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기사단이 하나의 포탈을 타고 이동할 수는 없다. 그들은 4방위로 인원을 나눠 마계로 이동, 그 후 합류하는 방법을 택했다.
동쪽에는 청혈 기사단과 암철 기사단. 서쪽에는 그림자 기사단과 호스 기사단. 남쪽은 황혼 기사단과 광야 기사단. 북쪽은 제국의 기사단인 호계 기사단, 천시 기사단, 적린 기사단으로, 주축이 되는 7대국의 기사단 이외에는 각각 인원수와 활용도에 맞춰 나누어졌다.
“모두 어젯밤엔 좋은 꿈을 꿨는가?”
북쪽의 선두는 호계 기사단이었다. 그들을 이끄는 단장, 엑토 엔티는 근엄하면서도 쾌활한 표정으로 평원에 선 기사들의 면면을 돌아보았다. 그의 질문을 받은 기사들은 전부 굳은 얼굴로 목석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평화의 돌 탈환 작전 당일이다. 모두 악몽을 꾸지나 않았으면 다행일 긴장감 속에서 잠을 설쳤으리라. 그런 그들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엑토가 다시 한번 크게 외쳤다.
“우리가 무슨 꿈을 꿨는지, 지난밤을 얼마나 편안하게 보냈는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비호 아래 살아가는 제국인들! 우리의 승리를 믿는 그들의 단잠이다!”
카델은 능숙하게 아군의 사기를 올리는 엑토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실로 믿음직스러운 단장이다. 이상적인 단장의 표본인 그와는 달리, 자신은 모두가 모인 오늘 새벽에조차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입을 열면 쓸데없는 감정을 쏟아 낼까 두려워서였다.
“투쟁하라! 우리가 쟁취해야 할 것은 평화! 제국인, 나아가 인간계 전체의 삶이다! 어깨가 무거운가? 그렇다면 검을 휘둘러 떨쳐 내라. 쉬지 않고 투쟁한 끝에 우리는 비로소! 이 지긋지긋한 전쟁의 종지부를 찍고 무한한 영광을 얻을 것이다!”
엑토가 대검을 치켜들자, 기사들 사이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호계 기사단뿐 아니라, 천시 기사단원들 또한 열기에 전염된 듯 순식간에 전의를 끌어 올렸다. 그중 적린 기사단만이 고요를 지켰다.
“마법사들은 징벌의 문을 개방하라!”
대기하던 마법사들이 호계 기사단이 선 범위를 아우르는 술식을 생성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손짓을 따라 가느다란 마력이 하늘거리며, 바닥에 마법진이 그려졌다.
호계 기사단은 가장 먼저 마계로 이동하게 될 것이다. 그다음 차례는 천시 기사단. 적린 기사단은 마지막에 투입되어 전장의 흐름을 파악하고, 보조 형식으로 빈틈을 노리는 것이 북쪽 포탈의 계획이었다.
언뜻 단순해 보이나, 호계 기사단 정도의 인원과 제국 기사단만의 견고한 협동심이 있기에 가능한 전술이었다.
‘포탈을 타고 이동하자마자 탐색에 돌입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어느 정도 승률을 확보한 뒤에 움직여야겠지.’
두 가지 임무를 동시에 처리해야 하니, 그 어느 때보다 머리가 복잡했다. 팽팽 돌아가는 머릿속에선 여러 계획이 차근차근 순서를 맞추고 있었다.
“완성됐습니다! 마법진을 발동하겠습니다!”
한 마법사의 외침과 동시에, 호계 기사단이 선 바닥에서부터 암흑 마력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점점 몸집을 불려 가는 암흑 마력이 그들의 몸을 어둡게 물들이고. 카델의 어깨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다.
“전군! 마음을 단단히 먹어라!”
무수한 대대원들의 최전방에 자리한 엑토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불태우는 강렬한 의지만큼은 똑똑히 전해졌다.
‘엑토 경이 있다면 부담은 덜해질 거야.’
엑토라면 자신이 자리를 비운 때에도 부하들을 잘 통솔해 주리라 믿었다. 카델은 암흑 마력에 잡아먹히듯 사라져 가는 호계 기사단을 응시했다.
곧 마지막 전쟁이 시작된다는 생각은 과한 흥분을 유도했으므로, 최대한 머리를 비우려 노력했다. 어떻게든 평정을 유지한 채 전투에 임하고 싶었다. 하지만.
“카델.”
내내 침묵을 지키던 부하들 사이, 요젠이 그를 불렀다. 작게 눈을 굴리자, 심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법진 위에서 벗어나라고 해.”
“……뭐? 어째서?”
“저 안에서 마기가 느껴져. 꼭 마법진을 찢고 나오려는 것처럼…….”
징벌의 문은 발동과 동시에 암흑 마력이 피어나지만, 인간이 구현한 것인 만큼 마계 마법진처럼 마기를 생성하지는 못한다. 그런 곳에서 마기가 느껴진다니.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한 카델이 엑토를 부르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무, 무슨……!”
“으아악!”
난데없이 솟구친 대량의 마기가, 마법진을 통째로 집어삼키며 등장했다. 범람하는 마기가 순식간에 호계 기사단을 집어삼키고. 너머에서부터 기사들의 찢어지는 비명이 들려왔다.
“마기라고……?”
“모리톨 경!”
카델은 혼란에 빠진 아군 사이에서 모리톨을 찾아냈다. 모리톨은 예상치 못한 사태에 당황한 듯 보였으나, 빠르게 사태의 원인을 파악하려 했다.
