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1화 (42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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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다 왔습니다. ……이 소리, 들리시죠?”

멀지 않은 곳에서 어렴풋한 함성이 들려왔다. 비명인지 기합인지 확실치 않은 처절한 외침, 바쁜 발소리와 둔탁한 타격음. 동맹군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음이 확실했다.

그들은 일단 진군을 멈추고, 어떤 식으로 전장에 합류할지를 의논했다.

“모들렌 경의 말대로라면 동맹군은 이미 포위당했소. 그러니 우리는 아군을 돕고 적을 가두는 더 큰 포위망을 형성해야지. 카델 경과 하이론이 북쪽으로 이동하시오. 둘이서 마법으로 시선을 교란하면, 남쪽에 모여 있던 나머지가 뒤를 치는 거요.”

“하지만 북쪽의 인원은 교란과 동시에 적들의 타깃이 될 겁니다. 카델 경와 요정 와……. 라이돈 경의 아버지 측에는 두 분을 보호하고 비교적 공격을 잘 버틸 수 있는 기사를 보내는 게 좋겠군요.”

“적린 기사단에서는 반 헤르도스와 라이돈을 데려가겠습니다. 나머지 인원은 후방에서 기습을 도울 겁니다.”

기사단장과 대대장들이 모여 의논한 끝에, 아군은 북쪽과 남쪽으로 인원을 나누어 전장을 포위하기로 했다. 현재 그들이 있는 방위가 북쪽과 가까웠으므로, 남쪽을 맡은 기사들은 곧장 이동할 채비를 했다.

“아하하! 잘 가, 떨거지들! 카델은 내가 잘 보살필 테니까, 잔뜩 질투해도 좋아!”

“잘 가라. 되도록 늦게 만나자고.”

떠나는 동료들에게 마음껏 조롱의 말을 남긴 반과 라이돈이 합류하고. 카델은 자신과 함께 북쪽으로 이동할 기사들을 훑어보았다. 각 기사단에서 상대적으로 부상이 적고, 덩치가 큰 기사들이 선별되었다.

카델이 교란용 마법을 준비하며 이들을 모두 지휘하기는 어렵다. 때문에 기사들의 통솔을 위해 대대장이 한 명 더 따라붙게 되었다.

“바로 이동하죠, 소린 경.”

“그러지. 남쪽과도 속도를 맞춰야 하니, 최대한 신중하게 움직이도록 하겠소.”

마법은 지금으로부터 20분 뒤에 전개될 예정이었다. 북쪽과 남쪽에서 보이는 신호를 보냈다간 적들의 눈에 띌 위험이 컸기 때문에, 시간을 맞춰 공격하기로 한 것이다.

그들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되도록 적을 마주치지 않으려 사방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반은 카델의 앞에서 날카롭게 주위를 살폈고, 라이돈은 카델과 하이론의 사이에서 설렁설렁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걸어 나가던 때. 라이돈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이야, 이렇게 조심해서 걸을 필요가 있어?”

말 한마디 없이 고요히 진군하던 아군 사이에서, 라이돈의 목소리는 유독 크게 울려 퍼졌다. 카델을 포함한 다른 기사들의 시선이 일순 라이돈을 향했다.

“헛소리할 거면 계속 입 닫고 걷기나 해라, 요정 노…….”

평소처럼 라이돈을 ‘요정 놈’이라 부르려던 반이 슬쩍 입을 다물었다. 뒤늦게 하이론을 인식한 탓이었다. 하이론은 그런 반을 보며 가볍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적한테 들켜 봤자 도착 시간이 늦어지기만 하니까. 시간 맞춰 작전을 실행해야 삐거덕거리지 않지.”

덤덤하게 말한 카델이 라이돈의 등을 두드리자, 심드렁하게 입맛을 다신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걸어오는 내내 마주친 적이라곤 그 재미있는 고위 마족뿐이었는걸. 마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고.”

“……그건 그렇지.”

“전장으로 들어가지 않는 이상 적을 마주칠 일은 없을 것 같단 말이야. 그 고위 마족도 도망친 모들렌을 쫓아온 거였잖아.”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그들이 마계에서 마주친 위협이라곤 시한폭탄 마법진과 모들렌을 쫓아온 고위 마족. 두 가지뿐이었으니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니.”

“……뭐. 이렇게 답답할 정도로 조용하게 이동할 필요는 없지 않나, 싶었던 거예요.”

하이론의 대꾸에 라이돈은 더 이상 말을 늘어놓지 않았으나, 카델은 뭔가가 신경 쓰이는 듯 주위를 훑어보았다.

‘확실히, 이상할 정도로 적이 안 보이긴 했어. 모들렌 경의 말대로라면 지금쯤 전장과도 제법 가까워진 상태일 텐데. 그래서 더 보이지 않는 건가?’

주위의 모든 적이 전장인 숲의 중심부에 뛰어들며, 오히려 외곽이 깨끗해진 것일 수도 있다. 그리 생각해 보려던 순간이었다.

“정지!”

앞서가던 소린이 낮게 외쳤다. 갑작스러운 정지 명령에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걷던 카델이 반의 등에 코를 박았다. 반은 제 등에 부딪혀 비틀거리는 카델의 손목을 잡아채 지탱해 주고는, 앞에 선 기사들의 머리 위를 살폈다.

작게 눈살을 찌푸리며 시야를 확보하자 보이는 것은.

“저 작은 벌레는 뭐야?”

크기는 검지를 조금 넘어서는 정도. 살구색의 피부는 쪼글쪼글하게 주름졌고, 작은 몸체와는 어우러지지 않는 근육질 몸을 가졌다. 게다가 얼굴 면적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징그러운 눈알까지.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흉물스러운 외관이었다.

그리고 그 흉물스러운 존재를 더욱 기묘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었으니.

“아하하! 뒤로 뛰고 있네? 엄청 빠르잖아!”

