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탐욕, 투명한 구슬 속 가득 찬 영혼.]
투명한 구슬. 설마 그것이 저 아래에 있는 방울을 의미하는 걸까.
‘요젠은 라이돈의 기운을 방울 안쪽에서 느꼈다고 했어. 그렇다면 그 방울 속에 라이돈의 영혼이 있다는 게 돼. 그럼…….’
두 번의 탐욕. 탐욕이 정확히 무슨 행동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다. 때문에 카델은 ‘두 번’이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췄다.
‘두 번. 두 번이라는 게 중요한 거야.’
부하들은 두 번째 탐색에 돌입했을 때 자취를 감췄다. 어쩌면 아직 아래에서 수색을 진행 중일지도 모르나, 그것은 허무한 희망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들은 라이돈과 똑같은 사고를 당한 것이다.
‘그리고 라이돈도 마찬가지였어.’
처음엔 미처 생각하지 못했으나, 라이돈 역시 그 방울을 ‘두 번’ 목격했다. 첫 번째 입수를 끝냈을 때, 그는 본인이 봤던 방울을 보여 주겠다며 두 번째 입수를 강행했다. 그곳에서 자신은 첫 번째로 방울을 발견했고, 라이돈은 두 번째로 살펴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홀린 듯 방울 속으로 빨려 들어가 물거품이 됐다. 투명한 구슬을 채우는 영혼이 된 것이다.
“저 공기 방울이 평화의 돌이 잠들어 있는 장소였어.”
그뿐만이 아니다. 이곳에 평화의 돌이 있으리라 짐작했을 때부터, 묘하게 거슬리던 사실. 마족. 그들은 항상 인간보다 먼저 평화의 돌의 위치를 알아내 수색을 방해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곳에 평화의 돌이 있음이 확실함에도, 마족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마족들도 저 방울에 갇힌 걸지도 몰라.’
그 말인즉슨, 부하들의 갇힌 영혼을 풀어 줌과 동시에 마족들을 상대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
‘……부하들만 구할 수 있다면야, 마족쯤은 몇 번이고 상대할 수 있어. 진짜 문제는 부하들을 구하러 방울에 접근할 때, 나 역시 물거품이 되리라는 거지.’
하지만 접근하지 않고서는 부하들을 구해 낼 방도가 없다. 그리고 어쩌면, 물거품이 되어 방울 안으로 들어가야만 그들을 구할 수 있을지 모른다.
‘구해 낼 용기.’
물거품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구해 내겠다는 용기. 그것이 필요한 거라면, 기꺼이 움켜쥐어 가라앉겠노라.
양피지를 내려놓은 카델이 무거운 표정으로 주먹을 그러쥐었다.
눈을 가리고 입수하는 방법도 생각해 보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컸다. 자신은 요젠이 아니다. 눈을 가린 채로 방울의 위치를 찾기는 힘들뿐더러, 방울을 찢어 낼 방법도 모른다.
때문에 카델은 정직한 방식으로 방울에 접근하기로 했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 아무도 없네.’
처음 공기 방울을 발견했던 위치를 가늠해 헤엄쳐 들어가자, 덩그러니 자리한 방울만이 보였다. 부하들은 없다. 아마도 라이돈처럼 물거품이 되어 빨려 들어간 것이겠지.
열심히 몸을 움직여 방울과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요란하게 뛰어 대는 탓에 호흡을 관리하기가 어려웠다. 카델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폐부를 달래며 부지런히 헤엄쳤다. 그렇게 도착한 공기 방울 앞.
‘……마음의 준비는 됐어.’
카델은 처음보다 더 많은 물거품으로 채워진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두 번째로 찾아왔으니, 자신 역시 다른 이들처럼 홀리게 될 테지. 뭐가 어찌 되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해방의 열쇠일 테니, 교란을 당한대도 큰 손해는 아니다. 그래도 기왕이면 정신이 멀쩡한 쪽이 낫지 않을까.
카델은 정신을 단단히 붙들며 공기 방울의 표면에 손을 댔다. 미끈하고 말캉한 감각이 느껴졌으나, 꾹 힘을 주어도 형체가 바뀌는 일은 없었다.
‘아직까진 별다른…….’
