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5화 (385/521)

“푸하……!”

분명 조금 전까지 땅 위에서 숨을 쉬고 있었건만. 카델은 끝도 없이 역류하는 바닷물을 게워 내며 괴롭게 기침했다. 언제부터 참고 있었는지 모를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흥건하게 젖은 눈꺼풀을 깜빡였다.

“여긴 어디지……?”

숙인 고개 아래,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멍하니 손을 뻗어 바닥을 건드리자 얼굴에 파문이 일며 흐릿하게 번졌다.

‘……물. 지금 난 물 위에 있는 건가.’

바닥은 힘주어 짚을 수 있을 만큼 단단하다. 하지만 카델은 자신이 엎드린 물의 수심이 얕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특수한 힘으로 물 위에 서 있는 것일 뿐.

더듬더듬 수면을 짚고 일어난 그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혼란에 젖어 있던 눈빛은, 주위의 풍경을 담아내며 점차 경악으로 뒤바뀌었다.

“얘들아……!”

사방이 물로 이루어진 기묘한 공간 속, 부하들이 보였다. 그들은 둥근 물방울 속에 갇힌 채 허공에 떠올라 있었다. 모두가 평온하게 눈을 감고, 힘없이 부유했다.

제자리에서 허둥대던 카델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요젠에게로 달려갔다. 다급히 손을 뻗어 물방울을 만졌으나, 안으로 들어갈 순 없었다. 힘껏 두들겨 봐도, 마력을 주입해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빼내지 않으면 질식할지도 모른다. 공포와 걱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는, 뒤늦게 물방울 내부에서 무언가 비치고 있다는 점을 눈치챘다. 그것은 잠겨 있는 요젠도, 그 앞에 선 자신의 모습도 아니었다.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그것은 요젠이 꾸고 있는 꿈의 장면. 차분히 그 장면을 지켜보던 카델의 표정에 힘이 풀렸다. 예상했던 대로, 그들은 꿈의 내용을 공유하고 있었다.

고성이 자리한 고요한 섬, 모두와 함께하는 평화롭고 행복한 나날. 조금 전, 자신이 직접 깨부수고 나온 환상이었다. 하지만 홀로 환상을 깨고 나왔다 해도 모두를 구해 낼 순 없는 듯했다. 자신이 탈출에 성공했음에도 부하들의 꿈은 이어지고 있었으니.

요젠의 꿈속에서, 자신이 불태웠던 성은 유령의 힘으로 복구되었다. 사라졌어야 할 자신 또한 그대로 환상 속에 남아 있다. 가짜 카델 라이토스는 단원들에게 둘러싸인 채 멋쩍은 표정으로 뭔가를 떠들어 대고 있었다. 성을 불태운 이유에 대해 변명하기라도 하는 걸까.

그 단란해 보이는 모습을 응시하던 카델이 신경질적으로 물방울을 내리쳤다. 그들을 꿈에서 깨우는 것이 개인적인 욕심일 뿐이래도, 자신이 깨어난 이상 별수 없다. 안됐지만 그들은 하나뿐인 단장의 뜻에 따라 줘야 했다.

“어떻게 하면 부술 수 있지?”

환상의 핵을 부수면 깨어날 수 있으리라는 가정은 옳았다. 하지만 부순 대상만이 깨어날 수 있다는 점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이럴 거면 처음부터 모두에게 진실을 전했어야 했나. 차마 그들의 면전에다 행복한 꿈을 버리고 떠나자는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꿈에서 내가 사라졌다면 부하들도 따라 나올 방법을 찾았을 텐데…….’

그들의 꿈에선 여전히 ‘가짜’ 단장이 머무르고 있다. 이상한 점을 눈치채길 기다리기엔 시간이 없었다.

‘……침착하자. 난 꿈에서 깨어났어. 이건 벗어날 수 없는 감옥 같은 게 아니야. 분명 방법이 있을 거다.’