녀석은 기사들을 마주 보며 온 힘을 다해 거꾸로 달리고 있었다. 달리는 자세만 봐서는 조금씩 앞으로 다가와야 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빠른 속도로 멀어지고 있었으니.

소린이 저 괴물을 쫓아야 할지, 놔둬야 할지를 고민하며 멈춰 있을 무렵. 반의 어깨를 짚고 고개를 빼낸 카델이 미간을 좁혔다.

“베이비 데빌이잖아?”

“……베이비요?”

“당연히 귀여워서 붙은 이름은 아니고. 저거, 바스킨 마을에서 한 번 상대해 본 적 있어. 엄청 날쌨지.”

“그때도 저렇게 거꾸로 뛰는 녀석이었나요?”

“아니.”

어느 괴담에 나오는 귀신도 아니고, 거꾸로 뛰어가는 마물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워낙 크기가 작아 베이비 데빌의 표정까진 자세히 보이지 않았으나, 카델은 마물에게서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무서워하고 있는 것 같은데.’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치켜들고 있다. 인간이 무서워 그런 것이라기엔, 허약한 고블린조차 두려움 없이 달려드는 것이 저들 마물의 습성. 게다가 도망갈 것이라면 제대로 앞을 보고 달리는 편이 훨씬 빠르지 않겠는가.

‘원래 속도보다도 느려. 저건…… 끌려가고 있는 건가?’

마치 등을 잡아당기는 무형의 힘에 저항하는 것처럼, 베이비 데빌의 모습은 어색한 것투성이었다. 잠시 마물의 모습을 응시하던 카델이 소린을 향해 외쳤다.

“소린 경! 저 마물을 쫓아가 보죠!”

본래 속도보다 느려진 베이비 데빌을 쫓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기사들은 최대한 기척을 숨긴 채 마물과 일정 거리를 유지했고, 조금씩 안쪽으로 들어설수록 기사들의 표정은 오묘하게 변해 갔다. 바로 베이비 데빌이 향하는 방향 때문이었다.

“계속 이 방향으로 간다면 예정대로 작전 지점에 도착하겠는데요.”

반의 말대로였다. 베이비 데빌은 기사들이 향하던 작전 지점을 안내하듯 달리고 있었다. 그에 묘한 찜찜함을 느끼던 때.

“여기서 멈춘다.”

소린이 손을 들고 진군을 멈췄다. 그들은 곧장 흩어져 주위에 자리한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줄기가 앙상하고 잎사귀가 없어 몸을 숨길 그늘조차 마땅치 않았으나, 대놓고 모습을 드러내는 것보다는 나았다.

카델은 나무에 등을 기댄 반의 품에 몸을 가리고, 그의 어깨 너머를 내다보았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마법진……?”

텅 빈 숲길에 넓게 자리한 마법진. 베이비 데빌은 그 마법진 위로 내달렸다. 은은하게 발광하는 자주색 마법진 위로 올라간 녀석은 그제야 뜀박질을 멈췄다.

은근한 긴장감 속에서, 베이비 데빌이 이상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녀석은 밧줄에 묶이기라도 한 것처럼 꼿꼿하게 몸을 세우더니, 제자리에서 콩콩 널뛰었다. 하늘을 향해 휙 꺾인 고개와 발목이 구부러질 만큼 빳빳하게 세운 발끝.

그렇게 몇 차례 제자리 뛰기를 하던 녀석이 그대로 멈춰 서고. 반이 대검의 손잡이에 손을 올린 순간.

“……!”

마법진이 발광하며, 순식간에 다른 모습으로 변화했다. 그것은 어느 괴생물체의 아가리였다. 마법진의 크기만큼 활짝 벌어진 아가리 속에는 위아래로 빼곡히 자라난 무수한 이빨들이 자리했다. 그 아래 축 늘어진 기다란 혓바닥이 널름거리며 베이비 데빌을 휘감았다.

하지만 그 흉악한 아가리의 등장보다 충격적인 것이 있었으니.

“기사들이 왜 저기에……!”

아가리를 가득 채운 것은 이빨뿐만이 아니었다. 무저갱을 연상케 할 만큼 어두운 입 안. 그 속에는 여태껏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마물, 그리고 남쪽으로 이동 중이어야 할 기사들의 머리가 한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곳에서 제 부하들의 얼굴을 발견한 카델이 곧장 반의 품에서 빠져나와 그 앞으로 달려갔으나.

“단장, 위험해요!”

짧게 입맛을 다신 아가리가 꾹 다물리며, 완전히 모습을 숨겼다. 아가리가 사라진 자리에는 좀 전과 같은 마법진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환상인가? 대체 왜 저곳에 기사들이…….”

뒤늦게 몸을 빼낸 소린이 마법진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리자, 하이론이 답했다.

“환상은 아니에요.”

“그렇다면 저 마법진 안에 기사들이 갇혔다는 말입니까?”

“글쎄요. 마법진 안에 갇혔다기보다는…….”

심각하게 표정을 굳힌 하이론의 시선이 어딘가를 향했다. 드높은 상공. 별다른 기척이 느껴지지 않던 하늘 위로, 무언가가 나풀거리며 하강하고 있었다.

“카델. 마법진에서 떨어지세요.”

하이론의 말에 당장이라도 마법진을 해제하려던 카델이 멈칫하며 물러났다. 반은 자연스럽게 카델을 제 뒤로 끌어당겼고, 라이돈은 하늘을 향해 외쳤다.

“느려 터졌네! 날개가 달렸으면 빨리 내려오란 말이야!”

그 외침에 반응하듯, 느릿느릿 내려오던 무언가가 속도를 높여 단숨에 고도를 낮췄다. 한순간 강한 바람이 대지를 휩쓸며, 낭랑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새로운 먹잇감을 또 발견했네! 우리 토토가 아주 좋아하겠는걸?”

