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0화 (43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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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못난이.”

“……시비 걸지 마.”

“처음이랑 다르게 고분고분해졌네? 훨씬 잘 어울린다. 이대로 죽을 때까지 조용히 있어 줘.”

“시비 걸지 말라니까!”

“아하하! 성질내지 마, 공격할 뻔했잖아.”

카델의 신호를 따라 정지 중인 캐시와 라이돈. 라이돈은 캐시의 머리 위에 걸터앉아 그의 성질을 긁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랬다. 재미있는 미로 탐험에서도 제외당하고, 카델도 아닌 이따위 악취 나는 마족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어야 한다. 시비라도 걸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씩씩대는 캐시의 반응에 한결 기분이 나아진 라이돈이 슬쩍 아래를 내려 보았다. 짙은 안개에 가려져 미로를 누비는 인간들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아주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어렴풋이 그림자가 비치는 정도였다.

그 흐린 그림자 속에서 카델의 위치를 가늠하던 라이돈이 일순 인상을 구겼다.

“왜 이렇게 몸을 흔들어 대는 거야? 어지럽잖아.”

“……갑자기 걱정돼서.”

“흐응, 설마 우리 자기를 걱정하는 건 아니지? 함부로 걱정하지 마. 죽여 버릴 거야.”

“…….”

웃음기가 섞였으나, 그다지 농담처럼 들리진 않았다. 곧장 입을 다문 캐시의 머리통에 묵직한 발길질을 날린 라이돈이 짜증스레 물었다.

“뭐가 걱정인데?”

“……난 성에 와 볼 일도 거의 없었고, 있다고 해도 미로는 그냥 날아서 넘어가 버려. 그래서 미로에 대해 자세히 생각해 본 적이 없거든. 몇 번 들여다본 적은 있지만, 보다시피 안개 때문에 내부가 잘 안 보이잖아.”

“결론만 말해, 못난이.”

손톱을 잘근거리며 초조함을 드러내던 캐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미로에서 탈출했던 어떤 마족이, ‘하마터면 잡아먹힐 뻔했다’라고 말했던 걸 들은 적이 있어.”

“뭐? 잡아먹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아마 그랬던 것 같은…….”

캐시가 시원하게 확답하지 않자, 단숨에 인간형으로 변한 라이돈이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코앞으로 다가온 적안이 흉흉하게 번뜩였다.

“제대로 말해. 세상엔 죽는 것보다 괴로운 일이 많아.”

“아, 아니, 난……! 마, 맞아! 분명히 그런 말을 들었어. 잡아먹힐 뻔했다고! 하지만 미로를 빠져나온 마족들이 전부 같은 말을 했던 건 아니고, 정말 딱 한 명만 그런 소리를…….”

거칠게 멱살을 놓은 라이돈이 이어진 밧줄을 따라 망설임 없이 하강했다. 그에 캐시가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라이돈을 따라가야 할지, 자리를 지켜야 할지 판단을 내리지 못한 탓이었다.

그런 캐시의 앞에 라이돈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불쑥 솟구친 라이돈에 캐시가 간신히 비명을 집어삼키고.

“뭐 하고 있어? 너도 따라와.”

다시 캐시의 멱살을 잡아챈 라이돈이 그를 끌고 카델을 찾아 나섰다.

“미로가 침입자를 잡아먹어?”

길을 안내해야 할 둘이 아래로 내려온 이유를 물을 새도 없었다. 카델의 얼굴을 보자마자 크게 안도한 라이돈이 전한 정보는, 상당히 비현실적인 이야기였다.

“미로가 어떻게 침입자를 잡아먹는데? 이건 그냥 벽이잖아. 아니면 이 미로 자체가 마족이라도 된다는 소리야?”

“그건 나도 몰라. 이 못난이가 그렇게 말했는걸.”

“……설명해 봐, 캐시.”

라이돈이 눈짓하자, 캐시가 흠칫거리며 앞으로 나왔다. 그는 카델의 빤한 시선에 신중하게 말을 고르는 듯하더니, 이내 체념한 것처럼 입을 열었다.

