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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고마워요, 카델. 덕분에 예상보다 빨리 파우르를 잡을 수 있었어요.”
얼어붙은 파우르의 머리통을 내던진 하이론이 미소 지었다. 카델은 그런 하이론을 마주 보다, 일순 크게 비틀거렸다. 놀란 하이론이 손을 뻗었으나, 그보다 먼저 등장한 팔이 카델을 감싸 안았다.
“괜찮아, 카델?”
“요젠…….”
“기술이 끝났어. 더 오래 유지하고 싶었지만…… 아직은 이게 한계인가 봐.”
[불사의 맹언]이 종료되며, 요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몽롱한 듯 비틀거리는 카델을 지탱한 채 제 몸의 기운을 살폈다. 제법 많은 양의 암기를 사용한 탓에 몸이 쇠약해진 것이 느껴졌으나, 잠시 기운을 정돈한다면 무리 없이 전투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장소가 마계만 아니었대도 훨씬 나은 상태였을 텐데.
아쉬움을 드러내는 요젠에게, 겨우 현기증을 떨친 카델이 말했다.
“계속 싸울 수 있다는 걸로 만족해. 네 기술 덕에 수월하게 적들을 몰아세울 수 있었으니까. 이젠 이 기세를 잇는 것만 남았어.”
나머지 동맹군이 도착하는 동안 선두에서 적들을 압박하고, 가장 거슬리는 고위 마족을 처치하는 데 성공했다. 실로 순탄한 시작이었다. 이 정도의 여유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이어질 계획에 전혀 대비할 수 없었을 테니. 요젠의 각성 타이밍은 가히 완벽하다고 볼 수 있었다.
‘파우르의 매혹에 단원이 두 명이나 당했을 줄은 몰랐지만…….’
나비오라를 해치운 뒤, 뒤늦게 살핀 전장에서 반과 라이돈을 발견했을 때. 카델은 그야말로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기분이었다.
파우르의 힘은 커다란 위험 요소 중 하나였으나, 그 많은 기사 중 자신의 단원들이 당할 확률은 지극히 낮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매혹이 그렇게 쉽게 걸리는 거였냐고. 나 좋다던 놈들이 금세 헤롱헤롱해져서는…….’
하필 평소 넘치도록 애정 표현을 해 대던 두 명이다. 그런 녀석들이 풀린 눈으로 전장을 활보하는 꼴을 보니, 심각한 와중에도 복장이 뒤집혔다. 카델은 저 멀리 보이는 반을 흘기며 눈살을 찌푸렸다.
라이돈의 폭주는 하이론이 수를 썼다고 했고, 반의 폭주는 마밀이 통제한 듯했다. 잠시 반 옆의 마밀을 바라보던 카델이 하이론을 향해 말했다.
“금방 돌아올게요, 하이론 님. 같이 라이돈을 찾으러 가죠.”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요. 환혹술은 풀어 뒀으니, 라이돈도 금방…….”
“잠깐이면 돼요.”
하이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카델은 무언가 더 말하려는 하이론을 뒤로한 채 마밀에게로 달려갔다.
“카델의 부하라는 놈이 정신머리 하나 못 챙겨서 그새 아군을 공격해? 내가 아니었다면 몇 명의 목숨이 달아났을지, 예상이나 가나?”
“……죄송합니다.”
“사과는 필요 없네! 지금이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라는 말이지 않나!”
마밀의 호통 앞에서 한껏 작아진 반이 머리를 숙였다. 다른 이의 말이었다면 가볍게 무시한 채 스스로의 분노에 집중했을 테지만. 상대는 카델의 스승인 마밀이다. 카델이 그를 부모처럼 의지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마밀에게 듬직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건만. 하필 이런 추태를 보인 것이 원통하기만 했다.
그렇게 좌절하는 반과 마밀의 앞으로, 카델이 다가왔다.
“마밀 님!”
“그 기묘한 마법은 유통 기한이 끝난 모양이지?”
“네. 마법이 아니라 제 단원의 기술이었지만요. 어쨌든, 전 지금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해요.”
“여기서 자리를 비운단 말이냐? 적룡의 기운을 끌어오려는 거라면 시기상조다. 아직은 밀어붙여야 할…….”
“아뇨. 하이론 님과 준비할 기술이 있어서요.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금방 돌아올 테니, 그때까지 제 빈자리를 채워 주세요. 부하들도 맡아 주시고요!”