강한 바람에 감고 있던 눈을 뜨자, 목소리의 주인공이 보였다. 제대로 정돈하지 않은 검은 더벅머리와 둥그스름한 붉은 눈, 마르고 왜소한 몸을 가진 고위 마족.

그는 뒷짐을 진 채 인간들을 구경하듯 하늘을 한 바퀴 돌았다. 그러고는 이내 한 인간을 콕 집어 손가락을 뻗었다.

“내 취향이다, 너! 죽을 것 같으면 꼭 비명을 질러. 죽기 직전에 목을 똑 떼어 가야겠어.”

바로 위에서 손가락질하니 헷갈릴 일도 없었다. 카델은 자신을 내려보는 고위 마족을 향해 헛웃음을 뱉었다.

“보통 자기 취향이면 살려 준다고 하지 않나?”

“에이, 아무리 취향이라도 인간을 살려 줄 수는 없지. ……아니. 애완 인간으로 키워 볼까? 그 정도는 신시 누나가 허락해 줄지도?”

“신시?”

“응! 아, 신시는 내 누나고, 내 이름은 캐시! 귀여운 이름이지?”

캐시는 목소리만큼이나 행동도 발랄했으나, 그를 지켜보는 카델의 표정은 싸늘하기만 했다. 그리고 함께 둘의 대화를 듣던 하이론이 카델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솔라비스 가문인가 보군요. 몸을 마기로 바꾸던 고위 마족의 이름이 신시였어요.”

또 솔라비스였다. 이번에도 캐시라는 고위 마족이 낯설기만 한 것을 보아, 솔라비스 가문은 헬 모드에 새롭게 추가된 마족 무리인 것이 틀림없었다.

‘대체 언제까지 신규 고위 마족만 마주칠 건데. 아는 얼굴 좀 만나 보자, 응?’

게임 속에서 경험해 본 고위 마족들이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그렇게 카델이 신시의 동생이라는 그에게 조금 더 정보를 빼내 보려던 때.

“우리 자기가 예쁜 건 인정하는데, 내 앞에서 작업 걸지는 마. 죽여 버리고 싶으니까!”

빤히 캐시를 응시하던 라이돈이 얼음 창을 발사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캐시가 가까스로 몸을 틀어 회피하고. 얼음 창이 스쳐 간 팔뚝을 벅벅 문지른 그가 뒤늦게 새된 비명을 질렀다.

“죽을 뻔했잖아! 이 버릇없는 요정! 넌 내 취향도 아니야!”

“너도 내 취향 아니야! 못생긴 게!”

“너도 못생겼어! 요정 중에서 제일 못생긴 것 같은데?”

“아니? 이 세상의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난 평생 예쁘다는 소리만 듣고 살았어!”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너 못생겼어!”

서로의 연령이 궁금해지는 유치한 대화 속에서, 반은 살짝 고개를 틀어 카델에게 속삭였다.

“반응 속도가 느려요. 육체파는 아닌 것 같아요.”

“……그럼 마법사인가? 저 녀석이 이 마법진의 주인일지도 몰라.”

“단장이 사슬로 발을 묶으면, 제가 바로 공격할게요.”

카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육체파가 아닌 마법사라면, 거리를 벌려 마법을 전개할 시간을 줘선 안 됐다. 은밀하게 마력을 끌어 올린 카델이 [화련]을 발사하고. 라이돈에게 주의를 빼앗긴 캐시를 붙드려던 순간.

“토토! 이 못생기고 짜증 나는 요정 좀 혼내 줘!”

캐시의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대지가 진동했다. 갑작스러운 진동에 [화련]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한 박자 늦게 자신을 향한 공격을 눈치챈 그가 손쓸 틈도 없이 빠른 속도로 하늘을 날았다.

“내가 쫓아갈게! 저 못생긴 마족을 죽여 버리겠어!”

캐시를 뒤쫓는 라이돈을 막을 새는 없었다. 극심한 진동은 중심을 잡는 일조차 어렵게 만들었다. 카델은 반의 옷자락을 붙든 채 간신히 두 발을 붙이고 섰다.

“대체 언제 멈추는 거야!”

“카델 경, 저길 보시오!”

속이 뒤집히는 진동 속에서 간신히 시선을 옮기자 보이는 것은.

“허……?”

숲의 사면을 가득 채우며 밀려드는 샛노란 파도. 끝을 가늠할 수 없는 너비와 하늘을 날지 않고선 절대 피할 수 없는 높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순간 머리가 새하얘질 만큼 거대한 파도가 사방을 포위한 채 그들을 덮치고 있었다.

“하이론 님, 장막을!”

“모두 최대한 몸을 낮추세요!”

하이론이 다급히 영창하며 아군을 두르는 장막을 생성하고. 카델 역시 얼음 장막 위로 바람 장막을 덧대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자, 잠깐……!”

거침없이 몰아친 파도가 장막을 덮쳤다. 시야를 샛노랗게 물들이는 파도에 카델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무의식적으로 움직인 시야 속, 자신과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하이론의 얼굴이 비쳤다.

“장막이…….”

“녹아내리고 있어요.”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를 따라, 장막이 녹아내리고 있음이 느껴졌다. 아무리 빠르게 장막을 보강해도, 마력을 아무리 불어넣어도 소용없었다. 두 마법사의 마력이 합쳐졌음에도 장막은 유지되지 못했다.

카델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투명한 얼음과 바람의 장막이 녹아내리며, 작은 구멍이 생겨났다. 넘쳐흐르는 액체가 기어이 구멍을 비집고 떨어지고.

단 한 방울. 구멍을 통해 떨어진 단 한 방울의 액체가 한 기사의 머리를 적셨다. 차가운 감각에 움찔 몸을 떨던 기사가 일순 표정을 굳혔다.

“대, 대대장님, 뭔가가 이상……!”

그가 소린을 향해 한 걸음 발을 뻗기가 무섭게. 멀쩡하던 육체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뭣……!”

