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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박했던 전투가 끝났으나, 청혈 기사단은 영 컨디션을 회복하지 못했다. 치유술은 일시적으로 기력을 끌어 올렸을 뿐, 오랜 전투에 시달렸던 기사들은 휴식을 원했다. 왕국의 방어를 전담하던 마밀 또한 의식불명의 상태였으니.
그렇다고 평화의 돌 탐색을 이 이상 미룰 수 없었기에, 비교적 상태가 멀쩡한 적린 기사단이 우선 탐색을 진행하기로 했다. 이번 전투에 죄책감을 가졌던 카델의 결정이었다.
“이 마을에 있는 건 확실하다고 했어.”
낡은 양피지를 펼친 카델이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아드몬이 넘겨준 양피지의 안쪽에는, 마이뉴 왕국이 보유한 돌의 위치가 적혀 있었다.
[무수한 평범, 무수한 안락, 무수한 영혼을 지키고자 싸웠네. 나의 영혼은 잔잔하게 고여 그들의 행복을 지켜볼 것이니. 깊고 깊은 영원 속에서 나의 투쟁을 마셔라.]
이 글귀만 봐서는 어째서 눈앞의 마을, ‘베네’가 봉인석이 자리한 장소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마이뉴 왕실은 세븐 나이츠의 의지가 ‘베네’에 묻혀 있다는 추가적인 기록을 찾아냈다. 복잡한 술식으로 봉인되었던 마법서를 마밀이 해독해 내며 얻은 정보였다.
‘이런 오지 마을에 평화의 돌이 묻혀 있다니. 무슨 기준인지 모르겠단 말이지.’
지킬 사람 하나 없는 곳에 귀한 봉인석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는 사실은, 근처에 적이 없음에도 괜스레 불길한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흐음, 왜 이렇게 두루뭉술하게 적어 놨대? 찾으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어느새 카델의 등 뒤로 다가온 라이돈이 그를 끌어안듯 감싸며 양피지를 빼앗았다. 순식간에 시야 바깥으로 사라진 양피지에 카델이 미간을 좁혔다.
“내놔, 라이돈. 글귀 아직 못 외웠어. 한시라도 빨리 찾아야 한단 말이야.”
“왜 카델만 봐? 내가 찾아낼 수도 있는 거잖아. 설마 날 못 믿는 거야, 자기?”
“그건……!”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라이돈이 글귀를 해석할 수 있으리란 기대감이 들지 않았다. 카델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자, 라이돈이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옆으로 물러났다.
“나도 할 수 있어. 인간들이 찾는 걸 내가 못 찾을 리 없잖아!”
라이돈의 변덕에 따라 주기엔 상황이 그리 여유롭지 못하다. 대충 달래 주고 다시 양피지를 뺏어 오는 쪽이 나을 것이다. 그렇게 한숨을 삼킨 카델이 양피지로 손을 뻗으며 라이돈을 구슬려 보려 했으나.
“내가 찾을 거야!”
“야……! 라이돈!”
순식간에 작은 요정으로 변신한 라이돈이 양피지를 훔쳐 비행하기 시작했다. 난데없는 부하의 독주에 얼빠져 있기도 잠시. 빠르게 정신을 차린 카델이 뒤따라오던 부하들에게 외쳤다.
“쟤 좀 잡아 와!”
항상 옆에 붙어 있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사실 이 자그마한 요정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모습을 감출 수 있는 녀석이었다.
“꼭 환혹술까지 사용해야 했을까요, 라이돈 경? 단장님의 경멸하는 표정이라니. 정말 상처받을 뻔했다고요.”
“감히 단장 얼굴을 가지고 장난을 쳐? 어디 있는 거냐, 요정 놈. 발견하면 바로 주먹을 먹여 주지.”
“초콜릿을 줄 테니 그만 놀고 내려와라, 라이돈. 딱히 널 잡아서 날개를 떼 버리려는 건 아니야.”
단장의 명령으로 라이돈을 추격하던 단원들은 무방비하게 환혹술에 걸려들었다. 대부분 카델의 경멸, 비난, 무시를 겪은 탓에, 간신히 환혹술에서 풀려난 그들은 라이돈에 대한 분노가 급상승한 상태였다.
이렇듯 전투적으로 라이돈을 추격하는 단원들 사이, 유일하게 환혹술에 당하지 않은 요젠. 그만이 차분하게 암기를 퍼뜨렸다.
“어때? 찾을 수 있겠어?”
“……마을 전체에 본인 마력을 뿌려 뒀어. 내 추적을 염두에 둔 모양이야.”
미리 암기를 묻혀 두지 않는 이상, 요젠이 특정 대상을 쫓을 때 필요한 것은 대상의 기운이었다. 기운을 감지해 위치를 알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라이돈은 이미 요젠의 수를 파악하고 있다는 듯, 제법 농도 높은 마력을 곳곳에 뿌려 두었다.
