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6화 (406/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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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정말 말도 안 되는 기술인데요? 부활이라니, 이건 치유술의 경지를 넘어섰잖아요. 하이웨일의 피가 섞였다더니 재능은 그 백부를 능가한 모양이죠.”

망자의 부활은 아군은 물론 적군의 혼란도 가중시켰다. 망자의 부활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리 없으므로, 적군의 입장에선 지금까지의 싸움이 무용지물이 된 셈이었다.

‘죽인 인간들이 모조리 부활하고, 기어이 신시를 상대하는 방법까지 알아냈다는 거죠?’

아르파는 차오르는 황당함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부지런히 기운을 끌어 올렸다. 인간들이 모조리 부활했대도 상관없다. 자신들이 해야 할 것은, 스스로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짜내 인간들을 붙드는 것. 마왕 에밀리아 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었으니.

그리고 그런 아르파의 앞으로, 서늘한 바람이 훅 끼쳐 왔다.

“도둑놈이 말이 많군. 훔쳐 간 걸 돌려받으러 왔으니, 순순히 내놓는 게 좋을 거야.”

검기는 사용할 수 없다. 아르파라는 마법사는 검의 기운마저 흡수하는 괴물이었으니. 오로지 순수 검술. 그리고 체술만으로 녀석을 압도해야 했다.

그것은 일반적인 적이라면 몰라도, 날개가 달린 고위 마족을 상대로 하기엔 상당히 불리한 핸디캡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아예 기운을 빼앗지 못하도록 맨몸으로 돌진하는 것도 방법이긴 하지만요. 그것도 상대를 봐 가며 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르파는 제 위로 쏟아지는 검의 잔상에 마기를 날려 가볍게 뿌리쳤다.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루멘을 향해 코웃음 친 그가 빈정거리며 말했다.

“기운도 담기지 않은 검술로 뭘 어쩌겠다는 건지. 발버둥이 애처로울 지경이지만, 솔직히 그 속도는 조금 거슬리네요. 계속 그렇게 재미없게 굴면 확 죽여 버릴 겁니다.”

눈앞의 인간은 확실히 강적이다. 날쌘 속도로 상대의 사각지대를 포착해 위협적인 검기를 끝도 없이 흩뿌려 대다니. 적이 눈치채기도 전에 목숨을 거둬 가는 악독한 능력이다.

그러니 되도록 많은 기운을 빼앗아 검술의 위력을 약화하려 했다. 조금 더 다양한 힘을 가지는 것은 덤. 하지만 지금처럼 검기도 없이 맨몸으로 달려들어 자신을 방해하려 든다면, 한시라도 빨리 해치우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다른 곳을 공격할 낌새만 보여도 득달같이 달려드니. 역시 먹어 치우는 것보단 없애는 편이 낫겠어.’

이 인간이 가진 힘의 정수가 아깝긴 했으나, 이미 충분히 많은 힘을 흡수했다. 결국 아르파는 루멘을 무시하는 대신, 그를 해치우는 데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루멘이 원하는 바였다.

“탐내던 식량을 스스로 뭉개 버려야 하는 이 속상한 마음을, 당신 같은 인간이 알 리 없겠죠?”

“알 필요도 없지.”

아르파가 다른 곳에 시선을 두도록 해서는 안 됐다. 녀석이 이곳저곳을 헤집지 못하도록 붙들어 정면으로 부딪쳐야 했다.

완전히 자신에게 주의를 돌린 아르파를 마주 보며, 루멘이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적의 앞에서는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던 매끈한 검신이 온전히 드러나고. 루멘은 빛나는 검 끝으로 아르파를 겨눴다.

“이런 상황에서 할 얘기는 아니지만…….”

군더더기 하나 없는 완벽하고 곧은 자세. 흔들림 없이 빛나는 눈빛. 피와 상처로 더럽혀졌음에도 그에게선 흉흉한 살기나 끓어오르는 투지, 통제할 수 없는 흥분은 비치지 않았다.

“내 한계를 시험하는 순간은, 언제나 즐겁거든.”

잔잔한 호수처럼, 극한까지 정제된 정신력이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그의 전신을 붙들었다. 그 어떠한 도발이나 협박도 그를 동요시킬 순 없었다.

그를 마주한 아르파의 표정이 점점 구겨졌다. 루멘에게서 느껴지는 침착함과 여유. 그것은 모든 걸 해탈한 인간의 자포자기 따위가 아니었다.

마치 이곳의 모든 생명. 마족은 물론 아군까지도 제 아래로 깔보는 듯한 오만함. 오로지 자신의 강함에만 집중하는 루멘의 태도는, 아르파에게 있어 그 무엇보다 강력한 도발이었다.

“그 즐거움, 가차 없이 짓밟아 드리죠.”

