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2화 (412/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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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 마족을 전부 잃은 적군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아군은 최후의 기력을 끌어모아 싸웠고, 마지막 마족의 심장에 검을 꽂아 넣은 기사의 비명 같은 함성과 함께. 지독했던 전투가 마무리됐다.

“제대로 된 시작도 전에 이런 꼴이 되다니. 하늘도 참 무심하군.”

깨어난 엑토는 승리의 잔해를 둘러보며 참담한 심정을 드러냈다. 무수한 기사가 희생당했으나, 그중 가장 많은 기사를 잃은 것은 바로 호계 기사단이었으니.

“무리하지 마십시오, 단장님. 치유술을 받기 전까진 움직이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날 환자 취급하는 건가, 소린?”

“환자가 맞지 않습니까. 동료의 죽음으로 기사들의 심신이 허약해졌습니다. 이럴 때 단장님이 다시 쓰러지기라도 하시면…….”

“알았으니 잔소리 그만하게. 없던 두통까지 생기는 기분이군.”

소린의 걱정을 떨쳐 낸 엑토의 시선이 움직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카델과 모리톨, 그리고 하이론이 모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요정 왕이라니.”

깨어난 그를 가장 놀랍게 했던 것은, 도저히 승세가 보이지 않던 아군이 순조롭게 전장을 휩쓸고 있다는 점이 아니었다. 바로 요정족.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지원군이 인간을 돕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직도 사방팔방에서 반짝이는 요정들의 날개가 적응되지 않았다.

엑토는 당장이라도 저들의 틈에 끼어 요정 왕을 자세히 관찰하고 싶었다. 하지만 옆에서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소린 탓에 쉽사리 걸음을 뗄 수 없었다.

‘지원을 요청한 치유사들이 도착하려면 오랜 시간이 남았어. 그때까지 얌전히 자리에 박혀 있을 순 없지. 어디 보자……. 그래. 적린 기사단의 흑마법사에게 부탁하면 되겠군.’

가르엘의 존재를 떠올린 엑토가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루멘과 반, 라이돈, 심지어는 요젠까지도 보인다. 그러나 가르엘의 모습만은 보이지 않았다.

‘카델 경의 근처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아해하며 더 먼 곳을 둘러보던 엑토의 눈썹이 들썩였다.

“저기 있군!”

“예?”

“가 보겠네. 자넨 여기서 다친 기사들을 살펴보고 있게.”

“단장님, 움직이지 마시라니…….”

엑토는 따라붙으려는 소린을 간단히 밀쳐 내곤 가르엘에게로 거침없이 나아갔다. 기본적인 응급 처치만 해 놓은 탓에 몸이 비명을 질러 댔으나, 그는 고통에 굴하지 않았다. 이런 고통에 일일이 절절댈 것이었으면 진즉에 쓰러져 죽었을 것이다.

그렇게 찾아간 가르엘의 곁. 곧장 치유술을 요구하려던 엑토가 멈칫하며 걸음을 늦췄다.

“모들렌? 들리나? 모들렌! 젠장, 뭐라고 하는 거야!”

[울로]를 움켜쥔 가르엘이 다급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분위기만 봐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지?”

“엑토 경.”

“동맹군의 상황이 좋지 못한 건가?”

엑토 역시 카델처럼 동맹군의 상황을 제국군과 동일시하고 있었다. 혹시 다른 방위의 동맹군은 더욱 상황이 좋지 못한 것일까. 이쪽은 요정족의 도움으로 기사회생했으니, 별다른 지원이 없었을 그들은 최악의 결말을 맞이했을 수도 있다.

심각해진 엑토가 묻자,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린 가르엘이 [울로]를 넘겼다.

“서쪽은 저희와 똑같은 전투를 겪었던 것 같습니다. 피해는 크지만 무사히 승리한 것 같고요. 하지만 동쪽과 남쪽의 기사단에선 제대로 된 대답이 들려오지 않아요.”

