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6화 (376/521)

“……시험?”

카델은 얼빠진 사람처럼 멍한 얼굴로 쿤라의 말을 되풀이했다. 세계선의 소멸과 재생은 마계 전쟁의 승리를 보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세계선을 건드는 목적이 마계 전쟁의 승리가 아니라면, 도대체 시스템은 무엇을 원하는가.

쿤라의 주장이 가진 핵심은 곧 시스템이 세계의 소멸과 재생을 반복하는 ‘기준’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였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반쪽이, 네가 알 수도 있겠지. 아니. 너밖에 알지 못해.”

이 세계와 가장 무관한 곳에서 가장 오래도록 세계의 흐름을 읽고, 그 세계를 향유해 왔던 자. 그것은 바로 빙의자였다. 그리고 현 세계선에 존재하는 빙의자는 자신뿐이다. 그러니 시스템의 목적을 알아낼 수 있는 이 또한 자신뿐일 것이다.

바닥에 주저앉은 그가 심각해진 낯으로 턱을 문질렀다.

‘그래, 이거였어. 내가 쿤라의 얘기를 들은 뒤로 계속 찜찜함을 느꼈던 이유가.’

세계선의 반복. 처음에는 그 목적이 오로지 ‘마계 전쟁의 종식’에만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는? 목적을 이룬 시스템이 이 세계선에서 완전히 발을 뺄까? 목적 달성과 동시에 사라진다면, 어떻게 자신의 영혼을 이곳에 묶어 ‘카델 라이토스의 삶’을 살게 할 수 있는 것인가.

……만약 목적을 달성한 뒤에도 시스템이 이 세계선에 남아 힘을 쓴다면.

‘시스템의 존재는 분명히 다시 이 세계에 영향을 끼칠 거야.’

그것이 좋은 영향일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쿤라의 말대로라면, 시스템은 전쟁 이전에도 세계선을 골라 가며 뭔가를 ‘시험’했다. 그리고 그 시험의 내용은 단순 전투.

시스템은 세계를 아끼지 않는다. 그것이 쿤라와 가장 크게 비교되는 점이었다. 쿤라는 인간과 마족의 싸움을 방관하지만, 죄 없는 것들은 전부 거둬 수호한다. 세계에 속한 것을 전부 품지는 않더라도, 세계 그 자체는 아끼기 때문이었다.

‘쿤라의 비유대로야. 시스템은 이쪽의 수많은 세계선을 그저 실험용으로만 다루고 있어.’

이제 자신은 이 세계를 ‘가짜’라고 여길 수 없다. 자신이 살던 곳과는 다르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또 하나의 현실.

‘하지만 시스템의 의중을 알아내려면, 나도 시스템처럼 생각해야 한다.’

이 세계를 그저 게임이라고 생각하자. 자신이 겪었던 모든 일은 이미 계획된 스토리에 불과하고, 모든 인물은 만들어진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세계에는 주요 등장인물과 언제 버려도 상관없는 엑스트라가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그들의 싸움과 죽음을 지켜보며 알아내야 할 것.

낼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수까지 꺼내 둔다. ‘설마’, ‘말도 안 돼’, ‘그럴 리 없지’ 따위의 이성적 판단은 필요 없다. 그런 건 가능성을 제한하는 방해물일 뿐이었다.

그렇게 카델이 없던 힘까지 끌어모아 머리를 쥐어짜 내던 때. 불쑥 떠오른 한 가지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밸런스 패치…….”

“뭔가를 떠올린 거냐?”

불쑥 튀어나온 반응에 쿤라의 눈썹이 들썩였다. 카델은 잔뜩 미간을 좁힌 채 주먹을 쥐었다 피기를 반복하더니, 이내 벌떡 일어나 주변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히어로 오브 나이츠요. 그 게임, 제가 이곳에 오기 전에 ‘헬 모드’를 새롭게 패치한다고 했거든요. 예전에 정말 뜬금없이 떠오른 기억이라 어이없어서 웃고 넘겼는데, 생각해 보면 그때 분명 헬 모드 난이도 조절을 위한 테스터를 구한다고 했어요.”

“헬 모드……? 그게 뭐냐.”

