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아, 짜증 나. 처음부터 그냥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내 넓은 아량이 문제가 될 줄이야!”
두 다리와 날개가 얼어붙은 캐시는 엉금엉금 바닥을 기어 나갔다. 어떻게든 라이돈에게서 도망치겠다는 의지가 처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캐시는 조롱하듯 자신의 뒤를 뒤따르는 라이돈에게 외쳤다.
“꺼져! 나야말로 처음부터 네 말 따위 들으면 안 됐어. 왜 내 형제들이 몰상당했다고 거짓말을 한 거야? 그 말만 아니었어도 내가 너희를 이곳까지 안내할 일은 없었는데!”
“아하하! 거짓말은 아니었어. 정말 모조리 죽은 줄 알았거든. 그리고 네 누나 한 명을 빼고는 전부 확실하게 죽었으니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
“시끄러워! 누나와 난 절대 죽지 않아. 무슨 일이 있어도!”
“멍청해. 아직도 마계의 승리를 믿어?”
난데없이 등장한 적룡이 고위 마족을 모조리 쓸어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았음에도 여전히 희망을 품는단 말인가. 멍청하다. 지능이 있다면 저런 헛된 희망 따윈 품지 않을 텐데.
놀리는 것도 지겨워진 듯,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라이돈이 캐시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그에 캐시가 젖 먹던 힘까지 짜내 몸부림을 쳤으나. 카델도 감당하는 힘을 라이돈이 제압하지 못할 리 없었다.
“가자. 카델이 널 데려오랬어.”
“……신시 누나가 너희를 전부 죽여 버릴 거야. 너희는 누나의 무서움을 몰라.”
짐짝처럼 들린 캐시가 표독스럽게 말했으나, 라이돈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모르는 건 너야. 카델과 아버지는, 네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강하거든. 고작 고위 마족 하나에 당할 일은 없어.”
캐시를 데려간다면 일은 훨씬 수월하게 풀릴 것이다. 이 지루한 싸움도 금방 종결시킬 수 있겠지. 라이돈은 카델과 하이론의 강함을 믿었고, 그들의 안전을 확신하며 날개를 펄럭였다.
‘됐어. 이제 된 거야.’
처음부터 숨어 있을 필요도 없었다. 이렇게 하이론은 뒤로 물려 놓고, 제가 직접 나서 신시를 해치우면 되는 일이었다.
카델은 까맣게 타들어 간 신시의 몸에 [화련]을 겹겹이 감쌌다. 늘어진 몸이 열기에 반응하듯 힘없이 움찔거렸다. 더는 몸을 마기로 바꿀 기력도 없는지, 재생을 위해 피어나는 마기도 미약하기만 했다.
“간단하군요.”
카델의 곁으로 다가온 하이론이 말했다. 카델에게 제압당한 신시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었다.
“마계에 내려왔을 때부터 이미 반죽음 상태였을 거예요. 하이론 님의 공격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도주한 거였으니까요.”
시스템의 변덕만 아니었다면, 그녀는 지금쯤 하나 남은 형제인 캐시를 데리고 안전한 곳에 숨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처음부터 도주라는 선택지를 고르지 않았을지도. 그녀가 맞이했을 여러 가지 결말이 떠올랐다.
동정심이야말로 오만의 증거겠지. 하지만 결국 카델은 신시를 끝장내기 전, 그녀의 마음이 편안해질 만한 말을 꺼냈다.
“캐시를 찾는대도 죽이진 않을게. 만약 캐시가 인간들에게 위협적인 행동을 한다면 제압해야겠지만, 최대한 살려 두겠다는 얘기야. 반대로 캐시가 협조를 이어 간다면…… 전쟁이 끝난 뒤에도 건들지 않아. 약속하지.”
배신의 대가도 치르지 않는, 상당히 후한 처사다. 그럼에도 신시는 침묵 속에서 사슬에 묶인 몸을 꿈틀거릴 뿐이었다. 죽어도 인간에게 감사를 표하긴 싫다는 걸까.
