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사단에게 주어진 짧은 휴가는 눈 깜짝할 새 지나갔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제국으로의 복귀뿐. 새벽임에도 여전히 사람이 붐비는 항구 앞에서, 카델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건너편을 응시하고 있었다.
“시간이 다 됐는데도 라이돈 경이 안 보이네요. 디저트를 사러 간 걸까요?”
“그렇다기엔 며칠 전부터 안 보이던데요. 뭐, 라이돈이라면 알아서 올 겁니다. 대장이 떠나려는 건 귀신같이 알아채는 요정이니까.”
라이돈은 시계탑에서의 대화 이후, 단 한 번도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와 본인의 일과를 늘어놓았을 요정이건만. 그가 남긴 허전함이 지독한 결핍이 되어 카델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라이돈이 내 곁을 떠날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는 끝까지 자신과 함께할 것이고, 그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일 뿐임을 안다. 그럼에도 지금 당장 그의 해맑은 미소가 보고 싶었다.
“먼저 들어가죠, 단장. 날개 달린 놈이니 알아서 올 거예요.”
“……조금만 더 기다려 보고.”
슬슬 출항 시간이 다가온다. 반의 말대로 조금 늦는다 한들, 라이돈은 비행이 가능하니 알아서 찾아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놔두고 먼저 출발하기는 싫었다. 그리 생각하며 머뭇거리고 있던 때.
“오고 있네.”
요젠의 중얼거림과 함께, 저 멀리서부터 눈에 띄는 인형이 보였다. 인간의 모습으로 품 안 가득 뭔가를 끌어안고 오는 라이돈. 인파 속에서 우뚝 솟은 훤칠한 미남자는, 그 등에 달린 투명한 날개 덕에 더욱 존재감이 도드라졌다.
그는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을 모조리 무시한 채 당당하게 기사단 앞으로 걸어왔다.
“왜 이렇게 늦은 거냐, 요정 놈. 쓸데없이 기다리게 하지 말라고.”
“흐응, 반한테 기다려 달라고 한 적 없거든?”
“그건 다 뭡니까? 초콜릿?”
“언제 또 올지 모르잖아. 조개 초콜릿을 비축해 둬야지. 너희한텐 안 나눠 줄 거니까 탐내지 마.”
아무래도 라이돈은 본인이 먹을 디저트를 사 오느라 늦은 듯했다. 그를 타박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보이는 익숙한 태도에 안도감마저 들었다.
“카델은 줄 수 있으니까, 혹시 먹고 싶으면 말해.”
“응. 고마워.”
며칠간의 부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라이돈은 카델과 눈을 맞추며 미소 지었다. 그것이 다행이라고 생각되면서도, 정확한 속내를 알 수 없어 답답하기도 했다.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 거겠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지만, 당장은 내버려 두는 게 좋겠어.’
만약 동족은 부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면, 다시 한번 라이돈을 설득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가 지금은 아니었다.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소중한 부하와 불화를 일으키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카델은 지각한 라이돈에게 온갖 구박을 퍼붓는 부하들을 이끌고 서둘러 승선했다.
*
「보유 봉인석: 5/7」
제국에 무사 입성한 뒤, 스니벡 공국에서부터 봉인석을 입수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로써 남은 봉인석은 데번 왕국과 오스마 제국의 것뿐. 오스마 제국의 봉인석은 마계에 묻혀 있다는 것이 기정사실화되었으므로, 실질적으론 봉인석 여섯 개가 모이는 시점에서 인간계는 할 일을 다 한 셈이었다.
‘데번 왕국까지 봉인석을 입수한다면, 하루빨리 마법진을 완성해서 마계로 내려가야 해.’
제국이 주도하는 마계 마법진 연구를 끝마치는 즉시. 7대국과 타 동맹국은 힘을 합쳐 마계로의 침입을 꾀할 것이다.
하지만 현재로서 적린 기사단에게 주어진 임무라곤 마법진 완성을 기다리며 수련하는 것이 전부였다. 물론 단장인 카델은 제외한 이야기.
제국의 대표 마법사이자 대마법사 마밀의 제자인 그는, 제국에 온 뒤로 무려 49시간째 이어진 불면과의 사투 중이었다.
“카델 님, 이 술식 좀 봐 주십쇼. 어떤 것 같습니까? 가능성이 보이나요?”
“마, 마밀 님! 이 마법진에서 불씨가 튑니다! 화염 마력은 넣은 기억이 없는데……. 어디가 잘못된 걸까요?”
