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4화 (394/521)

황혼 기사단은 전력의 1/3만이 전투에 투입되고, 나머지 2/3는 인간계와 이어진 포탈에 대기하며 부상병의 응급 치료와 엄호를 담당한다. ―라는 것이 황혼 기사단 측의 전술이었다.

그들은 성기사이기에 전사와 치유사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다능한 만큼 어느 한 역할에만 충실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치유사의 역할에 집중한다면 전력에는 큰 보탬이 될지 몰라도, 마족들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다. 적군의 일 순위 타겟이 됐을 시, 타 기사들이 전력으로 보호해 줄 여력이 있을지도 미지수. 최악의 경우, 황혼 기사단이 가장 처음으로 몰살당하는 참극이 벌어질 수도 있다.

때문에 모들렌은 전투 시의 위급 상황을 대비한 전력의 1/3을 전장에 투입하고, 나머지는 최후방에 대기하며 치명상을 입은 기사들을 치유. 그리고 그들이 포탈 바깥으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도록 엄호하는 방식을 택했다.

얼마나 길고 치열한 전투가 될지 모를 전쟁이다. 전투 능력이 전무한 치유사들을 마계 안으로 들일 수는 없었으므로, 성기사들의 역할은 아주 중요했다. 그들이 가장 안전한 곳에서 전투를 보조해야만 조금이라도 승산이 올라간다는 것이 모들렌의 의견이었다.

“타당하긴 하지만, 모들렌 경의 주장도 꽤 의견이 갈릴 것 같네. 대장이 그 주장을 지지한다면 끼리끼리 논다는 인상을 심어 줄 수도 있겠어.”

모들렌과의 대화를 끝마치고 돌아오는 길. 카델은 심란해 보이는 루멘의 옆에서 낮은 한숨을 내뱉었다.

“자칫하면 안전한 후방에서 다친 기사들만 치유하겠다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으니까. 확실히…… 힘을 비축하기 위해 초반부터 전력을 아끼겠다는 이쪽의 주장과 비슷하게 들릴 수 있겠어.”

과연 자신이 모들렌을 지지해 줄 형편이 되는 것일까. 카델의 이야기를 들은 모들렌 역시 곤란한 기색을 보였었다. 하지만 서로 간 도움이 필요한 입장이었으므로, 서로의 의견을 지지해 주기로 한 것이다.

예상 밖의 난관을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할지. 고민하던 중, 다음 목적지에 도착했다. 성내에 자리한 식당이었다.

이곳에는 장미 기사단과 백금 기사단, 부엉이 기사단의 단장들이 늦은 점심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카델은 이미 선박에서 식사를 마친 후였으나, 그들과의 대화를 위해 식당에 들어섰다. 하지만.

“단순히 어려서 그런가, 아니면 이른 나이에 거머쥔 성공에 눈이 멀어 버린 건가.”

“……예?”

그들은 카델과 루멘의 등장을 반기지 않았다.

“이 전투의 주인공은 당신이 아니오, 카델 경. 운 좋게 거둔 몇 번의 승리로 자신이 전쟁의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조급함에 너무 섣불리 이야기를 꺼낸 듯했다. 세 명의 단장들은 곧장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고, 다시 한번 이야기를 들어 달라고 부탁해 봐도 소용없었다.

“적룡이 직접 전장에 행차하신다면 몰라도, 고작 몇 할의 힘을 끌어오는 동안 이쪽은 경의 눈부신 활약을 위해 피 터지게 싸우라고? 그 힘으로 얼마나 많은 마족을 죽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경이 직접 전투에 참여하는 것보다 많은 아군을 살리지는 못할 거요.”

그들은 마법사인, 그것도 대마법사 마밀의 제자인 카델이 아군의 보호에서 완전히 손을 떼겠다고 말했다는 데에서 큰 실망감을 느꼈다. 카델의 기술이 전쟁의 승패를 가를 만한지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도 있었다.

