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두 번, 세 번. 반짝이는 눈동자가 몇 번이고 문장을 타고 올랐다. 눈빛에는 총기가 가득했지만, 양피지에 고정된 얼굴은 착실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점점 기울어지는 고개와 함께 양피지에 코를 박다시피 한 카델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라는 거야…….”
몇 번을 읽어 봐도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화이트 왕국은 글귀의 가장 첫 구절인 ‘하나의 섬, 흠뻑 잠긴 세계의 유일한 숨’에 기대어 섬들을 수색 중인 듯한데. 사실 ‘하나의 섬’ 말고는 전부 애매모호한 비유뿐이라, 어느 부근부터 수색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다.
“흠뻑 잠긴 세계……. 이건 해룡 때문에 해수면이 상승한 걸 비유한 건가? 그런데 이걸 잠겼다……라고 할 수 있나? 사실 해룡이 아예 섬을 침수시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든가.”
어쩌면 이벤트 스토리의 컷신에는 해룡이 섬을 침몰시키는 장면이 나왔을지 모른다. 그런 거라면 지금으로선 찾을 방법이 묘연해진 것이 아닌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수록 단서와는 멀어지기만 했다. 차라리 부하들을 불러 모아 머리를 맞댄다면 다양한 의견을 조합해 볼 수 있을 테다.
“조금이라도 쉬게 해 주고 싶었는데.”
혼자 조금이나마 수색 범위를 좁혀 낸다면, 부하들의 체력 소모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야밤에 나와 혼자 양피지를 들여다보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밤새 글귀를 분석해 많은 단서를 찾아낸다면, 내일 수색에 돌입할 부하들이 한결 편해질 테니까.
그런데 이렇게나 빨리 벽에 가로막혀서야.
“쿤라한테 물어볼까.”
쿤라는 이전 마계 전쟁 때에도 ‘세븐 나이츠’와의 연이 있었다 했으니. 어쩌면 평화의 돌의 대략적인 위치를 알 수도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자신으로선 짐작할 수도 없을 만큼 아득한 세월을 살아온 존재가 아니던가. 얕은 지식에 기대 허덕이는 것보단 쿤라의 의견을 묻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리 생각한 카델이 펜던트를 움켜쥔 순간이었다.
“자기, 여기서 혼자 뭐 해?”
막 잠에서 깬 라이돈이 등 뒤로 다가왔다. 뻑뻑한 눈을 비비며 게슴츠레 카델을 훑어 낸 그가 뒤늦게 양피지를 발견했다.
“혼자 재미없는 글을 읽고 있었어? 왜?”
“그냥. 잠이 안 와서 시간 좀 죽이고 있었어.”
본심을 말하기가 뭣해 둘러대자니, 라이돈이 자연스럽게 어깨에 팔을 얹어 왔다. 뒤에서부터 카델을 꽉 끌어안은 그가 카델의 머리 위에 턱을 괸 채 나른한 숨을 내쉬었다.
“오늘 꽤 재밌는 일들이 있었잖아. 안 피곤해? 카델 체력이라면 이미 한참 전에 뻗어야 하는데. 이상하다.”
“내 체력이 뭐가 어때서? 많이 늘었거든?”
“그래 봤자 굼벵이에서 지렁이가 된 정도인걸.”
“……떨어져.”
싸늘하게 식어 버린 카델이 라이돈을 밀쳐 내려 했으나, 단단하게 얽힌 팔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애교 섞인 웃음소리가 바닷바람을 타고 선선하게 흩어졌다.
“잠이 안 오면 나랑 놀자.”
“안 돼. 조금만 더 글귀 분석하다가 잘 거야.”
“그런 건 내일 해도 되잖아.”
“물론 그렇긴 하지만, 난 지금 하고 싶……!”
이 노력이 전부 미래의 본인을 위한 것이건만. 카델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라이돈은, 그가 거절의 말을 꺼내려는 기색을 보이자마자 끌어안은 팔을 풀었다. 그러고는 바닥에 쭈그려 앉아 불쌍하게 고개를 수그리는 것이다.
“나랑 약속했으면서. 수영하기로 했잖아? 이미 피곤하다고 다음으로 미뤄 놓고는, 잠 안 오는 심심한 밤에 물어봐도 거절이야? 너무해, 자기. 속상해서 다른 애들이 일할 때 혼자 마음대로 놀러 다니고 싶어졌어.”