사방이 물로 막힌 공간.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자신의 모습이 비친다. 아마 이곳은 처음 바닷속에서 보았던 거대한 물방울의 내부일 것이다. 바깥에서 보았던 맹렬한 회전체나 물거품은 없지만, 확실했다.

‘바깥에서 부술 수 없다면 내부에서 부숴야겠지.’

그가 꿈에서 깨어날 수 있던 이유는, 꿈의 핵심인 성을 불태웠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곳에도 물방울을 유지하는 핵이 있을 것이다.

카델은 미처 숨기지 못한 조바심을 드러내며 허둥지둥 공간을 헤집기 시작했다. 틈틈이 부하들의 상태를 살피며, 혹여라도 그들이 괴로운 기색을 보이지는 않는지도 확인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들은 괴로워하지 않았다. 되레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해 보였다. 당연했다. 그들이 꾸고 있는 꿈은, 사랑스러운 일상으로 가득할 테니.

그것을 인지할수록 카델의 눈빛은 차츰 가라앉았다. 투명한 공간을 홀로 바쁘게 쏘다니며, 누구도 원치 않을 탈출의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조금씩 무력감이 더해졌다.

한참을 돌아다녔음에도 핵이라 추정되는 무언가를 찾지 못했다. 결국 걸음을 멈춘 카델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떨리는 입술에 힘을 주고, 단단히 주먹을 그러쥔 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일어나 줘.”

부하들이 스스로 꿈을 포기하고 진짜 단장이 있는 현실로 빠져나오기를 바랐다. 그들은 단장이 꿈에서 깨어났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욕심이 났다. 그들이 이곳에서 홀로 방황하고 있는 자신을 위해, 기꺼이 달려와 주기를.

무책임하고, 나약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다. 힘 빠진 울먹임은 찰나였다. 찰싹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뺨을 내리친 그가 눈물로 흐려진 눈을 부릅떴다.

‘애초에 이곳엔 핵이 없는 걸지도 몰라. 통째로 무너뜨려야 하는 거라면, 힘을 써야겠지.’

언제까지 이곳에서 시간을 낭비할 순 없다. 그들이 있어야 할 곳은 꿈속이 아니다. 자신이 있는 이 현실. 이곳이야말로 그들의 진정한 삶이 있는 장소다.

꿇어앉은 카델이 양손을 수면 위에 올렸다. 짧은 들숨과 함께 마력을 최대치로 끌어 올리고, 망설임 없이 방출했다.

쿠구구구구―

화염 속성의 마력이 물속을 파고들며, 공간을 채우고 있던 물이 끓어오르듯 부글거리기 시작했다. 카델은 온몸을 뒤흔드는 진동을 느끼며 쿤라의 힘까지 개방했다. 뱀처럼 수축한 동공이 결연하게 번뜩였다.

무엇도 망설이지 말고,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했다. 제 행동이 부하들을 구해 내기 위함임을 의심해선 안 됐다. 그들의 진정한 행복은 자신의 행복과 다를 것이 없음을 믿었다. 그들의 존재로 행복을 느꼈던 자신처럼, 그들의 행복 또한 진짜 자신이 있는 바로 이곳에 존재하리라.

‘이건 구해 낼 용기 같은 게 아니야.’

그들이 꼭 쥐고 있는 행복을 빼앗아, 그 빈자리에 자신의 손을 욱여넣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이것은 용기가 아닌 약속. 꿈같은 행복을 주진 못하더라도, 끝까지 너희의 손을 놓지 않겠다는 순수한 맹세였다.

최대의 마력을 끊임없이 불어넣는 동안, 공간의 진동 역시 격렬해졌다. 카델은 아무것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공간을 부수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가 앉은 수면이 들끓으며, 튀어 오르는 물을 따라 살갗으로 뜨거운 열기가 전해졌다. 카델은 출렁거리는 물 위에서 온 힘을 다해 버텼다.

그리고 다음 순간.

‘반……! 요젠!’