결국 카델은 받아 놓은 음식을 절반도 먹지 못한 채 쓰린 비난과 함께 자리를 떠야 했다. 루멘은 시무룩해진 카델을 데리고 나머지 단장을 찾아가려 했으나, 위치 파악이 불가능해 곧 포기했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네.”

“그러게. 지금도 이런데 진짜 회의가 시작되면 얼마나 많은 반대에 부딪힐지.”

“……미안하군.”

“응? 뭐가?”

카델의 방 앞. 루멘은 안으로 들어가려는 카델에게 사과를 건넸다. 카델이 의아하게 바라보자, 카델보다도 심각한 낯을 한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단장들의 성향을 더 잘 알아봐야 했어. 설득이 통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은 처음부터 걸러서, 대장이 그런 소릴 듣지 않도록 해야 했는데. ……부단장 자격 미달이야.”

아무래도 루멘은 카델이 단장들에게 쓴소리를 들었던 일을 마음에 두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은 전부 카델의 고집이 불러온 업보나 다름없었다. 오히려 루멘은 그 업보를 최소한으로 줄여 주었으니. 카델은 답지 않게 풀이 죽은 그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무슨 소리야. 난 지금, 이런 게 부단장의 역할이라면 앞으로도 쭉 부단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걸. 네가 있어서 든든해.”

“……위로해 주려고 애쓰지 않아도 돼.”

“진심이야, 루멘. 이미 네 존재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되니까.”

옆에서 함께 다른 이들을 만나도, 상대의 심기를 건드리진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단원. 충분히 듬직하고 믿음직스럽다. 그리 생각하며 진심을 담아 말하자, 굳어 있던 루멘의 표정도 한결 풀어졌다.

“그렇게 말해 준다면…… 끝까지 힘내 보지.”

「기사 ‘루멘 도미닉’의 호감도가 1 상승했습니다.」

「현재 호감도: 93/100」

이런 단순한 칭찬으로도 마음이 풀어지는 걸까. 의외로 쉬운 면이 있다고 생각하며, 카델은 방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종일 방치당하느라 잔뜩 토라진 요정이 있을 것이었다. 쏟아질 투정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나. 고민하며 시선을 옮겼으나.

“……너 뭐 해?”

라이돈은 돌아온 카델에게 달려들지도, 불만을 토로하지도 않았다. 그저 얌전히 침대에 정좌를 틀고 앉아, 명상하듯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의 주위로는 자그마한 얼음 조각들이 잔잔히 부유했다.

“라이돈, 뭐 하는 거냐니까?”

“……쉿.”

카델의 부름에 라이돈은 정숙을 요구했다. ‘쉿’이라니. 라이돈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왔다는 데에 충격을 받아 굳어 있던 카델이 머뭇거리며 앞으로 다가갔다. 혹시 어딘가 잘못되기라도 한 건 아닐까 걱정이 돼서였다.

“어디 아파? 나 없는 동안 무슨 사고라도 쳤어?”

“쉿, 카델. 집중이 안 되잖아.”

대체 무엇을 위한 집중이란 말인가. 너무도 당황스러워 더 캐묻고 싶었지만, 라이돈이 안 하던 짓을 하는 데엔 이유가 있겠거니 싶어 입을 다물었다.

잠시 낯선 라이돈의 모습을 응시하던 카델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책상 앞에 앉았다. 내일 회의에 들어가기 전, 최종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정리해 보기 위함이었다.

‘정상회담처럼 쿤라를 데려온다면 얘기는 쉽게 해결되겠지만, 이번에는 안 돼.’

아무리 스토리를 모른다고 해도, 지금 자신이 주장하려는 전술이 진짜 카델 라이토스가 할 법한 생각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진정한 영웅이라면 모두가 싸우는 동안 후방에서 안전하게 힘을 끌어오겠다고 얘기하진 않을 테니까.