어찌나 불만이 많으신지, 라이돈은 중얼중얼 끊임없이 투덜거리며 서운한 감정을 토로했다. 카델은 그런 라이돈을 어이없다는 듯 내려보다, 한숨과 함께 주저앉았다. 대충 눈높이를 맞춘 그가 손끝으로 라이돈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은근슬쩍 농땡이 피울 구실 만들지 마. 수영하기로 약속하긴 했지만, 언제 할지는 정하지 않았잖아. 적당한 때에 하자고.”
“지금이 적당한 때 아니야? 내일 되면 또 이런저런 핑계 대면서 안 놀아 줄 거면서!”
“안 그럴게.”
“안 믿어.”
라이돈의 대답은 일순 카델을 당황하게 할 정도로 단호했다. 뾰로통한 눈빛에는 한 치의 거짓도 담겨 있지 않았기에, 카델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래도 난 항상 약속은 지키지 않았어?’
중요한 약속을 빼먹은 적은 한 번도 없다. 하지만 이렇듯 라이돈이 놀아 달라며 떼를 쓸 때면, 종종 기약 없는 회피성 약속을 지어내곤 했다.
이것만 끝나면 놀아 줄게, 다음엔 꼭 놀러 가자, 말 잘 들으면 이런 걸 해 줄지도 몰라, 등등. 물론 당시엔 여유가 생기면 꼭 약속을 지키리라 다짐했다. 문제랄 것은, 그런 사소한 약속을 전부 수행하기엔 일상이 너무도 빡빡하다는 것이다.
‘뭐…… 미뤄 왔던 약속이 몇 개 생각나긴 하네.’
그때마다 라이돈은 꼬박꼬박 불만을 표출했지만, 대충 달래 주면 금세 잠잠해지곤 했다. 그런 식으로 모면한 위기의 수도 꽤 된다.
과거를 되짚을수록 조금씩 죄책감이 차올랐다. 예뻐해 주기만 해도 아쉬운 요정을 너무 제멋대로 다루고 있지 않은가.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칼을 쓸어 올린 카델이 짧게 입맛을 다셨다.
“……알겠어. 수영하자. 약속 지킬게.”
어차피 혼자 머리를 싸맨다고 금방 해결될 일도 아니고. 어떻게든 모두를 덜 피로하게 만들고 싶었지만, 그게 안 된다면 한 명이라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그렇게 카델이 수영에 응하자, 라이돈은 언제 시무룩했었냐는 듯 환하게 웃으며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미처 일어서지 못한 카델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워 넣어 그대로 날아올랐다.
“어어, 야! 갑자기 뭐야!”
“바다로 가자!”
“주, 준비 운동은 해야지!”
이 차가운 밤바다에 맨몸 입수라니. 상상만으로도 심장 마비가 올 것 같아 바둥거렸으나, 잔뜩 신난 라이돈은 인간의 생명력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카델을 마주 안고 이마에 몇 차례 입을 맞춘 그가 고도를 낮춰 곧장 바닷속으로 입수했다.
준비되지 않은 입수에 카델이 기겁하며 눈을 감았다. 반사적으로 숨을 참은 덕에 참사는 면했으나, 온몸을 적시는 차디찬 바닷물에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흐린 시야 속으로 라이돈의 얼굴이 비쳤다.
어두운 바닷물을 파고드는 달빛. 그 아래 은은하게 빛나는 황금색 머리칼이 일렁인다. 숨을 참느라 동그랗게 부푼 하얀 뺨. 속눈썹 위로 맺힌 투명한 기포 방울, 가볍게 휘어진 눈꼬리, 귀여운 호선을 그린 입술. 그의 표정은 넘쳐나는 호기심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찰나의 순간이었으나, 그 짧은 시간 동안 비친 라이돈의 모습은 갑작스런 입수로 인한 부정적인 감정을 모조리 씻어 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바닷속을 들여다보는 눈동자는 물이 따갑지도 않은지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카델이 가만히 손을 뻗어 그의 부푼 뺨을 더듬자, 곧장 눈길을 돌린 라이돈이 빠르게 입을 맞췄다. 차게 식은 입술 위로 미끈한 감촉이 느껴졌다.