굳건하던 물방울이 차례차례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카델은 시야를 가릴 만큼 높이 치솟는 물줄기 사이로 추락하는 부하들의 모습을 발견했다. 안타깝게도 그들의 이름을 부를 여유는 없었다.

처음 꿈에서 깨어난 자신처럼, 힘겹게 물을 게워 내는 부하들의 모습을 확인한 카델이 마력 방출에 박차를 가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거세게 용솟음치는 물줄기. 갓 깨어난 그들에게, 시야 확보조차 어려운 이 공간은 혼란 그 자체일 테다. 그럼에도 단원들은 그 어떤 것보다 먼저 카델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들의 다급한 외침 속에서, 한계까지 마력을 짜낸 카델의 노력은 이윽고 보답받았다.

촤아아악!

물의 공간이 허물어졌다. 투명하게 일렁이던 물의 벽이 사라지고, 대신 어두운 심해의 바닷물이 공간을 메웠다.

갑작스레 뒤바뀐 장소에 온갖 구멍으로 물이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질끈 눈을 감은 채 괴로움에 바둥거렸으나,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아래서부터 솟구친 물기둥 때문이었다. 물기둥의 폭발적인 수압이 카델의 몸을 단숨에 수면 위까지 밀어 냈다. 정신없이 솟구치는 와중, 무언가 반짝이는 것을 본 듯도 했다.

“살려……!”

수압에 떠밀려 끝도 없이 올라가던 몸이 둥실 떠올랐다. 간신히 되찾은 산소에 헐떡이며 도움을 요청하려던 카델은, 게슴츠레 뜬 눈 틈새로 들어찬 풍경에 말문을 잃었다.

그가 떠오른 곳은 아득히 드높은 상공. 카델을 구름 위까지 밀어붙인 물기둥은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췄다.

공중에서 몇 차례 허우적거리자, 중력을 이기지 못한 몸이 짓눌리듯 훅 낙하하기 시작했다. 카델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이를 악물고 몸에 힘을 주었다. 어떻게든 바람 마력을 끌어내 처참한 죽음을 막아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러나 카델이 마력을 끌어내기도 전.

[오래도 걸렸군.]

미처 부를 생각도 하지 못한 쿤라가 등장했다. 그의 등 위로 안착한 카델이 터질 듯 쿵덕거리는 가슴께를 누르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쿠, 쿤라. 부하들은…….”

[옆을 봐라.]

목숨을 부지하자마자 부하들을 찾는 카델에게, 쿤라가 무심히 대꾸했다. 그제야 고개를 든 카델이 등 위에 늘어진 부하들의 모습을 발견했다.

“무사했구나…….”

그들은 연이은 충격에 정신을 잃은 듯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부하들의 안전을 확인한 카델이 앓는 소리를 내며 얼굴을 가렸다.

“왜 진작 안 도와주고 이제야 나타난 거예요!”

[평화의 돌을 찾는 건 중요한 일이야. 이 몸이 과도하게 개입한다면 언제 시스템에게 저지당할지 몰라. 조심해야 한다는 걸 알지 않느냐.]

“그래도…….”

조금 더 투정의 말을 늘어놓으려던 카델이 입을 다물었다. 적룡의 날갯짓을 따라 불어오는 훈풍이 젖은 몸을 말려 주었다.

바깥은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다. 조금은 허탈한 심경으로 눈앞에 펼쳐진 노을을 응시하고 있자니, 쿤라가 다시금 말을 걸어왔다.

[돕진 못했지만, 네가 잊고 온 건 챙겨 뒀다.]

“……잊고 온 거라뇨?”

[돌도 챙기지 않고 물기둥에 휩쓸리기 바쁘더군. 내려가서 돌려주도록 하지.]

혹시 밀려나는 중 언뜻 보았던 반짝거리는 물건이 평화의 돌이었던 걸까. 쿤라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바닷속 어딘가에 버려졌을지도 모른다.