“생존자가 없다는 말인가?”

“아니요. 직접 들어 보시는 게 빠를 겁니다.”

가르엘의 말에 엑토가 [울로]를 조작했다. 가지고 있는 마도구로 마력을 불어넣어 통신 지역을 동쪽으로 바꾸자, 곧 기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

그것은 쇳소리 같기도 했고, 뭔가가 끓어오르는 소리 같기도 했으며, 뚝뚝 끊긴 고함 같기도 했다.

“청혈 기사단, 들리나? 암철 기사단! 듣고 있다면 아무나 대답해 보게!”

엑토가 소리 높여 말했으나, 기이한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울로]를 툭툭 건드려 봐도, 불어넣는 마력의 양을 늘려 봐도 마찬가지였다.

“[울로]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닌가?”

“남쪽을 확인해 주시죠.”

가르엘을 일별한 엑토가 다시 한번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동쪽에서처럼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희미하게 사람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왜……. 언제 오……. 전부…….]

“내 목소리가 들리나? 황혼 기사단! 광야 기사단!”

[당장……. 빠져…… 없…….]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이쪽의 목소리가 제대로 전달되는지조차 알 수 없다. 단순히 [울로]가 망가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전쟁을 위해 만들어진 [울로]는 그 내구성이 상당했고, 동맹군이 보유 중인 [울로]가 전부 망가졌을 리도 없으니.

이유를 짐작하는 엑토의 앞에서, 가르엘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황혼 기사단장, 모들렌 경의 목소립니다. 확실해요.”

“모들렌 경이라면 망가진 [울로]를 잡고 계속 연락을 시도하고 있을 리는 없겠군. [울로]의 문제가 아니오. 이건…….”

잠시 생각하던 엑토가 낭패라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당했군. 동쪽과 남쪽의 기사단은 이미 징벌의 문을 통해 마계로 진입한 거요.”

동맹군 전원이 마계로 진입하기 전에 피해를 본 것이라면, 모두 함께 재정비의 시간을 갖고 최상의 컨디션으로 재침입을 꾀할 수 있다. 하지만 절반의 인원만을 공격한다면. 공격받은 인원의 피해는 물론, 나머지 절반은 반 토막 난 인원으로 적진에 고립되는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다.

“재정비할 시간이 없소. 당장 마계로 이동하지 않는다면 먼저 내려간 아군이 몰살당할 테니.”

참담한 광경이었다. 눈 돌리는 곳마다 마물의 시체와 분별없이 뒤섞인 기사들의 시체가 있었고, 탁하게 식어 버린 죽은 이의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 지독한 피비린내와 질어진 흙바닥, 텁텁한 공기. 살아남은 기사들은 전투의 흥분으로 미처 인식하지 못하던 부상의 고통에서 허우적댔다.

죽은 동료를 위해 싸우겠다는 투지는, 더 큰 싸움을 코앞에 맞닥뜨렸다는 근심과 공포에 꺾여 버렸다. 사방에서 끙끙 앓는 소리와 각별한 동료와의 이별을 견디지 못한 흐느낌이 들려왔다.

엑토와 모리톨, 그리고 카델은 절반 이상이 사라진 아군을 둘러보며 심란함을 숨기려 애썼다.

“이 상태로 마계에 들어가 봤자 유의미한 전투를 치르긴 어렵습니다. 기껏해야 조금 더 시간을 버는 정도겠죠. 치유사들이 도착하는 걸 기다렸다가, 충분히 회복한 뒤에 이동해야 합니다.”

모리톨의 덤덤한 말에 엑토가 언성을 높였다.

“우리가 회복하는 동안 먼저 마계로 넘어간 동맹군은 모조리 죽어 나갈 거요. 그들이 다 죽은 후에 마계로 넘어간들, 겨우 절반의 인원이 살아남았을 뿐인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려가야 하오.”