“저 요정이 협박해서 그렇게 말한 것뿐이야. 이 미로를 건너왔던 어떤 마족이 ‘하마터면 잡아먹힐 뻔했다’라고 말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몰라. 그런 소릴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

침입자를 잡아먹는 미로? 그딴 게 사실이든 아니든, 카델은 당장 돌아오지 않는 요젠의 신변이 걱정될 뿐이었다. 제법 시간이 지났음에도 고작 한 명인 적을 처치하지 못했단 말인가. 만약 그가 돌아오지 않는 이유가 이 미로와 관련 있는 것이라면.

“차분하게 잘 생각해 봐, 캐시. 네 가물가물한 기억이 지금의 우리에겐 중요한 정보가 될 수 있거든.”

억지로 끌어 올린 입꼬리가 경련하듯 떨렸다. 카델은 눈앞의 캐시를 사정없이 흔들어 버리고 싶은 것을 꾹 인내하고, 이 빌어먹을 고위 마족이 겁을 먹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했다.

그런 카델의 얼굴을 한참 힐끔거리던 캐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실 나는 마족들한테 별 관심이 없어. 미로 위를 날아갔을 때도 성을 구경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뜨기만 했으니까.”

“…….”

“확실하지 않은 정보는 네 혼란만 부추기는 거잖아? 인간의 편에 서 있는 이상 신뢰를 잃을 만한 짓은 하면 안 되니까. 그러니까 함부로 장담하긴 어렵지만…….”

쓸데없는 서두를 한 마디만 더 덧붙인다면 이 덥수룩한 머리 위로 불덩이를 떨어뜨리리라. 가까스로 살기를 억누른 카델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반응에 용기를 얻은 듯, 짧게 숨을 들이쉰 캐시가 말을 이었다.

“미로의 출구엔 마족들이 떼로 몰려 있을 때가 많았어. 꼭 타이밍을 재다 한 번에 이동한 것처럼. 하지만 ‘잡아먹힐 뻔했다’라고 말한 그 마족은…… 혼자였어. 응. 그래서 기억에 어렴풋이라도 남았던 것 같아.”

“…….”

“도움이…… 됐어?”

캐시는 꼭 칭찬을 바라는 아이처럼 눈을 맞춰 오며 눈치를 살폈으나, 카델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은 억지웃음이 전부였다.

“무슨 일이오, 카델 경. 앞에서 계속 멈춰 있다간…….”

계속된 정체에 이상을 느끼고 빠져나온 엑토가 작게 인상을 구겼다. 아래로 내려온 캐시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에 캐시가 주춤거리며 카델의 뒤로 숨자, 카델이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잠시만 자리를 맡아 주십쇼, 엑토 경.”

“그게 무슨 소리요?”

“설명은 제 부하들이 해 줄 겁니다. 잠깐이면 돼요.”

급히 말한 카델이 빠르게 밧줄을 풀곤,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요젠을 찾으러 간다는 것을 눈치챈 단원들 사이로 시선이 오가고. 곧 가르엘이 그의 뒤를 따랐다.

“단장님! 아무리 근처라도 혼자는 위험합니다!”

카델은 요젠의 흔적을 찾아 거의 뛰듯이 나아갔다. 금세 거리를 좁힌 가르엘이 그의 어깨를 잡아채자, 잔뜩 굳은 표정이 드러났다.

“뭉쳐 있지 않고 혼자 이동하는 침입자를 잡아먹는 걸까? 요젠이 발견했다던 적도 한 명이었어. 움직이지도 않고, 그 자리에 계속 멈춰 있었대. 어쩌면 잡아먹히는 중이었을지도 몰라. 그걸 찾으러 갔던 요젠도…… 혼자였으니까. 위험한 상황일지도 모른다고.”

“그런 생각을 했으면 누구라도 데리고 갔어야죠. 단장님까지 잡아먹히고 싶은 거예요?”

“……어떡하지, 가르엘? 만약 요젠이, 요젠이…….”

미로에 잡아먹혔다면 어떻게 빼내야 하는가? 애초에 미로는 어떤 식으로 침입자를 잡아먹는 것일까?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면서도, 머릿속은 복잡하게 뒤엉키기만 했다. 가르엘은 연신 불안해하는 카델의 손목을 꽉 움켜쥐곤 단호하게 말했다.

“요젠 경이에요, 단장님. 만약 무슨 일을 당했다 해도, 어떻게든 이겨 내고 나올 겁니다.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알잖아요.”