“고맙네요.”

아찔해진 정신을 다잡고 감사를 전하자, 잠시 침묵하던 쿤라가 말을 덧붙였다.

[잘했다. 너라면 해낼 줄 알았어.]

“……정말 잘한 걸까요.”

[아무리 행복한 환상이래도, 그 끝은 공허할 뿐이다. 계속 환상 속에 머물렀다면 머지않아 깨닫게 됐겠지. 네 덕에 막을 수 있던 거다.]

조금의 거짓도, 과장된 위로도 느껴지지 않는 덤덤한 말투. 그는 진심으로 카델의 선택을 옳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랬기에 카델은 딱딱하던 표정에 힘을 풀고, 맥 빠진 웃음을 뱉었다.

“제 발로 지옥에 돌아온 기분이지만…… 뭐. 그래도 한 건은 해결했네요.”

「보유 봉인석 : 3/7」

카델은 제 손에 들어온 세 번째 봉인석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반투명한 푸른빛의 겉면. 그 안쪽에선 물방울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회전체가 거품을 흩뿌리고 있었다. 꼭 바닷속 물방울을 축소시켜 둔 듯한 모양새였다.

“이 안에서 돌아가고 있는 게 뭔지 알아요, 쿤라?”

카델의 물음에 라이돈을 모래사장에 눕히고 있던 쿤라가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이 몸에게 잡스러운 일을 시켜 놓곤 태평하게 돌이나 구경하고 있는 거냐? 건방지기 짝이 없군.”

“모르면 말고요.”

“이 몸의 노고는 안중에도 없나 보지. 슬슬 억울해질 지경이야.”

섬에 내려온 뒤에도 단원들은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그들이 내내 올라타 있을 순 없었으므로, 쿤라는 곧장 인간으로 변해 단원들을 모래사장으로 떨어뜨렸다. 어차피 알아서 깨어날 테니 이대로 놔두자는 말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의견은 묵살당했다. 카델은 굳이 부하들을 바다와 가장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기려 했다. 그 시위와 같은 모습을 황당하게 주시하는 것도 잠시였다. 결국 보다 못한 쿤라가 카델을 제쳐 두고 직접 나서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르엘까지 팽개치듯 끌어다 둔 쿤라가 터덜터덜 카델의 곁으로 다가갔다.

“모리츠와 세보의 작품이다.”

“모리츠와 세보요?”

“세븐 나이츠라는 우스꽝스러운 칭호를 단 녀석이 모리츠. 그 녀석을 수호하던 까탈스러운 녀석이 세보.”

카델의 손에서 돌을 빼앗아 간 그가 돌을 높이 들어 속을 들여다보았다. 주변이 어두워 잘 보이지 않는 건지, 아니면 돌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돌을 응시하던 그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이 몸에게 영감을 받아 재밌는 사역마를 만들었다고 하더니. 열화판도 이런 열화판이 없군.”

“저 안에서 돌아가고 있는 게 사역마예요?”

“섬을 침몰시키려던 괴수를 보지 않았나?”

“그 해룡이요?”

“해룡은 무슨. 물 뿜는 지렁이겠지. 어쨌든, 그 괴수의 본체가 이 안에 있는 자그마한 지렁이다. 모리츠의 죽음과 동시에 이 지렁이에게 모리츠가 가지고 있던 마력, 세보 녀석의 권능이 전달됐지. 그랬기에 봉인석의 역할을 해낼 수 있던 거다.”

이 봉인석 안에 해룡의 본체가 있단 말인가. 뜻밖의 사실에 흥미가 돋았다. 높게 뛰어 쿤라의 손목을 낚아챈 카델이 강제로 팔을 끌어 내려 돌을 빼앗았다.

“우릴 물방울 속으로 끌어들인 건, 모리츠의 수호신인 세보의 권능이었나요?”

“그래. 그 녀석에겐 아공간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었거든. 모리츠는 그 아공간에 환상을 심어 적들의 전의를 하락시켰지.”

