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3화 (383/521)

진심으로 이런 정체도 알 수 없는 찝찝한 공간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몇 시간 내내 저택을 뒤졌음에도 단서 하나 얻어 내지 못했다. 모두가 허탕을 칠 동안 하늘은 착실히 어두워졌고, 소득 없는 수색에 조금씩 지쳐 갔다.

“배고프다…….”

중앙 홀 구석에 자리한 소파 위에 늘어진 카델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거의 반나절 동안 먹은 것도 없이 돌아다니기만 했으니. 허기가 질 수밖에 없었다.

“많이 배고파요? 어쩌죠, 저도 먹을 만한 게 없는데…….”

옆에 있던 반이 곤란한 표정으로 짐 가방을 뒤적였다.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델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그런데 반.”

“네?”

“그 가방은 어디서 난 거야? 생각해 보니까 대검도 그래. 바닷속에 들어갈 때 전부 두고 갔잖아.”

다른 부하들의 무기도, 심지어는 요젠의 눈을 가린 붕대도 마찬가지였다. 이상을 감지한 카델의 낯빛이 심각해지자, 반이 곧장 대답했다.

“이곳에서 눈을 뜰 때부터 가지고 있었어요. 단장 말대로 진짜 무기와 짐은 바깥에 있을 테니, 이건 가짜겠죠.”

“……가짜?”

“왜 만들어 둔 건지는 모르겠어요. 이왕 가방을 줄 거면 안에 먹을 거라도 넣어 두지.”

이질감을 최소화하기 위한 나름의 노력인 걸까. 그런 것치곤 자신에겐 짐 가방 하나 주어지지 않았다.

‘뭐, 있어 봤자 거슬리기만 했을 테니까.’

빠르게 의심을 거둔 카델이 다시금 소파에 몸을 묻고. 바깥에 음식을 만들어 먹을 만한 재료가 있던가, 기억을 되짚어 보려던 때였다.

“카델. 정원에서 이상한 기운이 감지됐어.”

소리 소문 없이 다가온 요젠이 성의 정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으로 접근하는 중이야.”

갑작스러운 정보에 카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에게 위층의 동료들을 불러 달라고 부탁한 그가 곧장 마력을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이상한 기운이라는 건 정확히 어떤 의미야? 마족은 아니란 건가?”

“마족의 기운은 아니야. 나도 처음 느껴 보는 종류거든. 뭐랄까…… 굉장히 흐리고 미약해. 살아 있는 생명의 기운이라기엔 느껴지는 생명력이 거의 없어.”

“생명력이 거의 없다고……? 다 죽어 가는 사람이라도 걸어오고 있다는 말이야?”

“모르겠어. 확실한 건, 인간도 마족도 아니라는 거야.”

인간도 마족도 아닌, 생명력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존재.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다. 요젠은 너머의 존재에게서 위험을 감지하진 못했지만, 쉬이 정체를 파악할 수 없기에 섣불리 접근하는 것을 꺼렸다.

‘뭔지는 몰라도 지금 다가오는 존재가 우릴 해칠 것 같진 않네.’

그저 막연한 예감 같은 것이 아니다. 잠시 정문을 응시하던 카델이 이내 그 앞으로 걸어 나갔다.

“요젠, 넌 거기 있어.”

“위험할지도 몰라. 함부로 다가가는 건…….”

카델은 요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동시에, 숨이 막힐 정도로 시린 바람이 전신을 덮쳤다.

“……!”

“카델!”

찬 바람이 몸속을 파고들며, 그대로 통과하는 기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비틀거린 그가 바람이 지나간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저게…….”

쉬이 형용하기 힘든 ‘무언가’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것은 인간의 형체를 꾸며 낸 진녹색의 연기 같았다. 반투명한 몸뚱이가 끊임없이 일렁였고, 요젠의 암기에 꿰뚫렸음에도 아무런 반응 없이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 ‘무언가’는 쇳소리 같은 기묘한 울림을 동반하며 당당히 성안으로 침입했다.

“저건 대체 뭐죠?”

“우와, 유령 아니야? 유령처럼 생겼는데!”

“저놈과 접촉해도 괜찮은 건가? 대장, 몸에 이상은 없어?”

한발 늦게 아래층에 도착한 부하들이 순식간에 ‘무언가’를 둘러쌌다. 카델도 약간의 한기가 남은 팔을 문지르며 ‘무언가’의 앞에 섰다.

“그냥 조금 추워진 정도야. 그나저나 이건…… 진짜 유령 같은데?”