짧게 숨을 들이쉰 카델이 [화련]의 마력을 늘렸다. 그대로 신시를 불태워 죽일 셈이었다. 하지만.
“카델! 나 왔어! 부탁한 마족도 데려왔다!”
들려선 안 될 외침이 그들의 틈을 헤집었다.
“누나! 신시 누나!”
“캐시……?”
다급한 캐시의 음성에 내내 침묵을 지키던 신시가 반응을 보였다. 바닥에 처박혀 있던 고개를 움직인 그녀가 목소리가 난 방향을 돌아보았다.
캐시는 신시와 똑같은 자세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날개와 다리가 꽝꽝 얼어붙은 탓이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신시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캐시는 신시의 처참한 모습에 충격을 받은 듯,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녀에게 기어갔다. 하지만 필사적인 전진은 그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라이돈이 캐시의 등에 발을 올려 움직임을 저지한 것이다. 분해하는 캐시의 얼굴에 신시가 조용히 이를 갈았다.
조금도 바라지 않던 남매의 상봉이다. 카델은 신시의 앞을 가로막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다가오지 마!”
“응? 왜?”
“다가오지 마, 라이돈. 거기 그대로 있어.”
식은땀이 흘렀다. 라이돈이 정말 캐시를 데려오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설마 라이돈이 캐시를 찾아 데려오는 것까지 시스템의 계획이었던 걸까. 캐시의 등장으로 신시가 자극을 받는 건 곤란하다.
‘……아니. 전부 신시를 죽이면 해결될 일이야.’
더 이상의 변수는 허락하지 않는다. 라이돈의 접근을 저지한 카델이 [화련]의 위로 강한 마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으…… 흐아아악! 아아악!”
다른 때였다면 한 방에 목숨이 끊길 강력한 마법을 구사했을 거다. 제게 고문을 즐기는 취미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신시는 육체를 마기로 변환할 수 있는 고위 마족. 큰 기술을 준비하는 동안 도주를 시도한다면 일이 커지게 된다.
때문에 카델은 오로지 [화련]의 화력만으로 신시를 불태워야 했다. 본래 구속이 목적인 [화련]의 힘으로 고위 마족을 죽이는 게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죽음의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는 신시의 비명이 귓가를 때렸다. 끔찍한 경험이었다. 이를 악문 채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카델은 신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녀의 몸부림과 최후의 발악처럼 피어나는 마기, 잔인한 악취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어쩌면 이들 역시 시스템의 희생양이 아닐까. 이세계의 유흥거리로 전락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었을지 모른다. 불쑥 치솟는 나약한 상상을 밀어 내며, 최대한 빨리 그녀가 눈을 감게 하는 데 집중했다.
“안 돼! 누나! 누나! 아아악! 그만!”
캐시의 처절한 비명에 일순 구역질이 치밀었다.
‘제발 포기해, 신시.’
죄책감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절대 느껴선 안 될 불순물이다. 결국 고개를 돌려 버린 카델이 온 힘을 다해 마력을 방출하고.
“……!”
일순, 신시의 몸에서부터 폭발처럼 마기가 터져 나왔다. 연막 같은 마기에 시야가 가려지며, 잠시 당황하던 카델이 서둘러 바람을 일으켰다. 설마 신시가 숨겨 두었던 기술이라도 꺼낸 것일까. 긴장된 눈빛이 흩어진 마기 너머를 훑고.
“…….”
카델의 시야 속으로, 완전히 타들어 간 신시의 육체가 들어찼다. 숯덩이처럼 검어진 육체는 일말의 미동 없이 축 늘어졌다.
‘……죽었어.’
시체를 확인해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카델은 천천히 [화련]을 거두며 한 걸음씩 물러섰다. 눈앞에서 형제의 죽음을 목도한 캐시의 절규는 들리지 않았다. 라이돈이 그의 머리를 눌러 땅에 박은 탓이었다.