“마법진에 문제가 생긴 겁니까?”
“아뇨, 술식에 실수는 없었어요. 애초에 인간의 마력으로 만든 마법진에서 마기가 나올 리도 없고요.”
“그럼 지금 제가 보고 있는 광경은 뭐란 말입니까.”
“함정이에요. 인간들을 마계로 끌어들이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었어요. 저 마법진 자체가 함정이었던 겁니다.”
마계 마법진이 완성되고, 마계와 인간계를 잇는 통로가 열릴 때. 처음부터 그 순간을 노려 역으로 공격할 셈이었던 것이다.
‘인간계의 동향을 살피는 마족이 있던 거야. 징벌의 문이 완성된 걸 알고 미리 대기하다, 발동과 동시에 신호를 보낸 거지. 이런 함정이 있을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
에밀리아는 처음부터 인간들을 순순히 마계에 들일 생각이 없었다.
“호계 기사단을 구해야 합니다! 당장 기사들에게 장막을 두르고 안으로 투입해야…….”
“잠깐.”
호계 기사단을 저 안에 방치했다간 전쟁 시작도 전에 큰 손실을 보게 될 것이었다. 그리 생각한 카델이 다급히 말했으나, 모리톨은 저지했다.
그는 미간을 좁힌 채 호계 기사단이 갇힌 마기의 기둥을 응시하고 있었다. 모리톨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서서히 힘을 잃어 가는 기둥의 모습이 보였다.
용오름처럼 미친 듯이 휘몰아치던 마기가 천천히 사그라지며, 사라졌던 아군의 모습이 비쳤다. 그리고 그들은.
“꺄하학! 죽어, 죽어!”
“위대한 마계, 위대한 마왕을 위하여!”
“어서 싸우자고! 모조리 죽여 주마!”
마족의 날카로운 손발톱에 급소가 꿰뚫리고, 기다란 창대에 매달리고, 처참하게 뭉개지거나 비틀렸으며, 피 칠갑이 되어 비틀거렸다. 망가진 그들의 곁으로 날개를 펄럭이는 고위 마족과 마족, 마물의 향연이 펼쳐졌다.
눈 깜짝할 새 호기롭던 아군의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으며, 살아남은 아군은 코앞에 드리운 적을 숨 가쁘게 상대했다. 카델은 이 비현실적인 장면 전환에 말문을 잃고 말았다.
‘이런 전개는…….’
기억 속에 없다. 스토리를 제외해도 마찬가지였다. 바삐 굴러가는 카델의 시야 속, 모습을 드러낸 고위 마족은 전부 초면이었다. 몇 번을 꼼꼼히 훑어봐도 마찬가지였다.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설마 이 낯설기만 한 적들이, 헬 모드에 추가된 새로운 적인 걸까. 처음부터 어그러진 계획에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엑토 경! 살아 있다면 대답하십쇼!”
처참한 광경을 목도한 모리톨이 큰 소리로 엑토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곧 넘쳐나는 적군 사이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빠져나왔다.
“징벌의 문이 잡아먹히고 있소! 이 녀석들을 전부 해치우지 못하면 이동할 수 없소! 모리톨 경, 카델 경! 싸우시오!”
징벌의 문이 잡아먹히고 있다니. 엑토의 말에 반사적으로 마법진을 내려다본 카델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옅은 마기로 뒤덮인 마법진 아래. 빼곡히 들어찬 마족이 당장이라도 빠져나올 듯 머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꼭 지하와 지상 사이에 얇은 거울을 둔 것처럼, 마계의 적들이 선명하게 비쳤다.
‘젠장, 이래서는…….’
너무도 허무하게 호계 기사단 전력의 절반을 잃었다. 말도 안 되는 손실이었다. 주먹을 그러쥔 카델이 곧장 마력을 방출했다. 날카로운 바람 마력이 적린 기사단은 물론, 전장의 아군을 아우르는 개별 장막을 생성했다.
“가르엘! 마법진 안으로 광역 치유술을 전개해! 살릴 수 있는 아군은 모조리 살려!”
“알겠습니다!”
“루멘과 요젠은 가르엘을 엄호, 라이돈과 반은 호계 기사단을 보호하면서 적을 정리해!”
빠르게 명령을 내린 카델이 펜던트 위로 마력을 불어넣었다.
‘마계로 넘어가는 이동 시간이 길어져선 안 돼. 단박에 끝내야 한다.’
본 게임을 시작하기도 전에 전력을 잃을 순 없었다. 망설임 없이 쿤라의 힘을 끌어온 그의 동공이 뱀처럼 길게 수축했다.
‘우선은 고위 마족부터. 나머지는 기사들에게 맡긴다.’
날카롭게 굴러가는 눈동자 속, 한 명의 고위 마족이 들어찼다. 가장 높은 상공에서 뒷짐을 진 채 이 모든 아비규환을 지켜보는 마족. 어두운 적색의 단발머리와 창백할 만큼 새하얀 피부, 양쪽의 길이가 다른 날개.
모든 특징을 일일이 따져 보아도 떠오르는 적은 없다.
‘뭐 하는 녀석인진 몰라도, 대체로 저렇게 무게를 잡고 있는 녀석이 가장 성가셨단 말이지.’
저 녀석이 행동에 나서기 전, 빠르게 처리하겠노라. 결정한 카델이 마법을 전개하려 했으나.
“……어?”
무미건조하게 지상을 내려보던 마족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