쏟아지는 요구 사항에 마밀의 표정에 황당함이 떠올랐다. 지금이 그런 부탁을 할 때인가. 그런데도 카델은 이미 결정을 마친 듯 단호한 모습을 보였다. 자신의 제자가 상황 파악 못 하고 날뛰어 댈 인물은 아니기도 하고.
무어라 더 말을 얹으려던 마밀이 짜증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그대로 뒤를 돌아 떠나려던 카델은, 마음을 고쳐먹은 듯 멈춰 서 반에게 시선을 두었다.
“지금까지 네 취향은 나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그냥 기분 좋으라고 한 소리였나 봐? 그 마족 생긴 게 나랑 아주 딴판이더라고.”
“다, 단장……!”
카델의 심술에 금세 사색이 된 반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기술을 유지하는 중에는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어서, 저한테 그런 정신 공격이 날아들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것뿐이거든요! 어디 그런 마족이랑 단장을 비교해요, 말도 안 돼요!”
반은 그대로 자신을 스쳐 가려는 카델에게 빠른 속도로 제 진심을 전했다. 그에 피식 웃은 카델이 반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렸다.
“알았으니까, 열 내지 말고 나 없는 동안 제대로 싸워. 난 라이돈을 데리고 돌아올게.”
가능하다면 조금만 더 반을 놀려 주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남은 시간이 빠듯하다. 시스템 창을 일별한 카델이 서둘러 하이론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제거까지 남은 시간: 0시간 07분 06초」
“라이돈!”
하이론의 안내를 따라 나아간 곳. 캐시를 잡았거나, 혹은 이미 놓친 채 방황하는 중이리라 생각했던 라이돈은, 미로의 파편 위에 쓰러져 있었다. 서둘러 달려간 두 남자가 라이돈의 상태를 살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식을 되찾은 라이돈이 눈을 떴다.
“괜찮은 거니, 라이돈?”
“다친 곳은 없어? 왜 여기 쓰러져 있는 거야!”
그들의 다급한 걱정 속에서 라이돈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꼭 긴 꿈을 꾸고 온 것처럼 몽롱한 얼굴을 문지르던 그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뭐야……? 나 왜 여기 있어?”
“그건 우리가 묻고 싶은 얘기거든. ……다행히 다친 곳은 없는 것 같네.”
파우르의 매혹이 풀리며 일시적으로 정신을 잃었던 걸까. 하지만 같은 상황이었던 반은 파우르가 쓰러짐과 동시에 정신을 차렸다. 본인이 정확히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는 기억하지 못해도, 스스로 매혹에 걸렸었다는 자각은 있었고.
카델의 부축을 받고 일어난 라이돈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에 맞고 튕겨 나간 것 같았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해.”
“맞고 튕겨 나가? 네가 쫓던 건 캐시였을 텐데. 캐시가 널 공격하기라도 했단 거야?”
“흐음, 모르겠어. 이상한 마족의 술법에 걸려들다니, 기분 나빠서 더 생각하고 싶지도 않네!”
자신이 왜 하찮은 마족의 정신 교란에 걸렸는지 모르겠다며 투덜거리는 라이돈의 옆. 미로의 파편을 지르밟은 하이론이 신중하게 주위를 돌아보았다.
“캐시가 보이지 않아요. 보아하니 라이돈에게서 무사히 도망친 듯한데……. 어딘가에 숨어 있나 보군요.”
라이돈에게 환혹술을 걸어 자신과 캐시의 모습을 바꿨을 때도, 하이론은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라이돈의 추격 속도는 상당하다. 비행에도 탁월한 재능이 있는 요정이었으니. 캐시가 완벽하게 도망칠 수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캐시가 다치게 된대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캐시의 안위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작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용케 살아남은 캐시를 대견하게 여겨야 할지. 애매하다는 듯 미간을 좁힌 하이론에게, 카델이 말했다.
“여기서 캐시가 죽는 건 곤란해요. 성에 들어가 본 적도 있다고 했으니, 이후에도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멀리 도망가지는 못했을 테니 함께 찾아보죠.”
곧 하이론에게 위험이 닥칠 것이다.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그의 곁을 지킬 셈이었으니, 오히려 좋은 변명거리가 생겼다.
“그럼 나도 같이 갈래!”
“아니, 라이돈. 넌 돌아가서 동료들을 지켜 줘.”
