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8화 (408/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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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럽게 빨리도 왔네.”

입 안에 고인 피를 뱉은 반이 중얼거렸다. 요정의 날개에 반사된 햇빛이 반짝이며, 하늘은 꼭 한낮의 은하수처럼 아름답게 물들었다.

그들이 쏟아 내는 얼음 창은 빠르게 지상의 적을 꿰뚫었고, 공격받는 아군의 위로는 단단한 얼음 갑옷이 덧대어졌다. 날갯짓을 따라 떨어지는 얼음 결정은 적군을 탐지해 그들의 움직임을 둔화시켰다.

요정군의 합류는 무너져 가던 아군의 전세를 순식간에 뒤집고 있었다.

“요정이 나설 줄이야……. 뭐, 그래 봤자 먹잇감이 늘어난 정도겠지만.”

로딘은 뺨의 상처를 문지르며 코웃음을 쳤다. 요정 군단의 등장은 확실히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다. 인간과도, 마족과도 관계가 좋지 못한 그들은 항상 스스로를 지키기에 급급했으니까. 하지만 이제 와 요정족이 합류했다고 다 이긴 싸움에 패배할 일은 없었다.

그녀는 제 앞의 인간을 노려보며 방패를 치켜들었다. 오라로 만들어진 뿔은 볼품없이 동강 났고, 기묘한 형상을 꾸며 낸 가면 역시 본래의 형태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전투가 이어질수록 인간의 공격에선 날렵함이 사라졌고, 힘도 떨어졌다. 피가 부족해진 것이 틀림없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밀어붙인다면,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처리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런 로딘의 예감은 정확했다.

‘앞으로 1분 정도인가.’

로딘에게서 얻은 피만으로는 끌어온 만큼의 피를 보충할 수 없다. 이대로라면 힘의 담보로 내건 왼팔과 양 귀가 사라질 터였다. 반은 벌써부터 욱신거리는 왼팔과 귀의 통증을 느끼며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부터 시간을 끌기 위한 싸움이었다. 이 정도로 오래 붙들어 뒀으니, 다음은 그 녀석의 차례다.

“좀 더 적극적으로 굴지 그래? 아까의 기세는 어디로 간 거야, 광전사?”

“널 볼수록 적극적으로 굴 의지가 사라져. 좀 더 매력적으로 굴어 봐. 우리 단장의 발톱 정도만 흉내 내도 의욕이 살아날 텐데 말이야.”

“역시, 얼굴을 빼면 볼 게 없는 인간이야. 네 목을 잘라서 전리품으로 가져가야겠어.”

짧게 입맛을 다신 로딘이 다시금 돌진했다. 이렇다 할 준비 자세도 없이 곧장 시작되는 돌진은, 기습적으로 쏘아진 탄환과 다를 바 없었다. 반은 로딘의 도착 지점을 가늠하며 대검의 면을 세웠다. 그러나.

“……?”

반을 향해 거침없이 돌진하던 로딘이, 일순 움직임을 멈췄다. 급히 몸을 세운 그녀가 반에게로 시선을 고정한 채 제 배를 짚었다.

‘뭐지? 갑자기 한기가…….’

몸속에 자그마한 얼음 씨앗이 심어진 듯, 싸한 감각이 느껴졌다. 반에게만 집중하던 주의를 분산시키자, 곧 갑작스러운 이물감의 원흉을 찾아낼 수 있었다.

‘저 요정이군.’

멀지 않은 곳에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한 요정. 붉은 눈 위로 떠오른 선명한 마법진을 발견한 그녀가 짧게 혀를 찼다.

‘가만히 놔두면 좋은 꼴은 못 볼 것 같은데.’

그녀가 가진 기형적인 방어력의 비결은, 바로 체내의 모든 마기를 외피에 두르는 것이었다. 갑각류의 껍질처럼, 웬만한 공격으로는 흠집 하나 낼 수 없는 방어막. 하지만 그 너머의 내피는 살짝만 찔러도 찢어질 만큼 연약하다.

이 약점을 알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찔러 본 것인지. 체내에 마력을 심어 넣는 요정의 방식은 로딘의 카운터 기술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마기를 거둬 체내의 마력을 녹인다면 방어력이 약해진다.’