“하여간 잔꾀는 많아서……. 추적이 어려울까?”
“불가능하진 않아. 시간이 조금 걸릴 뿐이지.”
대답을 들은 카델이 한숨과 함께 요젠의 옆자리인 나무 그늘에 주저앉았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부하들의 성난 외침을 제외한다면, 마을은 적막하기만 했다.
베네 마을에 평화의 돌이 묻혔다는 걸 알아내자마자, 왕국은 마을 주민들을 임시로 이주시켰다고 했다. 그러니 수색이 끝날 때까진 아무도 이 마을에 머무를 수 없다. 작전을 수행 중인 적린 기사단을 제외한다면.
“…….”
나무 기둥에 머리를 기댄 카델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적린 기사단만 존재하는 마을이라. 감상적인 생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란 건 알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했다. 전쟁이고 뭐고, 전부 내다 버린 채 영지나 하나 얻어다 옹기종기 모여 살고 싶었다.
‘……재밌을 것 같다.’
라이돈이 바다를 좋아하니, 저택은 바다 앞에 짓는 편이 좋을 것이다. 몸을 가만히 놔두지 못하는 녀석들이니 넓은 수련장도 필요하겠지. 사과를 좋아하는 요젠을 위해 과수원을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가르엘을 위해 인적이 드문 장소를 골라야 한다. 근처에 부딪힐 귀족이 없었으면 좋겠고, 가끔 놀러 가기 좋은 작은 마을과 붙어 있었으면 좋겠다.
다함께 물놀이를 하고, 배가 고프면 과수원의 과일을 따 먹고, 종일 뒹굴거리다 심심하면 마을에 내려가 구경을 해야지. 상상만으로도 풍족한 평화가 느껴져, 입가엔 어느새 미소가 맺혀 있었다.
그러나 기분 좋게 올라간 호선은 얼마 안 가 자취를 감췄다.
‘내가 전쟁에서 도망친다면, 우리가 쌓아 온 추억도 전부 사라지겠지.’
세계선이 통째로 사라진다면, 지금껏 자신이 부하들과 맺었던 모든 관계도 사라질 것이다. 시스템은 새로운 세계선을 찾아갈 것이고, 그곳에선…….
‘새로운 카델 라이토스가 세상을 구하는 건가.’
자신이 210번째 빙의자라고 했으니, 실패한다면 분명 또 다른 빙의자가 생길 것이다. 도대체 시스템은 어떤 방식으로 빙의자를 선출하고, 다른 세계로 옮겨 오는 것일까. 그러한 근본적인 의문을 전부 제쳐 두자 문득 떠오르는 한 가지 생각.
‘만약 새로운 카델 라이토스가 내 단원들을 만나지 못한다면, 저 녀석들은 영원히 보답받지 못할 상처 가득한 삶을 살아가게 될 거야.’
만약 새로운 카델 라이토스가 부하들을 만난다고 해도, 과연 퀘스트를 위한 도구가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 대해 줄 수 있을까. 자신 만큼 부하들을 사랑해 줄 수 있을까. 그러지 못한다면, 새로운 세계의 부하들은 너무도 괴롭고 외로운 삶을 살게 될 테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시금 고통의 굴레로 빨려 들어가는 걸 지켜볼 수는 없다. 느리게 눈을 뜬 카델이 잎사귀에 가려진 하늘을 멍하니 올려 보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았어. 빙의자인 내 목적은 전쟁을 승리로 돌리는 것. 그것 하나뿐이다.’
달라진 것은, 실패했을 때 떠안아야 할 절망의 크기. 확실한 승리가 아니라면 의미가 없다. 자신이 이토록 크고 무거운 짐을 짊어질 만한 인간인가. 의심을 따라 회의감이 들어찼지만, 견디는 수밖에는 없었다.
저도 모르게 차오르는 한숨을 가까스로 집어삼킨 카델이 고개를 돌렸다. 생각만큼 추적이 쉽지 않은지, 정좌를 틀고 앉은 요젠의 미간에 금이 갔다. 그리고 카델이 반사적으로 그의 미간을 풀어 주려 손을 뻗은 순간.
[찾은 것 같아, 자기! 빨리 와 봐!]
기사단의 머릿속으로, 라이돈의 신난 음성이 울려 퍼졌다.
*
라이돈이 자리한 곳은 마을 외곽에 있는 오래된 우물 앞이었다. 우물에 걸터앉은 작은 요정이 자신을 둘러싼 동료들을 돌아보며 생긋 미소 지었다.
“느낌이 왔어. 평화의 돌은 여기 있을 거야.”
제법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카델은 드디어 손안에 들어온 양피지와 우물을 번갈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확실히 ‘고여 있다’는 표현이나 ‘마셔라’라는 단어를 보면 물과 관련되어 있을 법도 해. 하지만…….”
