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0화 (420/521)

⚔️

“공격이 관통한 자들의 영혼을 빼앗고, 빼앗은 영혼으로 또 다른 영혼을 잡아먹는, 괴물 같은 녀석이었습니다. 많은 단원이 목숨을 잃었어요. 만약 저까지 영혼을 빼앗긴다면 아군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보았을 거고, 그걸 막기 위해선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놈이 끝까지 쫓아와 죽기 직전까지 갔지만요.”

의식을 되찾은 모들렌은 끔찍했던 전장의 상황을 전달하며 참담함을 숨기지 못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전투에 투입됐던 황혼 기사단은 절반 이상이 사망했고, 포탈 근처에서 대기 중이던 인원만이 온전히 목숨을 부지 중이라 했으니.

“…….”

모들렌의 말에 가르엘이 푹 고개를 수그렸다. 카델은 그런 가르엘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겨 그러쥐었다.

“합류를 서둘러야겠군. 황혼 기사단이 그 이상 기사를 잃는다면 마계에서의 생존율은 0에 수렴할 거요.”

엑토는 이 모든 상황이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마족은 초반부터 인간군의 전력을 반으로 나누고, 착실하게 수를 줄이고 있었다. 이 흐름을 막지 못한다면 아군의 궤멸은 시간 문제.

모두가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모들렌은 치료를 마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돌아가는 길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장 합류한다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아군을 살릴 수 있을 거예요.”

넝마가 된 망토를 대충 뜯어낸 모들렌이 한곳에 모인 제국군을 돌아보았다.

“부상자들은 이쪽으로 모이세요. 합류 전에 최대한 치료를 해 두겠습니다.”

가르엘의 경우, 심한 상처가 아닌 이상 치유술을 전개하지 않았다. 기운의 문제도 있었으나, 그의 역할은 전투 중의 아군을 관리하며 조금이라도 더 오래 싸울 수 있게 만드는 것이었으니. 때문에 상처를 주렁주렁 달고 이동하던 기사들은 곧장 모들렌에게 모여들었다.

모들렌이 성심성의껏 치유술을 전개하는 동안, 나머지 인원은 근방을 정찰했다.

“넌 하이론 님이랑 같이 있으라니까.”

“싫어! 난 카델 옆에 있고 싶단 말이야.”

라이돈은 하이론과 함께하라는 카델의 말을 무시하고 그와의 정찰을 택했다. 기어이 옆자리를 꿰찬 그가 마음껏 애정을 퍼부었지만, 카델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지기만 했다.

그 확연한 반응 차이에 라이돈이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나랑 같이 있기가 싫은 거야?”

“……그런 거 아니야.”

“그런데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아. 누가 괴롭혔어?”

스스로 남기를 택한 하이론을 내내 걱정하고만 있기에는, 코앞에 닥친 시련이 너무나 크고 무겁다. 그럼에도 하이론은 자신이 사랑하는 요정의 아버지이자, 자유를 약속한 대상이었기에. 카델은 좀처럼 그의 안위를 포기할 수 없었다.

카델이 입을 꾹 다문 채 대답을 회피하자, 라이돈 역시 심각한 낯으로 그의 손을 잡아챘다.

“왜 그래, 카델. 내가 뭘 하면 기분이 풀어져?”

라이돈이 직접 하이론을 돌려보내게끔 유도하는 것은 어떨까. 사랑하는 아들의 부탁이라면 순순히 돌아갈지 모른다. 그리 생각하며 뻣뻣한 입술을 움직인 순간이었다.

“치유술이 끝났다고 하네요. 어서 돌아오세요, 카델. 라이돈 너도.”

언제부터 그들을 뒤따랐는지 모를 하이론이, 둘 사이를 가르며 말했다. 그에 주춤거리며 카델의 표정을 살피던 라이돈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등을 돌리고. 하이론은 카델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두 번은 약속을 어기지 마세요.”

작게 속삭인 그가 라이돈을 데리고 걸음을 옮겼다. 확실한 경고였다. 조금씩 멀어지는 두 부자의 뒷모습에, 카델의 표정이 괴롭게 구겨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행렬의 최후방. 진군하는 기사들과 거리를 벌린 카델의 옆에는, 그의 부름에 응한 쿤라가 있었다.

쿤라는 울적한 카델의 목소리를 들으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담아내는 것은 하이론. 최전방의 상공에서 바삐 날개를 펄럭이는 요정 왕이었다.

“……제거라.”

카델에게 새로운 시스템 창에 대한 설명을 들은 후. 쿤라 역시 적지 않은 심란함을 느꼈다. 요정 왕의 안위가 걱정되기 때문은 아니었다. 자신이 개입을 허락하지 않은 대상을 ‘제거’하겠다는 시스템 창. 그것은 마지막 전투를 치르는 동안, 불청객이 만들어 낼 변수를 철저히 배제하겠다는 이세계 신의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생각보다도 내가 건드릴 수 있는 요소가 적어지겠군. 고작 요정 왕이 고위 마족 하나를 죽인 것 가지고 그렇게나 날을 세우다니.’

카델의 말대로 ‘제거’라는 것이 그저 마계에서의 퇴출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 세계에서의 완전한 제거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둘 중 무엇이 진실이건 쿤라에게 있어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제거’라는 단어를 사용한 게 오히려 긍정적 의미일지도 모른다. 그 녀석이 좋아하는 ‘소멸’ 따위의 극단적인 표현은 없었으니.”

“제거도 충분히 극단적인 표현이에요.”

“게다가 요정 왕은 네 경고를 무시하고 끝까지 함께하겠다 결정했지. 여기서 네가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라이돈에게 알린다면 하이론 님도 더 버티지 못하고 떠날 거예요.”

천천히 고개를 돌린 쿤라가 카델을 내려보았다. 하이론을 응시하는 그의 표정에선 짙은 근심이 떠올라 있었다. 이 중대한 상황에서조차 제 아비도 아닌 자의 생존을 걱정하는가. 그것이 황당하면서도 지극히 카델다워, 쿤라는 짐짓 단호하게 일갈했다.

“관둬라.”

“어째서요? 하이론 님은 분명 중요한 전력이지만, 전 부하의 가족까지 위험으로 내몰고 싶지 않아요. 이 전쟁에서 희생시키고 싶지 않다고요. 그리고…….”

“네 의지만큼이나 저 요정의 의지도 견고해. 누군가를 위해 죽을 결심 같은 건, 그리 간단히 다질 수 있는 게 아니다.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겠지.”

그제야 카델의 입이 다물렸다.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고개를 수그리는 카델의 옆에서, 쿤라는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요정 왕이 제거당하지 않을 방법을 찾아보마. 그러니 일단 걱정은 미뤄 두고 전투에 집중해.”

카델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자, 쿤라는 다시 모습을 감췄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