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9화 (409/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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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기술이 끝납니다. 아군 전력이 반 이상 줄어들 거예요.”

검을 타고 지면으로 흘러드는 마기의 양이 눈에 띄게 줄었다. 가르엘의 안색 역시 좋지 못했다. 대량의 마기를 사용하는 고난도 기술인 데다, 실전 경험이 전무한 탓에 양 조절에도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이번 [혼령무곡]이 끝난다면, 그는 한동안 간단한 치유술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큰 피로감을 느끼게 될 터였다.

‘게임 속에서도 이 궁극기를 사용하면 스테이지가 끝날 때까지 스킬을 사용할 수 없었으니까.’

전세를 바꾸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의 페널티는 감수해야 했다. 카델은 힘겨워하는 가르엘의 옆에 [울로]를 내려 두며 말했다.

“기술이 끝나는 즉시 넌 최후방으로 물러나. 힘이 회복될 때까지 싸울 생각은 말고, 다른 지역의 동맹군에게 연락을 넣어.”

“하지만 여전히 치유술이 필요한 기사들이…….”

“너 한 명의 힘으로 모두를 살릴 순 없어. 욕심부리지 마. 우리의 목적은 마계로 진입해 봉인석을 확보하는 것. 그것뿐이야. 목적을 잊어선 안 돼.”

“……알겠습니다.”

가르엘은 이대로 전장에서 물러나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마계에 진입해서도 가르엘의 힘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힘을 비축해 두어야 했다.

‘루멘에겐 요젠이 갔을 거야. 그 둘이라면 아르파를 무난하게 격퇴할 수 있겠지. 빨간 머리의 파훼법은 모두가 인지하고 있으니 더 이상 큰 걱정거리가 아니다.’

시간이 없다. 카델은 곧장 라이돈을 불러 장막을 부탁하려 했다. 하지만.

“아하하! 에이든, 헨지! 드디어 어린애 수준을 벗어났나 보네? 그 정도 실력이면 끔찍하게 죽을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

“그게 친구한테 할 말이야? 넌 어떻게 변한 게 하나도 없냐?”

“그, 그래, 라이돈. 네가 없는 동안 우리도 열심히 훈련받았단 말이야.”

라이돈은 카델의 목소리가 닿지 않는 상공에서, 제 동족들과 어울리기 바빠 보였다. 그는 친구들과 경쟁하듯 적을 공격했고, 오랜만에 만난 전사들과 잡담을 나눴다.

치열한 전장에서 보이기에 그리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저 모습이야말로 라이돈다웠다. 잠시 라이돈의 모습을 좇던 카델이 결국 그를 부르는 것을 포기했다. 쿤라의 힘을 조금 떼어 비늘 갑옷을 생성한다면 목숨에 지장은 없을 것이었다.

그렇게 각기 흩어져 제 몫의 싸움을 치르는 기사단 사이. 가장 격렬한 전투를 진행 중인 두 사내가 있었으니.

“로딘, 로딘, 로딘!”

죽은 동료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드는 아르파는, 이전의 여유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거칠었다. 쏟아지는 화염구에는 시간 차가 없었고, 사방에서 분별없이 암기가 솟구쳤다. 희번덕 부릅뜬 눈은 새빨갛게 충혈되어 오로지 루멘만을 담아내고 있었다.

루멘은 그 폭풍 같은 공격 속에서 인상을 구겼다.

‘화염구만 피하기도 벅차다.’

연달아 날아드는 화염구는 꼭 불지옥에라도 내던져진 듯 숨통을 달궜다. 이 상황에서 암기까지 일일이 피해야 했더라면, 자신은 진즉에 무너졌으리라.

“흥분한 만큼 빈틈이 생겼어. 그걸 노려, 루멘.”

빠르게 공격을 회피하는 그의 귓가로 요젠의 속삭임이 들렸다. 루멘은 대답 대신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채기도 어려울 만큼 은밀하고 위협적인 암기의 공격은, 기척을 숨긴 요젠이 전부 차단해 주고 있었다. 요젠이 직접 모습을 드러낸다면 아르파의 주의를 분산시킬 수 있겠으나, 그건 루멘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루멘은 아르파가 온전히 자신에게만 집중하기를 바랐다.

“죽은 동료를 애도할 필요가 있나? 곧 같은 곳에 가게 될 텐데. 적당히 슬퍼하지 그래.”

“이 건방진 인간 놈이……! 감히 함부로 입을 놀려!”

동료의 죽음을 모욕당한 아르파가 피를 쏟을 듯 시뻘게진 얼굴로 루멘에게 날아들었다. 양손에 이글거리는 화염구를 움켜쥐고, 루멘의 좌우를 가로막으며 내던졌다. 양쪽에서 가해지는 공격. 루멘은 몸을 비틀어 오른쪽의 공격을 피하고, 왼쪽의 화염구를 검으로 베어 냈다. 검기를 사용했다면 깔끔하게 잘린 불꽃이 효력을 잃고 사그라졌겠으나.

