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기 직전까지 라이돈을 설득할 생각만 하고 있었건만. 간신히 눈을 뜬 카델은, 전혀 예상치 못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라이돈이…… 숲으로 돌아갔다고?”
“예. 아군을 불러온다더군요. 그때까지 버텨 달라 했으니, 단장님. 지휘해 주세요.”
라이돈이 스스로 동족을 설득하기 위해 떠났다니. 그의 선택이 놀라웠고, 이내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가 직접 동족을 부르러 갔다는 것은, 이 전쟁에서 승산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테니.
무의식적으로 상처가 아문 뱃가죽을 쓸어내린 카델이 부하들의 상태를 살폈다. 가르엘의 집중적인 치유술 덕에 다들 의식은 되찾았으나, 상태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조금 더 치료받는 편이 나을 듯했다. 게다가 가르엘은.
“넌 단원들의 치료가 마무리되는 대로 회복에 집중해. 너희도 가르엘이 회복에 전념할 수 있도록 엄호해 주고. 그 전까진 내가 보호해 줄게.”
“……미안해, 카델.”
카델의 명령에 생뚱맞은 사과가 되돌아왔다. 당황한 시선이 요젠을 향했다. 요젠은 아직 아물지 않은 허리께의 상처를 감싼 채 카델의 앞으로 다가왔다. 눈을 가렸음에도 그가 느끼는 죄책감이 전해졌다.
“뭐가 미안하다는 거야, 요젠.”
“아르파를 죽이지 못했어. 그 탓에 내 힘을 흡수한 아르파가 많은 인간을 죽였고, 결국 너까지…….”
“인간들을 죽인 건 네가 아니라 아르파야. 암기를 빼앗긴 건 뼈아픈 실책이지만, 그 녀석을 죽이면 해결될 문제고. 요젠.”
카델은 상처를 가린 그의 손등을 조심스럽게 감싸며 말했다.
“치료를 마치면 내가 신호를 주기 전까지, 네 특기를 발휘해 봐.”
“특기……?”
“사람을 구하는 거야. 아르파가 사용하는 암기는 네가 아니면 기척을 눈치챌 수 없어. 그 녀석에게서 기사들을 보호해 줘.”
카델의 말에 요젠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요젠을 안심시키듯 작게 웃은 카델이 남은 부하들을 돌아보며 단호히 말했다.
“라이돈이 돌아온다면 상황은 역전될 거야. 그러니 너희는 동료를 믿고 버텨. 할 수 있는 최대치를 뽑아, 더는 전세가 기울지 못하도록 막자.”
한 번 의식을 잃고 죽음의 위협을 겪었음에도. 카델의 눈빛에선 이전보다 강렬한 투지가 불타올랐다. 단원들은 그런 카델을 보며 전의를 불태웠고, 카델은 그들에게 추가적인 명령을 건넨 뒤, 주위를 보호하는 두꺼운 장막을 둘렀다. 하지만 그는 장막 안에 머무르지 않았다.
단장들을 만나야 했다. 카델은 꾸역꾸역 몰려드는 적들을 헤쳐 나가며 목소리를 높였다.
“엑토 경! 모리톨 경! 단장과 대대장들은 대답해 주십쇼!”
그의 외침은 적들의 괴악한 웃음소리와 곳곳에서 번지는 폭음에 파묻혔다. 카델은 몇 차례 더 소리 높여 아군을 부르다, 결국 하늘 높이 화염구를 쏘아 올렸다. 그것을 발견한 적들이 카델에게 몰려들며 사위를 포위해 갔지만, 신호를 보내는 것을 멈추진 않았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카델 경!”
카델을 둘러싼 적들의 틈새로 누군가 등장했다. 묵직한 해머가 적의 허리와 머리를 짓뭉개며 좁다란 길을 만들었다. 카델은 그 길을 따라 몸을 빼내며 외쳤다.
“소린 경!”
