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6화 (396/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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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한 곳은 공동의 앞이었다. 카델은 눈앞에 드리운 깊은 어둠을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뜨거워.’

열기가 느껴졌다. 공동의 안쪽에서부터, 잠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살갗이 후끈하게 달아오를 만큼 뜨거운 열풍이 불어오고 있었다.

쿤라가 안쪽에 있음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카델은 곧장 안으로 들어서지 못한 채 머뭇거렸다. 직감적으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눈치챈 것이다.

“쿤라.”

자그맣게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으나, 돌아오는 것은 음산한 기운을 품은 바람뿐. 마른침을 삼킨 카델이 천천히 발을 뻗었다. 맨몸으로 들어갔다간 화상을 입을 것 같아, 비늘 갑옷을 두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쿤라, 안에 있는 거 맞죠?”

어두운 시야를 밝히기 위해 불덩이를 띄우고, 불안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안으로 들어설수록 열기의 강도는 점점 심해졌다. 카델은 숨이 막히는 더위를 인내하며 조금씩 걸음의 속도를 높였다.

공중에 띄운 불덩이의 개수를 늘리자, 공동의 벽면에 핏줄처럼 뻗친 붉은 기운이 비쳤다. 꼭 괴물의 몸속에 들어온 것 같다. 인상을 찌푸린 카델이 뜀박질을 시작했다.

“쿤라! 어디 있는 거예요!”

다급히 공동의 안쪽을 살피며 달려가던 카델의 표정이 일순 경악으로 물들었다.

“쿤라!”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공동의 가장 깊숙한 곳. 그곳에 새빨간 기운에 뒤엉켜 괴롭게 몸을 웅크린 쿤라가 있었다. 단숨에 그 앞으로 다가간 카델이 쿤라의 몸을 흔들었다.

“쿤라, 쿤라! 정신 좀 차려 봐요! 왜 이런 꼴이…….”

그의 몸은 말 그대로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열이 오른 정도가 아니라, 금방이라도 타 버릴 듯 강렬한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비늘 갑옷 위에 장막을 덧대어야 겨우 만질 수 있을 정도였다.

쿤라는 카델의 손길을 따라 맥없이 흔들렸다. 엉망으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리자,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벗어날 수 없는 악몽에 빠진 사람처럼 눈도 뜨지 못한 채 괴로워했다.

카델은 그의 뺨을 두드리고, 억지로 상체를 일으켜 벽면에 기댔다. 힘없이 기울어진 고개를 받히자 손바닥 위로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어떡하지? 내가 뭘 어떻게 해야…….’

가르엘을 데려왔어야 했나? 가르엘을 데려왔대도 그가 쿤라를 치료할 수 있었을까? 인간도 아닌 적룡을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애초에 그가 어쩌다 이런 꼴이 됐는지도 알 수 없었다.

‘시스템의 짓인가? 하지만 최근에 시스템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짓은 하지 않았어. 쿤라를 괴롭힐 만한 이유는 없다고!’

언제나 강자의 위치에 있던 쿤라의 나약한 모습은, 순식간에 카델의 평정을 앗아 갔다. 그는 쿤라의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연신 허둥거렸다.

‘뭔가 방법이 없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마음이 급해졌다. 카델은 울상이 되어 공동의 내부를 훑었다. 곳곳을 불덩이로 밝히자, 구석에 난 작은 공간이 눈에 띄었다.

“저긴…….”

쿤라가 종종 들어가 자신의 물건을 꺼내 오곤 하던 장소였다.

‘내가 처음 쿤라를 만났을 때도 저곳에서 술을 꺼내 왔지.’

기이할 정도로 시원한 술이 빠르게 활력을 채워 줬던 기억이 있다. 그것이라면 당장이라도 타들어 갈 것 같은 쿤라의 열기를 식힐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쿤라의 뺨을 쓸어내린 그가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봐 두었던 구멍 안으로 몸을 들이밀자, 생각보다 넓은 공간이 드러났다.

카델은 돌로 만들어진 빼곡한 선반을 빠르게 훑어내며 물건을 찾았다. 곧 익숙한 크리스털 병을 발견한 그가 병을 한 품 가득 쓸어 담아 밖으로 빠져나왔다.

“대체 왜 이런 꼴이 된 거냐고…….”

밀랍 인형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과 괴로운 표정. 엉망으로 흐트러진 그의 모습은 전혀 달갑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입을 벌려 병 안의 액체를 흘려보낸 카델이 걱정 가득한 시선으로 쿤라의 상태를 살폈다.

바람 마력으로 땀을 식히고,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도 연신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렇게 지극 정성으로 쿤라를 보살핀 결과.

“너는…….”