어떠한 비명이나 전조도 없이, 허무하리만치 쉽사리 사라진 몸. 그의 위로는 단 한 방울의 액체가 떨어졌을 뿐이다. 충격적인 장면에 아군의 표정 위로 동요가 스쳤다.

“하이론 님! 더 강한 장막을 만들 순 없습니까?”

“지금 상태에선 불가능해요!”

한 방울을 맞았을 뿐인 기사가 녹아내렸다. 저 액체가 장막 안으로 몽땅 들이친다면, 모두가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는 안 봐도 뻔했다. 카델은 서둘러 쿤라의 힘을 끌어 장막에 덧대려 했다. 그러나.

“자, 장막이 무너진다!”

쿤라의 힘을 끌어오는 사이 바람 장막이 허물어지며, 간신히 버티던 얼음 장막에 큰 균열이 번졌다. 작은 구멍을 중심으로 한 균열은 빠르게 몸집을 불렸고, 장막은 걷잡을 수 없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단숨에 들어찬 액체가 폭포처럼 머리 위로 쏟아지고.

“단장……!”

반사적으로 자신을 감싸 안은 반의 품에서, 카델이 질끈 눈을 감았다.

그 짧은 찰나에 반과 자신의 위로 비늘 갑옷을 덧대었으나, 장막이 손상되는 감각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한발 늦어 버린 걸까. 설마 이렇게 녹아 버리는 걸까. 캐시를 쫓아갔던 라이돈은 무사한 걸까.

허탈함과 공포, 걱정이 뒤섞인 감정은, 뒤이어 들려오는 시끄러운 함성에 파묻혔다.

인간의 함성과 마물의 괴성이 마구잡이로 귓가를 때렸다. 그칠 기미가 없는 소음에 카델이 꾸물꾸물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자신을 꽉 끌어안은 반의 얼굴이었다.

반은 굳은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 좋지 못함에도 자신을 감싸던 반이 무사하다는 점에 안도감부터 들어찼다.

“반…….”

작은 부름에 반의 시선이 곧장 움직였다. 그는 카델의 머리를 한 번 꾹 끌어안고는, 천천히 놓아 주었다. 그러자 탁 트인 시야와 함께 뒤바뀐 풍경이 들어찼다.

하늘은 없다. 넓은 하늘이 자리해야 할 상공엔, 새까만 벽이 드리워 있었다. 마찬가지로 새까만 바닥에선 과할 정도로 윤기가 흘러, 조금만 움직여도 미끄러져 중심이 흔들렸다.

뒤바뀐 공간은 너무도 어두워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었지만, 그들이 있던 숲보다는 면적이 좁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중간중간 떠 있는 빛덩이 덕분이었다.

그 희미한 불빛 아래서, 그림자 진 윤곽이 사방을 누비며 바삐 움직였다. 한눈에 인간인지 마물인지를 알아보기는 힘들었다. 워낙 시야가 어둡기도 하고, 빠르게 이동하는 탓에 윤곽을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저 빛은 확실히 마력이야. 같이 있던 기사들도 이곳에 끌려온 건가? 기사 중에 빛 마력을 사용하는 마법사가 있던 것도 같고……. 어쨌든, 그 노란색 액체가 생각만큼 위협적인 건 아니었나 보군.’

저 빛덩이가 함께 있던 마법사들의 신호라면, 이쪽도 화답해 줄 필요가 있었다. 카델은 그들의 것보다 훨씬 커다란 불꽃을 높이 띄워 올렸다.

작은 빛덩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크기의 불꽃이 순식간에 주위를 밝히고. 좀 전보다 확연히 선명해진 풍경에, 카델과 반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 이게…….”

“벌레……?”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던 것은, 예상대로 인간과 마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 달려들어 싸우지 않았다. 다만 그들의 등에 달라붙은 거대한 벌레. 그 벌레를 어떻게든 떨쳐 내려 발버둥 치고 있었다.

충격에 굳어 있던 카델의 시선이 더듬더듬 움직였다. 얼핏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치는 벌레는, 덩치 큰 기사들의 상반신을 몽땅 뒤덮을 만큼 오동통하게 살이 올라 있었다.

노란색 몸체는 울퉁불퉁하게 부풀었고, 등에는 일정 간격을 둔 자그마한 뿔들이 일렬로 자라났다. 게다가 머리가 자리해야 할 위치에 거대한 입이 달려 있었다. 크게 벌어진 입은 인간과 마물의 머리통을 집어삼키려 안간힘을 썼다.

“……단장. 저 벌레의 입을 좀 보세요. 저거, 마법진이 변했던 모양이랑 똑같지 않아요?”

그다지 관찰하고 싶지 않았으나, 카델은 불쾌함을 무릅쓰고 조금 더 자세히 벌레를 들여다보았다. 그의 말대로 벌레의 아가리 속에는 마법진에서 봤던 것처럼 무수한 이빨이 자라나 있었고, 혓바닥도 보였다.

“……그렇네. 확실히 비슷해.”

“그 마법진은 이 공간과 연결돼 있던 걸까요?”

“그럴지도 몰라. 특수한 공간 안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벌레……인 걸지도.”

정확한 정체는 알 수 없어도, 저 벌레에게 접촉을 허락하면 안 된다는 것쯤은 확실했다. 카델은 눈에 보이는 기사들에게 닥치는 대로 장막을 둘러 주기 시작했다. 이미 벌레가 달라붙은 기사들이 상당수다. 끌려온 시간은 똑같을 텐데 벌써 벌레와 접촉했다니. 벌레가 더 많이 밀집한 장소라도 있는 것일까.

그리 생각하던 때였다. 아무 생각 없이 장막을 둘러 주다 기사 한 명의 얼굴을 확인한 카델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제리엘 경? 경이 왜 여기…….”

제리엘은 남쪽으로 이동하는 인원에 포함되어 있었다. 평소 라이돈을 마음에 들어 하던 그가 정신이 나가 이쪽을 졸졸 따라온 것이 아니라면,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인물이었다.

