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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쉴 때마다 폐가 더럽혀지는 기분이네요. 마족들이 왜 그렇게 이 저주받은 땅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지 알겠어요.”
요젠을 선두로 동맹군을 찾아가는 길. 비행을 포기하고 직접 걸음을 옮기던 하이론이 탄식했다. 마족의 냄새가 꽤나 지독한지, 그는 라이돈이 곧잘 하는 것처럼 코끝을 문지르며 인상을 구겼다.
“넌 괜찮니, 라이돈?”
“못 버틸 건 아니에요. 매일 옆에서 마족 냄새를 맡고 살았더니, 적응됐어요.”
“그건 설마 제 얘긴가요, 라이돈 경?”
“알면서 뭘 물어?”
하이론과 동행한 뒤로 라이돈은 평소보다 침착한 면모를 보여 주었으나, 그렇다고 그의 평소 행실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가르엘의 가슴에 비수를 꽂은 그가 부산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걸음걸음마다 신기한 것투성이지만, 인간계에서와는 달리 호기심보단 불쾌함이 더욱 컸다.
말라비틀어진 나무나 툭 치면 바스러질 듯 건조한 수풀, 기묘한 모양과 색을 가진 열매, 행군을 따라 우수수 흩어지는 길바닥의 벌레들까지. 꼭 오래도록 청소하지 않은 폐가를 돌아다니는 기분이었다.
‘슬슬 새로운 인간들이 도착했다는 걸 눈치챘을 텐데. 방해꾼 하나 보이지 않네.’
단원들의 옆에서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던 카델이 짧게 혀를 찼다. 방해꾼을 보내지 않고 인간들을 방치한다는 것은, 그보다 성가신 일을 준비하고 있거나, 견제하지 않아도 된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일 것이다. 안 그래도 열세인 인간 측 진영이 아예 궁지에 몰릴까 걱정이 됐다.
“얼마나 더 걸어야 해, 요젠? 꽤 멀리 이동한 것 같은데.”
첫 마을을 가로질러 이 어두운 숲에 진입한 이후, 대략 40분 넘는 시간 동안 내리 걷기만 했다. 그럼에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숲길에 극에 달했던 긴장감마저 옅어진 상태였다.
카델의 물음에 앞장서 걷던 요젠이 우뚝 몸을 세웠다. 지상에서처럼 오랫동안 분신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행군을 멈추고 분신을 재생성할 필요가 있었다.
“거의 다 왔을 거야. 모들렌에게 묻힌 기운이 강하게 느껴지고 있으니까.”
집중한 요젠이 또 한 번 모들렌의 그림자 분신을 만들어 냈다. 함께 그 분신을 살피던 카델이 얕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기울였다.
“아까부터 계속 달리기만 하네. 많이 급한 상황이란 건 알겠는데……. 부상자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건가?”
“그것까진 모르겠어. 하지만 불안정한 상태라는 건 확실해.”
잠시 나타났던 분신은 금세 탄력을 잃고 녹아내렸다. 요젠은 분신의 암기를 갈무리하며 도착까지의 남은 시간을 계산했다. 하지만.
“……?”
손안에서 공처럼 뭉친 암기를 굴리며, 요젠은 한참이나 말없이 멈춰 있었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를 지켜보는 동료들은 물론, 뒤편에 정지 중인 기사들도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듯 웅성댔다.
“왜 그래, 요젠? 뭐 문제라도 있어?”
“……코앞이야.”
“응?”
“모들렌이 코앞에 있어.”
그리 말한 요젠이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코앞이라니, 근처에선 아무 소리도…….”
한창 격렬할 전장이 근처에 있다기엔 어렴풋한 비명조차 들리지 않는다. 의아함을 느낀 카델이 요젠을 따라 정면을 바라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맞은편에서부터 발소리가 들려왔다. 건조한 땅을 박차는 발소리는 빠르고 간결했다.
고요한 숲을 울리는 선명한 발소리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자연스럽게 임전 태세에 돌입한 기사들의 눈빛이 빛났다. 그들은 언제든 새로운 적을 상대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잠깐.”
함께 마력을 끌어 올리던 카델의 미간이 작게 구겨졌다. 맞은편에서 모습을 드러낸 작은 인형. 처음엔 손가락만 하던 것이, 빠른 속도로 몸집을 부풀리며 거리를 좁혀 왔다. 점점 선명하게 비치는 윤곽.
땀에 흠뻑 젖은 얼굴과 다급한 표정, 경직된 눈빛, 넝마가 된 단복. 그들의 앞으로 달려오는 이는, 다름 아닌 모들렌이었다.
“모들렌!”
