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델의 눈동자가 바삐 굴러갔다. 전세가 좋지 않다.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고위 마족은 물론, 일반 마족과 마물의 수도 상당했다. 마법진 아래에서 금방이라도 치고 들어올 듯 바둥거리는 적의 수는 굳이 헤아리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본능적으로 손이 펜던트를 향했다. 당장 쿤라를 불러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쿤라가 마계에서 제대로 힘을 발휘하려면 여기선 참아야 해.’
마계 진입 전부터 쿤라가 직접 개입하게 된다면, 시스템은 분명 제재를 걸어올 것이다. 본격적인 탐색에 돌입하지도 않았는데 쿤라의 힘에 제약이 생겨서는 안 됐다.
지금으로서는 어떻게든 인간들의 힘만으로 담판을 지어야 한다.
‘그러려면 고위 마족부터 해치워야 하는데…….’
로딘과의 전투가 시작된 뒤, 반은 카델을 본인과 멀리 떨어뜨려 두었다. 카델 역시 고집을 부려 그의 곁에 있기를 택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있어 봤자 반의 행동반경이 좁아지기만 할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멀리서 지켜보게 된 반의 전투는, 예상보다도 치열했다.
‘대체 저 로딘이라는 놈은 뭐지? 탱커형 적인가? 단순히 탱커형이라기엔 힘이 과하고, 딜탱이라기엔 말도 안 되게 단단해.’
언뜻 봐도 반이 밀리는 형국이었다. 모아 둔 혈액은 충분할 테고, 부상은 응급 처치한 상태. 그럼에도 반은 로딘을 압도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녀가 들고 있는 방패. 그리고 황당할 만큼 단단한 몸 때문이었다.
“난 말이야, 상대의 공격이 내 몸에 맞아 튕겨 나갈 때의 그 감각! 그 간질간질한 감각이 너무 좋아. 그러니까 더 때려 봐. 날 더 즐겁게 해 달라고!”
반이 아무리 우악스럽게 대검을 내려찍어도, 날카로운 오라를 수십 번 내질러도. 로딘에겐 생채기 하나 생기지 않았다. 가르엘의 백부, 로렌스 하이웨일과는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로렌스는 상처를 입는 즉시 회복하는 극한의 재생력으로 마치 무적인 것처럼 비쳤을 뿐. 로딘은 그 외피가 비정상적으로 단단해, 실제로 아무런 상처를 입지 않는 것이었다.
뿐만아니다. 단단함과는 별개로, 로딘이 휘두르는 방패의 위력 또한 상당했다. 방패를 앞세우는 돌진은 스치기만 해도 살점이 통째로 뜯겨 나갈 만큼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헬 모드 전용 적이라고 해도 무적일 리는 없다. 분명 약점이 있을 거야.’
자신이 공략법을 알지 못한다고 적이 죽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녀석들이 게임 캐릭터든 아니든, 살아 있는 생명체인 한 약점은 있을 테니까.
지금 자신에겐 최강의 기사들이 있다. 그들의 실력으로 해치우지 못할 적은 없었다. 카델은 땀으로 축축해진 손을 그러쥐며 시선을 옮겼다.
‘다음은 아르파.’
접촉한 모든 기운을 흡수할 수 있는 말도 안 되는 능력의 고위 마족. 기본적으로 마법사인 것 같지만, 요젠의 암기를 빼앗은 것으로 보아 흡수한 기운은 대부분 사용할 수 있는 듯했다.
‘저 녀석은 기운을 사용하지 않는 순수 무력으로 제압하는 게 최선일 것 같은데…….’
현재 아르파는 요젠과의 전투에 한창이었다. 제 기운을 마음대로 사용한 것에 열이 받았는지, 요젠의 전투는 멀리서 봐도 느껴질 만큼 과격했다.
“아야야, 아파! 날 자극할수록 다치는 인간만 늘어나게 될걸? 난 여기서 맛있는 기운이나 빨아 먹고 있을게. 가만히만 놔두면 다른 녀석들 손에 덜 아프게 죽게 해 줄 테니까…….”
“시끄러워.”