느리게 눈을 뜬 쿤라가 더듬더듬 카델의 얼굴을 확인했다. 건조하게 갈라진 음성이 제 이름을 부르자, 카델이 황급히 그의 뺨을 붙들었다.

“나예요, 쿤라. 정신이 좀 들어요?”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지금 그런 게 중요해요? 하도 대답이 없길래 찾아왔더니 당신이 여기 쓰러져 있었다고요!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쿤라는 현실감을 되찾듯 몇 차례 눈을 깜빡이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가 정신을 차리는 동안 공동을 가득 메우던 열기가 가라앉으며, 무분별하게 뻗쳤던 기운이 다시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빠르게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그가 여전히 제 뺨을 감싼 손등을 쥐고, 걱정으로 가득 찬 카델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내 걱정은 할 필요 없다고 했을 텐데.”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

“시스템 때문인 거예요? 당신이 이렇게 된 거.”

걱정스러운 물음에 쿤라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는 말없이 카델을 마주 보다, 이내 높낮이 없는 덤덤한 어투로 말했다.

“모든 건 내 탓이다.”

“……네?”

“이 모든 건, 전부 내 탓이야.”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내가 아까 술을 먹이긴 했는데. 혹시 취했어요?”

카델이 황당하게 되물어도 쿤라의 태도는 담담하기만 했다. 그는 쥐고 있던 카델의 손을 아래로 끌어 내리고, 공허한 눈을 내리깔았다. 겨우 의식을 되찾은 쿤라는 꼭 다른 존재가 된 것 같았다. 모든 기력을 빼앗긴 것처럼 허탈해 보이기도 했다.

“……왜 그래요, 쿤라. 불안하게.”

카델은 쿤라의 힘 빠진 손아귀에서 제 손을 빼냈다. 또 무슨 이상한 기억을 되찾은 걸까. 무슨 기억이길래 그 오만방자하던 적룡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걸까.

심장이 불쾌한 박자를 타고 널뛰었다. 불길한 예감이 사방의 공기를 가득 채워, 온몸을 무겁게 짓누르는 듯했다. 찾아온 침묵 속에서 카델은 인내했고, 한참을 멈춰 있던 쿤라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패배자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의 입에서, 진심을 담아 흘러나올 줄은 전혀 예상치 못한 말. 간단한 사실을 전하는 것처럼 무미건조한 말투에, 카델은 망연히 그를 바라보았다.

한 번 떠오른 기억은 무너진 둑처럼 속절없이 터져 나가, 견고한 벽 속에 감춰져 있던 진실 하나를 끄집어냈다. 쿤라는 이 세계의 유일무이한 신이었다.

그는 자신의 세계를 사랑했다. 박동하는 자연을, 그 안에 살아 숨 쉬는 동식물과 인간, 심지어는 마족까지도. 간혹 그들이 일구어 내는 불협화음이 못마땅하긴 했으나, 영생을 살아온 쿤라에게 불만은 찰나에 불과했다.

끊임없이 돌보아도, 평생을 사랑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자, ‘이세계의 신’이 찾아오기 전까지. 쿤라의 생은 조화와 사랑으로 풍족했다.

그자는 이름이 없었다. 본연의 형체도 없어, 처음 발견한 쿤라의 모습을 흉내 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느 날 불쑥 찾아와 쿤라의 세계를 굽어본 그자는, 경계하는 쿤라에게 거리낌 없이 말을 걸어왔다.

[난 다양한 세계를 여행하고 있다. 그대는 이 우주에, 이 무수한 차원에 얼마나 많은 세계가 존재하는지 알고 있나?]

“모른다. 궁금하긴 하지만, 작은 호기심을 채우겠다고 내 세계를 떠날 마음은 없어. 달갑지 않은 불청객을 모실 의향도 없고.”

[불청객이 아니야.]

“그러시겠지.”

[나는 침략자다.]

“……?”

[세계를 먹어 치우는 포식자, 그 안의 영혼을 향유하는 탐미자, 향락에 취한 중독자, 그리고…….]

이 모든 차원의 절대자. 그자는 아주 뻔뻔스럽게도, 웃음기 하나 없는 목소리로 자신을 ‘절대자’라 칭했다.

코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세계의 신을 만난 것도, 이세계의 존재를 확인한 것도 처음이지만. 눈앞의 불청객은 제대로 정신이 나간 게 분명했다.

“세계를 먹어 치우는 포…… 뭐? 됐고, 싸움꾼 돼지. 그럼 너는 지금, 차원을 넘어 이 몸의 세계를 침략하러 왔다는 거냐?”

[그 호칭은 마음에 들지 않는군.]

“뭘 따지고 있어.”