[화련]을 풀었음에도 신시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다. 그녀는 죽었다.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 지금껏 수많은 마족을 죽여 왔음에도, 유독 진한 여운이 남았다. 어쩌면 캐시의 존재 때문일지도 몰랐다.
시선을 옮겨 캐시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선 지독한 분노가 번들거렸다. 부릅뜬 눈은 형제의 시신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다. 차마 그와 시선을 맞출 용기가 나지 않아, 카델은 하이론을 돌아보았다.
“이제 됐어요, 하이론 님. 고생하셨어요.”
“고생은 카델이 한 거죠. ……이제 카델이 경고했던 위험은 사라진 건가요?”
“……네. 사라졌어요.”
신시를 제거했고, 쿤라의 기술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저 멀리 하늘을 물들인 붉은 기운이 여전했으니. 그래도 바로 복귀하는 것보다는 쿤라의 확답을 듣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후에는…….’
캐시를 풀어 줘야 할까. 신시에게 약속했다. 인간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한, 캐시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하지만 지금의 캐시를 풀어 줬다간 어떤 돌발 행동을 벌일지 몰랐다. 그렇다고 저대로 방치하기엔, 그는 이미 동족에게 배신을 들킨 몸.
‘내가 구슬려 봤자 역효과만 날 거야. 라이돈한테 캐시를 먼 곳에 풀어 주고 오라고 하는 게 나으려나.’
그리 생각하며 한 걸음을 옮기자.
“어……?”
카델의 펜던트가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당황하며 펜던트를 움켜쥐자, 뜨거운 열기가 퍼지며 펜던트의 단면으로 균열이 일었다. 쩍쩍 갈라지는 펜던트 사이로 붉은 기운이 새어 나오고.
“카델. 저길 봐요.”
하이론이 정원의 하늘을 가리켰다. 그곳에 있는 것은 쿤라. 주위를 감싸던 붉은 기운이 흩어지며, 쿤라의 몸이 맥없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에 놀란 카델이 반사적으로 뛰쳐나간 순간.
「제거까지 남은 시간: 0시간 00분 10초」
「변수를 통제합니다」
「실패 시, 페널티 발생」
「힘의 균형을 위한 세계 조율 및 위험인물 삭제가 진행됩니다.」
붉은 경고문이 떠오르며, 새로운 10초의 카운트다운이 생겨났다.
‘힘의 균형? 위험인물 삭제가 진행된다고?’
설마.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으며, 완전히 추락한 쿤라의 몸체가 대지를 울렸다. 카델은 파편이 떨어지는 펜던트를 움켜쥔 채 필사적으로 대화를 시도했다.
“쿤라! 쿤라, 내 말 들려요? 정신 차려요! 일어나 보라고요!”
하이론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힘의 균형을 위해 비슷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을 제거하겠다는 소리였다. 하이론의 영향력이 쿤라 급이란 말인가?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때맞춰 쿤라가 의식을 잃고 추락했다. 시스템의 다음 타깃이 누구인지, 무엇보다 분명하게 알리는 증거.
‘설마 쿤라를 죽이겠다는 거야? 아무리 패배했다지만 쿤라는 이곳의 신이야.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쿤라가 제거되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카운트다운이 끝나기 전에 쿤라를 보호해야 했다.
“젠장, 몇 초 남지도 않았잖아. 라이돈! 날 쿤라한테 데려가 줘!”
남은 시간이 없다. 카델은 서둘러 라이돈의 앞으로 달려갔다. 그의 비행 속도라면 어떻게든 제한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라이돈도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듯, 달려온 카델의 허리를 감싼 그가 곧장 날개를 움직였다. 그러나.
“너는……!”
라이돈의 당황한 목소리와 함께, 카델의 등을 밀친 강한 힘이 두 남자를 뒤편으로 밀어냈다.