곧장 느껴지는 극적인 변화는 없다. 그리 생각하기가 무섭게, 낯선 음성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행복한 꿈을 보여 줄게. 그 꿈에서 살게 해 줄게. 그곳에서 아무런 고통 없이, 행복하게 잠들자.]
쉬이 성별을 구분할 수 없는 중성적인 목소리. 카델은 그 오묘한 음성을 따라 정신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정신을 놓으면, 방울 속으로 들여보내 주는 건가? 만약 놓지 않는다면? 여기서 뿌리치고 수면 위로 빠져나간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몽롱해지는 와중에도 끈질기게 의문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런 카델의 정신을 완전히 장악하겠다는 듯, 물거품으로 가득하던 방울이 수정 구슬처럼 어느 장면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물거품이 됐으리라 생각한 부하들의 모습이었다.
‘저곳은…….’
그들은 또 다른 세계 속에 갇혀 있었다. 방울이 만들어 낸 환상인지, 특수한 아공간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들은 한데 모여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심각한 표정인 것으로 보아 빠져나갈 방도를 의논하는 중인 듯도 했다.
작게 시선을 움직이자, 그들의 근처에 널브러진 시체들이 보였다. 마족의 시체였다.
‘평화의 돌을 수색하러 왔던 마족들인가. 정말 먼저 당했던 거야?’
공기 방울에 흡수되면 전부 저 공간 속으로 이동하는 모양이었다. 한 공간에 모인 마족과 부하들이 전투를 벌인 모양이지. 다행히 크게 다친 사람은 없어 보였다.
그들이 저곳에 모여 있다는 확신이 들자, 어렵사리 다잡고 있던 정신이 속절없이 풀어졌다. 바깥에서는 그들을 구해 낼 방법이 없으니, 안으로 들어가 모두와 함께 빠져나오겠노라.
흐려지는 시야 속에 담긴 마지막 장면은, 방울을 짚고 있던 손끝이 거품이 되어 흩어지는 모습이었다.
*
“깨어났다!”
묵직한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리자, 익숙한 음성과 함께 시야 가득 반가운 얼굴이 들어찼다. 사랑스러운 곡선을 그린 입술이 다가와 얼굴 곳곳에 온기를 남겼다. 가만히 그 애정을 받아들이고 있노라니, 곧 날카로운 반응들이 들려왔다.
“그 지저분한 입술 당장 떼라, 요정 놈!”
“갓 깨어난 사람 괴롭히지 말고 비키지 그래.”
“다음엔 무슨 변명을 할지 궁금하네, 카델.”
“다들 귀찮게 굴지 말고 나와 주세요. 치유사인 제가 단장님을 살펴보는 게 우선이니까요.”
몽롱한 의식의 틈새를 비집는 떠들썩한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카델은 제 위에서 얼굴을 들이민 라이돈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는, 짧은 신음과 함께 상체를 일으켰다.
“바깥에서 너희를 구할 방법을 찾지 못했어. 안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고. 미안하게 됐다.”
카델은 부하들에게 자신이 알아낸 글귀의 의미를 전달하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울의 바깥에서 어렴풋이 보았던 장소와 비슷하다. 그들은 어느 해안가 절벽에 자리한 높은 고성 앞에 있었다. 자신이 깨어난 곳은 정원의 한가운데인 듯, 바로 옆에 신기한 모양으로 다듬어진 정원수와 형형색색의 꽃들이 보였다.
알록달록하게 정돈된 아름다운 정원과 고즈넉한 분위기의 성, 절벽 아래로 펼쳐진 에메랄드빛 바다까지. 방울 속 세계는 놀라울 만큼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우리도 이렇게 한 번에 전원이 빨려 들어올 줄은 몰랐어. 당황했을 텐데 용케 글귀를 해석했군. 어쩌면 대장의 말처럼 모두가 방울 안으로 들어와야 해결책을 찾을 수 있었던 건지도 몰라.”
이야기를 들은 루멘이 기특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난 조금 억울해, 자기. 그 방울이 나한테 이상한 말을 속삭이면서 행복하게 웃는 자기 얼굴을 보여 줬단 말이야. 그게 너무 예쁘니까 손을 뻗었을 뿐인데, 갑자기 납치당했다고!”