본인의 피와 적의 피가 어지럽게 뒤섞인 소린의 얼굴에선 다급함이 엿보였다. 카델은 곳곳이 깨진 방어구와 선명한 상처를 빠르게 훑어 내곤, 그의 위로 장막을 둘러 주었다.
“단장님이 크게 다치셨소.”
“엑토 경이요?”
“경과 모리톨 경이 쓰러진 사이 제리엘 경과 그의 부대가 집중 포격을 당했고, 단장님은 그 공격을 막아 내려다 복부를 뚫리셨소. 가르엘 경이 곧바로 치유술을 사용해 목숨은 부지하셨지만, 일어나 싸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오.”
“그럼 엑토 경과 제리엘 경은 지금……?”
“후방으로 옮겨 기사들이 보호하고 있지만, 아예 이동 마법진을 타고 떠나는 게 아니라면 이곳에 안전지대는 없소.”
소린의 말에 카델이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실책이다. 적들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내린 섣부른 판단. 그리고 부하의 부상으로 흐트러진 집중력. 그로 인해 두 기사단의 단장이 쓰러졌고, 귀한 마법사인 제리엘과 그의 대대가 전력에서 제외됐다.
“지금은 막는 것만이 최선이오. 이런 상황에서는 제대로 된 치유술도 사용할 수 없고, 도주조차 불가능하지. ……그러니 카델 경. 살아남은 기사들을 데리고 이동 마법을 사용해 주시오.”
뜻밖의 발언에 카델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묻고 싶었으나, 마주친 소린의 눈빛이 너무도 무거웠다. 수많은 전장을 헤쳐 온 그조차, 어쩌면 수많은 전장을 헤쳐 왔기에 더더욱. 그는 이 전쟁에서 분명한 패배의 조짐을 읽었고, 살아남은 이들이라도 돌려보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경이 마법을 준비할 때까지 적은 1대대가 감당하겠소. 돌아가 치유사들의 치료를 받고, 지원군을 데리고 돌아와 주시오.”
단장이 쓰러진 지금, 그는 호계 기사단 1대대의 대장이자 부단장으로서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리고 그의 선택은 바로 1대대의 희생. 소린은 자신과 부하들의 목숨을 걸고 제국의 기사들을 살리려 했다.
선택을 마친 소린의 눈빛에선 어떠한 공포도 비치지 않았다. 카델은 그런 소린의 눈빛을 마주하다, 주먹을 그러쥐며 대답했다.
“싫습니다.”
“고집을 부릴 때가 아니오. 아무리 경이라도 이 상황을 타파하진 못하오. 그걸 인정하고 남은 이들만이라도…….”
“곧 지원군이 도착할 겁니다.”
“지원군……?”
“그리고 적린 기사단에선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어요. 부하들이 회복하는 즉시 고위 마족을 압박할 만한 전술을 생각해 뒀습니다. 그 전술에는 호계 기사단과 천시 기사단의 도움도 필요해요. 그러니 전 살아남은 아군을 모조리 동원할 겁니다.”
이곳에서 물러난다면 그들에게 두 번의 기회는 없다. 카델은 그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또한 그는 라이돈의 힘겨운 결정으로 얻어 낸 기회를 어떻게든 잡아야 했다.
“그러니 경의 희생은 필요 없습니다. 끝까지 버티는 데에만 집중해 주세요.”
⚔️
“힘들어 죽겠으니까 간결하게 말해.”
바닥에 꽂은 쌍검으로 중심을 잡은 채 허리를 숙인 드레프가 힘겹게 말했다. 상처투성이의 몸과 이가 빠진 칼날을 보아, 힘들어 죽겠다는 것이 단순한 투정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카델은 앞에 모인 대대장들을 차분히 둘러보았다. 소린과 자신의 부름으로 어렵사리 한곳에 모인 그들은, 카델의 장막 밖으로 보이는 적들을 힐끔거리며 피로와 조급함을 드러냈다.