라이돈의 말처럼 눈앞의 ‘무언가’는 물체라기보단 영혼에 가까워 보였다. 공격도 통하지 않는 듯하고, 대화가 가능해 보이지도 않는다. 인간의 형체를 흉내 냈음에도 이목구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흐리멍덩한 그림자 같기도 했다.

요젠이 유령을 관통하던 암기를 거두자, 가만히 멈춰 있던 유령도 움직임을 재개했다. 그것은 자신을 둘러싼 부하들을 유유히 통과하며 성안의 어딘가를 향하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는 거지?”

“일단 따라가 보죠. 딱히 해를 끼치려는 것 같진 않으니.”

유령을 따라 도착한 곳은 부엌이었다. 부하들이 한바탕 헤집어 둔 탓에 조리 기구가 엉망으로 흩어진 상태였다. 도저히 뭔가를 요리할 만한 환경이 아니다. 그리 생각하기가 무섭게, 유령이 공중으로 떠오르며 부엌을 크게 한 바퀴 휩쓸었다.

“뭐……!”

“아하하! 대단한데? 엄청 신기해!”

유령의 몸체가 닿은 공간이 단숨에 어질러지기 전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한 번의 회전으로 청소를 끝마친 유령은, 이내 차근차근 조리 도구를 꺼내 요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재료도 없는데 뭘 하려는 것인가 싶었으나, 쓸모없는 걱정이었다.

“대체 뭐야? 이것도 마법의 일종인가? 그럴 리가 없는데…….”

유령의 손길 한 번에 어디서 샘솟은지 모를 각종 채소와 육류, 생선과 향신료들이 조리되기 시작했다. 냄비와 프라이팬을 가득 채운 재료들이 능숙한 손놀림을 따라 착실하게 음식이 되어 갔다.

기사단은 옹기종기 모여 유령의 현란한 요리 솜씨를 지켜보았다. 다들 유령이 가진 비밀을 파헤치려 했으나, 성공한 이는 없었다. 완성된 음식이 풍기는 군침 도는 냄새에 무력하게 빠져들 뿐이었다.

유령은 완성된 음식을 공중에 띄우고는, 기다란 테이블이 자리한 식당으로 이동했다. 그러고는 인원수에 맞춰 식기를 배분하고, 음식을 쭉 늘어놓았다.

“우와…….”

“자기, 이거 먹어도 돼? 먹어도 되는 거지? 먹어도 된다고 해!”

“진정하세요, 라이돈 경. 만약 독이 있더라도 제가 해독해 드릴 테니까요. 일단 배부터 채우죠.”

“기다리세요, 단장! 제가 먼저 먹어 보고, 위험하지 않으면 그때 드세요.”

종류를 쉬이 셈할 수도 없을 만큼 음식들이 넘쳐났다. 카델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홀린 듯 자리에 앉았다. 음식의 냄새는 물론이고, 모양새까지 완벽했다. 모든 작업을 끝낸 유령은 그대로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음식의 퀄리티가 너무 높잖아. 의심스러울 수준인데.”

“진짜 음식이야. 어떻게 저런 존재가 진짜 음식을 만들 수 있는 거지?”

요란하게 음식을 감별하던 부하들이 하나둘씩 착석해 제 몫을 덜어 내고. 비장하게 칠면조 고기를 썰어 먹은 반은, 신중하게 제 몸 상태를 살핀 뒤 고개를 끄덕였다.

“먹어도 될 것 같아요.”

카델은 그제야 여기저기서 덜어 주는 음식을 받아 식사를 시작했다. 이 알 수 없는 공간이 주는 불안감이나, 유령이 만든 음식이라는 께름칙함은 뛰어난 풍미에 잊힌 지 오래였다. 기사단은 너 나 할 것 없이 그릇에 코를 박고 음식을 흡입했다. 피로와 허기를 제하고도 식욕을 넘치게 돋울 만큼 훌륭한 음식이었다.

“흐으, 배부르다.”

카델은 볼록해진 배를 문지르며 의자에 늘어졌다. 그리도 많던 음식이 전부 바닥을 드러냈다. 넘치는 포만감에 모두의 얼굴에서 만족감이 번졌다.

식사를 마치니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유령이 그릇을 수거해 갔다. 식사 준비는 물론 뒷정리까지 직접 하는 듯했다.

‘……좀 탐나는데?’

혹시 기사단에 영입할 수는 없는 걸까. 유령이니 코스트도 필요하지 않을 것 같은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소화를 시키던 카델이 짧게 입맛을 다셨다.

‘이렇게 배부르게 늘어져 있을 때가 아니잖아.’