단순한 위로 같겠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요젠은 혼자 마계에 떨어진대도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 만큼 생존력이 강한 인간이다. 이곳에 얼마나 많은 함정이 깔려 있든. 요젠이라면 절대 걸려들지 않을 것이다.

움켜쥔 손목에 힘이 들어간다 싶더니, 이내 맥없이 풀어졌다.

“……알아. 걱정이 필요 없을 만큼 강한 남자라는 건.”

그럼에도 걱정이 되는 것은, 요젠 역시 평범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요젠을 믿고 그를 걱정하지 않는대도, 자신만큼은 걱정해야 했다. 자신은 그가 가진 고독과 쓸쓸함, 강해져야만 했던 이유를 알고 있는 유일한 인간. 요젠에게도 약한 순간이, 방심하는 때가 있다는 것을 안다.

“다 알고 있으면 이렇게 막무가내로 앞서가지 말고, 제 옆에서…….”

말을 잇던 가르엘이 주춤하며 멈춰 섰다. 그의 시선이 맞은편의 어딘가를 향했다. 카델 역시 가르엘과 같은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숨까지 멈춘 채 그것을 바라보던 카델은, 이내 가르엘에게 잡힌 손목을 거칠게 뿌리치며 달려갔다.

“안 돼…….”

미로의 벽 앞.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그가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움켜쥐었다. 하얀 붕대였다. 요젠의 눈을 가리고 있던 붕대.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깨끗한 천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요젠 경의 붕대가 왜…….”

가르엘은 카델의 곁에서 신중하게 주위를 살폈다. 주변으로 꺾어지는 길목은 많지만, 그중 어느 곳에도 요젠의 흔적은 남지 않았다.

정말 요젠이 미로에 잡아먹히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가면 속의 눈빛에서 당혹감이 아른거렸다. 그럴 리가 없다며 마음을 다잡는 가르엘의 귓가로, 카델의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페알르 섬에서 너희가 단체로 사라졌을 때. 그때도 요젠의 붕대로 너희가 방울에 갇혔다는 걸 알 수 있었어. 방울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직전에, 붕대를 풀어서 신호를 보낸 거야.”

“……단장님.”

“요젠이 잡아먹혔어.”

붕대를 움켜쥔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가며, 둥근 손톱이 부드러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혼자 보내면 안 됐어. 누구라도 붙였어야 했는데. 요젠이 아무리 괜찮다고 거절했어도, 걘 원래 혼자가 익숙한 애니까. 내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자신 때문에 요젠이 위험에 노출된 것이다. 요젠이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미로에 잡아먹혔다면 그를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 조금도 감이 잡히지 않아 아득하기만 했다.

망연자실한 카델의 앞으로 가르엘이 손을 뻗었다.

“일어나요. 돌아가서 다 같이 방법을 찾아보죠.”

“……안 돼.”

카델은 가르엘의 손을 바라보기만 할 뿐, 그의 손을 맞잡지는 않았다. 거절의 말에 반사적으로 미간을 구긴 가르엘에게, 카델이 말했다.

“요젠을 찾는 동안 모두가 멈춰 있으면 곤란해. 뒤쪽의 동맹군도 곧 거리를 좁힐 테니까, 빨리 미로를 빠져나가야지. 이런 상황에서 기사 한 명을 찾겠다고 모두가 나서 주지도 않을 거고.”

“그럼 대체…….”

“내가 캐시를 데리고 요젠을 찾을 동안, 너희는 라이돈과 함께 미로를 빠져나가.”

“그 고위 마족과 단둘이 미로에 남겠다고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단장님. 차라리 단원 중 한 명을 데려가요. 제가 싫다면 다른 누구라도…….”

“30분 안에 돌아갈게. ……그 안엔 돌아올 거야.”

카델의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 그곳에 자리한 것은 착실하게 줄어드는 카운트다운. 요젠을 되찾는 시간이 늦어진다면 요젠과 하이론, 둘 모두가 위험해질 것이다. 그러니 고위 마족인 캐시의 도움을 빌려 최대한 빨리 이 난관을 헤쳐 가야 했다.

결정한 카델이 미로의 벽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 마. 그리고 만약 내가 30분 안에 돌아오지 못한다면, 너는 동료들과 함께 하이론 님을…….”

말을 잇던 카델의 몸이 기울며, 카델을 바라보던 가르엘의 표정으로 경악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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