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2화 (372/521)

[암안술 제2식 – 무법 지대].

자신이 있는 한 에드워드는 카델을 해치지 못한다. 기분 좋은 확신을 얻은 요젠이 가볍게 손을 펼쳐 단검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이 공간 속에서, 눈앞의 고위 마족은 착실하게 죽어 갈 것이다.

도대체 그놈의 ‘묵직한 한 방’은 언제 완성된다는 것인지. 눈앞으로 뻗쳐 오는 수십 개의 창날. 그 어지러운 잔상의 움직임을 좇으며, 루멘이 짧게 혀를 찼다.

“아무리 재빨라도 상대방에게 틈이 없다면 공격은 불가능하죠!”

맑은 웃음소리를 낸 샌디가 거리를 벌리려는 루멘을 따라 앞으로 내달렸다. 그녀의 공격은 말 그대로 상대의 혼을 빼놓는 구석이 있었다. 현란한 창술뿐만이 아니다. 그녀가 가진 거대한 날개는 끊임없이 바람을 일으키며 흙먼지를 날려 댔고, 시린 바람과 따가운 모래는 집요하게 시야를 방해했다. 아차 하는 순간 온몸에 수십 개의 구멍이 뚫리리라.

‘적당히 주의만 끌어 줘야 하니 더 성가시군.’

차라리 본격적인 전투였다면 루멘도 적극적으로 전술을 구사하며 샌디를 상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주어진 역할은 반이 기술을 완성할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

‘이런 건 성미에 안 맞는단 말이지.’

전방에서 돌진하며 적의 주의를 끄는 역할은 반의 몫이건만.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좋든 싫든 반 헤르도스는 자신의 동료였으니.

“물론 내 우월한 검술도 빈틈없는 상대에겐 상처를 입힐 수 없어. 하지만 그 상대가 너는 아니거든.”

“뭐라는…….”

되물을 새도 없이 루멘의 신형이 갑작스레 자취를 감췄다. 일순 샌디조차 움직임을 좇지 못할 만큼 빠른 속도였다. 그렇게 사라진 루멘은, 샌디가 미처 당혹감을 드러내기도 전.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코앞에서였다.

“넌 빈틈투성이라고.”

훅 드리운 얼굴 위로 비스듬한 미소가 매달렸다. 푸른 눈동자에 비친 샌디의 표정이 미묘하게 움찔거렸다.

찰나의 순간, 그녀의 표정에선 순수한 놀라움이 스쳤다. 단순히 루멘의 속도가 한계치를 측정하기 어려울 만큼 압도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도 있었으나.

“잘생겼네요! 인간이면서!”

예고 없이 들이닥친 인간의 얼굴이 충격적일 만큼 잘생겼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떻게 이목구비가 저렇게까지 적재적소에 배치될 수 있는 것인지. 별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눈빛은 왜 쓸데없이 촉촉하게 젖어 보는 이를 심란하게 만드는 것인지.

문득 제 동료인 디포렉의 외모를 떠올린 샌디가 반사적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그리고 루멘은, 그런 샌디의 감탄에 가볍게 응수해 주었다.

“알고 있어.”

상당히 뻔뻔스러운 반응임에도 어이없다는 감상조차 들지 않았다. 그렇게 말문을 잃고 만 샌디의 뒤편. 한껏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그녀 대신 대꾸했다.

“검술로 상대하랬더니 그 기생오라비 같은 얼굴을 써먹는 건가? 이러니 네가 도련님이란 거야.”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샌디의 시야 속. 살기등등한 적안과 응축된 오라를 둘러 몸집이 두 배 이상 불어난 대검이 들어찼다. 그녀를 향해 날아드는 대검은 검이라기보단 거대한 철퇴에 가까워 보였다.

맞은편 퇴로를 가로막은 루멘을 피해 옆쪽으로 몸을 틀자, 붉은 오라가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코끝을 스쳤다. 분명히 닿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기다란 열상이 그녀의 코와 광대를 가로지르며 핏물이 솟구쳤다.

“아아악!”

평범한 상처가 아니다. 상처에서는 기이할 만큼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고, 곧장 마기를 끌어 올렸음에도 치유의 기미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마기를 사용할수록 되레 상처가 점점 깊어지기만 했다.