“으악, 카델 님! 어제 알려 주신 술식을 적은 종이가 타 버렸어요! 아직 못 외웠는데……!”
“마밀 님, 역시 이 술식에는 대지 마력을 추가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물론 마밀 님이 그건 절대 아니라고 하시긴 했지만, 저의 직감상…….”
넓은 연구실 안, 마밀과 카델의 이름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그 끊임없는 부름을 무시할 수도 없어, 두 마법사의 고개가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그 와중에도 틈틈이 기존의 술식을 점검하고, 새로운 술식을 연구해야 했으며, 다른 마법사들의 실험까지 지켜보아야 했다.
다른 이들이 몇 시간이라도 쪽잠을 잘 때, 카델과 마밀은 단 1분도 숨을 돌리지 못했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휴식을 취하는 대신 떨리는 손으로 물약을 집어 허겁지겁 들이켜야 했다.
“주, 죽을 것 같아요, 스승님…….”
“시체가 말을 하는구나.”
두 남자의 자리 아래에는 물약 공병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중간중간 코피를 닦아 낸 휴지 뭉치도 보였다.
카델은 아무렇게나 펼쳐진 양피지 더미를 힘겹게 헤집어 참고용 술식을 찾아냈다. 불면 38시간째부터 흐리멍덩해진 정신은 영 또렷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눈앞이 흐릿했고, 속도 더부룩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쪽잠을 자 두는 편이 여러모로 나을 것 같았으나, 도무지 그럴 틈이 안 났다. 잠시라도 눈을 붙이려 하면 득달같이 달려드는 마법사들 때문이었다.
“카델 님! 저희 쪽 마법진 좀 봐 주십쇼! 이번엔 정말 성공할 것 같습니다!”
“……마밀 님에게 부탁해 보는 건 어떨까요? 정말 성공할 것 같다면 저보단 스승님에게…….”
“수작 부리지 말고 어서 다녀오거라.”
지속되는 끔찍한 피로감에 사제 간의 정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어떻게든 업무를 떠넘겨 보려던 카델이 울상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법사들은 카델이 따라오는 걸 확인하고서야 빠른 걸음으로 앞장서 걸었다. 카델의 입장에선 신기할 정도로 활기 넘치는 모습이었지만, 사실 다른 마법사들 역시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가끔 음식과 물을 전달하러 오는 시종들의 눈에, 그들은 그저 폭주 중인 좀비 떼와 그를 뒤따르는 송장일 뿐이었다.
마법사들이 카델을 이끈 곳은 연구실의 지하. 황제가 마법 실험장으로 내어 준 장소였다. 어지간한 폭발에는 끄떡없는 내구성을 갖춰, 지금까지 몇십 번이나 발생한 폭발에도 얇은 금밖에 가지 않았다.
“어제 카델 님이 알려 주셨던 술식을 바탕으로 만들어 본 겁니다.”
카델은 죽은 물고기 같은 눈으로 광기 어린 마법사들의 얼굴과 그 밑의 마법진을 번갈아 보았다. 이미 수도 없이 실험실에 끌려왔던 터라, 별다른 기대감이 들지 않았다.
“저희 다섯이 머리를 맞대고 완성한 궁극의 마법진! 보시죠!”
확신에 찬 외침과 동시에, 다섯 마법사가 마법진을 둘러싸고 마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조금씩 발광하는 마법진을 지켜보는 카델의 눈빛은 시큰둥하기만 했다.
‘쟤네 마력을 저렇게 많이 쓰면 또 물약 먹어야 할 텐데. 인당…… 네 병쯤은 마셔야겠군.’
상상만으로도 속이 더부룩해진다. 카델은 괜스레 울렁거리는 배를 문지르며 차게 식은 눈으로 마법진을 응시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된다, 된……!”
“크아악! 안 돼!”
끝도 없이 발광하던 마법진에서부터 무언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이어서 실험실 안이 순식간에 탄내로 가득 찼다. 사라진 섬광 너머, 검게 물든 채 타들어 가는 마법진의 모습이 보였다. 실패한 것이다.
“어, 어째서……,”
“이번엔 정말 될 줄 알았는데!”
“또 해야 한다고? 이 짓을 또?”
슬슬 실패의 충격에 익숙해질 법도 하지 않나. 심심한 위로의 말조차 귀찮아진 카델은, 낮은 한숨과 함께 마법진 앞으로 다가갔다. 실패는 실패인 거고, 이 실패에서 원인을 찾아 보완해야 했다. 그것을 위해 카델이 모든 실험에 일일이 따라붙는 것이었다.