라이돈은 짧은 시간 동안 겪었던 카델과의 이별을 운운하며 그의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반이 그런 라이돈을 떼어 내려 난리를 쳤으나, 요정의 굳건함을 이겨 낼 방도는 없었다.
“두 번 쳐다보면 불가항력으로 홀려 버려. 버틴다고 버틸 수 있다는 확증도 없고. 어차피 전부 이곳에 들어오게 됐으니, 한탄은 미뤄 두자.”
“지당하신 말씀이네요.”
“그나저나, 이곳에 마족들이 있었지? 너희가 쓰러뜨린 것 같던데. 다친 곳은 없는 거야?”
카델의 물음에 가르엘은 당당한 표정으로 본인을 가리켰다. 애초에 크게 다친 이도 없지만, 다쳤다 해도 가르엘이 치유술로 깔끔하게 치료해 준 모양이었다.
카델이 가르엘을 칭찬하자, 옆에 있던 요젠이 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절벽 아래 켜켜이 쌓인 마족의 시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수가 제법 많았지만, 쓰러뜨리는 게 어렵지는 않았어. 이쪽이 강해서도 있지만, 저쪽이 약해서도 있었지.”
“약했다고? 평화의 돌 수색을 방해하러 왔을 정도면 제법 수준이 높았을 텐데…….”
“싸우려는 의지가 없어 보였거든. 이렇다 할 반격도 하지 않아서, 쉽게 처리할 수 있었어.”
싸움의 의지가 없다? 카델이 아는 마계의 적들은 일반 마물조차 투쟁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무식할 정도로 집요하게 상대를 해하려는 녀석들이다. 그런 놈들이 별다른 반격도 없이 허무하게 싸움을 포기했다니.
이해할 수 없는 사실에 카델이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놈들의 무기력이 이 미지의 공간과 뭔가의 연관이 있는 걸까.
“단장, 일단 저 성에 들어가 볼래요? 저희도 방금까지 마족을 상대해서, 아직 성을 들여다보지 못했거든요. 저 안에 이곳에서 빠져나갈 단서가 있을지도 몰라요.”
“……좋아. 가 보자.”
육안으로 봐서는 해안가에 특별한 점은 없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가장 독보적인 존재감을 가진 성을 탐색해 보는 게 우선이겠지. 카델은 부하들과 함께 성의 안쪽으로 들어섰다.
*
바깥에서 보았던 성은 빛바랜 회색의 석재로 건축되었고, 붉은 기 도는 담쟁이덩굴이 상당 부분을 뒤덮어 오래된 티가 났다. 하지만 안쪽은 누군가 꾸준히 관리하는 것처럼 깔끔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매끈한 대리석 바닥과 화려한 양탄자, 눈부신 조명, 잘 관리된 나선형의 계단. 곳곳에 산뜻한 꽃과 분재가 자리해, 내부에서는 긴장이 풀릴 만큼 온화한 향내가 맴돌았다.
“이렇게 완벽한 성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데요. 관리한 사람에게 박수라도 쳐 주고 싶은 심정이군요.”
가르엘은 진심으로 감탄하며 성의 내부를 훑어보았다. 그의 말대로 성안은 아주 사소한 것까지 공들여 관리했다는 게 느껴졌다. 성에 들어서자마자 사방을 뒤엎으려 했던 카델조차 망설임을 느낄 만큼 완벽했다.
그렇게 처음의 다짐과는 달리 한껏 얌전하게 성을 구경하고 있던 무렵.
“자기! 여기 올라와 봐!”
언제 위층에 올라갔는지 모를 라이돈이 계단 난간에서 몸을 길게 뺐다. 혹시 중요한 단서라도 발견한 걸까. 서둘러 계단을 오르자, 단박에 그를 낚아챈 라이돈이 복도에 쭉 늘어진 방 중 한 곳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여기가 우리 방이야! 내가 제일 먼저 정했으니까, 다른 애들이 몰려와도 소용없어.”
한쪽 벽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유리창. 활짝 열린 유리창 너머로는, 가리는 것이 없이 드러난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나부끼는 흰색의 커튼 사이, 잔뜩 들뜬 라이돈의 미소가 풍경과 함께 어우러졌다.
잠시 그 모습을 응시하던 카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난 여기서 잘 생각 없거든. 제대로 수색 안 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