풍족한 식사를 즐겼다며 행복해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극한의 의지력을 발휘해 자리에서 일어난 카델이 테이블에 앉은 부하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 먹었으면 바깥도 수색해 보자.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찾아봐야지.”

성을 빠져나오니 하늘이 옅은 분홍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30분 정도만 지나도 완전히 해가 저물어, 원활한 수색이 어려울 것 같았다.

‘하룻밤 묵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더라도, 최대한 이곳에 머무는 시간을 줄여 봐야지.’

라이돈과 가르엘은 바닷속을, 반과 요젠은 모래사장을, 루멘과 카델은 정원의 수색을 맡았다. 사실 정원에서 보이는 것이라곤 조화로운 꽃과 정원수, 예쁜 티테이블이나 파고라 정도였지만. 흙이라도 파다 보면 뭔가를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먹은 것을 소화할 겸 산책 같은 수색을 진행하던 때였다.

“이쪽으로 와 봐, 대장.”

반대쪽을 수색하던 루멘이 카델을 불렀다.

설마 이 완벽하기만 한 정원에서 이상한 점을 찾아낸 걸까. 서둘러 달려간 곳에는, 흐드러지게 피어난 푸른 장미 덤불이 있었다. 실물로는 본 적 없는 푸른색의 장미는, 정원의 분위기를 꿈결처럼 아름답고 몽환적으로 만들었다.

순간 멈칫할 만큼 아름다운 장미의 향연 속에서, 더듬더듬 시야를 움직인 카델이 루멘을 찾았다.

그는 풍성한 장미꽃 사이, 말없이 카델을 돌아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푸른 눈동자에 온기가 맺히며, 조각 같은 얼굴 위로 단정한 미소가 떠올랐다.

“……뭔갈 찾은 거야?”

파란 장미꽃과 루멘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꼭 장미 꽃봉오리 속에서 태어난 남자처럼. 새삼스럽게 미모에 놀라 바보처럼 물어보자, 그가 가볍게 손짓했다. 가까이 다가오라는 의미였다.

“뭘 찾았길…….”

그는 카델이 다가오자마자 그의 손목을 쥐고 끌어당겼다. 우아하게 내리깐 눈이 제 품에 안긴 카델의 놀란 얼굴을 응시하고. 카델은 맞닿은 가슴 위로 여유로운 표정과는 상반되는 요란한 심장 박동을 느꼈다.

“예뻐서.”

그는 카델의 팔을 자연스럽게 제 목덜미에 두르도록 만들었다. 이어서 한 손으로는 카델의 허리를, 한 손으로는 그의 뒷머리를 감싸 쓸어내렸다.

“대장에게 보여 주고 싶었어.”

“……왜 이래, 안 어울리게.”

짙은 꽃향기와 루멘 특유의 시원한 체향이 어우러지며, 기분 좋은 향이 코끝을 어루만졌다. 카델은 루멘의 깊은 눈빛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어색함을 표출했다.

“수색도 제대로 안 하고. 관광하러 온 거 아니잖아. 네가 라이돈도 아니고, 이런 데 낭비할…….”

이 부끄러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잔소리를 퍼부으려 했으나, 루멘은 그를 용납하지 않았다. 능숙하게 고개를 숙인 그가 조잘대는 카델의 입술을 가볍게 머금었다. 놀라 굳어 버린 입새로 혀를 밀어 넣자, 뜨거운 온기가 뒤엉키며 루멘의 목에 두른 팔에 힘이 들어갔다.

루멘 역시 카델을 더 가까워질 거리도 없이 꽉 끌어안고 놔 주지 않았다. 하지만 입맞춤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간단히 혀를 섞고, 입 안을 장난스레 건드리던 루멘이 미련 없이 입술을 떼어 냈다. 그러고는 눈이 반쯤 풀린 채 벌써 끝났냐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카델을 응시했다.

“수색도, 전투도 좋지만, 가장 즐거운 건 역시 대장과 시간을 보내는 일이야. 네가 아름답고 신기한 것을 볼 때의 얼굴이 좋거든. 오직 그 얼굴을 보기 위해서…… 나는 이 세계가 온전하게 유지되기를 바라는지도 몰라.”

“…….”

“그러니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마, 대장. 잠깐 정도라면 괜찮잖아.”

괜찮지 않다. 이곳에 오래 있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고, 머무는 시간과 비례해 점점 탈출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 낭비하는 시간 없이 부지런하게 수색해야 한다.

그리 생각하면서도, 카델은 제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그저 루멘의 어깨에 뺨을 기댄 채, 그와의 짧은 입맞춤이 남긴 여운을 되새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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