여행객의 신분으로 찾아왔대도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자신이 수호하는 세계에 범상치 않은 힘을 가진 이물질이 끼어들었다는 것은, 쿤라에게 있어 상당히 신경 쓰이는 불확실 요소였다.

그는 자신의 모습을 한 ‘침략자’의 앞으로 다가갔다. 모든 표정이 사라진 인형 같은 자신의 얼굴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묘한 불쾌감을 안겼다.

“이 몸에게 싸움을 걸겠다는 건가? 이곳은 너의 세계가 아니다. 제대로 실력 발휘도 하지 못할 녀석이…….”

몹시도 건방지고 오만하다. 쿤라는 이 풋내기 침략자에게 자기 분수를 알려 주고자 했다. 하지만 그가 채 말을 끝마치기도 전.

[나는 이제껏, 무수한 세계의 영혼을 수거해 왔다.]

어떤 것에도 닿지 않은 쿤라의 몸이, 포탄을 맞은 것처럼 강렬한 충격파에 밀려났다. 몸이 반쯤 접힌 채로 발사되며, 무성한 숲에 일직선의 길을 냈다.

쿤라는 수십 개의 나무 기둥을 부러뜨리며 날아가면서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했다. 끊임없이 귓가를 울리는 침략자의 음성이 현실감을 흩뜨렸다.

[그 영혼을 나의 세계로 가져와 대지에 흩뿌렸다. 나의 것들은 쉴 새 없이 즐거움을 피워 냈고, 나는 몹시 흡족했지. 그들의 즐거움이 메마르지 않는 이상 영혼은 죽지 않아. 좀 더 많은 영혼을 모은다면 훨씬 많은 즐거움이 나의 세상을 채울 테고, 나는 점점 더 강해질 거다.]

간신히 날개를 펼친 쿤라가 가까스로 반동을 이겨 몸을 세웠다. 거친 숨을 고르자 입술 새로 무언가 뜨거운 것이 흘렀다. 반사적으로 입가를 훑어 낸 손등에 붉은 액체가 묻어났다. 선혈이었다. 선명한 핏자국을 발견한 쿤라의 눈빛에 동요가 스쳤다.

[세계의 영혼을 수거하기 위해서는, 수호자의 안내가 필요하다. 세계의 수호자만이 영혼의 위치를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 내게 영혼을 넘겨라. 작은 세계의 수호자, 쿤라여.]

“……헛소리를 요란하게도 하는군. 나는 나의 세계를 네 하찮은 유흥에 놀아나게 할 마음이 없어.”

[수호자가 사라진 세계는 많은 침략자의 먹잇감이 되지. 그들이 너의 방식으로 세계를 다스리리란 기대는 하지 마라. 하지만 나는 네 방식을 존중하겠다. 난 그저, 이 세계를 온전히 즐기고 싶을 뿐이니까.]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건, 우리가 다른 세계를 다스리고 있어선가?”

[아니. 그건 네가 아직까지 힘의 격차를 느끼지 못해서다.]

힘의 격차. 침략자는 무덤덤하게도 자존심을 긁어 댔다. 그의 말대로 쿤라는 이 세계의 수호자, 또한 유일한 절대자였다. 단 한 번도 패배를 경험한 적이 없었으며, 경험해서도 안 되는 존재.

만약 누군가 그에게 힘의 격차를 논한다면, 그것은 우위에 있는 쿤라가 두렵기 때문이어야 했다.

하지만.

“커헉……!”

[만족하며 제자리에 머무른다면 성장할 수 없다. 그건 신이라고 다르지 않지.]

침략자는 간단한 손짓, 가벼운 움직임만으로 쿤라를 압도했다. 무형의 힘은 범접할 수 없는 속도로 차근차근 그의 육체를 좀먹어 갔다.

화려하던 날개는 순식간에 넝마가 되었고, 그 무엇도 뚫을 수 없던 비늘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쿤라는 그의 움직임을 읽을 수조차 없었다.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한, 기이할 정도로 표정이 없는 침략자. 그는 한순간도 쉬지 않고 쿤라를 몰아붙였다.

마음만 먹는다면 세계의 절반을 너끈히 불태울 화염이, 태산을 꿰뚫을 발톱이, 이 세계의 흐름을 관장하는 기운이. 침략자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쿤라의 공격은 그에게 어떠한 상처도 입힐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흘리는 피의 양이 늘어나고, 생전 겪어 본 적 없던 고통이 찾아오며. 쿤라는 혼란과 함께 처음으로 ‘공포’라는 감정을 더듬을 수 있었다.