‘어디 보자……. 또 얼마나 시답잖은 걸로 마법진이 불발했을까.’
지금까지 치명적인 실수로 마법진이 불발하는 경우는 없었다. 당연하다. 카델과 마밀이 연구의 주축이긴 하나, 이곳에 모인 마법사들은 전부 각국의 내로라하는 수재들. 그들이 최선을 다해 연구한 술식에 뻔한 오점이 있을 리 없었다.
마계 마법진은 보통 인간들이 크게 염두에 두지 않는, 아주 사소하고 상식적인 부분들을 파고들어 집요하게 불발을 일으켰다. 그 모든 상식을 일일이 비틀어 마계의 규칙과 맞춰야 했으니. 연구 속도가 더딘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뻐근해진 몸을 구부려 마법진 위로 마력을 흘려보낸 순간이었다.
화르륵!
효력을 잃었어야 할 술식이 재발동되며, 마법진 위로 암흑 마력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어어? 저게 뭐야?”
“마법진이 왜 다시……?”
암흑 마력을 불어넣은 적은 없다. 술식에도 암흑 마력은 포함되지 않았으니, 이 마력은 마법진이 스스로 생성하는 것일 터였다. 카델은 웅성거리는 마법사들 틈에서 침착하게 마력을 조절했다. 암흑 마력은 마법진을 어둡게 물들이더니, 이내 조금씩 술식을 구부리며 형태를 망가뜨리기 시작했다.
‘이 현상은…….’
제다이의 숲에서 셀레브가 마계 마법진을 발동했을 때. 지금과 똑같은 장면을 본 기억이 있었다. 형태가 변화하는 기묘한 마법진.
하지만 눈앞의 마법진이 일으킨 기이한 현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조금씩 어그러지며 암흑 마력을 뿜어내던 마법진은, 어느새 사그라진 마력과 함께 완전히 죽어 버렸다.
카델은 재가동의 기미가 없는 마법진을 차분히 훑어 내곤, 뒤편의 마법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훌륭하네요. 여러분 덕분에 연구 속도가 크게 진척될 것 같습니다.”
몇 달간의 노력 끝에 겨우 찾아낸 단서였다. 마법사들은 하루라도 빨리 마법진을 완성하기 위해 득달같이 달려들었고, 그것은 타국도 마찬가지였다. 마법진 발동의 열쇠가 암흑 마력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각국은 수감돼 있던 흑마법사까지 대동해 연구를 진행했다.
한 번 갈피를 잡은 연구는 인간들을 마계 이동의 목전까지 데려다 두었고, 그 폭풍 같은 시간 속에서 인간계는 여섯 번째 평화의 돌을 확보했다.
「보유 봉인석: 6/7」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오스마 제국의 봉인석 확보에는 전 대륙의 기사단이 참여하게 될 것이다. 마계에 묻힌 봉인석의 탈환만이 전쟁의 종지부를 찍을 유일한 방법이었으니.
카델은 숨을 돌릴 겸 빠져나온 정원에서 멍하니 하늘을 올려보았다.
‘마법진 유지 시간이 점점 늘어나고 있어. 성공은 코앞이다. 길어야 일주일쯤 걸리려나.’
그 후에는 모든 기사단이 머리를 맞대 작전을 짤 테고, 곧장 마계로 이동하게 될 테다. 날짜가 미뤄질수록 마계에만 유리한 일이니.
‘아직까지 쿤라가 별말이 없는 걸 보면, 그때 얘기했던 방법보다 나은 수는 떠오르지 않은 모양이야.’
이대로 마계에 돌입한다면,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동시에 마계에 남아 있을지 모를 마왕의 후계자를 찾아 없애야겠지.
과연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하염없이 의문만 떠올랐으나, 해내야만 하는 일임을 알았다. 해내지 못한다면 이 세계에, 자신의 소중한 단원들에게. 찾아올 밝은 미래는 없다.
“……슬슬 돌아가 볼까.”
짧은 환기를 끝낸 카델이 묵직한 눈꺼풀을 문지르며 고개를 숙였다. 며칠 내내 단원들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연구에만 매진했더니, 심신이 배로 지치는 듯했다. 마법진을 완성한다면 다음 일정 전까지 그들과 진득한 시간을 보내리라.
홀로 의욕을 불어넣은 그가 바삐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