활짝 날개를 펼친 아르파가 자신이 흡수한 무수한 힘들을 개방하기 시작했다. 저 여유만만한 표정이 공포와 절망으로 일그러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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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인간들을 노리며 달려가던 로딘이 급히 몸을 세웠다. 짧게 숨을 고른 그녀가 삐딱하게 고개를 틀며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어차피 넌 내 몸에 흠집 하나 못 내. 귀찮게 굴지 말고 그냥 꺼져.”

되살아난 인간들의 틈을 비집고 나오는 한 명의 사내. 벌써 익숙해져 버린 사내의 얼굴을 담아낸 로딘의 표정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안됐지만 널 귀찮게 구는 게 내 역할이라서. 이번엔 쉽게 당해 주지 않을 거다.”

[적혈망매].

오라로 물든 반신이 도깨비처럼 흉악하게 변모했다. 반은 기운이 이글거리는 대검을 그러쥔 채 로딘의 앞을 막아섰다.

‘유지 시간은 최대 10분. 그동안 착실하게 손발을 묶어 주마.’

모아 둔 피는 끊임없는 전투로 소모된 지 오래였다. 로딘을 상대하려면 더 많은 피가 필요했고, 그만한 피를 모으기 위해선 비교적 손쉬운 적을 상대할 필요가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여유는 없다.

반은 자신의 신체를 담보로 삼아 일시적인 각성 상태에 들어섰다. 그의 상태가 이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눈치챈 로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래? 그럼 어디 시험해 볼까?”

그녀가 손을 펼치자, 손안으로 거대한 방패가 생성됐다. 로딘은 방패를 치켜든 채 곧장 반의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무식한 속도와 걸음마다 땅이 울릴 만큼 어마어마한 각력. 적중한다면 절대 멀쩡히 버티지 못할 위협적인 돌진이었으나, 반은 피하지 않았다. 대신 대검을 높이 치켜들고 로딘과의 거리를 가늠했다.

그리고 막힘없이 달려온 로딘의 방패가 그의 가슴을 후려친 순간.

“……!”

공격을 맞은 반의 몸이 폭발하듯 흩어지며, 검은 기운이 그녀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에 당황할 새도 없이.

“혼자 싸우겠다는 말은 한 적 없는데.”

뒤편에서 들려오는 얄미운 목소리와 함께, 거대한 굉음이 대기를 울렸다.

“크윽……!”

뒤통수에서부터 느껴지는 진동이 온몸을 댕댕 울렸다. 예상치 못한 타격에 로딘이 이를 악물고 비틀거렸다.

“적이 분신에 달려드는 꼴을 보는 거, 좀 재밌긴 하네. 확실히 그 암살자 놈이 실력은 좋단 말이야.”

작게 웃은 반이 대검을 고쳐 쥐며 로딘을 턱짓했다. 빠르게 몸을 돌린 그녀의 뒤통수에서부터 옅은 마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때. 이번엔 좀 아파?”

“……살짝 간지럽네.”

“으음, 아직 허세 떨 힘은 남았다? 다음엔 시원하게 긁어 드려야겠어.”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위력. 바뀐 외관과 연관이 있는 것인가. 눈앞의 인간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의 농도가 남달랐다. 저 정도 농도의 오라가 피어난다면 이성을 잃는 것이 마땅함에도, 그는 기묘할 만큼 멀쩡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로딘은 방패의 강도를 높이며 반을 똑바로 응시했다.

“아무리 노력해 봤자 넌 날 죽일 수 없어. 그래도 용쓰는 모습이 안쓰러우니, 네 대검이 부러질 때까진 실컷 놀아 줄게.”

흔해 빠진 도발이었으나, 반은 대번에 인상을 구겼다. 흉흉하게 눈을 부라린 그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감히 내 검을 협박한 거냐? 내 검에 금 한 줄이라도 가면 네 뼈 마디마디를 부러뜨려서 변기통에 빠뜨릴 거다. 언행을 조심해, 박쥐 새끼.”

본인을 모욕하는 것보다 검의 안위가 더욱 신경 쓰인단 말인가. 황당하기 그지없었으나, 로딘은 이해를 포기하고 전투를 재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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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리 좀 꺼져!”

화려한 폭발과 함께 시야를 가리던 마물 무리가 터져 나갔다. 바람을 날려 매캐한 연기를 걷어 낸 카델이 짜증스레 하늘을 올려 보았다. 상공에선 여전히 회복에 전념 중인 빨간 머리가 자리하고 있었다.

‘마물이고 마족이고, 어떻게든 저 고위 마족을 지키려 혈안이군. 적군의 핵심 전력인 것 이외에도 뭔가 더 있어. ……헬 모드의 추가적인 스토리인가?’