‘……뜨겁군.’

기운을 두르지 못한 검은 폭발의 충격과 열기를 버티지 못했다. 검날이 미세하게 구부러지며, 흩어진 불꽃이 그의 상체를 덮쳤다. 후끈한 열기에 루멘이 미간을 구겼다. 기운을 흡수하는 아르파를 상대하는 만큼, 그에게는 이렇다 할 장막도 없었다.

맨몸으로, 오로지 검술만을 사용해 고위 마족을 상대해야 한다. 끔찍할 정도로 난이도 높은 전투였으나, 루멘은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이 이곳에서 아르파를 해치울 수 있다면.

‘대장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어.’

고작 고위 마족 하나를 죽이지 못해 절절맬 수는 없었다. 다짐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제 목숨을 바쳐 카델에게 행복한 미래를 안길 것이라고. 그러니 벌써 포기를 입에 담을 순 없었다.

“죽여 버리겠어! 널 죽인 다음엔 로딘을 죽인 그 요정들을, 그다음엔 로딘을 지하에 가둔 너희 인간 전부를!”

“평생 지하에서 썩었다면 온몸이 터져 죽을 일도 없었을 텐데.”

“네놈을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가장 처절하게 죽여 주마.”

거리를 좁혀야 했다. 검기를 사용하지 않는 발도술로는 깊은 상처를 입힐 수 없다. 순수 검술로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려면, 충분히 힘을 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접근해야 했다.

하지만 원거리 공격이 주인 아르파는 본능적으로 거리를 벌려 본인에게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려 했다. 루멘은 아르파가 조금 더 이성을 잃고 제게 달려들기를 바랐다.

“일평생을 마계에 갇혀 있던 녀석이 무슨 자신감으로 날 이기겠다는 거지?”

“일평생을 저주와 원망 속에서 살아 본 적도 없는 녀석이 자만의 말을 지껄이는구나.”

“네 불행이 가장 거대할 거라고 여기는 게 더 큰 자만이라고 생각한다만. 너희들은 네 생각처럼 대단한 종족이 아니야. 네 동료, 로딘도 마찬가지지. 그러니 그리 간단히 죽은 거 아니겠어?”

“감히……!”

아르파는 루멘의 도발에 속절없이 끌려갔다. 그의 눈빛에선 분노와 살의밖에 비치지 않았고, 뭔가를 깊이 생각할 여유도 없어 보였다. 루멘은 조금씩 좁혀지는 거리를 가늠하며 쏟아지는 공격을 방어했다.

‘모든 공격을 피하면서 접근할 순 없어.’

아르파가 흥분에 잠식될수록, 그가 쏟아 내는 공격의 양도 많아졌다. 그에 주춤하며 물러섰다간 도발의 의미가 퇴색된다.

‘어차피 암기는 요젠이 막아 줄 거다. 요젠을 믿고, 나는 화염구만 살피면 돼.’

꼭 카델의 공격을 막아 내는 것 같아 썩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루멘은 묘한 고양감을 느꼈다. 앞으로 자신이 카델과 대립할 일은 없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카델과 등을 지진 않는다. 그러니 카델의 공격을 정면으로 맞는 일도 없겠지.

그런 의미에서, 카델의 기운을 흡수한 아르파의 공격은 루멘이 가진 검사로서의 욕망과 호기심을 채워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무인으로서, 가장 강력한 마법사의 힘을 일부라도 상대할 수 있다는 것. 전력을 내지 못한다는 점이 아쉽긴 하나, 이쪽도 카델의 전부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니.

‘오로지 적에게만 집중한다.’

피하지 않은 불꽃이 안길 고통, 어쩌면 치명상을 입을지 모를 공격의 궤적, 거리가 좁혀질수록 거세질 폭발력. 보통 싸움이라면 당연히 염두에 두어야 할 요소들을 전부 배제한다.

루멘은 오로지 아르파의 움직임에만 집중했다. 그가 휘두르는 팔의 각도, 공격 전에 보이는 미세한 눈가의 떨림, 시선의 위치와 호흡의 빈도. 그 모든 것이 슬로 모션처럼 늘어졌다. 타고난 동체 시력이 아르파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를 잡아냈다.

‘……저기다.’

정면으로 쇄도하는 화염구 사이, 텅 빈 옆구리가 비쳤다. 기회는 한 번. 화염구가 아르파의 시야를 가린 찰나. 저 빈틈을 찌르고 들어가야 했다. 만약 실패한다면 아르파는 두 번 다시 똑같은 빈틈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시야를 가득 채운 불꽃 속에서, 루멘은 결단을 내렸다. 정면으로 맞는다면 결과를 장담할 수 없을 공격이었음에도, 루멘에게는 이 한 번의 기회를 잡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는 쏟아지는 화마를 피하는 대신, 크게 보폭을 넓혀 화염 너머로 들어섰다. 거침없이 화염을 헤친 팔. 빛보다 빠른 속도로 내지른 장검이 어느새 거리를 내어 준 아르파의 옆구리를 노렸다.