얼굴을 감싸 쥔 샌디가 날선 눈빛으로 대검의 주인을 노려보았다. 그는 샌디의 키만 한 검을 땅바닥에 늘어뜨린 채 그녀를 마주 보고 있었다. 전신을 휘감은 오라는 처음보다 훨씬 색이 짙어져, 오래된 핏자국처럼 검붉게 일렁였다.

‘본 적 없는 농도의 오라야.’

녹아내리듯 아래로 흐르는 오라는 끊임없이 대검으로 흡수되고 있었다. 광전사를 직접 상대해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놈들의 싸움을 처음 본 것은 아니었다.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알아서 자멸하리라 생각했건만.

이 인간의 오라는 어딘가 이상했다. 마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마기에 조종당하지 않고 되레 흡수하려는 것처럼 공격적으로 변모했다.

얼굴에 난 상처도 마찬가지다. 오라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 자가 회복을 위해 마기를 끌어 올리는 즉시. 상처에 남은 오라의 잔해가 체내의 마기를 잡아먹겠다는 듯 살벌하게 파고들었다.

‘위험하다. 분명히 닿지 않았는데도 상처를 입었어. 근접전을 했다간 회복이 불가능한 치명상을 입게 될 거야.’

창술의 핵심은 상대와의 거리를 유지하며 기술을 연계하는 것. 하지만 상대가 저리도 무식한 무기를 들고 있다면, 가까이 접근하기도, 멀리 떨어지기도 애매해진다.

‘디포렉에게 넘길까? 아니면 마물들을 방패 삼아 중심을 무너뜨리는 것도…….’

자신이 반을 상대하는 건 무리가 있다. 단숨에 결론을 내린 샌디가 반을 떨쳐 낼 방편들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딜 도망가?”

반은 샌디가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몸을 쏘아 날렸다. 사람만 한 무기를 들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사정없이 휘몰아치는 대검을 피하는 데 급급하던 샌디의 표정이 점차 굳어 갔다.

‘닿지 않았어. 닿지 않았다고!’

아슬아슬하긴 했으나, 대검과 그녀의 사이에는 분명히 거리가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몸에는 끊임없이 생채기가 생기고 있다. 조금만 가까워져도 피부가 따끔거릴 만큼 강렬한 기운. 생각보다도 훨씬 위험했다.

‘……이 정도 기운이 오래 유지될 리 없어. 진을 빼 둔다면 알아서 자멸할 거야.’

한층 강력해진 적을 상대하는 건 즐거운 일이다. 평소였다면 이성을 놓고 달려들었겠지. 하지만 회복이 불가능한 상처를 얻은 순간, 샌디는 떠올렸다.

자신은, 마족은 더 이상 패배해선 안 됐다. 오랜만에 맡은 맑은 공기에 들떠 바보처럼 방심해 버려선 곤란했다. 조심성이 필요하다.

‘일단 피한다.’

상대는 근거리 전사인 데다, 날개도 없는 인간이다. 하늘로 날아오른다면 따라올 수 없다. 그리 판단한 샌디가 도약하려 했으나. 날개뼈에서부터 느껴지는 격심한 통증과 함께, 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감사는 필요 없다.”

날 수 없다. 그 사실을 인지한 샌디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뒤편에는 반쯤 빠져나온 검을 납검하는 루멘이 서 있었다. 그의 싸늘한 시선이 샌디를 훑어 내곤, 다시 너머의 반을 바라보았다.

“내가 묶어 둔 덕에 벨 수 있었던 거면서 생색 한번 더럽게 내는군.”

“고맙다는 말도 못 배운 녀석에게 예의를 기대하긴 어렵지.”

“빨리 꺼져 버려.”

시답잖은 대화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샌디의 주의를 끄는 것은 오직 하나. 넓게 펼쳐진 채 바닥에 떨어진 검은 날개 한쪽. 이것은 누구의 것인가? 아름다운 깃털이 보인다. 깔끔하게 절단된 날개뼈도 희끗하게 비쳤다. 축 늘어진 깃털에선 더 이상 마기가 흐르지 않아, 윤기를 잃고 건조하게 메말라 갔다.

“아, 아아…….”

쓰러지듯 주저앉은 샌디가 떨어진 날개를 끌어안았다. 날개가 잘려 나간 등에서부터 보라색 핏물이 넘치도록 흘러내렸다. 검은 날개를 끌어안은 채 넋을 잃은 그녀의 모습은 상당히 애처로웠으나, 반의 심금을 울리기엔 역부족이었다.