“나만 빼두고 둘이 시간을 보내겠다고? 나 없어도 걔네들은 잘 싸우거든!”
라이돈은 평소처럼 고집을 부리려 했으나, 이번만큼은 넘어가 줄 생각이 없었다. 라이돈을 똑바로 마주 본 카델이 표정을 굳혔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단호한 시선.
라이돈이 함께 있다면 정체 모를 위협 속에서 하이론을 지키는 일은 한결 수월해질 것이다. 하지만 라이돈까지 시스템의 술수에 휘말리도록 놔두고 싶지 않았다. 쿤라가 어떻게든 일을 해결해 줄 테니, 굳이 라이돈을 끌어들일 필요도 없었고.
차갑기 짝이 없는 카델의 태도에 라이돈은 결국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서운함을 그대로 드러낸 아들의 모습에, 옅은 미소를 머금은 하이론이 말했다.
“걱정 말렴, 라이돈. 카델을 오래 붙들어 두진 않을 거란다. 그때까지 다치지 말고 신중하게 적들을 상대하렴.”
“……네.”
마지막까지 뜸을 들이던 라이돈이 미련을 떨치듯 날아오르고. 카델은 고작 5분 남짓이 남은 카운트다운을 일별하며 하이론의 옆에 섰다.
“미로가 무너지면서 벽이 겹겹이 쌓였어요.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갔을 수도 있죠. 몸집이 큰 편이 아니라 찾기가 힘드네요.”
“근처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면 진즉에 라이돈이 정신을 차렸다는 걸 알아챘을 테죠. 살려 달라면서 가장 먼저 달려왔을 거예요. 그러지 않았다는 건, 이쪽이 보이지 않을 만큼 먼 곳에 숨어 있다는 얘기가 되고요.”
“어쩌면 다른 고위 마족에게 잡혀갔을 수도 있어요. 라이돈이 뭔가에 부딪힌 뒤에 정신을 잃었다고 했으니……. 하지만 그렇다기엔 정신을 잃은 라이돈은 가만히 두고 캐시만 데려간 부분이 걸리네요.”
밀린 일이 산더미 같은 와중에 캐시 하나를 찾자고 시간을 낭비할 생각은 없다. 카델은 대화를 이어 가며 하이론에게 위협이 될 만한 요소를 찾아 눈을 번뜩였다. 캐시의 행방을 추측하면서도, 정작 진심으로 그를 찾을 마음은 없었다.
그런 카델의 곁에서, 차분히 캐시를 찾던 하이론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머물렀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미로의 벽 너머.
은밀하게 몸을 숨긴 캐시가 가슴을 짚은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하이론의 시선이 느껴진 듯, 휙 고개를 돌린 캐시의 눈빛이 작게 흔들렸다.
“이리 나오렴, 캐시. 예상대로 무사히 잘 도망친 모양이구나.”
“…….”
“화가 난 거니? 미안하구나. 하지만 라이돈에게 걸린 마법을 풀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이해해 주렴.”
하이론을 따라 캐시에게 접근하면서도, 카델은 사위를 훑으며 경계심을 거두지 않았다. 근처에 특별히 보이는 고위 마족은 없다. 그들의 목표는 인간들이 성에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것. 정원의 후방인 미로에 있는 한, 고위 마족들의 시선을 끌 일은 적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오래 머무를 순 없어. 대체 시스템은 어떤 식으로 하이론 님을 위협할 생각이지.’
서서히 마력을 끌어 올리며, 언제든 공격할 태세를 마쳤다. 보이는 적이 없음을 확인한 카델이 슬쩍 시선을 옮겨 캐시를 보았다. 캐시는 자신을 찾아온 두 남자의 앞에서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잔뜩 움츠러든 몸과 눈치를 살피는 표정. 본인을 미끼로 쓴 데에 불같이 화를 낼 줄 알았건만. 캐시는 아무 말 없이 하이론과 카델을 번갈아 살피기만 했다.
“다친 곳은 없나 보구나. 바로 전장으로 돌아가야 해. 옆에 잘 붙어만 있는다면 최대한 안전하게 보호해 주마. 자, 이리 오렴.”
“시, 싫어.”
