감이 스쳤다. 깨어난 카델이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자, 가르엘이 곧장 그의 손을 맞잡았다. 깊은 한숨을 집어삼킨 그가 카델의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기며 말했다.
“몸은 좀 어때요. 괜찮은 것 같아요?”
“응. 개운해.”
“외상도 내상도 없었어요. 할 수 있는 거라곤 엉킨 기운을 정돈하는 것뿐이었는데…….”
작게 인상을 찌푸린 그가 고개를 수그린 채 맞잡은 손을 흔들었다.
“더 이상 이 불쌍한 치유사를 무력하게 만들지 말아 주세요, 단장님.”
“……미안해. 나도 뭐 때문에 갑자기 쓰러졌는지 모르겠어.”
쿤라의 기운 때문이 아닐까 막연하게 짐작할 뿐, 갑작스러운 통증의 이유를 밝혀낼 방도가 없었다. 가르엘 역시 원인을 찾아내지 못한 것 같으니.
본의 아니게 걱정을 끼쳐 버렸다. 잠도 자지 못하고 고생했을 가르엘을 달래듯 뺨을 문지르자, 그가 느슨하게 눈을 맞춰 왔다.
“누가 괴롭힌 건 아닌가요?”
“괴롭혀?”
“가끔 크게 스트레스를 받으면 기운이 들쑥날쑥해지기도 하거든요.”
“으음……. 아무래도 전쟁 중이니까, 신경 쓸 일이 많기는 하지. 하지만 쓰러질 만큼 힘든 건 아니야. 이 정도도 못 버티면 단장 실격이지.”
“기사단의 누구도 단장님이 무리하게 버티는 걸 바라진 않아요.”
“무리하지 않았다니까 그러네.”
머쓱하게 미소 지은 카델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다시 눕히려는 손길을 저지한 그가 팔을 뻗어 가르엘의 목을 끌어안았다.
“정말 괜찮아. 조금 피곤했나 봐. 그래도 네가 치료해 준 덕에 지금은 완전히 팔팔해졌으니까.”
“……갑자기 포상인가요?”
“건강하게 깨어난 나에게 주는 선물이지.”
“아직 정신이 덜 돌아온 건가.”
“왜. 갑자기 끌어안으니까 싫어?”
“그럴 리가요.”
가르엘은 자신에게 기댄 카델의 등을 감싸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벅찰 정도로 들어차는 안도감은 자신이 얼마나 카델의 건강에 민감한지를 실감하게 해 주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카델의 머리에 뺨을 기댄 채 온기를 느끼다, 다정하게 등을 쓸어내린 그가 입을 열었다.
“바깥에서 단원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다들 걱정이 많았을 겁니다.”
“미안하게 됐네. 나 때문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바로 싸우게 됐으니.”
“모두 단장님이 건강하게 깨어났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할 겁니다.”
카델은 가르엘의 품에서 빠져나와 몸을 일으켰다. 몇 시간 내내 집중 관리를 받은 덕인지, 평소보다 배는 정신이 맑았다. 머리가 개운하고, 몸도 가벼웠다.
언제 다시 통증이 찾아올지 모른다는 부분이 거슬리긴 했으나, 지금 상태라면 소환진 분석은 무리 없이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개운하게 기지개를 켠 그가 한층 밝아진 얼굴로 막사를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