난데없는 등장에 놀란 가르엘이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빠져나왔다. 왜 모들렌이 이곳에, 그것도 아군 한 명 대동하지 않은 채 달려오고 있는 것인가. 도망을 치고 있는 걸까? 하지만 모들렌이라면 전투 중인 아군을 버리고 혼자 도망치는 짓은 결코 하지 않는다. 그 장소가 마계라면 더더욱.
기사단을 발견한 듯, 헐떡이는 숨을 몰아쉬던 모들렌이 이내 다급히 입을 열었다.
“도망, 도망가십……!”
그러나 모들렌이 채 말을 끝맺기도 전.
“뭣……!”
뒤에서부터 빛의 속도로 날아든 무언가가, 모들렌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것을 막을 새는 없었다. 뚝 끊긴 뜀박질과 함께 모들렌의 몸이 앞으로 기울고.
“모두 흩어지세요!”
충격에 굳어 있는 아군의 귓가로 하이론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카델은 한 박자 늦게 모들렌을 꿰뚫은 공격이 그대로 아군에게로 쇄도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주춤거리며 공격을 피하려 했으나, 그보다 먼저 누군가가 그를 끌어안고 바닥을 굴렀다. 찰나의 순간, 아슬아슬하게 회피한 공격이 뺨을 할퀴는 강풍을 일으켰다.
카델은 누군가의 품속에서 허겁지겁 고개를 치켜들었다.
“……가르엘.”
자신을 감싼 손이 달달 떨리고 있음이 느껴졌다. 카델은 흔들리는 가르엘의 눈빛을 바라보다, 곧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뒤편을 돌아보자 가까스로 공격을 피해 좌우로 갈라진 기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대체 좀 전의 공격은…….”
모리톨이 인상을 찌푸리며 바닥을 내려보았다. 모들렌을 꿰뚫은 ‘무언가’는 분명 허공을 할퀴며 쏘아졌다. 그러나 그 ‘무언가’가 지나간 자리에는 땅을 깊게 팬 자국이 기다랗게 이어져 있었다.
이토록 강한 공격이 어떤 조짐도 없이 불시에 이루어졌다. 금세 어수선해진 분위기 속에서, 카델은 공격이 시작됐던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대장!”
“단장, 혼자 가지 말아요!”
모두의 부름을 무시하고 달려간 그곳엔, 맥없이 쓰러진 모들렌이 있었다. 카델은 엎어진 그의 몸을 바로 눕히며 날카롭게 외쳤다.
“가르엘! 꾸물거리지 말고 이쪽으로 와!”
그에 가르엘은 물론 나머지 단원과 하이론, 모리톨과 엑토까지 다가왔다. 가까이서 본 모들렌의 가슴에는 손가락 한 마디만 한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위로 울컥울컥 핏물이 차올랐고, 완전히 의식을 잃은 모들렌의 몸은 서서히 식어 갔다.
그럼에도 가르엘은 곧장 치유술을 전개하지 못했다. 모리톨과 엑토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의 망설임을 눈치챈 카델이 모들렌의 가슴을 짚은 커다란 손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꾸물거리지 말고 당장 치료해. 사람들을 설득해서 물릴 여유 없어. 지금이 아니면 모들렌 경을 살릴 기회도 없고.”
단호한 시선과 눈을 맞춘 가르엘이 더듬더듬 상처를 어루만지고. 결단을 내린 듯 질끈 눈을 감은 그가 마기를 개방했다.
“잠깐, 저 기운은……!”
곧장 마기를 감지한 모리톨이 눈을 크게 뜨며 한 걸음 다가섰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으로 물든 표정이 가르엘을 향했으나. 그의 행동은 엑토에게 저지되었다. 엑토는 팔을 뻗어 모리톨의 앞을 가리고는, 당황한 낯에 대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자는 사람을 살리고 있소, 모리톨 경. 아군과 적군을 제대로 구분하시오.”
“하지만…….”
무언가 더 대꾸하려던 모리톨은 굳은 카델의 표정을 일별하곤 이내 입을 다물었다.
“살릴 수 있겠어?”
“뭔가 이상해요. 마기가 제대로 순환하지 못하고 있어요. 대체 왜…….”
“가르엘,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모들렌 경을 살리는 데에만 집중해.”
심장이 불안한 박자를 타고 널뛰었다. 카델은 마기가 어루만지는 상처를 응시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위력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은 크기야.’
그저 지나가는 것만으로 땅에 길을 만들어 낼 만큼 강력한 공격이었다. 그런데도 공격에 적중당한 모들렌의 상처는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로 작았다.
‘대체 뭐가 발사됐던 거지? 화살? 마기의 덩어리? 아니면 총탄? 비중은 적었지만 총을 사용하는 적도 존재하긴 했으니까. 하지만 요젠까지 적을 발견하지 못한 걸로 봐선 꽤 먼 곳에서부터 공격한 것 같은데……. 마법사인가?’