캐시는 떨리는 목소리로 제안을 거절했다. 예상 밖의 반응에 하이론은 물론 카델 또한 대번에 표정을 굳혔다. 하이론에게 배신감을 느껴 반항하는 걸까? 그럴 리는 없다. 캐시는 생존에 대한 욕구가 대단한 마족이었고, 현 상황에서 반항심을 드러낸다는 건 제 목숨을 내놓는 일이나 다름없었으니.
‘……설마. 캐시가 범인인 건가? 시스템이 캐시를 통해서 하이론 님을 위협…….’
잠시 날을 세웠던 카델이 금세 고개를 저었다. 캐시는 아무런 위협이 될 수 없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무리해서라도 데려온 것이었고. 게다가 캐시의 몸속에는 언제든 그의 몸을 찢어발길 요젠의 암기가 심겨 있었다. 만약 캐시가 숨겨 둔 힘을 발휘한대도, 언제든 제압이 가능하다는 소리였다.
카델은 입을 다문 하이론을 대신해 캐시의 앞에 섰다.
“싫은 이유를 알려 줘. 여기에 혼자 숨어 있어 봤자 고위 마족의 눈에 띄는 건 시간문제야. 지금 당장은 시선이 앞에 몰려 있어서 이곳이 안전해 보일지 몰라도…….”
“난 너희를 이곳, 성의 정원까지 안내했어. 내 동족들의 앞까지 데려왔다고. 그럼 내 할 일은 끝난 거야. 더 이상 명령을 따라야 할 이유는 없어.”
“음, 정확히 말하면 네 임무는 우리를 성까지 안내하는 거였지. 아직 할 일이 끝난 것 같진 않은데.”
“네깟 놈이 지껄이는 임무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버럭 소리를 지른 캐시가 되레 제 호통에 놀란 듯 한 걸음 물러섰다. 싸늘하게 식은 카델의 눈을 응시하던 그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주춤하던 표정은 다시금 표독스럽게 얼어붙었다.
“너흰 절대 마계의 해방을 저지할 수 없어. 절대로.”
“……뭔가가 있구나, 캐시. 뭘 숨기고 있는 거야?”
“내가 네 입바른 말에 넘어갔다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야. 안타깝게 됐네. 난 토토와 형제들을 죽인 인간을 절대 용서하지 않아. 내가 만만했지? 나약하고, 지켜 줄 대상도 없고, 살고 싶다며 울어 대기나 하니까. 갖고 놀기 좋은 장난감처럼 보였을 거야.”
“캐시, 다시 잘 생각해 봐. 살고 싶다는 네 말이 진심이었다면, 내 쪽에 붙는 편이 훨씬 나을 거야. 유혹에 흔들리지 마.”
“유혹? 하! 그래, 처음엔 나도 망설였어. 부끄럽지만 그게 사실이야. 하지만 그 요정…… 그 망할 요정의 말이 거짓이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너희는 다시 내 적이 됐다고!”
위험한 것은 캐시가 아니다. 겁에 질려 울어 대기만 하던 캐시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준 존재. 분명 그 존재가 하이론을 위협할 진정한 적.
다급해진 카델이 어떻게든 캐시의 입에서 정보를 캐내려 했으나.
“카델!”
뒤편에 있던 하이론의 외침과 함께, 강력한 기운의 파동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뒤를 돈 카델의 눈 안으로 들어찬 것은.
“신시……?”
하이론이 해치웠다 믿어 의심치 않던 솔라비스의 장녀. 신시 솔라비스. 양팔이 사라진 그녀는 하이론의 뒤에서 카델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팔을 이루던 기운은 하이론을 휘감은 채 그를 구속했다.
카델을 향한 시선을 고정한 채, 하이론의 뒤로 바짝 몸을 붙인 신시가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더는 내 가족을 해치게 놔두지 않아. 내 모든 걸 걸어서라도 널 죽이겠어.”
대체 어떻게. 어떻게 신시가 살아남아 마계에까지 발을 들인 것인가. 황당한 의문을 대신하며 머릿속을 스치는 기억 하나.
‘그때 추락했던 신시의 몸은 터지지 않았어. 액체처럼 바닥으로 스며들었지. 몸을 기운으로 바꿀 수 있는 여자니까, 그런 식으로 도주를…….’
처음 경험해 보는 상대였기에 그런 도주 방식을 사용하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완전한 실책이었다. 낯선 기술일수록 더욱 꼼꼼하게 경계했어야 했는데.
“건드리지 마. 하이론 님 몸에 상처 하나라도 입혔다간, 네 동생은 죽어.”