함께 카델을 발견한 제리엘이 등에 벌레를 붙인 채 허겁지겁 달려왔다.

“카, 카델 경! 이것 좀 떼어 주세요! 너무 징그럽고 따가운데, 뭘 해도 안 떨어집니다!”

제리엘이 가까워질수록 벌레의 형체가 선명해졌다.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소름에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친 카델을 대신해, 앞에 나선 반이 대검을 빼 들었다.

“더 이상 단장한테 접근하지 말고, 거기서 등 돌려요.”

“대, 대검으로 베려고요?”

“그럼 손으로 찢을까요?”

“조심해서 부드럽게 베어 주세요. 제 등에 닿지 않도…… 우와악!”

그다지 조심스럽지 않은 손길로 단숨에 벌레의 등을 베어 내자, 물기 가득한 소리와 함께 몸체가 터져 나갔다. 떼어지지 않는다는 것치고는 제법 간단한 제거였다.

그리 생각하며 아래를 내려 보았으나.

“젠장, 피해요!”

“으아아, 이게 뭡니까! 유충?”

벌레의 노란 체액 위로, 수십 마리의 유충이 꿈틀거렸다. 그 끔찍한 광경에 반사적으로 욕설을 내뱉은 카델이 발을 구르며 물러섰다. 반은 신발 밑창으로 유충을 밟아 죽이려 했으나, 녀석들은 재빠르게 흩어져 공격을 피했다.

“죽어, 죽어!”

대지 마력을 다루는 제리엘은 평평한 석판 같은 것을 만들어 쿵쿵 내리찍었지만, 몇 마리의 유충만 잡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흩어진 유충들은 다시금 경로를 틀어 제리엘과 반, 카델을 노리기 시작했다.

“징그러워……!”

통통하게 살이 오른 주제에 꿈틀거리는 속도가 제법 빨랐다. 카델은 사정없이 불꽃을 떨구며 치를 떨었고, 반은 마음처럼 죽지 않는 녀석들의 움직임에 짜증을 드러냈다. 제리엘은 곧 거품을 물 것처럼 유충들을 징그러워했는데, 다행히 셋의 인정사정없는 공격으로 대부분의 유충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후……. 괜찮아요, 단장?”

“응. 아무래도 큰 녀석을 죽이면 안에서 작은 녀석들이 나오고, 그 녀석들이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가는 모양이야. 함부로 죽이는 건 위험하겠어. 제리엘 경은 괜…….”

뒤늦게 제리엘의 안위를 확인하려던 카델이 멈칫했다. 흐릿한 어둠 속에서도 또렷이 드러난 그의 서글픈 표정 때문이었다. 그렁그렁 눈물을 매달은 제리엘이 흐느낌 섞인 목소리를 냈다.

“너, 너무 징그러웠어요. 지옥이에요, 이곳은…….”

“이제 괜찮으니까 울지 마요. 다 떼어 냈잖아요. 진정하시고, 일단 경이 왜 여기 있는지부터 말해 주시죠. 어쩌다 일행과 떨어지게 된 거예요?”

“예……? 떨어지다뇨? 두 분이야말로 낙오된 거 아니었어요?”

“네?”

“예?”

의미 없는 되묻기가 이어지며, 제리엘과 카델은 차차 상황 파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럼 혹시, 남쪽의 인원도 그 노란색 파도를…….”

“북쪽도요? 저희는 우연히 마법진 하나를 발견해서 그걸 지켜보는데, 갑자기 숲에 파도가 들이치지 뭡니까. 장막도 소용이 없었어요. 결국 시원하게 파도를 맞고 정신을 차려 보니 이 지옥이었고요.”

“고위 마족은요? 캐시라는 이름의 고위 마족은 보지 못한 겁니까?”

“고위 마족은 보지 못했어요.”

설마 남쪽이 먼저 공격을 받았던 것일까. 처음 등장했던 캐시는 분명 새로운 먹잇감을 ‘또’ 발견했다고 했다. 만약 몸을 숨긴 채 남쪽의 인원을 공격하고, 그 후 북쪽에 올라온 것이라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카델이 크게 소리쳤다.

“얘들아! 이 불꽃이 보인다면 여기로 모여!”

남쪽 인원에 포함되었던 부하들도 이곳에 있을 것이다. 불꽃을 보고도 단장의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수 있으니, 확실히 알려야 했다.

그렇게 몇 차례 더 부하들의 이름을 부르자.

“대장! 왜 여기 있는 거야?”

“하하, 단장님. 이것 좀 보세요.”

다급한 얼굴의 루멘과 제법 즐거워 보이는 가르엘이 등장했다. 루멘은 격한 싸움을 치른 듯 호흡이 거칠었으나, 가르엘은 아니었다. 카델은 그의 어깨에 달라붙은 벌레를 발견하곤 잔뜩 눈살을 찌푸렸다.

“너 어쩌다가 그걸……!”

“옆에 있던 기사한테 달라붙은 걸 떼 줬더니 여러 마리가 생겨나지 뭐예요. 정신 차려 보니 한 머리가 어깨에서 자라나고 있던데요. 보다 보니 정감 가네요. 곧 있으면 완전히 커서 입도 쩍쩍 벌릴 것 같고.”

“정감 같은 소리 하네! 징그러워, 빨리 떼 버려!”

“이게 참, 떼 주는 건 쉬운데 직접 떼기는 어렵더라고요. 잘 떨어지지도 않고, 공격도 안 먹혀요. 아무래도 달라붙은 대상이 직접 공격하는 건 불가능한 모양이에요.”

세상에 그런 끔찍한 벌레가 어디 있단 말인가. 카델은 가르엘을 걱정하면서도 직접 벌레를 떼어 주진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루멘이 짧게 혀를 차고는, 살짝 뽑힌 검을 납검했다.