그러니 쿤라 정도의 존재가 그 말도 안 되는 전술을 지지하기 위해 행동한다면, 시스템이 제약을 걸어올 수도 있다. 시스템이 쿤라에게 제약을 걸면 그의 힘을 받는 자신 또한 영향을 받는다. 위험 요소를 최대한 배제하기 위해 직접 설득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잘 들어먹히지 않는다면 협박이라도 해야겠지만.’

차라리 시원하게 모두 이 세계를 위한 거니 잔말 말고 협조하라 외치고 싶었다. 가까스로 충동을 참아 낸 카델이 텅 빈 종이 위에 한숨을 흩뿌렸다.

⚔️

전략 회의 당일.

나머지 기사단이 하나둘씩 도착하며, 테이론 섬은 아침부터 활기를 띠었다. 회의는 그들이 배를 채우고 짐을 정리한 이후인 오후 3시경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원래라면 회의 시간 전까지 한 명이라도 더 붙들어 전술을 설파하려 애썼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카델과 루멘은 아침부터 자취를 감춘 요정을 찾기 위해 모든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찾았어, 루멘?”

“아니. 어디에도 없어. 대장은?”

“이쪽도 마찬가지야. 미치겠네…….”

혹시라도 라이돈이 단장들의 눈에 띄게 된다면, 이제껏 노력한 보람도 없이 기사단의 이미지가 추락할 것이다.

‘그냥 가만히만 있으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요구야? 어? 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거야!’

섬 곳곳에 기사들이 깔려 있다. 그들은 내로라하는 기사단을 이끄는 단장이니만큼, 오감의 발달이 일반인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터. 작은 기척에도 민감한 그들이 요정의 날갯짓을 알아채지 못하리란 기대는 하지 않는 게 나았다.

카델과 루멘은 그야말로 발에 땀이 나도록 섬을 헤집었다. 중간중간 자신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기사들에게 운동 중이라며 억지웃음을 지어 주는 것도 잊어선 안 됐다.

하지만 그들의 눈물 나는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회의 직전까지 라이돈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단장들도 발견하지 못한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건지…….’

덕분에 여러 생각으로 복잡했던 머리는 깔끔하게 비어 버렸다. 뭘 더 깊이 생각할 체력도 없다. 카델은 이미 한바탕 회의를 치르고 온 사람처럼 너덜너덜하게 성의 꼭대기를 향했다.

전략 회의. 마계에서 이루어질 위험한 전쟁에 앞서, 최전방에 투입될 기사들의 전술을 종합해 최선의 방책을 마련하기 위한 자리.

―라는 것이 본래의 목적이었으나.

“당연히 암철 기사단이 선두에서 돌격해야지 않겠습니까? 저희 갑옷은 특수한 방식으로 설계되어 마법사의 장막 없이도 무수한 공격을 견뎌 낼 수 있죠. 그리고…….”

“선두는 그림자 기사단에게 맡겨 주시죠. 적지에 들어가는 것인 만큼, 기습 공격의 형태로 시작해야 적을 압도하기 용이합니다. 은신술로 기습을 시작한다면,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작부터 소수 인원을 투입하면 포위의 위험이 있소. 만약 기습에 실패한다면 시작부터 흐름을 빼앗길 위험도 있지. 그러니 선두에는 호계 기사단이 서겠소. 대규모 인원이 쳐들어온다면, 상대측 진영에 심적으로 부담을 주기도 쉽지…….”

각 단장의 의견은 도통 융합될 줄을 몰랐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해 보려 해도, 그사이에 새로운 의견이 치고 들어왔다. 처음에는 차례대로 발언권을 가지자며 시작됐던 것이, 이제는 조율을 빙자한 자율 토론이 되어 버렸다.

‘진짜 시장통이 따로 없네.’

의견을 제시하고, 약속된 지지를 받을 새도 없다. 사방에서 우렁차게 들려오는 주장에 이따금 압사당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흥분 상태에 돌입한 단장들과, 쉴 새 없이 무언가를 작성하며 단장에게 귓속말하는 부단장들. 이 난장판에서 이목을 끌기 위해선 화염구라도 쏘아 올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으나.