뭔가를 더 깊이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빠르게 뒤편의 캐시를 낚아챈 카델이 손안으로 불덩이를 띄웠다. 확 끼쳐 오는 열기에 캐시가 격하게 발버둥 쳤지만, 카델은 캐시의 힘조차 이기지 못할 만큼 연약하진 않았다.
신시는 그런 카델과 캐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표정은 무감했으나, 눈동자에선 분노의 불씨가 튀어 오르고 있었다.
저 여자가 바로 시스템이 변수의 제거를 위해 심어 둔 장치. 가족을 건드린 하이론을 응징하겠다는 신시에게선, 더없이 위험한 기운이 풍겼다. 그녀의 복수심이 하이론을 마계에서 추방하는 것으로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신시는 무조건 하이론 님을 죽이려 할 거야. 남은 시간은…….’
「제거까지 남은 시간: 0시간 02분 48초」
신시가 본격적으로 공격을 시작하는 건, 아마도 이 카운트다운이 종료된 후일 것이다. 그 시점에 쿤라가 시스템의 주의를 끌 것이다. 자신은 쿤라의 계획이 완료될 때까지 하이론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카운트다운이 끝나기 전에 하이론 님을 데려와야 해.’
하이론의 사지를 결박한 마기는 벌써 그의 피부를 좀먹어 갔다. 붉은 흉터가 손목과 발목을 타고 오르며 하이론의 몸을 뒤덮어 갔다.
그 상처를 일별한 카델이 캐시를 제 앞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캐시의 얼굴 바로 옆에 불덩이를 들이민 채 날카롭게 외쳤다.
“말했을 텐데, 건드리지 말라고. 당장 마기를 거둬.”
“캐시 얼굴에서 불을 치워. 먼저 동생을 놔주지 않는다면, 이 요정부터 죽게 될 거야.”
붙잡힌 하이론은 마법을 전개하려 했으나, 마기에 입이 틀어막힌 탓에 영창을 시도하지 못했다. 보통의 마법사들은 영창 없이 마법을 전개할 수 없다. 방출하는 마력 또한 짙은 마기에 잡아먹혀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했으니.
하이론도 캐시도, 자력으로는 빠져나갈 수 없다. 캐시와 카델 역시 인질을 섣불리 죽일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대치 상황은 오래가지 않는다. 몇 분이 지나면, 신시의 인내심은 한계에 달할 것이다.
“하이론 님 몸에 상처가 났으니, 나도 똑같은 흉터 정도는 남겨 줘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
코앞까지 다가온 불덩이에 캐시가 질끈 눈을 감았다. 금방이라도 캐시의 얼굴을 지질 듯 거침없는 손길에 신시의 눈빛에 이채가 스쳤다.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그녀가 짧게 입술을 달싹이고. 공격성을 거둔 마기는 더 이상 하이론의 피부를 녹이지 않았다.
“내 동생의 몸속에 암기를 심어 뒀다고 하던데.”
벌써 그런 것까지 알렸단 말인가.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주자, 캐시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곤란하다. 이쪽이 언제든 캐시를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신시의 경계심은 절대 약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보험을 들었지. 이렇게 보니 미리 기운을 심어 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
“없애.”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당장 없애지 않는다면 이 요정의 신체가 하나씩 사라질 거야.”
“내가 그 꼴을 두고 볼 것 같아?”
“상관없어. 내가 요정을 어떻게 하든 캐시의 목숨이 여전히 너희 손에 달려 있다면, 극단적인 방법이라도 시도해야지 않겠어?”
카델은 차오르는 한숨을 집어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신시가 하이론을 인질로 붙잡은 이상, 캐시의 몸에 암기가 심어졌다는 사실은 더 이상 위협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인질의 목숨이 위험해지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쪽이 언제든 캐시를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은, 신시를 더욱 공격적으로 만들 테니.
“……내 힘으론 암기를 없애지 못해. 내 부하를 이곳으로 데려와야 할 텐데. 괜찮겠어?”
“아니. 캐시를 내게 넘겨. 그깟 기운은 나 혼자서도 지울 수 있거든.”
“인질을 교환하자는 건가?”
그런 제안이라면 크게 손해 보는 것은 아니었다. 카운트다운이 종료되기 전까지 하이론을 돌려받는 것이 최우선 목표였으니. 신시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자, 캐시의 입 밖으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남은 시간이 너무 촉박해. 더 재고 있다간 하이론 님을 보호할 수 없게 돼.’