바깥에서는 여전히 부하들이 치열한 싸움을 치르고 있었으니. 카델도 그들을 길게 붙들어 둘 생각은 없었다.
“곧 뛰어난 마법사들이 대거 도착할 겁니다. 그들이 오면 전세를 뒤집을 가능성은 충분해요. 아니, 무조건 뒤집힐 겁니다.”
“왕실 마법사들이라도 부른 거야?”
“보면 알아. 어쨌든, 여러분은 지원군의 도착을 믿고 대대원들을 이끌어 주시면 됩니다.”
마법사들의 지원. 카델의 발언은 패배의 기운에 질식해 가던 아군에게 더없이 큰 희망이었다. 카델은 조금씩 빛을 되찾아 가는 그들과 눈을 맞추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지금 저희의 가장 큰 문제는 장막조차 무용하게 만드는 마기입니다. 관찰 결과, 그 공격은 한 고위 마족이 자신의 몸을 마기로 변환해 실행하는 거예요. 그러니 마기를 공격할 수 있다면, 그 마족에게도 유효타를 먹일 수 있다는 거죠.”
“그게 가능한 겁니까? 만져지지도 않고, 마기는 그저 기운일 뿐인데요.”
“발사 직전의 마기라면 분명히 공격할 수 있어요. 마기가 형체를 갖추고 발사되는 순간. 바로 그 순간을 노려야 합니다.”
“그만큼 완벽한 타이밍을 노리려면 상당한 집중력이 필요한데, 적들을 상대하면서 마기에만 집중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기사들은 맞아도 죽지 않는 위치를 선점하는 것만으로도 벅차할 거예요.”
여기저기서 우려의 말이 쏟아졌다. 카델은 그들의 걱정을 모두 이해한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여러분이 마기에 집중하는 동안, 적들의 시선을 분산시킬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니 적린 기사단을 믿고 마기를 베어 내는 데만 집중해 주세요.”
방법을 일일이 설명할 시간은 없었다. 카델은 장막의 유지가 힘들어질 만큼 몰려든 적들을 일별하며 아군의 동의를 구했고, 대답은 소린에게서 돌아왔다.
“믿겠소. 지금은 아군을 믿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으니.”
소린은 망설이는 대대장들을 다독이듯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서, 해머의 위로 기운을 불어넣었다.
“경의 전술이 실패한다면 제국의 미래는 사라지겠지. 하지만 이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인간계의 미래가 사라질 거요. 이 모든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밀어붙여야 하는 뜻이라면, 그게 뭐든 따르겠소.”
최대한 기운을 두텁게 둘렀음에도 검날은 점점 무뎌졌다. 제 앞으로 달려드는 레드 맨의 목을 베어 낸 드레프가 짧게 혀를 찼다.
‘곧 맨주먹으로 싸우게 생겼는데.’
마도구가 장착된 쌍검은 이것 하나뿐이다. 반평생을 써 온 무기가 곧 부러질 듯 너덜거리다니. 이런 황당한 위기는 입단 전, 검을 다루는 요령이 전무하던 시절 외에는 없었다.
재빠른 검격으로 사방의 적을 격퇴하는 드레프의 시선이 드문드문 지면을 향했다. 금방이라도 마법진을 찢고 나올 듯 흉흉하던 적들의 얼굴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마법진을 가득 메운 시체 때문이었다.
그 틈에서 제 부하의 얼굴을 발견할 때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함께 웃고 떠들던 동료의 얼굴을 발견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져 도통 평정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아버지까지 쓰러지셨어. 이 싸움을…… 이어 가도 되는 걸까.’
멀찍이서 서서히 쓰러지던 엑토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버지이자 단장인 그와 함께 출정한 적은 손에 꼽을뿐더러, 이번처럼 처음부터 힘을 합쳐 전투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랬기에 드레프는 이번 전투에 나름의 기대를 품었다. 아버지에게 실력을 증명해 보이겠다는 의욕도 넘쳤다.