“그리고 쿤라, 당신이 새로 떠올린 기억이요. 그건 아마 클로즈 베타 때의 기억일 거예요. 게임을 출시하기 이전에 미리 체험해 볼 테스터를 모집했거든요. 전 그때 해 보진 못했지만, 클로즈 베타 때에는 게임 내용이 많이 달랐다고 했어요. 전투도 단순하다고 했고. 아마 주인공도 달랐을 거예요”

“크, 클로즈……? 알아듣게 좀 말해 보거라.”

“……그래. 그래! 클로즈 베타 테스트 당시에 스테이지를 맨 처음으로 클리어 한 사람. 그 사람은 입원 중인 환자였다는 인터뷰를 읽었었어. 왜 잊고 있었지? 그 사람이 클리어하기 전까진 게임에 대한 아무런 후기도 올라오지 않다가, 클리어 한 이후엔 후기가 쏟아졌지. 공략에 실패했든, 성공했든 상관없이. 그때도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카델은 쿤라에게 설명을 해 준다기보단, 일단 홀로 말을 뱉음으로써 생각을 정리하는 중인 듯했다. 그 덕에 쿤라는 신조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노인처럼 의아하게 눈을 깜빡여야 했다.

“당신이 말한 ‘시험’은 어쩌면 게임의 패치, 그러니까, ‘업데이트’와 관련된 걸지도 몰라요. 그리고 시스템은 매 업데이트마다 테스터를 모집한다는 명목하에 빙의자들을…….”

어쩌면 너무 과한 추측일지도 모른다. 그야, 애초에 멀쩡한 사람을 강제로 게임 속으로 불러들여 체험하게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됐으니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하지만 그가 과거의 기억에 의존해 조금 더 현실적으로 시스템의 정체를 밝혀 보려던 때였다.

“……반쪽이?”

“어…….”

갑작스럽게 터진 코피가 바닥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난데없는 코피에 코를 막거나 고개를 숙여 보기도 전.

“이게…….”

별안간 눈앞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붉게 깜빡이는 시야가 꼭 거대한 경고창 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아무런 시스템 창도 뜨지 않고, 뭔가의 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없지만. 카델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내가 알아선 안 되는 진실에 접근하고 있는 거야. 더 이상 생각하지 못하도록 막으려는 거다.’

만약 이 이상 뭔가를 알아내려 한다면, 시스템이 극단적인 수를 쓸지도 몰랐다. 경고 수준일 터인 지금도 육체는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다. 코피는 멎을 기미를 보이지 않고, 뒤이어 극심한 현기증이 따라왔다. 이런 상태에서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있을 리 없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쿤라가 다가와 기운을 불어넣으려 했으나, 카델이 그를 저지했다.

“기다, 려요.”

“기다리라니, 지금 네 상태가 어떤지 알기는…….”

“기다려.”

만약 이 상황에서 시스템이 경계하는 쿤라의 힘까지 합세한다면. 놈이 무슨 조치를 내릴지 몰랐다.

지금껏 자신이 기억하지 못했던 일들. 밸런스 패치나 헬 모드, 베타 테스트, 환자, 첫 클리어 등등. 빙의한 후로 완전히 잊고 있던 원래의 기억들이 돌아오기 시작한 이유. 그것은 분명 쿤라와의 ‘영혼 분리 작업’ 때문일 것이다.

카델 라이토스와 신여환의 영혼 사이. 융합되었던 두 영혼이 조금씩 떨어지며, 시스템이 부여한 구속이 약해졌다. 그 틈을 비집고 조금씩 옛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시스템이 기억을 지운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존재하겠지만, 빙의자가 진실에 도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도 있을 터.

‘시스템이 빙의자의 변화를 눈치채고 조치를 취하는 기준은 뭐지? 말? 생각?’

지금껏 자신은 직접 말을 뱉으며 알아낸 것들을 정리했다. 시스템은 그것을 감지해 경고를 보내는 것일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 자신의 생각까지 읽을 수 있을지도.

‘어떤 게 맞는지는 알 수 없어. 그러니 지금은 생각도, 말도. 전부 멈추는 게 낫다.’

시스템이 자신의 기억에 영향을 끼치기 전에, 경고를 받아들이고 생각을 멈춰야 했다. 그랬기에 카델은 극심한 통증 속에서 묵묵히 인내했다. 쿤라는 기다리라는 카델의 말을 받아들이기로 한 듯, 비틀거리는 그를 지탱한 채 피가 쏟아지는 코를 받쳐 주었다.