상당히 사랑스러운 입맞춤이었으나, 그 기분을 오래 음미할 순 없었다. 금세 숨이 찼기 때문이다. 힘들다는 뜻으로 라이돈의 어깨를 두들기자, 카델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은 그가 수면 위로 헤엄쳐 올랐다.
“푸하!”
고개를 바짝 치켜든 카델이 가쁘게 공기를 들이마시며 젖은 얼굴을 문질렀다. 찬 바닷물에 골이 띵하게 울렸다. 용케 심장이 멈추지 않았구나. 십년감수한 카델이 멋대로 자신을 입수시킨 라이돈에게 잔소리하려 했으나.
“봤어, 카델?”
가볍게 머리를 털어 낸 라이돈이 한껏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
“저 아래에, 엄청 재밌어 보이는 게 있어!”
“재밌어 보이는 거……?”
“공기 방울이라고 해야 하나? 엄청 동그랗고, 투명하고, 커다란 뭔가가 있었어. 분명히 봤다고! 카델은 그게 뭔지 알아?”
엄청 동그랗고, 투명하고, 커다란 무언가라니. 전혀 짚이는 바가 없어 멍하니 라이돈을 마주 보자, 비장하게 표정을 굳힌 그가 조금 떨어져 있던 몸을 다시 밀착시켰다.
“다시 들어가서 보여 줄 테니까, 그게 뭔지 알려 줘. 잘 집중하면 보일 거야.”
카델이 뭔가의 대답을 꺼낼 새도 없이, 라이돈은 또 한 번 막무가내로 그를 끌어 내렸다.
손으로 입과 코를 막고, 라이돈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그는 카델의 허리를 쥔 팔을 가볍게 흔들며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눈을 제대로 뜨기가 힘들어 꾸물거리고 있으니, 재촉하는 것처럼 팔의 움직임이 거칠어졌다.
그렇게 간신히 눈꺼풀을 올린 카델이 라이돈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고.
‘……저게 뭐야?’
이내 표정에 당혹감이 어렸다. 그것은 바닷속 한가운데서 가라앉지도, 완전히 떠오르지도 못한 채 우두커니 자리하고 있었다. 라이돈의 비유대로 공기 방울처럼 투명한 막도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기포막이 아니었다.
‘괴물? 뭔가 봉인된 건가? 꼭 알 같기도 하고…….’
막의 안쪽, 맹렬하게 회전하며 거품을 뿜어 대는 ‘무언가’가 있었다. 하도 회전 속도가 빨라서, 정체가 무엇인지 유추하기조차 어려웠다. 카델은 호흡이 한계에 도달하기 전에 그 ‘무언가’를 자세히 관찰하기로 했다.
허리를 두른 라이돈의 팔을 꽉 움켜쥐며 눈을 맞추자, 라이돈이 좀 더 아래로 헤엄쳐 들어갔다. 가까이 접근할수록 기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물로 틀어막힌 먹먹한 귓속으로 날카로운 음파 같은 것이 파고들었다. 기포막 속의 저것이 내는 소리가 분명했다.
‘생각보다 커다랗네. 이 음파 때문에 오래 살펴보는 건 어려울 것 같지만.’
공기 방울의 크기는 멀리서 봤을 때보다 훨씬 거대했다. 막연히 한 품 정도일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성인 남자 세 명이 양팔을 벌려야 간신히 둘러쌀 만큼 지름이 넓었다. 심지어 귀를 강타하는 날카로운 소음이 점점 심해져서, 오래 머물렀다간 청력에 이상이 생길 것 같았다.
‘저건 대체 뭐지? 이 음파도 저 녀석이 만들어 내는 건가? 움직이는 걸로 봐선 생명체 같긴 한데……. 물거품 때문에 뭘 제대로 볼 수가 없네.’
상당한 회전 속도는 물론, 녀석이 계속해서 뱉는 거품이 막을 가득 채워 내는 탓에 윤곽을 잡는 것도 어려웠다. 일단 눈앞의 막을 터뜨리면 조금 더 확실하게 정체를 확인해 볼 순 있겠다만.
‘위험한 녀석일 수도 있어. 이 막이 최소한의 안전장치라면, 섣불리 제거해선 안 되겠지.’