‘이걸 위한 무력 행사 금지 조항이었나.’

안타깝게도 회의에선 무력 사용이 금지된 상태였다. 자의적으로 제한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겐 일시적으로 착용자의 기운과 마력을 억제하는 마도구가 배급되었으니.

“치고 들어갈 타이밍 잡기가 힘들군.”

카델의 옆에 앉은 루멘 역시 회의장의 분위기에 쉬이 적응하지 못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이 요란한 분위기 속에서 이목을 끄는 건 어려운 듯했다.

“소리라도 질러 볼까?”

“미친 척하고 그러는 것도 나쁘진 않겠어. 소리를 지른다고 들릴 것 같지도 않지만.”

발언 순서가 찾아오기도 전에 이 난리라니. 적린 기사단은 이곳에선 거의 신생이나 다름없는 데다, 나이로도 카델이 한참 밀리는 탓에 발언 순서 또한 꼴등이었다. 순서가 찾아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던 것이 실수였다.

‘좋아. 딱 청혈 기사단 주장까지만 듣고, 바로 치고 들어가는 거야. 테이블이라도 내려쳐 보자고!’

이렇게 우물쭈물하다 회의가 끝나 버린다면,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카델은 의지를 다잡으며 호기롭게 주먹을 그러쥐었다. 얼마나 큰 소리를 낼 수 있을진 모르겠다만, 필요하다면 테이블로 차력 쇼라도 하겠노라.

그리 다짐한 순간. 그의 등 뒤에서부터, 익숙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내가 도와줄 테니까, 긴장하지 마.”

도저히 헷갈릴 수가 없는 라이돈의 음성. 그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라이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늘에도, 테이블 아래에도, 루멘의 어깨나 자신의 망토 아래에도 마찬가지였다.

“대장? 갑자기 왜 그래?”

“너 못 들었어?”

“뭘?”

“라이돈 말이야! 라이돈이 내 뒤에서…….”

말을 잇던 카델이 입을 다물었다. 갑작스런 카델의 이상 행동에 의아한 표정을 짓던 루멘도, 열띤 토론을 이어 가던 단장들도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에 찾아온 적막 속에서, 그들은 천천히 장내를 돌아보고 있었다.

“이건……?”

“마기인가?”

난데없이 흘러든 보라색의 기운. 그것이 장내를 가득 채운 채 조용히 일렁였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전부 내로라하는 기사단의 단장들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그들은 최소 여섯 시간 동안은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 회담이 과열될 경우 마도구를 벗어 버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특수한 술식을 새겨 유지 시간 동안 절대 벗지 못하도록 조치한 것이다.

“일단은 흩어지지 말고 모입시다. 아래로 내려간다면 사람들이 다칠 수 있어요.”

다행이랄 것은, 지금껏 수많은 전투를 치러 온 그들이기에 긴급 상황 속에서도 쉬이 평정을 잃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중앙 테이블에 최대한 밀착해 변화하는 공기의 흐름을 살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회의장의 누군가 입을 열었다.

“이건 마기가 아닙니다. 마기를 흉내 낸…… 마력 같습니다만.”

마기를 흉내 낸 마력. 그 말을 들은 순간, 카델의 머릿속으로 끔찍한 예감이 떠올랐다.

‘설마.’

절로 식은땀이 흐르며 마른침이 넘어갔다. 반사적으로 루멘의 옷자락을 움켜쥔 그가 자신의 비극적인 상상을 전달하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눈앞이……!”

“이게 무슨……. 마법인가?”

장내를 채우던 마기가 폭발하듯 단숨에 흩어지더니, 공간을 이루던 벽이 허물어졌다. 허물어진 벽 너머로 펼쳐진 것은, 마땅히 보여야 할 하늘이 아니었다.