벌레의 몸체를 뒤덮는 촘촘한 섬광이 잔상을 남기고. 순식간에 벌레의 몸체가 터져 나가며, 아래로 반 잘린 유충의 시체가 후드득 추락했다. 그 완벽한 처치를 지켜본 제리엘이 입을 틀어막으며 감탄했다.

“이야, 역시 루멘 경. 솜씨가 장난이 아니네요.”

루멘은 슬쩍 제 옆으로 붙어 오는 제리엘을 일별하곤 카델에게 말했다.

“북쪽도 그 노란색 액체를 맞은 건가? 전부 여기 끌려온 거야?”

“그렇게 된 것 같아. 피하기 힘든 규모였으니까. 그런데…….”

부하들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한 카델의 시선이 그들의 너머를 향했다. 굳은 표정으로 어딘가를 살피던 카델이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요젠은 어디 있어? 같이 이동했던 거 아니야?”

부하들이 모인 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요젠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카델은 작은 불덩이를 띄워 앞을 밝히며 조급함을 드러냈다.

“공간이 생각보다 넓어. 요젠만 멀리 떨어져 있을 수도 있어.”

처음엔 그리 넓지 않다고 여겼던 곳은, 불덩이를 띄울수록 그저 폭이 좁을 뿐, 끝도 없이 이어진 기다란 공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금씩 나아갈수록 바닥에 무수히 흩어진 유충들과 먹잇감을 노리는 거대 벌레, 익숙한 얼굴의 기사들,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마물의 모습이 보였다.

“대장의 말이 맞는 것 같네. 가르엘 경과 난 운이 좋아 근처에 있었던 모양이야.”

“저와의 만남을 운이 좋다고 표현해 주는 건가요? 루멘 경은 참 다정하다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그런 소리가 나옵니까?”

“전 긴장하면 이상한 말이 나오더라고요.”

걸음을 뗄 때마다 벌레들의 얇은 다리가 사각거리며 땅을 내딛는 소리가 번졌다. 그것들을 일일이 처리하며 나아가는 데는 상당한 에너지가 필요했다. 하지만 자리에 꼼짝 않고 서서 요젠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심란해하는 카델의 뒤에서, 집요하게 루멘의 근처를 맴돌던 제리엘이 말했다.

“위로 올라가서 아래를 살펴볼까요?”

“올라갈 만한 지대가 없는데요. 전부 평평해요.”

“그거야 만들면 되죠. 대지 마법사들의 장점이 뭐겠어요. 유리한 지형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 아니겠습니까.”

호기롭게 말한 그가 술식을 생성하기 위해 바닥에 무릎을 꿇으려 했다. 하지만 그새 주변을 둘러싼 유충 무리에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멈춰 서 버벅거렸다. 자연스럽게 닿는 도움의 눈길에, 한숨을 쉰 루멘이 유충들을 정리해 주었다.

“최대한 빨리 이 끔찍한 공간을 뜰 방법을 찾았으면 좋겠네요.”

간절한 영창과 함께 바닥으로 술식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루멘이 그에게 몰려드는 서른 마리의 벌레를 처치했을 무렵.

“……뭔가 이상한데요.”

완성된 술식 위로 마력을 불어넣던 제리엘이 눈살을 찌푸렸다. 카델이 다가가자, 그를 올려다본 제리엘이 손을 떼어 내며 말했다.

“이 바닥, 평범한 흙바닥이 아니에요.”

“뭐…… 그렇겠죠. 생긴 것부터 이상한 기름을 끼얹은 것처럼 불결한데.”

“아니요. 아무리 표면이 다른 물질로 덮여 있다 해도, 대지를 이루는 요소는 크게 다르지 않아요. 그러니 어떤 장소에서도 대지 마법사들이 지형을 바꿀 수 있는 거고요.”

“그럼 경의 말은…….”

“대지가 아니에요. 이건, 그러니까 꼭…….”

그러나 제리엘이 부가적인 설명을 꺼내려던 순간이었다.

콰아아아―

지면이 격심하게 요동치며, 어디선가 세찬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뭐지……?”

“뒤쪽이에요, 단장. 뒤에서 뭔가 밀려오고 있어요!”

“일단 앞으로 이동합시다!”

가르엘의 말을 따라 모두 앞으로 달려 나갔으나, 뜀박질을 이어 가기는 쉽지 않았다. 끊임없이 꿀렁거리는 바닥 때문이었다. 요동치는 바닥 위에서 내달리는 것은 웬만한 신체 능력으론 어려운 일이었고, 마법사인 카델과 제리엘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리 와요, 단장!”

반은 허둥거리는 카델을 낚아채 안아 들었다. 카델은 자연스럽게 반의 목을 휘감아 끌어안고는, 뒤편을 비추는 불덩이를 날렸다. 그러자 드러난 것은.

“노란 액체야! 우릴 이곳으로 보낸 그 이상한 액체!”

“저기 닿으면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되는 건가?”

“으음, 아무래도 아닌 것 같은데요. 저 마물들 좀 보세요.”

거의 울부짖으며 달려가던 제리엘의 뒷덜미를 낚아 어깨에 둘러멘 가르엘이 뒤편의 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 있는 것은 미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마물. 밀려들던 세찬 물줄기가 놈을 덮치고. 액체에 흠뻑 적셔진 마물은 온몸을 바둥거리며 끔찍한 고통을 호소했다.

놈의 머리털과 살가죽이 조금씩 녹아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더 큰 문제는 그런 마물을 먹잇감으로 삼은 벌레였다. 벌레는 마물이 정신을 못 차리고 버둥대는 사이, 커다란 아가리를 벌려 머리를 집어삼켰다.

벌레의 몸뚱이가 한계를 모르고 늘어나며, 마물의 몸을 통째로 쑤셔 넣었다. 그 잔인한 장면에 카델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봐도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것 같진 않아. 산처럼 닿으면 녹아내리는 건가? 왜 갑자기 성질이 바뀐 거지?’