그러나 이젠 아니다. 엑토마저 쓰러진 전장의 흐름을 대체 어떻게 되찾을 수 있는 것인지. 지금이라도 부하들의 개죽음을 막기 위해 후퇴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나약한 망설임만이 차올랐다.
그럼에도 계속해 싸움을 이어 가는 것은, 카델 라이토스. 그 젊은 기사단장이 일궈 낸 연승이, 이번에도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드레프 대대장님! 마족이 회복을 마쳤습니다!”
빨간 머리 마족의 동태를 살피던 부하가 우렁차게 외쳤다. 그에 사방으로 검기를 흩뿌린 드레프가 목청을 높였다.
“전원! 다가올 공격에 대비해! 제자리에서 꼼짝 말고 마기가 실체화되는 그 순간을 노려!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순간 죽음뿐이라는 걸 잊지 마라!”
이렇게 무식하게 쏟아지는 적들의 주의를 어떻게 분산시키겠다는 것인지 아직도 납득할 수 없었다. 하지만 카델의 말을 믿지 않는다면, 빨간 머리 마족을 격퇴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렇게 대대원들의 우렁찬 대답이 들려온 다음 순간.
“시작됐다!”
이 많은 아군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공격이 재개됐다. 드레프는 정확히 자신의 목과 명치를 조준한 마기 줄기를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급소다. 베어 내지 못한다면 눈을 뜨지 못하겠군.’
위치를 바꾼다면 치명타는 피할 수 있다. 하지만 몸을 비트는 짧은 시간조차 부족했다. 드레프는 전신의 감각을 끌어 올리며, 마기가 닿은 부위의 감촉을 느껴 보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 단순한 작업이 쉽지 않았다. 밀물처럼 몰려드는 적과 심상찮은 기운을 뿜어 대는 고위 마족들. 그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무시하려 해도, 반사적으로 몸이 움찔거렸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고블린과 레드 맨의 기척, 오우거가 휘두르는 방망이의 궤도, 마족이 내는 쇳소리가 끊임없이 정신력을 갉아먹었다.
‘이봐, 카델 라이토스. 뭔가를 할 거면 빨리하라고. 난 고작 마물한테 맞아 죽기 싫거든!’
흉악스러운 얼굴을 치켜들며 달려오는 마물의 살기에 집중력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그것은 다른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리라.
혹시 계획에 차질이 생긴 건 아닐까.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급소를 피해 몸을 틀어야 하는 게 아닐까. 망설임이 극에 달하고, 마물의 공격이 지척으로 다가온 순간.
대앵―
어디선가 들려오는 우렁찬 종소리와 함께, 지면에서부터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마기……? 아니, 암흑 마력인가?’
애매한 기운의 정체를 파악할 새는 없었다. 갑작스럽게 어두워진 하늘. 반사적으로 움직인 시야 속으로, 상공을 가득 채우며 나타난 거대한 저울이 들어찼다. 저울의 한쪽 접시는 눈부신 빛 마력으로 이루어졌고, 나머지 한쪽은…….
‘……보이지 않아. 암흑 마력이 휘감겨 있다. 그렇다면 이건…….’
혼란에 혼란이 덧붙여지며, 저울의 중심이 조금씩 기울었다. 암흑 마력의 접시가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잠시 저울의 움직임에 한눈을 팔던 드레프가 다급히 시선을 옮겼다. 자신에게 달려들던 적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물러나고 있어……?’
마물은 물론 마족까지, 뭔가의 낌새를 느낀 것처럼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마족의 공격이 아니야.’
그렇다면 가장 가능성이 큰 것은, 저 기술이 암흑 마력을 사용할 줄 아는 유일한 아군. 적린 기사단의 흑마법사가 전개한 마법이라는 얘기가 된다. 물론 그렇게 생각해도 빛 마력의 존재가 거슬렸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일일이 따질 때가 아니었다.
“한눈팔지 마라! 이게 우리의 마지막 기회야! 마기의 흐름을 읽어라!”