신시의 말에 숨겨진 의중을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잠시 굳은 얼굴의 하이론을 응시하던 카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아. 교환하지. 셋을 세면 동시에 인질을 풀어 주는 거야.”
“대신 나는 캐시의 몸에 심어진 암기를 지울 때까지 요정을 묶은 마기를 거두지 않아. 하지만 너는 캐시에게 어떤 마법도 걸어 둬선 안 돼.”
“……이건 또 무슨 참신한 수작이지?”
“알다시피 내 동생에겐 남을 공격할 수단이 없어. 하지만 이 요정은 달라. 인질을 교환하는 동안 둘 모두에게 제약을 걸지 않는다면, 요정과 네가 합심해 캐시를 공격할 수도 있잖아? 캐시가 내 앞으로 도착하는 즉시 암기를 터뜨려 버릴 수도 있고.”
“…….”
“그러니 모든 작업을 끝마칠 때까지, 요정을 완전히 풀어 주진 않겠어. 네게 돌려보내 주는 것만으로 고맙게 여겨.”
캐시가 무력하다는 게 이토록 거슬리는 상황으로 이어지게 될 줄이야. 신시가 마기를 거두지 않는다면, 반대로 캐시에게 심어 둔 암기가 사라지는 즉시 하이론이 공격당할 위험이 컸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신시를 설득할 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젠장. 더 생각할 시간도 없어.’
결국 이 불공평한 제안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카델이 고개를 끄덕이자, 신시가 하이론의 몸을 결박한 마기를 조종했다. 그렇게 겨우 두 다리의 자유가 생긴 하이론이 땅을 딛고.
“하나.”
가느다란 목소리가 건조한 공기를 갈랐다. 카델과 신시는 서로를 향한 시선을 치우지 않으며, 그 안에 담긴 음모를 간파하려 했다.
“둘.”
마력을 거둔 카델이 캐시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캐시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셋.”
캐시는 카델의 손길에, 하이론은 마기에. 가볍게 떠밀린 두 인질이 제자리를 찾아 이동하고. 카델의 시선이 시스템 창을 향했다.
「제거까지 남은 시간: 0시간 00분 51초」
‘하이론 님…….’
신시는 캐시를 주시하는 와중에도 카델의 상태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가 마력을 개방하려는 낌새가 보인다면, 지체 없이 하이론을 공격할 것이었다. 그러니 몰래 하이론에게 장막을 둘러 줄 수도 없다. 요젠에게 신호를 보내기엔 그와의 거리가 멀었고, 은밀하게 알릴 방도도 없다. 카델이 캐시를 공격할 수 없게 된 시점부터, 그들은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하이론과 캐시. 둘 모두 목적지에 도착했다. 카델은 하이론의 팔을 끌어당겨 제 옆에 바짝 붙였다. 신시 역시 캐시를 제 앞으로 끌어당기고는, 곧장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심어 둔 암기를 소멸시키기 위해서였다.
“……괜찮아요.”
여전히 마기에 입이 틀어막힌 채지만, 카델은 눈빛만으로 하이론이 제게 미안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목소리를 낮춘 그가 하이론에게만 들릴 만큼 조용히 말했다.
“캐시에게 심어 둔 암기를 없애자마자 이쪽을 공격해 올 거예요. 타이밍 맞춰 장막을 둘러 드릴 테니, 바로 도망쳐요.”
심어 둔 암기의 주인도 아니고, 캐시가 안전해진 시점을 노려 신시의 공격을 예측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하이론이 그리 생각한다는 것이 뻔히 보였으나, 카델은 구태여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카운트다운이 끝나는 시점. 그때가 바로 캐시의 안전이 확보된 순간이야.’
이제는 초 단위가 남았을 뿐인 카운트다운. 카델은 신시와 캐시, 하이론에게 주의를 두는 대신, 오로지 시스템 창만을 주목했다. 고작 몇십 초가 억겁의 세월처럼 느껴졌다. 땀이 흥건해진 주먹을 그러쥔 그의 머릿속으로, 위험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3초.’
바짝 긴장해 있던 캐시의 어깨가 미세하게 내려가고, 신시의 입꼬리는 희미하게 올라간다.
‘2초.’
여전히 머리 위에 둔 손을 떼지 않은 그녀가 캐시를 향해 무어라 속삭였다.