이상한 것투성이었으나, 가장 큰 문제는 저 산성 물질이 언제까지 들이칠 것이냐였다.

‘제리엘 경은 이곳에서 새로운 지형을 만들 수 없어. 만약 저 액체가 끊임없이 흘러온다면 우리는 결국…….’

꼼짝없이 녹아내리거나, 그대로 벌레의 밥이 되어 버리리라. 끔찍한 상상을 마친 카델이 급히 앞쪽의 상황을 살폈다. 달려 나가는 와중에도 벌레들은 몰려들었으므로, 전방에 선 루멘이 최대한 놈들을 베어 넘기고 있었다.

카델은 근처에서 허둥거리는 기사들에겐 어서 도망가라는 외침을, 앞에서 걸리적거리는 적들에겐 불꽃을 날리며 안전지대를 찾았다. 하지만.

“대체 뭡니까, 여기? 꼭 기다란 굴 같잖아요.”

제리엘의 말대로, 공간은 깊고 긴 굴처럼 한없이 이어졌을 뿐. 비집고 들어갈 틈이나 물살을 피할 만한 경사로가 존재하지 않았다.

“단장, 꽉 잡아요. 바닥의 움직임이 점점 심해져요……!”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바닥은 서 있기조차 버거운 상태가 되어 갔으니. 카델은 반의 목을 단단히 끌어안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데요?”

이런 바닥에서는 속도가 나지 않는다. 점점 좁혀지는 액체와의 거리에 식은땀이 났다. 여기서 바람 마력으로 단원들을 밀어 준다고 한들, 중심 잡기가 힘들어지기만 할 것이었다.

‘일단 장막이라도 둘러 놔야…….’

이 기세라면 덮쳐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지금으로선 덮쳐진 후의 일을 대비하는 편이 나았다. 그리 생각하며 장막을 두르려던 순간이었다.

“여기까지.”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후방에서 달리던 반의 등 뒤로 검은 암기의 벽이 솟아올랐다.

“요젠?”

“그만 달리고 멈춰.”

난데없이 등장한 요젠은 선두에서 달리던 루멘의 앞으로도 벽을 세워 전진을 멈췄다. 단원들은 요젠의 등장에 놀라면서도, 순순히 그의 말을 따랐다. 제리엘은 여전히 두려운 모양이었지만, 가르엘에게 얹혀 가는 주제에 계속 달리라는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그렇게 정지한 단원들의 코앞까지 물살이 밀려들었으나. 정확히 요젠이 세운 암기의 벽 앞. 그곳이 경계선이라도 되듯, 미친 듯이 밀려들던 물살이 잠잠해졌다. 제자리에서 출렁거리던 액체는 곧 지면으로 흡수돼 자취를 감췄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델은 서둘러 반의 품에서 내려와 요젠에게로 달려갔다.

“요젠! 어디 있었던 거야? 너도 도망치던 중이었어? 다친 곳은?”

급히 어깨를 잡고 요젠의 상태를 살폈지만, 눈에 띄는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전혀 흐트러진 모습이 아닌지라, 꼭 어딘가에서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다 온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허겁지겁 자신을 살피는 카델의 앞머리를 가볍게 쓸어 준 요젠이 고개를 저었다.

“난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공간의 윤곽을 잡고 있었어.”

“공간의 윤곽?”

“여긴 거대한 벌레의 배 속이야.”

곧장 본론을 꺼내 든 요젠의 발언에, 모두의 시선이 한꺼번에 움직였다.

“벌레의 배 속이라고……?”

“우리가 지나쳐 왔던 숲속, 그 넓은 숲 전체가 하나의 벌레였어. 전투가 진행 중인 전장을 둥글게 감싼 모양새야. 그 안으로 진입하려는 생명체들을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우는 거지.”

“벌레……. 그 숲이 바로 벌레였다고…….”

“벌레의 몸체, 그러니까 숲길에 마법진이 있어. 그 마법진을 통해 사냥감을 끌어왔던 거야.”

“그건 우리도 봤어. 하지만 정작 우리가 끌려온 건 노란 파도를 맞은 직후였는데……. 이게 벌레의 배 속이라면, 그 액체는 위산 같은 거였나?”

여러 단서를 가지고 조금씩 아귀를 맞춰 가는 카델의 앞에서, 요젠이 말을 덧붙였다.

“밖에서 본 그 노란 파도는 일종의 마법이야. 벌레는 이 배 속에서만 제대로 된 위력을 낼 수 있으니, 외부에서 따로 마법을 사용해 안쪽으로 보내 버리는 거지. 설치된 마법진은 부가적인 덫인 거고. 혹시 누가 그 마법을 사용했는지 알아?”

“……대충 짐작 가는 녀석은 있어.”

“그 녀석이 다시 마법을 사용한다면, 배 속과 바깥을 잇는 통로가 생길 거야. 그 순간에 통로를 찾아 탈출해야 해. 그게 불가능하다면 이쪽에서 직접 통로를 만들어야 하고.”

그 파도가 마법이고, 모두가 그 마법으로 인해 강제 소환당한 것이라면. 요젠의 말대로 시전자의 마법을 이용해 탈출을 꾀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 방법엔 큰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단장. 밖에서 그 마족을 상대하고 있는 건 라이돈 아닌가요?”

과연 라이돈이 사라진 아군의 행방을 짐작하고, 그들의 탈출이 캐시의 손에 달렸음을 알아챌 수 있을까.

‘높은 확률로 캐시를 잡아 죽이려고 할 텐데.’

자신도 요젠을 통해 겨우 알아낸 탈출법을 라이돈이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캐시의 마법을 통해 탈출하는 방법은 실현 가능성이 너무도 낮다.

한숨을 삼킨 카델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여기서 가만히 있지 말고, 움직이면서 사람들을 모아 보자. 라이돈에게 모든 걸 맡길 순 없지.”