그렇게 대략 20여 분이 흐르고. 시야를 방해하던 붉은색도, 현기증과 코피도 멎었다. 카델은 기진맥진해진 몸을 쿤라에게 완전히 기댄 채 떨리는 숨을 골랐다.

“……이제 괜찮아 보이는군. 갑자기 왜 몸에 이상이 생긴 거지?”

쿤라가 코를 받치고 있던 손을 털어 내자, 가벼운 불길이 일며 피로 물들었던 손바닥이 깨끗하게 닦였다. 제 가슴팍에 기댄 머리를 가볍게 쓸어내린 쿤라가 카델의 턱 끝을 들어 자신을 올려 보게 만들었다. 반쯤 풀린 눈이 멍하게 깜빡인다 싶더니, 이내 조금씩 안광이 맺혔다.

“한 번에 너무 많은 걸 알아냈나 봐요. 시스템이 전에 없던 방식으로 경고를 보냈어요. 관련된 얘기는…… 조금 나중에 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알겠다.”

쿤라는 지친 카델을 다그치거나 재촉하지 않았다. 그 역시 불쑥불쑥 떠오르는 기억에 과격한 혼란을 느끼는 중이었으나, 아무래도 이 작은 인간의 혼란에 비할 바는 아닐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돌아가도록 하지. 생각이 정리된다면 펜던트로 날 불러라.”

그리 말한 쿤라가 카델을 가볍게 안아 들었다. 평소라면 뭐 하는 짓이냐며 그를 밀어 냈겠으나, 늘어진 몸은 쿤라의 품이 주는 안락함을 떨쳐 내지 못했다.

쿤라는 얌전해진 카델을 안아 들고 기사단이 모인 집을 향했다.

난데없이 카델을 안고 등장한 쿤라에 단원들의 소란이 있었으나, 그새 단잠에 빠진 카델을 깨울 만큼 대단한 소동은 아니었다. 그들은 카델을 가장 넓은 방에 옮겨 재우고, 쿤라가 대강 꾸며 낸 변명으로 단장의 피로를 짐작하며 걱정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얼른 성으로 이동하자. 마밀 님이 깨어나셨대!”

카델은 새벽부터 날아온 전서조의 편지를 받고 곧장 마을을 떠날 준비를 했다. 잔뜩 뻗친 머리를 하고선 대충 싼 짐을 한 품 가득 든 모습은 꼭 소풍에 들뜬 아이 같기도 했다.

“어젠 기절해서 들려 오더니, 한숨 자니까 기력이 회복된 모양이지?”

그런 카델의 모습을 바라보던 루멘이 헛웃음을 뱉었다. 저녁부터 굶었으니 혹시라도 배고플까 싶어 준비한 음식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하지만 당장 제 스승님의 상태를 살피고 싶어 안달이 난 그의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원하는 것을 해 주고 싶었다.

“평화의 돌은 제가 챙겼어요, 단장.”

“응, 고맙다.”

“사과 줄게. 배고프면 먹어.”

“응, 좋아.”

“자기, 난 아직 졸린데.”

“이리 와. 주머니에 들어와서 자.”

카델은 다가오는 단원들을 한 명씩 상대하며 서둘러 이동할 채비를 했다. 저녁에 겪었던 일들은 아직도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으나, 마밀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오히려 그 지독한 진실들이 허상처럼 느껴졌다.

지키고 싶은 것이 명확한 탓이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더 이상 현실 세계로의 복귀가 아니다. 이 세계에 머무는 소중한 이들의 미래였다. 온 신경이 그들에게 쏠려 있으니, 시스템의 목적이야 어찌 됐든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는 것이었다.

“출발하자!”

가르엘의 손길로 옷매무새를 정돈한 카델이 빠르게 이동 마법진을 완성했다.

*

도착한 곳은 왕성의 별채. 마이뉴 국왕이 마밀을 위해 특별히 내어 준 개인 공간이었다. 카델은 국왕과의 만남까지 뒤로 밀어 둔 채 곧장 별채로 이동했다.

단원들은 전부 응접실에 모여 마밀이 나오기를 기다리려 했으나, 카델은 수십 개는 될 법한 방문을 일일이 열어젖히며 직접 마밀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적적하던 별채에 요란스러운 발소리가 이어지길 몇 분.