한순간에 인간을 무더기로 처치할 수 있는 전력이니, 마족들 사이에서도 보호 대상 1순위로 여겨질 순 있다. 하지만 마계군 전원이 저 고위 마족이 쓰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몸을 날릴 정도라니.

‘사실 쟤가 에밀리아인 거 아니야?’

마왕이 직접 행차한 것은 아닌가, 헷갈릴 정도였다. 카델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적들을 풍압으로 밀어 내며 최대한 적이 덜 밀집된 장소를 찾아 나섰다.

‘완전히 재생한다면 다시 녀석을 공격한다 해도 도돌이표일 뿐이야.’

격한 뜀박질에 겨우 회복을 마친 몸이 삐그덕대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씩 들어차는 고통에 이를 꽉 깨물면서도, 카델은 적들의 빈틈을 찾아내려 애썼다.

마침내 가장 안전해 보이는 장소를 찾아낸 카델이 소리 높여 외쳤다.

“드레프! 주변 적들을 정리해 줘!”

“뭐? 갑자기 튀어나와서 뭐야?”

“어서!”

간신히 근방을 정리하고 되살아난 부하들을 살펴보려 했건만. 난데없이 들이닥친 카델의 요구에 드레프가 황당한 기색을 드러냈다.

“조무래기 정리는 네 부하한테나 맡기라고!”

“내 부하들은 지금 바빠!”

드레프의 앞으로 달려온 카델이 자신을 따라온 마물과 마족을 눈짓하며 마력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서둘러. 저 녀석의 재생을 막아야 조금이라도 더 빨리 쓰러뜨릴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런 건 네 부하를 불러서 처리하라니까? 난 내 부하들한테 가 봐야 해. 네 치유사가 어떻게 한 건진 몰라도, 죽다 살아난 녀석들의 상태를…….”

“살아난 게 아니야.”

단호한 목소리에 당장이라도 뛰쳐나가려던 기세의 드레프가 주춤했다. 그의 굳은 얼굴을 일별한 카델이 덤덤하게 말했다.

“육체를 떠나가던 영혼을 일시적으로 붙든 것뿐이야. 내 부하의 기술이 끝나면 원래대로 죽게 되겠지.”

“그게…….”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일은 불가능해. 알고 있잖아.”

“……죽은 기사들의 시체를 방패로 삼고 있다는 거냐?”

“정신 차려.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건, 이 이상 사망자가 나오지 않도록 막는 거야.”

죽었다고 생각한 부하가 되살아났고, 사실은 그들이 전술을 위해 꼭두각시놀음을 당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드레프의 심정이 어떠할지 짐작이 가지 않았으나, 그의 마음을 일일이 헤아려 줄 시간은 없었다.

드레프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더 캐물어 따지는 대신 카델의 앞을 지키고 섰다.

“절대 내 부하들의 죽음을 헛되게 만들지 않을 거다. 절대로.”

위로의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카델은 그의 의지에 보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마력을 끌어 올렸다. 준비하는 기술은 맨 처음, 아르파에게 마력을 빼앗겨 실패하고 만 마법. 이번에야말로 적중시키리라.

‘방해할 만한 놈들은 전부 묶어 뒀어. 지금이 기회다.’

손바닥 위로 한계까지 응축된 작은 불꽃이 피어오르고. 조준을 마친 카델이 불꽃을 쏘아 날릴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날 봤어?’

눈을 감고 재생에 전념하던 그녀가 퍼뜩 눈을 떠 지면을 내려 보았다. 시선이 향하는 곳은 의심할 바 없는 카델의 위치. 지금은 그녀를 보호해 줄 강력한 고위 마족이 전부 묶여 있는 상태다. 본능적으로 위협을 감지한 듯, 그녀의 몸이 빠르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공격하려는 건가!’

재생을 멈추고 이쪽을 집중 포격할 작정이다. 찰나의 순간, 카델의 머릿속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떠올랐다.

하나는 즉시 마법을 거두고 모든 마력을 장막에 집중하는 것. 나머지 하나는, 그녀의 몸이 완전히 흩어지기 전에 마법을 적중시켜 해치우는 것.

고민은 짧았고, 여유는 없었다. 카델은 방어를 포기한 채 불꽃을 쏘아 날렸다. 그와 동시에, 흩어진 몸이 마기의 다발로 변화해 카델에게로 내리꽂혔다.

마법이 적중한데도 마기 줄기가 소멸할 가능성은 없다. 카델은 한 박자 늦게 장막을 생성해 몸을 보호했으나, 이 정도 방어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젠장, 일단 마법을 멈췄어야 했나……!’

틀린 판단을 후회할 겨를도 없었다. 빛처럼 쏘아진 마기 줄기가 머리 위로 거침없이 쏟아지고. 고통을 예감한 카델이 질끈 눈을 감은 순간이었다.

익숙한 한기가 그의 몸을 휘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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