우물은 몹시 깊었고, 물로 가득 차 있었다. 섣불리 들어가기에는 위험이 커 보였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우물 안을 들여다본 카델이 가볍게 입맛을 다셨다. 잔잔한 수면 위로 근심 어린 표정이 비쳤다.
“수영이 가능하고, 폐활량이 가장 좋은 녀석을 내려보내는 게 어때요?”
“아무리 폐활량이 좋아도 이 정도 깊이면 위험할 거야. 안에 평화의 돌이 있다는 게 사실이라면 가져오는 동안 이상한 함정이 발동될 수도 있고.”
부하들을 내려보내는 건 영 내키지 않았지만, 당장 다른 사람을 찾아올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자신의 폐활량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렇게 카델이 섣불리 우물 탐색에 돌입하지 못하며 망설이던 무렵.
“밧줄을 묶고 내려가면 위급 시에 구해 줄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정도 길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
잠시 자리를 비웠던 가르엘이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어디서 구한지 모를 길고 튼튼한 밧줄이 들려 있었다.
“오래된 밧줄인 거 아니야? 끊어지면 어쩌지?”
카델은 가르엘이 들고 온 밧줄을 요모조모 뜯어보며 안전을 걱정했다. 가르엘은 그런 카델을 내려 보며 작게 웃었다.
“그렇게 걱정 안 해도 큰일은 없을 거예요. 다들 목숨 하나는 질기니까요. 긴급 사태가 벌어졌다고 허둥댈 만한 인물도 없고.”
“……알겠어. 그럼 누가 들어갈래?”
수영은 전원이 가능했고, 폐활량은 다들 본인이 가장 우수하다고 주장했다. 모두가 자신만만하니, 대충 아무나 찍어 보내면 될 것 같았다.
‘힘이 좋은 반을 보낼까? 아니면 빠른 루멘이 나으려나……. 요젠이 감각이 예민하니까 봉인석을 더 빨리 탐색할 수 있을 거야. ……가르엘이라면 호흡이 좀 불편해도 어떻게 수습할 수 있지 않을까.’
저마다 장단점이 있어 의외로 선택이 어려웠다. 그리고 그런 카델의 앞으로, 의기양양한 표정의 라이돈이 날아들었다.
“내가 갈래. 위치도 내가 찾았으니까, 돌도 내가 가져올 거야.”
“……네가? 물속에선 날지도 못할 거 아니야.”
“나 헤엄 잘 쳐.”
“헤엄도 몇 번 안 쳐 봤으면서?”
“그래도 잘할 수 있어! 날 못 믿는 거야, 자기?”
라이돈을 못 믿는다기보단, 다른 부하들이 들어가는 편이 훨씬 나아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설명한대도 이미 마음을 정한 요정의 심기만 불편해질 뿐일 테다.
‘그래, 뭐. 처음 바다에 들어갔을 때도 물개처럼 잘 놀았으니까.’
수영을 못하는 것도 아니고, 밧줄을 단단히 매어 둔다면 걱정한 일이 벌어진다 해도 별문제 없을 것이다. 결국 라이돈의 입수를 허락한 카델이 그의 손에 밧줄을 쥐여 주었다. 반은 반대쪽 줄을 잡고 근처에 있는 나무 기둥에 단단히 묶어 고정했다.
“네 몸에 비하면 밧줄이 너무 두껍다. 인간형으로 바꿔 봐, 라이돈.”
“인간형으로 가면 몸이 꽉 껴서 불편할 거야. 이대로 갈래.”
“아니, 아무리 그래도…….”
카델은 라이돈의 몸에 밧줄을 묶어 주려 했으나, 작은 요정은 말을 듣지 않았다. 밧줄을 꽉 움켜쥔 그가 만류하는 카델의 말을 무시한 채 우물 안으로 입수했다.
“라이돈!”
누가 밧줄을 묶지도 않고 그냥 들고 가는가. 그러라고 가져온 밧줄이 아닐 텐데. 경악하며 우물 앞으로 달려갔으나, 이미 라이돈의 모습은 수면 아래로 사라진 뒤였다.
“괜찮을 거야, 대장. 알아서 잘 살아 나오겠지.”
“저런 조그만 몸이면 바닥을 찍는 데도 오래 걸릴 거야!”
“여차하면 내가 들어가서 구해 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 라이돈 걱정이라니,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일이라고.”
루멘이나 다른 단원들의 눈에 비친 라이돈은, 눈만 돌리면 말썽을 피우는 주제에 까닭 없이 카델의 귀염을 받는 얄미운 존재였다. 반면 카델의 눈에 비친 라이돈은, 잠깐만 주의를 돌려도 상처를 달고 와 금이야 옥이야 아끼게 되는 존재였으니. 걱정의 밀도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라이돈이 입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으음, 이건 살려 달라는 신호일까요? 아니면 돌을 발견해서 신나 죽겠다는 요정의 몸부림?”
나무 기둥에 묶인 밧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나뭇잎이 맹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