환상의 아공간이라. 확실히, 어지간한 독기와 의지가 없고서는 빠져나오기 어려운 공간이다. 자신 역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선택을 미루다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으니.

‘대부분의 봉인석은 용사와 수호신의 힘을 전부 흡수해서 유지되고 있던 건가. 헤소니아와 스텔라의 경우가 특별한 거였군.’

헤소니아와 스텔라는 봉인석에 전력을 다하지 않고, 요정의 봉인을 해방할 힘을 남겨 두었다. 그 덕에 라이돈은 해방의 힘을 얻을 수 있었고.

매끈한 돌의 겉면을 문지르던 카델의 눈빛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이걸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봉인석은 전부 얻었어. 나머지 평화의 돌은 다른 나라의 기사들이 발견하게 되겠지.’

그들이 수색을 완료하고, 마계 마법진의 복제가 성공하는 대로. 스토리는 최종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잠시 사색에 잠겨 있던 카델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쿤라와 눈을 맞췄다.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도, 시스템은 세계에 대한 영향력을 거두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우리의 목표는 전쟁에서의 승리가 아니에요.”

“……이 세계에서 시스템을 격멸하자는 말이냐.”

“네. 그리고 그게 가능하기 위해선 아마…….”

일전의 가정에서, 자신은 세계의 소멸과 재생이 ‘게임 업데이트’를 위한 시험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업데이트를 위해서는 적과 기사들의 밸런스 조절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그들이 싸울 명분을 제공하는 게 중요하다.’

적과 아군이 싸워야만 하는 명분. 지금껏 ‘히어로 오브 나이츠’의 적은 오로지 마족뿐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적의 종류는 바뀌지 않겠지. 이번 전쟁에서 마계를 봉인한다고 해도, 시스템은 ‘다음 업데이트’를 위해 어떻게든 마계를 부활시키려 들 것이다.

“마계가 부활할 모든 가능성을 제거해야 해요. 시스템이 다시는 이 세계선을 ‘실험체’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적이 존재할 가능성 자체를 봉쇄하는 거죠.”

적이 존재할 수 없다면, 시스템은 세계선을 실험할 수 없게 된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자연스럽게 시스템의 개입을 차단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 생각하는 카델의 앞에서, 쿤라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만약 네 말대로 시스템의 간섭을 차단할 수 있다면, 반쪽이. 너는 더 이상 카델 라이토스의 몸에 있을 수 없게 될 거다.”

“그렇게 되겠죠.”

“……더 이상 영혼 분리 작업은 필요 없겠군.”

시스템이 이 세계에서 퇴장한다면, 시스템의 힘으로 묶여 있던 자신 또한 본래 세계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시스템이 클리어 특전을 제공한대도 그 힘이 유지될지는 미지수였으니.

‘승리의 결과로 내가 이 세계에서 시스템과 함께 추방된대도…….’

해내야 했다. 부하들이 행복을 되찾을 이 세계를, 시스템의 꼭두각시인 채로 놔둘 순 없다. 이곳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내들의 세계. 누군가의 즐거움을 위해 끝없는 전투를 치르도록 놔두진 않을 것이다.

“만약 시스템과 제가 사라진대도, 당신이 이 세계를 지켜 줘야 해요. 이 세계의 모든 걸 안전하게 지켜 주세요. 그 어떤 것도 이곳의 평화를 해칠 수 없도록.”

카델의 눈빛에선 단 한 톨의 망설임도 비치지 않았다. 그가 바라는 것은 진정한 승리였다. 부하들이 평화로운 세계에서 오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면. 그는 자신이 꿈꾸던 행복 따윈 간단히 내버릴 수 있는 인간이었다.

이런 인간이기에 누구도 버티지 못한 운명을 짊어지고도 눈부실 수 있는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은 쿤라가 카델의 뺨을 감싸며 말했다.

“맹세하마. 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너와의 약속을 잊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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