이곳에서 패배해선 안 됐다. 그것은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패배가 두려워서라는 사소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패배한다면, 이 세계는. 그 무엇보다 사랑하고 아껴왔던 이 세계는, 누군가의 놀잇감이 되어 버린다. 누군가의 즐거움을 위해 꼭두각시처럼 끊임없이 놀아나는 것이다.

그런 일은 용납할 수 없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그 끔찍한 재앙만은 막아 내야 한다.

―라고 다짐했으나.

[지키고 싶은가?]

그는 패배했다. 고작 10분 남짓한 싸움. 그들의 난투에 우뚝 솟았던 산맥은 평원이 되었고, 푸르던 하늘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광활한 대지 위로 쿤라의 피가 바다처럼 펼쳐졌다.

쿤라는 자신의 생명이 빠르게 꺼져가고 있음을 느꼈다.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가고, 아찔한 절망이 그 빈자리를 채웠다.

[너는 패배했다. 그럼에도 지키고 싶은가? ……대답하라, 작은 세계의 나약한 신이여. 너의 세계가 여전히 존재하길 바라는가?]

“내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지키고 싶다.”

간혹 인간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을 때면, 짧디짧은 생의 간절함이란 얼마나 덧없는가. 느긋하게 생각하고는 했다. 하지만 지금, 쿤라는 이 세계의 누구보다도 간절했다.

작은 인간들의, 모든 생명의 사소한 간절함을 지키기 위해. 그 역시 절박하고 간절하게 자비를 구했다.

자존심 따위는 버린 지 오래였다. 그는 감히 머리를 들어 올리지도 못했다. 언제 닥칠지 모를 재앙에 겁을 먹어, 무엇을 대가로 내놓아도 좋으니 살려만 달라 빌었다.

다행이랄 것은, 이세계의 신은 오만한 애송이가 분수를 파악하고 무너져 내리는 꼴을 만족스럽게 여겼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이 세계의 영혼을 내게 바쳐라. 나는 네 세계의 영혼을 탐닉하고, 나의 것들이 이 세계의 고통을 향유하게 할 것이다.]

“…….”

[그러니 너는 모든 기억을 버리고, 내가, 그리고 나의 것들이 네 세계를 누리는 것을 도와라. 그리한다면 너의 패배를 눈감아 주겠다.]

침략자는 세계의 영혼을 절반 가져가, ‘특수한 형식’으로 자신의 세계에 흡수시킬 것이라 했다. 그런 식으로 두 세계를 연결하고, ‘나의 것들’이 더 큰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이 세계의 흐름을 손보겠다고 했다. 또한 그 흐름이 제대로 유지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나의 것들’ 중 한 명을 추려 내 ‘감시자’로서 투입하겠노라 선포했다.

만족할 만한 즐거움을 얻을 때까지, 만족스럽지 못한 시간선은 실험용으로 쓰이다 버려진다. 영혼을 절반이나 빼앗긴 세계는 재생하지 못한다.

온전한 하나의 영혼이었던 시기, 세계를 꾸리고 있던 시간선의 총량에서 늘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시간선이 삭제될수록 미래가 허락된 시간선의 수 역시 줄어든다.

만약 침략자의 세계가 오래도록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즐거움을 추구한다면. 이 세계는 모든 가능성을 잃고 완전히 소멸해 버릴 것이다.

모든 걸 알고 있음에도 쿤라는 침략자와 거래했다. 그것은 패배의 순간마저도 미처 버리지 못한, 태생적인 오만 때문이었다. 그는 침략자와의 거래로 기억을 잃어도, 자신의 힘으로 기억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아주 멍청한 선택이었다. 그야, 결과적으로 그가 기억을 되찾은 이유조차 침략자, 곧 시스템의 영향이었으니. 그는 깨어난 순간조차 패배자였다. 모든 기억을 되찾고 진실을 깨달았으나, 기억을 잃기 전 세워 두었던 어설픈 계획조차 대부분 실행이 불가능해진 상황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너무 많은 시간선을 잃었다. 그동안 자신이 했던 것은, 여전히 스스로가 세계의 절대자인 양 무식하고 오만하게 구는 것이 전부.

돌아온 기억과 함께 잊고 있던 절망감이 전신을 짓눌렀다. 쿤라는 자신의 앞에 자리한 인간을 바라보았다. 한때 그를 자신의 유일한 희망이라 여겼으나, 그는 결국 이세계의 ‘감시자’였다.

“나는…… 시스템을 이기지 못해. 그 힘은 영원히 이 세계를 떠나지 않을 거다. 그러니 너도 포기하거라. 이 세계가 완전히 붕괴할 때까지, 시스템은 사라지지 않아.”

아무런 의욕이 들지 않았다. 알아채지도 못할 만큼 깊이 묻혀 있던 절망은, 착실히 그의 뿌리를 좀먹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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