드레프의 외침과 동시에, 암흑 마력의 접시가 완전히 아래를 향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쿠구구구―
바닥에서 잔잔히 일렁이던 기운이, 얇은 빛줄기를 품은 채 사정없이 솟구쳤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은 드레프가 악을 쓰듯 명령했다.
“마기의 흐름을 읽어!”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며, 몸에서 뜨끈하게 열이 올랐다. 그리고 눈꺼풀 너머로 어렴풋이 비치던 섬광이 사그라질 무렵.
“……!”
마기가 닿은 부위에, 분명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에 드레프는 거침없이 쌍검을 휘둘러 마기의 줄기를 베어 냈다.
‘느껴졌어!’
무뎌진 검날 위로, 서걱거리는 절단의 소리가 났다. 다급히 눈을 뜬 그가 자신이 베어 낸 마기를 확인하려 했으나.
“뭣…….”
사라진 마기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바로 시야를 한가득 채운 아군의 등.
“우와아아아아!”
“돌격하라! 돌격!”
“다시 싸우자!”
마법진을 뒤덮은 채 쌓여 있던 아군의 시체가, 모조리 부활해 전장을 뒤엎기 시작했다.
⚔️
“잘했어, 가르엘.”
뇌까지 흔드는 듯한 우렁찬 함성에 파묻혀 카델의 목소리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카델은 주위를 가린 암흑 마력의 농도를 높이며, 그 중앙에 자리한 가르엘을 바라보았다.
짙은 마기로 물든 반신과 늘어진 반쪽짜리 날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땅 위에 검을 쑤셔 넣은 그는, 자신의 모든 기운을 망자의 안으로 불어넣고 있었다.
[혼령무곡魂靈舞曲].
짧은 시간, 망자를 되살려 마지막 혼이 다할 때까지 최후의 전투를 치르게 하는 기술. 게임 속에선 한 스테이지가 넘어가기 전에 죽은 아군만을 살릴 수 있는 기술이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체의 혼이 완전히 빠져나가기 전. 그 끝자락을 붙들어 마치 부활한 것처럼 만든다. 가르엘의 최종 궁극기라고도 볼 수 있는 기술이었다.
기술 사용 이외에는 어떠한 방어도 불가능하고, 한 번 기술을 사용하면 모든 스테이지가 지날 때까지 행동 불능이 된다. 게임 속에서도 최후의 수로 사용하는 것이 바로 이 [혼령무곡]이었다.
가르엘은 이 기술의 원리를 고요의 산맥에서부터 깨우쳤으나, 명령이 있기 전까진 절대 사용하지 말라는 카델의 뜻을 따랐다. 그 탓에 실전에서의 활용은 지금이 처음인 셈이었다.
‘최대한 후반부까지 아껴 보려고 했지만……. 라이돈이 도착할 때까지 어떤 수를 써서라도 버텨야 하니까.’
아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무너진다면, 더 이상 승리로 다가갈 방법은 없다.
‘그래도 가장 성가신 놈의 파훼법은 찾아냈어.’
카델의 시선이 암흑 마력 너머, 상공에 떠오른 빨간 머리 마족을 향했다. 몸을 재생 중인 그녀는, 더 이상 태연하고 덤덤한 모습을 유지하지 못했다. 곳곳에 자리한 상처와 입가를 타고 흐르는 자주색 피. 아군의 공격이 먹힌 것이다.
‘가르엘의 [혼령무곡]이 유지되고, 내 부하들이 고위 마족을 붙들어 두는 동안. 저 녀석을 착실하게 갉아먹어야 해.’
큰 부상을 입었으니 다음 공격을 시작하는 데까진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다음 기술을 얌전히 기다리고 있다간 [혼령무곡]의 지속은 끝이 나고, 부하들의 체력도 바닥이 날 터.
‘얌전히 회복하도록 둘 순 없지.’
눈을 빛낸 그가 암흑 마력 바깥으로 몸을 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