“아직 회복 중인 환자다. 알고는 있는 건지.”

기어코 마밀의 방을 찾아낸 카델이 더없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스승님!”

마밀은 햇살이 잘 드는 창가 침대에 등을 기댄 채 카델을 바라보았다. 며칠간 의식이 없었던 터라 안색은 그다지 좋지 못했으나, 표정에는 귀찮음을 가장한 반가움이 번져 있었다.

마밀의 앞으로 뛰듯이 달려간 그가 허둥지둥 상태를 살피며 말했다.

“회복 중인 환자라면서 시종은 왜 전부 물려 뒀어요? 갑자기 상태가 악화되면 어쩌시려고!”

“사람이 많아 봤자 거슬릴 뿐이야. 내 몸은 내가 직접 챙기면 된다. 갑자기 쓰러질 만큼 아픈 것도 아니고.”

“의사도 아니면서 그걸 어떻게 알아요? 적어도 치유사 한 명 정도는 곁에 둬야죠.”

“치유가 필요 없다는 판단이 섰으니 보낸 거 아니겠냐. 에잇, 계속 시끄럽게 쫑알거릴 거면 나가거라!”

“걱정되니까 하는 소리죠! 그리고…….”

뚝 말을 끊은 카델이 입술에 힘을 주었다. 금세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시선을 내리깐 그가 작게 숨을 골랐다. 마밀이 이렇게 된 것은 전부 자신의 책임이었다. 시스템의 농간이 있었다거나, 세계와 관련된 중요한 비밀을 밝혀야 했다거나. 그런 모든 일은 차치해야 했다.

하지만 카델이 사과의 말을 입 밖으로 꺼내기도 전.

“이미 지난 일이고, 널 원망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사과는 필요 없어.”

마밀이 카델의 의지를 잘라 냈다. 그는 진심으로 카델의 사과를 받고 싶지 않다는 듯 단호하게 일갈했다. 마밀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사내가 아니다. 그는 진심으로 카델을 아꼈고, 그만큼 최선을 다해 그를 이해하려 했다.

“네 잘못은 전쟁 도중 전쟁터를 이탈했다는 거야. 지휘해야 할 단원들을 방치했고, 그 탓에 혼란이 찾아왔지.”

“네. 전부 제 탓이에요. 정말…….”

“그뿐이다. 결국 너는 돌아와 청혈 기사단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던 골칫거리를 해치웠고, 결과적으론 왕국에 평화를 가져왔어.”

“하지만 제가 없던 공백을 버티느라 스승님은 크게 다치셨어요.”

“지원군의 마력 폭주를 막느라 그렇게 됐을 뿐이다. 마력 폭주는 네가 자리에 있었다 해도 막을 수 없던 일이었어. 멍청한 마법사들이 조심성 없이 마법진을 헤집어 화를 입은 게 네 탓은 아니니까.”

“그래도……!”

마밀은 계속해 자기 잘못을 시인하려는 카델의 어깨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항상 무심함을 띠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맑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나의 부상을 네 탓이라 생각하지 않고, 그렇게 생각할 이유도 없다. 그러니 너도 쓸데없는 죄책감은 묻어 두거라. 제자가 스승을 무리시켰다고 일일이 사과했다가는, 되레 사과의 의미가 퇴색될 게다.”

“…….”

“나의 일에 부담을 갖지 말거라. 그거야말로 내가 가장 원하지 않는 일이다. 그 누구도 전쟁의 무게를 홀로 짊어질 순 없어. 항상 너의 곁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라. 그들은 너에게서 사과보다 감사와 웃음을 바랄 게다.”

마밀에게 있어 카델은 소중한 제자이자, 지키지 못했던 옛 친우가 사랑을 주었던 핏줄. 그는 카델이 젠가처럼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지 않기를 바랐다. 자신을 아끼는 사람들 속에서, 그들의 사랑을 받아먹으며 살기를 원했다.

어깨를 쥐었던 손을 들어 부드러운 머리칼을 쓰다듬자, 눈치를 보는 듯하던 카델의 눈매가 조금씩 일그러졌다. 마밀은 회색 눈동자 위로 투명하게 고이는 눈물을 발견하곤 낮은 한숨을 쉬었다.