약해진 방어력으로 광전사를 상대하기엔, 그 힘이 너무 위협적이었다. 로딘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반의 눈치를 살피며 방패를 꽉 움켜쥐었다.

‘단박에 쓰러뜨릴 순 없어. 저 녀석을 해치우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마력을 무시하고 싸우기에도, 마력을 우선 처리하고 싸우기에도. 반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잠시 고민하던 로딘은 결국 마력이 퍼지기 전에 반을 처리하는 쪽을 택했다.

‘내 기운이 약해졌다는 걸 눈치 못 챌 리 없어. 마력이 몸집을 불리기 전에 처리하면 돼.’

빠르게 판단을 마친 로딘이 다시금 돌진을 재개했다. 반 역시 흐트러졌던 방어 태세를 다잡으며, 이어질 충격에 대비했다. 그러나 그녀의 방패가 반을 강타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커억……!”

반의 코앞. 방패를 치켜든 채 멈춰 선 그녀의 전신이 움찔거리며, 기묘하게 뒤틀렸다. 관절의 움직임을 따라 뼈와 가죽이 뜯겨 나가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째서…….”

부릅뜬 눈과 입, 코와 귀에서부터 보라색 핏물이 흐르며, 투명한 얼음송곳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가시덤불이 자라나듯, 로딘의 몸체를 뚫고 나온 날카로운 얼음이 순식간에 그녀의 육체를 찢어발겼다.

반사적으로 물러난 반이 제 가슴께까지 손길을 뻗친 얼음송곳과 얼음을 타고 미끄러지는 흉측한 내장을 번갈아 보았다.

“내 앞에서 마법을 전개하면 어쩌자는 거냐, 요정 놈. 같이 골로 갈 뻔했잖아.”

짜증이 어린 불만에 어느새 다가온 라이돈이 투덜거리며 답했다.

“내가 한 거 아니야.”

“……뭐?”

“내가 하려고 했는데, 한발 늦어 버렸다고.”

라이돈이 아니라면 대체 누가 이런 마법을 전개했다는 말인가. 거짓말하지 말라며 라이돈을 몰아붙이려던 반의 앞으로, 근엄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네 마법이 완성되길 기다리다간 저 인간이 먼저 죽겠더구나. 인간들 틈에서 팔자 좋게 놀고 있으니 실력이 늘지 않는 것 아니냐.”

험상궂은 인상과 주름진 얼굴, 그리고 외모와 잘 어우러지지 않는 우락부락한 몸매. 묘한 위압감을 풍기는 요정 노인의 등장에 반이 멈칫하고. 라이돈은 질린다는 듯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여기서까지 잔소리하는 거예요? 정말 때와 장소를 못 가리는 할아버지네!”

로딘의 죽음을 확인한 카델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남은 건 빨간 머리와 아르파인가. 지금이라면 처리할 수 있어. 하지만…….’

징벌의 문. 마계와 인간계를 잇는 통로가 되어 버린 마법진이 갉아 먹히며, 새로운 적들이 등장하려 하고 있었다. 시작부터 징벌의 문과 똑같은 좌표에 마계 마법진을 생성하며 인간계와 마계가 이어지게 된 것이다. 전투가 길어짐에 따라 징벌의 문을 이루는 마력의 양은 줄어들고, 마계 마법진의 마기는 늘어나고 있었으니. 밀리는 건 시간문제였다.

‘상황은 반전됐지만, 아직 완전히 방심할 단계는 아니야. 마법사와 요정족의 전력을 나눠 징벌의 문 보수에 투입했다간 돌발 상황에 대비하지 못할 가능성이 커. ……내가 해야 한다.’

홀로 징벌의 문을 보강할 만한 능력을 갖춘 마법사. 하이론이라면 가능할지 모르나, 그는 요정족을 통솔해야 한다. 그를 제외한다면 쿤라의 힘을 가진 자신 이외엔 이 작업을 진행할 인물이 없었다.

‘남은 두 고위 마족의 공략법은 전달해 뒀어. 또 다른 변수가 생기는 게 아니라면 부하들은 분명 승리할 거다. 그동안 적들 사이에서 안전하게 징벌의 문을 관리해야 하는데…….’

라이돈에게 장막을 부탁한다면 최소한의 방어는 할 수 있다. 결정한 카델이 마지막으로 부하들을 지휘하기 위해 전장의 중심부로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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