“하아. 말이 안 통하네.”
날개가 있는 아르파는 요젠의 공격을 피해 공중으로 날아올랐으나, 별 소용은 없었다. 지상과 지면을 가리지 않고 생성되는 암기의 웅덩이. 요젠은 그 웅덩이를 포탈처럼 사용하며 자유분방하게 이동했다.
아르파의 머리 위에서부터 떨어진 그가 낙하와 동시에 아르파의 머리를 노렸다. 아르파는 곧장 몸을 피했으나, 그의 움직임을 예상한 요젠이 단검을 던져 기어코 아르파의 귀를 베어 냈다.
이런 식으로 입은 상처가 벌써 빼곡하게 몸을 채웠다. 그럼에도 아르파는 요젠을 직접 공격하는 대신, 근방의 인간들에게 화염구를 던져 불씨를 퍼뜨렸다.
‘저런 식으로 남을 공격해서 요젠의 집중력을 흩뜨릴 셈이야. ……의도했든 안 했든, 요젠의 성정을 제대로 파악했어.’
요젠은 타인의 개죽음을 깡그리 무시하며 전투에만 집중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자신의 전투가 길어질 때마다 기사들이 하나둘 쓰러져 간다면. 그의 평정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요젠은 안 돼. 순수 무력만으로 상대하기 위해선 루멘이 필요하다. 하지만…….’
루멘은 라이돈을 운반하던 도중 크게 다친 상태다. 지금은 가르엘이 둘을 집중 치료 중이었으나, 전장의 한복판인 만큼 한계가 분명했다.
‘게다가 가르엘의 상처. 여전히 회복되지 않아.’
쿤라의 힘을 사용한 한쪽 동공이 조여지며, 게슴츠레한 눈 틈새로 암흑 마력 너머의 가르엘이 보였다. 그는 바로 눕힌 루멘과 라이돈의 몸 위에 마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표정은 침착하고 덤덤했지만, 몸은 아니다. 여기저기 뚫리고 상처 난 몸에서 상당한 양의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상처에선 끊임없이 마기가 피어올랐으나, 재생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의 재생력으로도 회복이 어려울 만큼 순도 높은 마기라는 얘기였다.
‘그 빨간 머리가 가르엘을 따로 노렸던 거야.’
아무 생각 없는 표정을 하고선 인간 측의 전력만큼은 제대로 파악한 모양이었다. 까득, 이를 간 카델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 보았다. 짧게 시선을 옮기자, 높은 상공에서 몸을 수복 중인 마족이 보였다.
‘저 몸이 완전해지면 다시 광역 공격이 시작될 거야. 그렇다고 섣불리 접근해 저지하려다간 아까처럼 묵사발이 될 테고.’
아무리 생각해도 처치 일 순위는 저 빨간 머리 마족이다. 그녀를 없애야 아군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되도록 원거리에서, 일대일 구도가 되지 않도록 거리를 유지한 채로 일제 사격을 하는 게 낫겠어.’
그걸 위해선 협조가 필요했다. 결정한 카델이 빠르게 아군의 틈을 비집으며 외쳤다.
“모리톨 경!”
사방으로 화염구를 날려 파도처럼 몰아치는 마물을 넘어뜨렸다. 마치 무성한 수풀을 헤집듯 나아간 그곳엔, 급박한 전투를 치르고 있는 모리톨이 있었다. 빠르게 적의 숫자를 파악한 카델이 [화련]을 날려 모리톨을 둘러싼 마족의 목을 옭아맸다.
그에 뒤늦게 카델을 발견한 모리톨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카델 경.”
“적이 끊임없이 몰려오고 있어요. 일일이 상대하기엔 아군이 죽는 속도가 더 빠릅니다.”
“징벌의 문을 재가동해야 해요.”
“고위 마족부터 처리하죠. 가장 성가신 저 녀석을 먼저 잡아야 합니다.”
카델이 하늘을 가리키며 말하자,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긴 모리톨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겁니까? 조금 전 카델 경을 하늘에서 추락시킨 마족이.”