그 어느 때보다 간결하고, 조금의 사념도 없는 정갈한 일검. 살과 가죽을 가르는 선명한 감각이 느껴짐과 동시에, 루멘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원래라면 아르파의 공격을 정면으로 돌파한 대가로 큰 부상을 허락했을 테다. 기운을 빼앗길까 봐 장막을 요청할 수도 없었으니. 하지만 공격을 적중시킨 순간. 루멘은 몸을 덮치는 뜨거운 화마 대신, 열기를 중화시키는 한기를 느꼈다.

“오랜만이네, 빌어먹을 인간.”

빠르게 검을 뽑자 아르파의 몸이 비틀거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루멘이 깔끔하게 아르파의 목을 베어 내고. 미끄러지듯 떨어진 아르파의 머리 너머.

“너는…….”

“흥, 알아는 보나 봐? 하긴, 그런 잔악무도한 짓을 저질러 놓고도 기억을 못 하면, 그냥 죽는 게 낫지.”

촘촘한 얼음 결정이 모여 완벽한 형태를 갖춘 한쪽 날개. 날개가 움직일 때마다 유리 조각이 부딪히는 것처럼 까끌까끌한 소리가 났다.

루멘은 맞은편에 자리한 요정을 올려 보았다. 인간형의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으나, 금세 과거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붉은 머리칼과 동그랗게 살이 오른 볼살, 콧등을 덮은 주근깨, 까탈스럽게 치켜 올라간 눈꼬리까지.

“……그 녀석이군.”

“그 녀석?”

자신이 시원하게 한쪽 날개를 베어 버렸던 요정이다. 카델을 괴롭히기에 별생각 없이 공격했었는데. 이런 곳에서 아군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으니.

“너 설마, 내 이름을 모르는 거야?”

“…….”

“야! 이거 진짜 배은망덕하네? 기껏 장막까지 둘러 줬더니! 죽어! 그냥 죽어 버려!”

할 말이 없었다. 아르파의 시체 옆에서 한참이나 요정의 우렁찬 욕설을 듣던 루멘은, 이내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행동을 했다. 그것은 바로.

“지금부터라도 기억하면 되는 거 아닌가? 이름을 말해. 죽을 때까지 기억해 주지.”

“……!”

미인계. 아르파의 시체를 넘어 불쑥 다가선 루멘이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대부분은, 심지어는 카델마저도 루멘의 미인계에는 곧잘 휘둘려 왔다. 하지만 이번 상대는 루멘이 직접 날개를 베어 낸 요정. 불구대천의 원수나 다름없는 자의 얼굴 공격에 순순히 휘둘려 줄 이가 어디 있겠는가.

“에이든이다, 이 빌어먹을 인간 녀석아! 다시는 널 돕지 않을 거야! 난 인간을 도우러 온 게 아니라, 마족을 죽이러 온 거니까! 라이돈이 아니었으면 애초에 여기까지 날아오지도 않았어! 최악이야!”

에이든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주를 쏟아부으며 반대편으로 날아가 버렸다. 루멘은 텅 빈 손을 주먹 쥐며 곤란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과거의 대립은 대립이고, 현재의 도움은 도움이었으니.

“……나중에라도 사과해야겠군.”

낮은 중얼거림과 동시에, 전장을 요란하게 뒤덮던 함성의 크기가 훅 줄었다. 일순 청각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닌지 헷갈렸을 만큼 극적인 변화였다.

사그라진 함성을 따라 조금 전까지 치열하게 전투하던 기사들이 실 풀린 꼭두각시처럼 툭툭 쓰러지기 시작했다.

‘마기를 전부 사용한 건가.’

아군으로 가득했던 시야가 순식간에 트였다. 루멘은 절반 이상이 사라진 아군과, 그만큼이나 수가 줄어든 적을 훑어보았다. 기사들은 격한 전투에 몹시 지친 기색이었으나, 눈빛만큼은 여전히 투지로 불타올랐다.

죽은 동료가 마지막 영혼까지 끌어모아 마계의 적을 상대했다. 살아남은 자신이 포기한다면, 그들의 영혼을 욕보이게 될 터. 모두가 그런 마음으로 끝까지 검을 놓지 않았다.

“아직 남은 적이 많아. 반과 라이돈을 찾아가자.”

아르파의 죽음을 확인한 요젠이 모습을 드러냈다. 짧게 고개를 끄덕인 루멘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계속해 상공에 머물며 인간들을 도륙하던 빨간 머리 마족. 요정족의 출현으로, 그녀의 비행 능력은 더 이상 큰 이점이 되지 못했다.

그녀를 둘러싼 요정족 전사들을 바라보던 루멘이 다시 시선을 돌려 동료들에게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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