모들렌은 이 공격을 피해 숲까지 달려왔던 걸까.
“어쩌면 가까운 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지 몰라요.”
홀로 맞은편을 살피던 하이론이 입을 열었다. 그는 빛이 들지 않는 어두운 숲 너머를 응시하다, 손을 펼쳐 그 위로 숨을 불어넣었다.
부드러운 숨결의 끝에서 생성된 얼음 결정이 휘몰아치고. 이내 결정 하나하나가 자그마한 나비가 되어 근방을 팔랑거렸다. 하이론의 손짓에 얼음 나비는 어두운 숲속을 향해 날아갔다.
나비의 움직임을 따라 어둡던 숲 곳곳이 영롱한 빛으로 밝혀졌다. 잠시 그 궤적을 지켜보던 하이론이 뒤를 돌았다.
“라이돈, 나와 근처를 돌아보자꾸나.”
“……저랑요?”
“그래. 카델, 아들을 데려가도 되겠죠?”
카델이 고개를 끄덕이자,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짓던 라이돈이 터덜터덜 하이론의 옆에 섰다. 하이론은 그런 라이돈을 향해 가볍게 미소 지으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우리의 숲과는 완전히 딴판이구나. 매달린 열매조차 독으로 가득해.”
하이론과 라이돈은 얼음 나비를 따라 조금씩 아군과의 거리를 벌렸다. 라이돈은 어두침침한 숲을 돌아보며 건성으로 동조했다.
“냄새가 지독하구나. 마족의 악취가 가득해서, 적의 위치를 가늠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야. 너도 그렇지?”
“아무래도요. 여긴 마계니까요.”
“그래, 여긴 마계지. 인간계에선 냄새로 적을 판별할 수 있었지만, 이곳에선 정반대야.”
더 이상 아군의 기척도,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거리. 하이론은 천천히 걸음의 속도를 늦췄고, 멍하니 얼음 나비를 따라 걷던 라이돈은 어느새 뒤처진 그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이곳에선 대군을 끌고 온 인간보다, 고작 둘뿐인 우리 요정들의 냄새가 훨씬 크게 부각될 거야. 요정의 냄새를 맡은 마족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고, 우리가 인간들 틈에 섞여 있다면 직접 위치를 노출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
“좀 전의 공격을 보면 알겠지만, 상대는 아주 위험한 녀석이란다. 섣불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초장거리 공격으로 상대를 견제하지. ……하지만 고작 둘뿐인 먹잇감이 코앞에 있다면, 마족은 참지 못할 거야. 오만한 녀석들이잖니.”
하늘하늘 날아가던 얼음 나비 떼가 어느 한 지점에 멈춰 요란하게 날개를 펄럭였다. 길쭉하게 솟은 어느 나무 앞. 얼음 나비는 기둥을 따라 높이 날아올랐고, 라이돈의 시선도 나비 떼를 따라 조금씩 올라갔다.
쩍쩍 갈라진 나무 기둥을 지나, 잎사귀도 달리지 않은 앙상한 나뭇가지를 넘어,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가지의 끄트머리. 그 가냘픈 가지를 밟고 선 고위 마족이 있었다.
하나로 높게 묶은 검은 머리와 입술 끝에 매달린 얇은 나뭇가지. 푸른빛 도는 어두운 피부색은 그의 살기 어린 눈빛과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눈앞에서 팔랑대는 얼음 나비를 단숨에 낚아챈 그가 손에 힘을 주어 나비를 으스러뜨렸다. 핏줄 선 손을 가볍게 털어 내며 아래를 응시하던 그는, 망설임 없이 곧장 낙하했다. 낙상의 위험은 없었다. 여유롭게 날개를 펼친 그가 땅 위에 몸을 세웠다.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요정이 두 마리나……. 마왕님께서 전투에 지친 날 위해 포식의 기쁨을 주시려나 보군.”
하이론의 시선이 마족의 손에 들린 장총에 닿았다. 아주 오래전, 마계 공학으로 일궈 낸 특수한 무기. 마계에서도 극히 일부만이 사용하는 무기였다.
하이론조차 실물로 본 적은 처음이었으나, 마족의 장총은 그의 기억과도 약간 달랐다. 그것은 다른 총보다 훨씬 길이가 길었고, 총구 또한 비정상적으로 넓었다. 분명했다. 눈앞의 마족이 바로 모들렌이라는 인간을 쓰러뜨린 적.
“물러나렴, 라이돈.”
“나도 싸울 수 있어요.”
“물론 그렇지. 하지만 초반부터 무리해 달려들 필요는 없단다.”