‘1초.’
고개를 끄덕인 캐시가 발끝의 위치를 옮기고. 동시에, 카델의 펜던트에서부터 붉은빛이 퍼져 나갔다.
‘지금!’
일순 신시와 캐시의 시선이 카델의 펜던트를 향하고. 퍼져 나가는 빛 속에서, 마력을 개방한 카델이 하이론을 구속한 마기를 떨쳐 내며 장막을 둘렀다.
“달려요!”
하늘로 솟구친 붉은빛이 단숨에 적룡의 형태를 갖췄다. 두 남매는 적룡의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으나, 얼이 빠진 캐시와는 달리 신시는 곧장 본래 목적을 깨달았다. 살벌하게 가라앉은 눈이 도망치는 하이론과 카델의 뒷모습을 담아내고.
“안전한 곳에 숨어 있어, 캐시. 금방 돌아올게.”
순식간에 녹아내린 그녀의 몸이, 갈라진 대지 아래로 스며들었다.
“몇십 번, 아니, 수백 번을 베어도 소용없다! 뼈저리게 느껴라, 종족의 격차를! 태생을 원망해라, 하찮은 인간이여!”
몰아치는 삭풍에 단복이 사정없이 나부꼈다. 팔을 교차해 방어 자세를 취했으나, 밀려나는 몸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저 무식한 재생력은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군.’
도벤토의 하관을 베어 바람을 불지 못하도록 막았으나, 그것은 정말 찰나에 불과했다. 루멘은 마밀의 마법에 시선을 빼앗겨 녀석의 비행을 막지 못했고, 그 짧은 시간 동안. 도벤토는 단숨에 상처를 회복해 다시 지상에 발을 붙였다.
강한 바람 앞에서는 제대로 된 발도술을 이어 갈 수 없다. 게다가 무식하게 날아드는 도끼도 문제였다. 바람을 따라 자유자재로 궤도를 변동하는 도끼는 방어만으로 상당한 피로감을 불러일으켰다.
‘고작 고위 마족 하나를 해치우지 못해 절절매고 있다니.’
경지에 올랐다고 생각한 검술로도 눈앞의 적을 압도할 수 없다. 여태껏 단순히 자만심에 취해 있던 것인가. 마계에서의 전투가 길어질수록, 루멘은 점점 더 심한 갈증에 시달렸다.
뭔가가 부족했다. 내면 깊숙한 곳에, 족쇄에 묶인 채 해방되지 못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 존재를 깨울 수만 있다면 이 지독한 갈증을 해소할 수 있을 텐데.
“내 도끼로 네놈을 갈기갈기 찢은 다음, 그 살점을 가져가 끓는 냄비에 넣을 거다. 아주 즐거운 승리의 만찬이 되겠지!”
루멘을 완전히 몰아붙였다고 생각하는 듯, 도벤토는 기분 좋은 고양감을 드러냈다. 그의 주위로는 수많은 인간이 있고, 동족을 위협하는 강인한 기사들도 존재했지만. 지금만큼은 눈앞의 루멘만이 도벤토의 유일한 먹잇감이었다. 좀처럼 무너지지 않는 루멘의 평정심과 꺾이지 않는 투지, 꿋꿋이 빈틈을 노리는 날카로운 눈빛. 그를 이루는 모든 요소 하나하나가 투사로서의 욕구를 들끓게 했다.
마밀이 펼쳐 둔 불꽃을 아무렇지 않게 짓밟은 도벤토가 다시 한번 바람을 모으고. 곧장 자세를 바꾼 루멘이 검집에 손을 올렸다. 놈이 바람을 모으도록 놔둬선 안 된다. 이번에도 하관을 베어 내지 못한다면, 공격의 주도권은 완전히 넘어갈 것이다.
지친 몸에 힘을 주어 중심을 바로 세운 루멘이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쿠구구구―
잠잠하던 대지가 요동치며, 일순 호흡이 불가능할 만큼 뜨거운 열기가 몰아쳤다. 순식간에 붉게 물든 시야에 루멘의 눈이 크게 뜨였다.
“……?”
피부가 타들어 갈 것만 같은 지독한 열기. 찰나의 고통에 움찔하던 때, 익숙한 비늘 갑옷이 전신을 휘감았다. 대장의 전략인 걸까. 하지만 자연스레 하늘을 향한 그의 시야를 채운 것은, 카델의 마법이 아니었다.