“네. 근접전은 불가능해요. 일정 간격을 유지하고 동시에 공격을 날린다면, 저와 같은 꼴이 되진 않을 겁니다. 경의 도움이 필요해요.”
카델은 모리톨의 손에 들린 활을 일별하며 말했다. 모리톨 아낙은 기사단장 중에서는 드물게도 활을 이용하는 원거리 공격이 특기인 자였다. 마법사들을 모아 그와 자신이 주축이 되는 공격을 날린다면. 최소한의 피해로 마족을 해치울 수 있을 것이었다.
전장에서의 모리톨은 결단이 빨랐다. 그는 카델의 제안을 곧장 수락했다.
“좋습니다. 보조할 마법사들을 불러 보죠.”
“아뇨. 마법사는 제가 모아 오겠습니다. 경은 보낸 마법사들을 적절하게 배치하고, 제가 신호를 보내면 일제히 공격할 수 있도록 지시해 주십쇼.”
“좋습니다. 서두르죠.”
카델은 곧장 마법진의 내부로 이동해 마법사를 찾았다. 그가 원하는 이는 호계 기사단 4대대. 그리고 4대대의 대장, 제리엘 그라토리였다.
검기가 난무하는 전장에서 제리엘을 찾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카델은 제리엘에게 계획을 전달한 뒤, 모리톨에게로 이동하는 마법사들을 엄호했다.
마법사들이 모리톨과 무사히 만난 것을 확인한 카델은 그들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조금만 위치를 옮겨도 적들이 몰려들어, 시간이 지날수록 빠르게 체력이 소모되고 있었다.
‘이래서는 마계에 돌입하기도 전에 기가 다 빨리겠어.’
다른 쪽 동맹군의 상황이라고 크게 다를 것 같진 않았다. 초장부터 전력이 박살 난 아군을 데리고 전투를 강행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일순 걱정이 들었으나, 지금 생각해 봐야 답이 나오는 일도 아니었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은 카델이 근방의 적을 간단히 정리한 뒤, 빨간 머리 마족의 위치를 확인했다. 녀석의 재생은 하반신의 절반 정도가 남아 있을 뿐. 시간이 촉박했다.
‘로딘과 아르파는 부하들이 묶어 두고 있어. 당장 방해받을 일은 없을 거다.’
빨간 머리를 처치한 후, 기세를 이어 나머지 고위 마족을 공략해야 했다. 카델은 조급함을 집어삼킨 채 마력을 끌어 올렸다. 먼 곳을 살피는 그의 눈에 착실히 거리를 벌린 채 공격을 준비 중인 아군의 모습이 보였다.
카델은 그중 모리톨에게 집중했다. 그의 무기는 특별한 마도구를 장착한 활. 필살의 일격을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었다.
하늘을 겨냥한 채 천천히 시위를 당기는 모리톨의 몸에서부터 무형의 기운이 피어올랐다. 은은한 황금색을 띠는 기운을 따라 시위에 걸친 화살이 조금씩 빛나기 시작했다.
저 화살이 가장 밝게 빛날 때. 그 순간이 신호를 보낼 타이밍. 카델은 모리톨을 주시하는 동시에 화염과 바람의 마력을 한데 뭉쳤다.
먼저 자신의 마법으로 마족을 타격한 뒤, 마족이 이쪽에 반응하는 동안 사방에서 아군의 공격이 쏟아지게 할 생각이었다.
‘……지금이다.’
모리톨의 화살이 눈부시게 빛나며, 그의 화살촉이 정확히 마족을 조준했다. 모리톨의 준비가 끝났음을 직감한 카델이 하늘 위로 화염구 발사하고. 준비된 마법을 전개하려던 순간.
“모리……!”
빛의 속도로 날아든 무언가가 모리톨의 몸을 강타했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모리톨의 몸이 반으로 접히며, 조준 중이던 화살이 엉뚱한 곳으로 발사됐다.
한편 모리톨 측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제리엘 측의 공격이 시작됐다. 계획이 틀어졌으나, 제리엘에게 반격이 몰리기 전에 카델만이라도 마법을 전개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곧장 반응하지 못했다.