“내가 좀 급해서 말이야. 마음 추스르게 둘 시간이 없거든.”

높게 치켜든 대검이 샌디의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녀에게선 더 이상 어떠한 전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날개가 없으면 걸으면 될 일. 그 징그러운 재생력으로 다시 붙일 수도 있지 않을까. 반은 갑작스레 평정을 잃은 샌디의 감정에 전혀 공감하지 못했지만, 그녀가 내어 준 틈을 놓치지도 않았다.

오라가 감긴 육중한 대검이 막힘없이 샌디의 머리 위로 내리꽂혔다. 하지만 대검의 날이 그녀의 정수리를 갈라내기 직전.

“정신 차려라, 너희들! 일을 그르칠 셈이냐!”

갑작스레 뛰쳐나온 검은 그림자가 샌디를 낚아채 도망갔다. 마수였다. 늑대의 형태를 한 마수가 샌디를 입에 문 채 반대편으로 달려 나갔다. 늑대의 등에는 축 늘어진 또 한 명의 마족이 업혀 있는 상태였다.

그에 코앞에서 적을 놓친 반은 물론, 곁을 떠나던 루멘까지 같은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적을 빼앗아 간 마수가 아닌, 그 마수를 조종한 마법사.

“적의 궤멸이 코앞이다! 이대로 무너질 순 없어!”

디포렉은 만신창이가 된 두 동료를 적린 기사단에게 떼어 놓으며 악을 썼다. 조금 전까지 확실하게 인간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들은 끝없는 마물 소환에 지쳐 갔고, 범상치 않은 전투력을 뽐내던 몇몇 인간들조차 점차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전부 계획대로였다. 이대로 인간 측 마법사들이 떼거리로 몰려와 마법진을 손본대도 돌이킬 수 없었을 텐데.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어느 시점부터, 전장의 흐름이 뒤바뀌고 있었다. 이대로 흐름을 빼앗길 순 없었다.

“일어나라, 샌디! 에드워드! 이곳은 우리의 무덤이 아니다!”

발악하듯 외친 그가 대량의 마기를 끌어 올리기 시작했으나, 성공하진 못했다. 멈칫하며 굳은 그의 머리 위에서부터 장난기 가득한 음성이 들려왔다.

“흐응, 그만 떠들고 빨리 죽는 게 어때? 어서 카델을 보러 가고 싶단 말이야.”

카델의 행방과 안위를 걱정하며 전투에 집중하지 못하던 때는 지났다. 적린 기사단의 옆에는 돌아온 카델이 있었고, 그는 존재 자체로 기사단에게 활력과 의욕을 충전시켰다.

‘조금… 아주 조금만 더 기다리면…….’

전투는 모두 부하들에게 맡겼다. 카델은 그들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고 승리를 위한 집념으로. 오로지 마법진 해제에만 집중했다.

비록 지금은 폭주 상태에 돌입했지만, 이전의 마법사들이 해제를 진행해 둔 덕에 마법진 전체를 처리해야 한다는 부담은 덜어졌다. 하지만 남은 작업을 홀로 진행하기에는 여전히 무리가 있었다. 심지어 이후에 도착할 지원군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어려운 상태였으니.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마법진 해제를 도와줄 동료가 아니었다. 마력. 더 많은 기운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였다.

“힘을 조금 더 나눠 주도록 하마. 그러기 위해선 결계의 구조를 손봐야 해. 시간이 걸릴 거다. 그렇게 길진 않을 테니, 그때까지 받은 힘으로 버텨 보도록 해라.”

결계를 완전히 해제하고 온전히 카델에게만 힘을 집중할 순 없었다. 그랬다간 과도한 관여로 시스템이 말썽을 부릴지도 몰랐으니. 그랬기에 쿤라는 자신의 판단하에, 적절한 양의 힘을 추가로 나눠 주기로 했다.

‘쿤라의 힘이 늘어난다면 나 혼자 마법진을 해제할 수 있어.’

해제한 뒤에는, 잔당의 처리를 부하들과 청혈 기사단에게 맡길 셈이었다. 지금도 홀로 폭주를 감당하고 있을 마밀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쉽게 무너지지 않으리라 믿고 있지만, 개인적인 문제로 마밀이 너무 큰 부담을 지게 됐다. 만약 무리하던 마밀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에 대한 죄책감을 영원히 떨쳐 내지 못할 것이었다.