적룡. 모습을 드러낸 적룡은, 몸속의 모든 세포가 움츠러드는 듯한 압도적인 위압감을 풍겼다. 활짝 펼친 날개와 더 높은 곳을 향해 치켜든 고개. 그에게선 마계의 암울한 분위기를 찍어 누르는 절대적 강자의 아우라가 느껴졌다.
그 아우라를 만들어 내는 것은, 적룡의 몸체에서부터 퍼져 나오는 기함할 만한 양의 기운. 그가 내뿜는 기운이 순식간에 전장을 뒤덮었다. 마치 살아 숨 쉬는 듯한 기운의 파동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며, 대지의 진동 역시 거세졌다.
눈에 띄는 것은 적룡의 기운뿐만이 아니었다. 하늘을 향해 벌어진 입새로 화염이 새어 나오며, 그의 머리 위로 하나의 불덩이가 생성되었다. 둥근 불덩이는 초 단위로 몸집을 불려 갔다. 저것이 바로 전장을 채운 열기의 근원.
비늘 갑옷을 두르지 못한 적군은 지독한 고통을 호소했다. 적룡과 조금 더 가까이 있던 고위 마족은 불덩이에 던져진 것처럼 사지를 뒤틀었다.
루멘이 상대하던 도벤토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마밀의 불꽃 위에서도 꿋꿋이 버티던 그는, 적룡의 기운에 무릎을 꿇고 끓는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의 전신으로 회복을 위한 마기가 피어올랐으나, 고위 마족의 재생력도 빛을 발하진 못했다. 열기에 녹아내린 몸뚱이는 가죽 너머의 근육이 드러날 정도로 빠르게 허물어졌다.
‘도벤토를 처리하려면 지금밖에 기회가 없다. 하지만…….’
루멘은 대놓고 빈틈을 드러낸 도벤토를 공격하지 않았다. 굳이 자신이 공격하지 않더라도 곧 쓰러질 것 같다는, 그런 안일한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그의 몸을 두른 비늘 갑옷. 이 갑옷이 납덩이처럼 무겁게 전신을 짓눌렀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태로는 제대로 된 전투는커녕 몸을 이동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이건 대장의 판단인가? 아니면 적룡의 독자적인 행동?’
적룡의 머리 위로 떠오른 불덩이는 끝을 모르고 몸집을 불려 갔다. 코앞에 닥친 비극을 예감한 고위 마족들은 괴로운 열통을 견디며 적룡을 향해 비행했으나.
“끄아아악!”
“안 돼! 안… 으아악!”
적룡은 그들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몸을 감싼 짙은 기운에 머리를 들이민 순간. 화로에 들어간 치즈처럼, 순식간에 온몸이 녹아내렸다. 흘러내린 육편이 대지로 추락하고, 떨어진 고깃덩이가 지글거리는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갔다.
몸을 감싼 비늘 갑옷이 없다면 인간 역시 마족과 똑같은 최후를 맞닥뜨릴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기사들은 전투를 멈추고 멍하니 적룡을 지켜보았다.
제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도 이 정도 위력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인가. 기사들은 왠지 모를 무력감과 허탈함, 또한 두려움을 느꼈다.
어느새 지상을 어둡게 물들일 만큼 거대해진 불덩이의 그림자. 저것이 떨어진다면, 이 전장엔 마족의 씨앗조차 남지 못하리라. 그리 생각하면서도 적들은 아무런 행동을 취할 수 없었다. 이곳의 누구도 적룡을 막을 수 없다. 온몸을 던진 처절한 공격도, 열기에 굴하지 않는 패기도. 모조리 녹아 증발해 버릴 테니.
공포에 휩싸인 적군과 굳어 버린 아군의 사이. 묵묵히 적룡을 올려 보던 라이돈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가 바라보는 곳은, 카델과 하이론이 떠난 미로였다.
“……카델.”
카델은 전장에 합류해 아군을 지키라 명했다. 하지만 적룡이 직접 나선 이런 때까지 자신의 능력이 필요하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적룡이 저렇게 날뛰는 데 카델의 입김이 작용하지 않았을 리 없다. 전장으로 적룡을 보내 놓고는 정작 본인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니.
피어나는 아지랑이 속, 흐리게 번진 인간들의 모습을 훑어 낸 라이돈이 묵직해진 몸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