“사내 녀석이 이리 쉽게 울음을 터뜨려서야.”

“고맙습니다, 스승님. 정말 고맙습니다…….”

마밀의 위로는 단원들의 위로와는 그 결이 달랐다. 그는 이 세계에서 카델의 유일한 스승이었고, 믿음직스러운 연장자이자 보호자였다. 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온전히 기댈 수는 없더라도, 그의 존재만으로도 카델은 따뜻한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에게 있어선 마밀 키파가 이 세계에 남은 카델 라이토스의 혈육보다 훨씬 가족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렇게 카델은 마밀의 곤란한 목소리를 배경 삼아 한참을 울어 댔다. 인지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던 건지, 의지할 수 있는 어른 앞에서 카델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그리고 거의 30분 남짓을 지겹도록 울어 댄 뒤. 참다못한 마밀이 귀가 아프다며 목청을 높일 즈음, 겨우 울음을 그친 그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그럼 건강하신 거 봤으니까, 이만 가 볼게요. 평화의 돌도 전달해야 해서요.”

“아직 건강하진 않다만.”

“아까 등짝 때리시는 거 보니까 건강은 이미 다 되찾은 것 같던데요.”

훌쩍거리면서도 서운했던 점은 꼭 짚고 가는 모습이 어이없었는지, 가볍게 코웃음을 친 마밀이 손을 흔들었다.

“적당히 추스르다 가거라. 그 꼴로 폐하를 뵈었다간 귀찮은 일이 생길 게 뻔하니.”

퉁퉁 부은 눈에 벌게진 얼굴은 확실히 국왕의 앞에 내보이기에 적절한 모습은 아니었다. 카델은 마밀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제법 씩씩한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스승과 제자의 오붓한 시간을 위해 지루한 대기를 견디고 있던 단원들. 그들은 자신의 단장이 잔뜩 불은 면발이 되어 등장했다는 데에 큰 충격을 받았다.

“단장……!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반은 카델이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달려가 그의 뺨을 붙들고 꼼꼼히 훑어봤다. 혹시 마밀의 상태가 예상보다 좋지 않았던 걸까. 걱정 가득한 눈길을 마주한 카델이 멋쩍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거 아니야. 마밀 님은 건강하셔. 얘길 나누다 보니까 조금 감정이 격해져서…….”

“……정말이죠?”

“응.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오히려 마밀의 앞에서 시원하게 울어 젖힌 덕에 속이 시원해졌다. 앞도 잘 보이지 않는 눈을 휘어 미소 짓자, 그제야 반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서 다가온 이는 라이돈으로, 그는 코앞에 있는 카델의 얼굴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엄청 못생겼어, 자기! 그 마법사가 자기를 붕어로 바꿔 버린 거 아니야? 가서 혼내 줘야겠는데!”

“너도 울면 이렇게 붓거든?”

“난 울어도 예쁜데? 카델도 그래서 좋아하는 거 아니야?”

당당하게 자신의 미모를 치켜세운 그가 불쑥 손을 뻗어 카델의 눈을 가렸다. 눈꺼풀을 지그시 누르는 압력에 당황하기도 잠시. 이내 피부 위로 시원한 한기가 스며들었다.

국왕을 만나려면 아무래도 부기부터 빼는 편이 좋겠지. 라이돈의 놀림을 뒤로한 채 묵묵히 그의 마사지를 받는 카델의 주위로 단원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몇 번이나 카델이 우울하지 않다는 확인을 받아 내고, 마밀이 괴롭히지 않았다는 말을 열 번쯤 들은 뒤에야 겨우 안심했다.

그런 단원들의 귀찮기까지 한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카델은 문득 깨달았다. 지금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 이곳에서 일궈 낸 소중한 관계들. 이 모든 것이 무수히 소멸했던 세계선 속, 간신히 살아남은 한 가닥의 희망이라는 것. 이 또한 시스템의 ‘시험’을 받고 불태워질 위기에 직면했으나, 결코 쉽게 스러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시스템의 ‘시험’을 안전히 끝마치는 게 아니었다. 바로 그 이후. 겨우 위기를 넘긴 이 세계가 또 다른 ‘시험’을 맞닥뜨리지 않고, 평화롭게 이어질 방법. 그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마계 전쟁은 스토리의 끝일 뿐.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는 승전만으론 부족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