“카델을 어디로 데려갔어? 못난아, 대답해 봐. 응?”

“으아악! 얼음 쏘지 마! 위험하잖아!”

“그냥 널 죽여 버리면 답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히이익!”

어찌나 높이 날아 필사적으로 도망치던지. 캐시를 뒤쫓던 라이돈은 일행이 전부 파도에 잠긴 뒤에야 지상의 상황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저 물일 것이다. 장막으로 파도를 막았을 테니, 물이 빠지면 다시 모습을 드러내리라. 간절히 바라며 지켜보았으나, 환상처럼 일시에 사라진 물 너머에서. 인간들은 자취를 감췄다.

“캐시, 이 더럽게 못생긴 마족아, 대답해 보라니까? 내 카델을 어디로 데려갔어?”

“내가 말해 줄 것 같아? 날 죽이면 절대 찾아내지 못할 곳에 박아 뒀으니까, 알고 싶으면 얼음 그만 날려!”

“그만 맞고 싶으면 어서 말해.”

“날 계속 괴롭히면 토토가 인간들을 죽여 버릴지도 몰라! 아니, 이미 죽이는 중일걸?”

토토. 캐시는 계속해서 ‘토토’라는 이름을 언급하고 있었다. 라이돈은 공격하지 말라는 말을 깔끔하게 무시한 채, 재빠르게 비행하는 그의 사방으로 얼음 결정을 흩뿌렸다.

시야를 가리며 몰아치는 얼음 결정에 캐시가 몸을 웅크리며 비행의 궤도를 틀었으나.

“아악! 아파!”

오히려 얼음 결정은 그의 몸에 달라붙어 피부 속을 파고들었다. 동상에 걸린 것처럼 빨갛게 얼어붙기 시작하는 손발에 캐시가 경악하며 라이돈을 돌아보았다.

“인간들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거야?”

캐시의 날갯짓은 눈에 띄게 느려졌고, 얼음 결정은 착실하게 피부를 파고들며 한기를 내뿜었다. 라이돈은 겁에 질린 캐시의 앞으로 단숨에 거리를 좁혀 들었다.

조롱하듯 그의 앞에 가까이 얼굴을 내민 라이돈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눈을 번뜩였다.

“널 죽이면 절대 알아낼 수 없는 곳에 카델을 숨겼어?”

“그, 그래! 그러니까 당장…….”

“그럼 죽이지만 않으면 되겠네. 그렇지?”

“……뭐?”

번들거리는 붉은 눈동자 위로 짙은 광기가 아른거렸다. 지독한 분노와 뒤섞인 광기는, 겁 많은 고위 마족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나, 나 떨어질 것 같아.”

동등하던 눈높이에 조금씩 격차가 벌어졌다. 캐시는 필사적으로 날개를 움직였으나, 얼음 결정이 덕지덕지 붙은 날개는 한 번 펄럭이는 것조차 버거웠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은 그가 라이돈의 옷자락을 움켜쥐려 했지만, 라이돈은 그 손길을 가볍게 피했다. 무감한 얼굴이 추락의 공포에 휩싸인 캐시의 모습을 응시했다.

“아니야, 그냥 죽일래. 널 죽이면 뭐라도 방법이 생기겠지.”

“아, 안 돼. 난 죽으면 안 돼. 날 죽이면 안 된다고!”

“으응, 싫어. 널 살리면 내 기분이 더러워져. 그건 너무 끔찍한 일이잖아.”

카델의 행방을 알 수 없는 시간이 길어지고, 그 원인이 눈앞에서 떠들어 대는 말들이 길어질수록. 라이돈의 인내심은 빠르게 바닥을 드러냈다. 라이돈은 차근차근 내려가는 캐시의 정수리를 지그시 밟아 무게를 실었다.

“이거 치워! 당장!”

“우리 높이도 올라왔다. 이대로 떨어지면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겠는데.”

“내가 죽으면 그 인간들도 끝이라고! 진짜야!”

“네 몸이 터져 버리면, 난 그 위에 침을 뱉을 거야. 그럼 기분이 나아지겠지?”

“이 미친 요정이……!”

라이돈은 진심으로 캐시를 죽일 셈이었고, 그의 농담 같은 살의는 분명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날개가 완전히 얼어붙고, 추락에 가속도가 붙고 있음에도. 캐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는 사역마인 ‘토토’ 없이는 전투력이 전무한 고위 마족이었다. 그랬기에 비행이라는 이점을 활용해 언제나 가장 먼 곳에서 토토의 배 속으로 적들을 실어 나르곤 했다. 그의 주된 적인 인간은 비행이 불가능하니까.

하지만 현재, 그의 상대는 요정이었다. 한 번도 요정과의 대면을 상상해 본 적 없던 그에게, 이토록 집요하고 앞뒤 없는 요정을 만난 것은 최악의 불행이라 할 수 있었다.

“빨리 떨어져, 못난이.”

정수리를 짓누르는 힘이 강해지고, 몸을 잡아당기는 중력이 실감 날수록. 캐시의 머릿속에선 지독한 생존 본능이 정신없이 들어찼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지면은 그의 공포심을 한도 끝도 없이 증폭시켰다.

결국 그의 한계는 자신의 낙하지점에 자리한 뾰족한 돌덩이를 확인한 시점이었다.

“사, 살려 줘! 살려만 주면 인간을 빼낼 방법을 알려 줄 테니까!”

“거짓말.”

“진짜야! 진짜라고! 으아아악!”

이제 곧 끝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지면은 언제든 그를 납작하게 찌그러뜨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캐시는 비명을 지르며 발작처럼 발버둥 쳤고, 그런 캐시의 머리를 시큰둥하게 내리누르던 라이돈은.

“빨리 말할 것이지. 괜히 시간만 버렸잖아.”

캐시의 몸이 지면과 맞닿기 직전. 그의 뒷덜미를 낚아채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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