대지. 어둠에 물든 대지와 땅을 가로지르는 균열 사이사이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마기. 그림자 진 보랏빛 하늘,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마물의 찢어지는 비명과 마족의 날카로운 웃음, 펄럭이는 날갯짓 소리.

조금 전까지 그들이 서 있던 테이론 섬의 회의장은 온데간데없다. 지금 그들은, 마계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마계를 본 적 없음에도 마계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대장.”

루멘은 순식간에 변화한 풍경을 노려보며 카델을 제 옆으로 끌어왔다. 갑작스러운 마족과 마물의 등장에 긴장한 기색은 아니었으나, 루멘의 안색은 그 어느 때보다 어두웠다.

“이거 설마…….”

“그래. 라이돈이…… 사고를 친 것 같아.”

조금 전 들려왔던 라이돈의 목소리와 아무런 전조도 없이 뒤바뀐 풍경, 그리고 마기를 흉내 낸 마력까지. 회의 직전까지 모습을 숨겼던 요정은, 이 순간을 준비하고 있던 듯했다.

‘대체 왜? 무슨 꿍꿍이지?’

놀아 주지도 않고 본인을 방치한 단장을 엿 먹이기 위해? 아무리 라이돈이 제멋대로라도, 자신에게 해가 될 만한 일을 의도적으로 실행하는 녀석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제 딴에는 뭔가의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고 벌인 일이란 건데.

‘라이돈의 짓이라고 말해 줘야 해.’

당황하는 단장들에게 사실을 알려야 한다. 하지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럴 때면 단원이 친 사고까지 처리해야 하는 단장이라는 위치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그렇게 카델이 진실을 알리는 것을 망설이고 있던 때였다.

“공격이 닿지 않아. 여러분, 이건 환상입니다!”

“마법사의 짓인가? 여기에 이런 짓을 벌일 마법사가 어딨단 말입니까?”

“몰래 섬에 잠입한 흑마법사, 혹은 마계 마법사의 소행일지도 모르죠. 다들 방심하지 마십쇼!”

금세 모든 것이 환상임을 눈치챈 단장들이 마법의 근원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들은 공간을 마구잡이로 헤집으며 나아갔고, 곧 회의장의 벽을 발견했다. 환상임을 깨달은 자에게 눈앞의 마계는 아무런 공포심을 심어 주지 못했다.

허술한 환상이다. 물론 겉보기엔 화려했고, 실감도 났다. 하지만 때와 장소가 적절치 못했다. 이런 환상으로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더 모른 척하고 있다간 상황이 악화될 거야, 대장. 밝히는 게 좋겠어.”

“……같은 생각이야. 진짜 기절이라도 하고 싶네.”

카델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차라리 술이라도 거하게 걸쳤다면 쉽게 용기를 낼 수 있을 텐데. 그리 생각하며 입을 연 순간.

“와아아아아!”

우렁찬 함성과 함께, 저 반대편에서부터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중앙에 선 단장들을 통과해 지나가며, 막힘없이 전진해 공격을 시작했다.

뜬금없는 난투였으나, 생동감은 상당했다. 오가는 공격 속에 피와 살이 난무했고,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잔혹한 장면이 이어졌다. 뿐만 아니었다.

“저건, 나인 것 같은데…….”

모리톨의 황당한 목소리를 시작으로, 기사들의 틈바구니에 섞인 본인의 모습을 발견한 이들이 차례차례 등장했다. 환상 속에 심어진 단장과 부단장들은 마족과 용맹하게 맞서 싸웠으나, 묘하게 엉성한 구석이 있었다.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음에도 그만한 결실을 보지 못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얼마 안 가 밝혀졌다.

“저, 적룡이다! 적룡이 등장했다!”

“드디어 카델 님이……!”

환상 속 기사들의 작위적인 외침을 따라, 상공에 모습을 드러낸 적룡이 대지 위로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리고 그 위에는, 늠름하게 몸을 세운 카델이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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