“경은 지금 기사들의 상태가 보이지 않는 겁니까? 내려가 다 같이 죽느니, 살아남아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게 낫지 않겠어요?”

“동맹군까지 전멸하면 인간계에 희망은 없소. 우리의 임무는 마지막 평화의 돌을 탈환하는 거지, 모두가 살아남아 미래를 꾀하는 게 아니오!”

“당장 개죽음이라도 당해야 속이 풀리시겠어요? 눈앞에 있는 부하들을 생각하시란 말입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전부 죽는대도, 최후의 한 명이 평화의 돌을 찾아낸다면 목적은 완수한 거요. 목숨을 걸지 않으면 무엇도 이루어 낼 수 없는 전쟁이오!”

의견이 대립함에 따라 엑토와 모리톨의 분위기가 점점 흉악해졌다. 부상도 완전히 치료하지 못한 몸으로 흥분해 봤자 상태만 악화될 뿐이다. 그들의 언쟁을 경청하던 카델이 둘 사이를 가르고 섰다.

“두 분 다 그만하세요. 저희는 단장입니다. 동료들이 죽어 나간 자리에서 우두머리들이 소리 높여 싸운다면, 얄팍하게 남아 있는 투지마저 꺾일 거예요.”

카델의 중재에 엑토와 모리톨이 거칠어진 숨을 골랐다. 둘의 입장이 모두 이해가 갔다. 모리톨은 아군을 개죽음으로 몰고 싶지 않은 것이고, 엑토는 설사 개죽음을 당하더라도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는 뜻을 품고 있었다.

단순한 승패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계의 존속이 달린 중대한 전투이니, 엑토가 저렇게 고집을 부리는 것도 당연했다.

카델은 짧게 찾아온 침묵 속에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금 내려가야 합니다.”

“당연하지.”

“카델 경까지 그런 소릴 하는 겁니까?”

경악하는 모리톨과 속이 시원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엑토의 사이에서, 카델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아래에는 황혼 기사단이 있어요. 성기사단인 그들을 잃게 된다면 승세는 걷잡을 수 없이 기울 겁니다. 또 그들과 접촉할 수 있다면 부상이 심하지 않은 기사들은 곧장 치유술을 받을 수 있을 거고요.”

“부상이 심한 기사들은 어쩔 셈이죠? 그들은 검도 몇 번 휘두르지 못하고 죽게 될 겁니다.”

“부상이 심한 기사들은 이곳에 남아 치유사를 기다리고, 모리톨 경의 말대로 회복을 마친 뒤에 합류하게 하죠.”

비교적 경상인 기사들을 추려 우선 마계로 이동하자는 것이 카델의 의견이었다. 이미 줄어들 대로 줄어든 인원을 또 한 번 찢어 두자는 의미나 마찬가지다. 모리톨은 물론 같은 의견을 주장했던 엑토조차 탐탁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그렇게 적은 인원이 이동한다면 시간을 끄는 일조차 쉽지 않을 거요. 지금쯤 궁지에 몰렸을 동맹군을 돕기는커녕 짐만 될 게 뻔하지.”

“제가 전투의 주축이 되겠습니다.”

“하지만 경은 적룡의 힘을 끌어와야 하는 게 아니었습니까?”

“동맹군이 안정될 때까진 계획을 미뤄야겠죠.”

애초에 어느 정도 승률을 확보한 뒤 시작하려던 탐색이다. 이토록 불리한 상황에서 무리하게 탐색을 진행했다간, 메인 퀘스트조차 완료하지 못한 채 실패하게 될 것이다.

“제가 주축이 되어 행동한다고 해도, 전세를 단숨에 뒤엎을 순 없을 거예요. 적진의 한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전투가 쉽게 풀릴 리 없으니까요.”

카델의 시선이 엑토와 모리톨 너머, 익숙한 금발 머리를 향했다.

“그러니 다시 한번 요정족의 도움을 구해 보겠습니다. 저들이 마계에서도 함께 싸워 주기를 바라는 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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