그렇게 카델이 쿤라의 힘을 기다리며 마력의 흐름에 집중하는 동안. 아군은 뒤바뀐 전장의 흐름을 따라 맹렬하게 적군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아하하! 그런 무겁고 칙칙하기만 한 날개로 뭘 어쩌겠다는 거야? 느려!”

내내 아군의 방어를 전담하던 라이돈은, 디포렉이 동료의 전투를 방해하려는 낌새가 보이자마자 곧장 공격을 시작했다. 동료를 돕기 위함이라기보단, 한시라도 빨리 전투를 끝내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공격을 피해 달아나는 디포렉의 뒤로 연달아 얼음 창이 날아 꽂혔다. 그가 지나간 경로마다 지면을 깨부순 묵직한 얼음이 냉기를 뿜어 댔다. 그에 아래에서 치유술을 전개하던 가르엘이 불만을 토로했다.

“이렇게 마구잡이로 공격하면 곤란합니다, 라이돈 경!”

“흐응, 어쩌라고? 장막은 계속 유지해 주고 있으니까, 나머지는 알아서 처리해!”

카델이 미미하게 유지 중인 암흑 마력 속에서 티 나지 않게 아군을 치유하는 일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알기는 할까. 애초에 라이돈에게 이해를 바라는 것부터 잘못이겠지만.

가르엘은 쓰러진 기사들을 라이돈의 공격 범위 바깥으로 나르며 생존자 확보를 위해 노력했다. 지금은 한 명, 한 명의 전력이 소중했다.

그리고 반과 루멘은, 디포렉이 도주시킨 샌디와 에드워드의 숨통을 끊어 내기 위한 공격을 이어 갔다. 요젠은 카델의 개인 호위를 맡고 있었으므로, 두 고위 마족의 목숨을 마무리 짓는 것은 반과 루멘의 몫이었다.

“죽어! 죽어!”

날개를 잃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샌디는, 디포렉 덕에 얄팍한 이성을 되찾았다. 그녀는 마수의 등에 올라타 자신을 쫓는 두 인간에게 무차별적으로 투창을 내던졌다.

공격을 회피하는 반과 루멘의 사방으로 지면이 솟구치며 흙먼지가 폭발했다. 한 대만 맞아도 몸 성히 살아 나갈 수 없는 공격. 그러나 마족을 추격하는 두 남자의 기세에는 변함이 없었다.

“내가 마수를 처리할 테니, 네가 마족을 공격해라.”

“명령할 시간에 검기나 날려.”

“항상 의아하지만 그런 지저분한 인성으로 어떻게 여태 대장의 옆에 붙어 있는 건지. 참 궁금하단 말이야.”

“내가 너와 단장을 똑같이 대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소름 끼치는군. 헛소리 말고 싸우기나 해.”

입으로는 쓸데없는 대거리를 이어 가면서도, 두 남자의 동선은 미리 짜 두기라도 한 것처럼 착착 맞아 들었다. 자연스럽게 속도를 늦춘 반이 대검을 휘두를 준비를 하는 동안, 루멘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샌디의 투창이 정확히 반의 머리를 겨눴다. 피하지 않는다면 적중이다. 그러나 반은 회피 대신 자세를 가다듬는 데에만 집중했다.

“절대 용서 못 해! 일말의 자비도 없이, 가장 고통스럽게 죽여 주겠어!”

흥분이 극에 달한 만큼, 샌디의 공격력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정면으로 맞는다면 가르엘이 달려온대도 회복이 어려울 것이었다. 그를 직감했음에도, 반은 두려움 없이 일직선으로 나아갔다.

빠르게 가까워지는 반의 모습이 심기를 거스른 듯, 해맑던 미소를 완전히 지워 낸 그녀가 악을 쓰며 창을 내던졌다. 하지만 투창이 그녀의 손을 떠나기 직전.

“……!”

그녀를 태우고 있던 마수의 몸체가 기울며, 샌디의 중심 또한 무너졌다. 뒤이어 그녀가 놓친 투창이 엄청난 풍압을 동반한 채 반에게 날아들었다. 당연하게도, 투창이 반을 직격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타이밍 하난 짜증 날 정도로 잘 맞추는군.”