자연스럽게 라이돈을 뒤로 물린 그가 마족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핀하이족의 요정 왕, 하이론이라고 해요. 안됐지만 당신은 이 이상 인간을 공격할 수 없어요”
“흐흐……. 요정 왕? 이거 영광이로군. 내 이름은 알렉시아 솔라비스. 잡아먹기 전에 이름 정돈 알려 주지.”
긴 혀로 입술을 핥은 알렉시아가 장총을 검처럼 가뿐히 치켜들어 하이론을 겨눴다.
“요정들 맛이 그렇게나 좋다던데. 어디, 요정 왕은 더 특별한 맛이려나?”
알렉시아의 도발에 물러나 있던 라이돈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는 반사적으로 마력을 끌어 올리려 했으나, 그보다 하이론의 행동이 빨랐다.
“그런 말은 삼가시죠. 보기보다 도발에 약한지라.”
눈 깜짝할 새 그의 주위로 폭풍 같은 눈보라가 휘몰아치며, 무수한 얼음 나비가 그 결을 채웠다. 유리 조각이 부딪히는 듯한 맑고 높은 소음이 사위를 채우며, 나비 떼가 알렉시아를 향해 날아들었다.
온통 새하얘진 시야에 짧게 혀를 찬 그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자신을 쫓는 나비 떼를 일별한 그는 총구를 발아래로 조준한 채 연달아 방아쇠를 당겼다.
조준도 없는 마구잡이식 발포. 그러나 총구의 바깥으로 빠져나온 것은, 평범한 탄환이 아니었다.
“왕은 왕이라 이거지.”
반투명한 초록빛 몸체와 선명한 이목구비. 기이한 바람 소리를 내며 나비 떼를 향해 검을 휘두르는 그것은, 인간들의 영혼이었다.
“대체 이건……?”
치유술을 전개하던 가르엘은 물론, 그를 지켜보던 이들까지. 생생한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카델은 모들렌의 몸에서 조금씩 빠져나오고 있는 진녹색의 기운을 주시했다. 그것은 연기처럼 일렁이면서도 확연한 형체를 갖췄으며, 모들렌과 꼭 닮아 있었다. 얼굴 위로 하늘거리는 기운에선 모들렌의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황망히 굳어 있는 사람들 사이, 요젠만이 조용히 단언했다.
“영혼이야.”
영혼. 그의 발언에 모두의 눈빛으로 경악이 스쳤다. 조용히 모들렌의 앞으로 다가간 요젠은 정면을 가리켰다.
“저 앞에 있는 존재가 영혼을 끌어당기고 있어. 약해진 몸이니, 저항하기 어려울 거야.”
“저 앞이라면…….”
천천히 몸을 일으킨 카델이 컴컴한 숲속을 응시했다. 나비를 따라 사라진 하이론과 라이돈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느껴지는 기척 또한 없었다.
‘상대의 영혼을 끌어당기는 적……. 상대해 본 적 없는 마족이야. 공략법도 모르는 녀석을 두 요정이 상대하게 둘 순 없어. 내가 가 봐야 해. 하지만…….’
카델의 시선이 가르엘을 향했다. 모들렌의 영혼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마족에게 끌려가고 있음에도, 치유술은 진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예 눈치 보기를 포기한 가르엘은 창백한 안색으로 마구 마기를 방출하고 있었다.
이런 가르엘을 두고 자리를 비우는 것이 옳은 선택일까. 불안정한 상태의 가르엘은 불쑥 충동적인 모습을 보이곤 했다. 만약 이곳에서 돌발 상황이 발생한다면, 가르엘을 진정시킬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었다.
망설이는 카델에게로 요젠이 다가왔다.
“아직은 더 지켜봐도 돼. 라이돈의 기운이 인식 범위 내에 있어. 완전히 멀어지지 않는 한 계속 상태를 살필 수 있으니까.”
“……무사한 거지?”
“응. 위험하다는 판단이 서면 내가 가 볼게.”
라이돈의 곁에는 하이론이 있다. 봉인이 풀린 하이론은 강력한 힘을 가졌을 테니, 둘 다 크게 다칠 일은 없을 것이다.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은 카델이 다시 가르엘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침착해, 가르엘. 모들렌 경이 의식을 되찾는다면 마족의 힘에 저항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하이론 님과 라이돈이 마족을 만났다면 분명 충돌할 테니, 힘이 약해진 틈을 노려서 치유술을 진행해 보자.”
“……단장님.”
“응.”
“제 손……. 잠시만 잡아 주시겠어요?”
뒤늦게 모들렌의 상처를 짚은 손이 눈에 들어왔다. 짙은 마기에 가려진 그의 손은 겁에 질린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그 위로 제 손을 얹은 카델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