바로 모리톨을 강타한 ‘무언가’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것은 어딘가에서 날아든 돌덩이도, 주먹이나 마법도 아닌. 누구보다 익숙한 부하의 몸이었으므로.
“반!”
다급한 외침은 이어지는 비명에 파묻혔다. 반사적으로 반의 상태를 확인하려던 카델은, 뒤늦게 제리엘의 방향으로 내리꽂히는 마기의 향연을 발견했다.
그에 허둥지둥 준비해 둔 마법을 날렸으나. 그의 공격은 이미 마기로 흩어진 마족의 잔상을 타격할 뿐이었다.
‘대체 왜……!’
속에서부터 갖은 욕설이 치솟으며, 불안과 공포가 아른거렸다. 통제할 수 없었다. 이 전장의 어떤 요소도, 자신의 뜻대로 흘러가는 것이 없었다.
공략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껏 자신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빠르게 적의 파훼법을 파악하고 전략을 세웠기 때문. 하지만 미지의 적을 목도한 지금, 자신은 이렇게나 무력하고 한심했다.
“반, 반, 반…….”
어찌할 줄 몰라 하며 반의 이름을 연신 중얼거리면서도, 카델은 제리엘 측으로 쏟아지는 공격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마법사들의 장막이 몇 중으로 둘렸으나, 충격을 완벽하게 완화해 주지는 못할 것이었다.
‘이렇게 위험한 녀석인데도 공격조차 제대로 할 수 없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빨간 머리를 호위하는 것은 아르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를 공격하려는 순간, 사방에서 촉각을 곤두세우던 마족들이 곧장 방해 공작을 펼친다. 마족들도 빨간 머리의 존재가 이 전장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인지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방해받지 않도록 다른 적부터 처리해야 하나? 하지만 그러기엔 적의 수가 너무 많아. 자칫하다간 이도 저도 아닌 모양새가 될 거야.’
아군을 보호할 수단 역시 마찬가지였다. 빨간 머리의 공격을 막을 수 없다면 다른 마족의 공격이라도 제대로 차단해야 하건만. 계속 장막을 유지해 주기엔 마법사 보호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준비해 둔 방어구와 마도구도 마찬가지. 호계 기사단의 경우, 가장 먼저 타격을 입은 만큼 방어구의 손상이 상당했다.
‘빨간 머리를 노리는 데도, 아군을 방어하는 데도, 징벌의 문을 재가동하는 데도……. 더 많은 마법사가 필요해.’
첫 습격에 너무 많은 아군을 잃었다. 전력 보충이 시급한 상황. 하지만 이미 끌어올 대로 끌어온 병력을 어디서 더 보충한단 말인가.
막막함과 무력감에 일순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카델!”
어디선가 들려오는 요젠의 외침과 함께, 뜨겁고 묵직한 감각이 전신을 관통했다.
‘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인식하기도 전. 뜨겁게 응어리진 액체가 입 안 가득 차올랐다. 힘이 풀려 느슨하게 벌어진 입새로 뭔가가 흘러내리며, 비린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피였다. 그것을 인식하자, 불에 덴 듯 열이 오르며 끔찍한 통증이 전신을 덮쳤다. 더듬더듬 움직이는 시야 속으로 몸을 관통한 암기가 비쳤다. 꾸물거리며 빠져나가는 암기의 표면으로, 큼직한 살점과 축축한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카델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루멘과 똑같은 공격에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멀리서 부하들의 외침이 들려왔으나, 어떤 대답도 내놓을 수 없었다. 급속도로 힘이 빠지며 눈앞이 아득하게 흐려졌다.
‘안 돼…….’
여기서 쓰러질 순 없었다. 마계에 진입하기도 전에, 이토록 간단하게 무릎을 꿇을 수는 없었다. 카델은 어떻게든 쓰러지지 않고, 가르엘을 불러 자신을 치료해 달라 외치려 했다.
그러나 벌어진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은 오로지 뜨거운 선혈뿐. 맥없이 감기는 눈꺼풀 사이, 마지막으로 들어찬 것은 절망 어린 아군의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