바로 옆을 스쳐 간 투창이 반의 머리칼을 헝클였다. 흐트러진 은발 아래 붉은 눈이 번뜩이고. 다리 잘린 마수가 마기가 되어 흩어지자, 샌디와 에드워드는 무력하게 바닥을 굴렀다. 샌디는 빠르게 몸을 세워 정신을 잃은 에드워드를 낚아챘다. 하지만 그녀가 자리를 벗어나기 전.

“안 돼……!”

둘의 위로 거대한 일직선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반의 대검이었다. 대검을 감싼 오라는 지면과 가까워짐에 따라 점점 범위를 넓히며 샌디와 에드워드를 집어삼켜 갔다.

날개가 있다면 손쉽게 공격 범위를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그녀에겐 반쪽짜리 날개밖에 남지 않았고, 챙겨야 할 동료까지 있었다. 일순 에드워드를 버리고 혼자 몸을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결정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육중한 대검이 지면을 내리치며, 폭풍처럼 몰아치는 오라와 함께 찢어지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대검에서부터 뻗친 오라가 그들의 육신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뜨거운 기운이 얇은 가죽을 벗기고, 근육을 녹였다. 흐르는 핏물은 한 방울도 남김없이 빨아들였다. 양질의 피를 머금은 오라가 더욱 짙고 어둡게 일렁였다.

샌디는 물론 끔찍한 고통에 의식을 되찾은 에드워드까지. 온몸의 생기를 빼앗기는 낯설고도 흉악한 감각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죽음을 직감한 샌디는 절규하듯 디포렉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디포렉은 그들을 구할 수 없었다. 그는 하늘 높은 곳에서 죽어 가는 자신의 동료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러게 처음부터 얌전히 지하에 처박혀 살았으면 좋았잖아. 그랬으면 너희가 죽을 일도, 내가 귀찮아질 일도 없었을 텐데. 그렇지?”

“커, 커헉…….”

“내 말이 맞다고? 아하하! 나도 알아!”

축 늘어진 날개와 몸뚱이가 공중에서 덜렁거렸다. 그의 몸을 관통한 것은 얼음으로 뒤덮인 기다란 팔. 구멍 난 가슴팍을 중심으로 꽃잎 같은 얼음 조각이 피어났다. 라이돈은 디포렉의 뒤에 바짝 붙은 채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너희가 없었다면 카델도 그렇게 힘들어하지 않았을 텐데. 지옥에 가서 꼭 반성하도록 해.”

나지막한 읊조림과 함께 디포렉의 가슴을 뚫은 팔을 느리게 비틀었다. 얼어붙은 몸뚱이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흐르는 피까지 얼어 버린 디포렉의 눈에 안광이 사라지고. 라이돈은 명을 다한 고위 마족의 시체를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구멍 뚫린 시체가 낙하하며, 근방을 메우던 마수들이 일시에 자취를 감췄다. 필사적으로 적을 상대하던 청혈 기사단은 한 번에 절반이 줄어든 적군의 수에 당황하는가 싶더니, 이내 더욱 전투적으로 남은 마물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가르엘의 치유술로 기력을 회복한 덕이었다.

저들의 전투에는 관심 없다. 무심하게 시선을 돌린 라이돈의 눈 안으로 전장의 자그마한 점 하나가 들어찼다. 카델. 그를 발견한 라이돈의 표정이 순하게 풀어지며, 곧장 날아갈 준비를 했다. 귀찮아 보이는 적은 다 처리했으니, 카델의 곁에서 대충 장막을 유지할 셈이었다.

그렇게 카델에게로 하강하려던 라이돈이 주춤하며 몸을 세웠다. 땅이 진동하고 있다. 점점 심해지는 진동을 따라 지면이 갈라지고, 그 틈새로 불그스름한 무언가가 비쳤다. 불꽃이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꿈틀거리는 불꽃이 지면 아래서부터 이글거렸다. 그 불꽃에 담긴 기운을 감지한 라이돈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콰아아―

웅크리고 있던 카델의 등에서부터, 거대한 한 쌍의 날개가 솟구쳤다. 그것은 불꽃을 휘감은 용의 날개. 하늘 높이 솟구친 날개가 넓게 펼쳐지며, 지면 아래 고여 있던 불꽃이 눈부시게 발광했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은 라이돈의 입가로 즐거운 미소가 맴돌았다. 이 길고도 요란스럽던 전투가 끝났음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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