아직까지 이 정체불명의 회전체는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지만 않는다면, 이 어지러운 음파 역시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언제 위험 요소가 될지 모른다는 것도 사실이지. 이런 괴상한 존재를 내 부하들이 머무는 섬에 내버려 둘 순 없어.’
뭔가의 조치를 취해야 했다. 그리 결정한 카델이 바깥으로 빠져나가기 위해 라이돈의 팔을 두드렸다. 하지만.
‘……라이돈?’
허리를 단단히 고정하던 팔에 스르륵 힘이 풀렸다. 당황한 카델이 반사적으로 라이돈의 어깨를 쥐며 그를 들여다보았으나.
‘갑자기 왜 이래?’
붉은 눈동자는 카델을 담아내지 않았다. 대신, 마치 홀린 것처럼 기포막 너머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신기한 존재에 과하게 집중하기라도 한 걸까. 슬슬 나가지 않으면 질식의 위험이 있다. 카델은 정신 차리라는 뜻으로 라이돈의 어깨를 크게 흔들었다.
‘……?’
그러나 라이돈은 카델을 바라보지 않았고, 되레 그의 손길을 떨쳐 냈다. 그리고 카델이 뭔가의 낌새를 눈치채도 전, 부드럽게 헤엄쳐 기포막 위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라이돈!’
막을 뚫고 들어간 손끝이 분해되듯 거품으로 변했다. 만들어진 거품은 막 안쪽으로 빨려들며 라이돈의 형체를 갉아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발견한 카델이 다급히 라이돈을 붙들었으나, 소용없었다. 손끝에서부터 퍼진 물거품은 순식간에 라이돈의 전신을 잠식했다.
더 이상 라이돈을 움켜쥘 수 없었다. 텅 빈 손아귀 사이로 거품이 빠져나가고. 물을 움켜쥔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안 돼…….’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라이돈이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온몸이 거품으로 변해 분해됐다. 다시 되새기는 것조차 끔찍한 사실에 카델의 이성이 흐려졌다. 라이돈을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에 무작정 막 위로 손을 뻗으려 했으나.
‘숨이……!’
그새 한계에 도달한 호흡이 그의 무모한 행동을 저지했다. 카델은 목을 움켜쥔 채 필사적으로 위를 향했다. 다급히 팔다리를 휘저어 수면 위로 올라오자, 한꺼번에 양껏 산소를 들이마신 폐가 찢어질 듯 팽창했다.
“허억, 허억……!”
끊임없이 다리를 움직이면서도, 찬 바람이 몽롱함을 덜어 내는 와중에도. 카델의 눈앞에선 좀 전의 장면이 각인처럼 박혀 사라지지 않았다.
“라이돈…….”
온몸의 피가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혹시 자신이 본 것은 환상이 아니었을까. 장난기 심한 라이돈이 몰래 환혹술을 걸어 자신을 놀려 먹으려는 것일 수도 있다.
얄팍한 희망을 붙든 채 몇 번씩 라이돈의 이름을 부르다, 그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을 기다리다, 종국엔 다시 숨을 참고 바닷속으로 머리를 들이밀려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아무것도 없는 바닷속을 발견한다면, 정신이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라이돈이 물거품이 되었다고? 어느 동화에 나오는 주인공도 아니고, 말도 안 되는 비극이었다. 그가 사라졌을 리 없다. 뭔가의 환상이 분명했다. 함정. 저것은 마계의 덫이다.
‘내가 구해 주면 돼. 내가 문제를 해결하면…… 라이돈은 돌아올 거야.’
세뇌하듯 스스로를 다독였다. 불쑥 치미는 충동이 이성을 지배하려 했으나,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어떤 방법을 썼든, 저 공기 방울은 라이돈을 순식간에 흡수해 버렸다. 섣부르게 접근했다간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한 채 똑같이 실종될 수도 있었다.
잠시 새까만 수면을 노려보던 카델이 턱에 힘을 주며 섬으로 헤엄치기 시작했다.
‘부하들을 깨워야겠어.’
홀로 조사를 감행하는 건 위험한 선택이다. 만약 저 공기 방울의 만행을 목격한 자신까지 실종된다면. 수색하게 될 부하들 역시 똑같은 위험에 노출될 것이 뻔했다. 그러니 지금은 함께 머리를 맞대 라이돈을 구출할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