질척하게 터져 나가는 소리가 났다. 등 뒤를 강타하는 강력한 풍압을 따라, 뜨거운 액체가 와락 몸을 덮쳤다. 기분 나쁜 냄새였다. 허리를 감싸고 있던 라이돈의 팔에서 느슨하게 힘이 풀어지며,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버지……?”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온몸이 굳은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허? 뭐야, 갑자기 튀어나와서는……. 성가시게!”
그의 시야를 채운 것은 황량한 미로의 무덤. 그리고 무너진 잔해를 배경 삼아 떠오른 시스템 창 하나.
「변수 제거가 완료되었습니다. 힘의 균형이 유지됩니다.」
덜렁 떠오른 글의 내용을 이해한 순간. 아득한 곳에 떨어진 것처럼, 머릿속이 멍하게 흐려졌다.
“비켜, 거슬리게 하지 말고. 내가 노리는 건 네 녀석이 아니라…….”
셀레브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몇 번이나 들어 봤으니, 곧장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셀레브가 어떻게 이곳을 찾아온 걸까? 왜 하필 지금?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라이돈의 팔이 힘없이 떨어지고, 귓가를 울리는 호흡이 거칠게 떨려 올 때에서야. 카델은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리고 보았다.
“한 발짝도…… 다가오지 마세요.”
셀레브의 앞을 가로막은 하이론. 그의 가슴을 뚫고 나온 검은 팔. 그러쥔 주먹을 타고 뚝뚝 흘러내리는 핏물과 고통을 견디듯 구부러진 하이론의 등. 그는 제 몸을 관통한 셀레브의 팔을 움켜쥔 채 마력을 개방했다.
한 박자 늦게 상황을 받아들인 라이돈이 다급히 하이론에게 다가가려 했으나.
“라이돈!”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른 묵직한 외침이 그의 행동을 저지했다. 하이론은 끝까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라이돈을 향해 말했다.
“도망가렴. 카델을 데리고 멀리, 몸을 숨기고 있어.”
“아, 아버지…….”
“금방 끝날 거란다. 어서.”
하이론의 말을 들었음에도 카델은 아무런 행동을 취할 수 없었다. 라이돈을 다독여 함께 떠나지도, 하이론에게 힘을 보태지도 못했다. 그의 머릿속을 떠다니는 생각은 오로지 하나.
‘왜?’
어째서? 하이론은 아직 살아 있다. 셀레브를 치우고 그를 가르엘에게 데려갈 수 있다면, 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시스템은 하이론이 완전히 제거되었다고 확신하는가? 어떤 방법으로도 하이론은 살릴 수 없다는 말인가? 모든 가능성이 소실되었다고?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무슨 수를 써도 하이론을 살릴 수 없다는 걸까?
말도 안 된다. 그럴 리 없다. 제깟 게 뭐라고. 느리게 차오른 반발심이 카델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그러나 카델이 행동에 나서는 것보다, 라이돈의 결단이 빨랐다.
“……가자.”
더듬더듬 카델의 허리를 감싸 안은 라이돈이 날아오르고. 붕 떠오른 시야 속으로 처참한 하이론의 모습이 노골적으로 담겼다.
“기다려, 라이돈! 셀레브야! 저 녀석 정도는 우리만으로도……!”
“셀레브의 실력이 우리 기억과 똑같았다면, 아버지도 함께 싸우는 걸 택하셨을 거야. 굳이 우릴 도망 보내지 않으셨겠지. 아버지는…… 함께 있으면 위험해진다고 판단하셨어. 혼자 있는 편이 더 처리하기 쉬우니까, 거슬리지 말고 떠나라고…….”
힘겹게 이어지던 말이 뚝 끊겼다. 거친 호흡 끝을 울리는 떨림에, 그제야 카델의 시선이 라이돈을 향했다. 라이돈은 애써 하이론을 무시한 채 더 높은 하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이론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필사적으로 날개를 움직였다. 맞닿은 몸은 경직됐고, 안색은 창백하다.
“……라이돈.”
“아버지의 선택엔 항상 뜻이 있어. 그러니까 괜찮을 거야. 핀하이족의 요정 왕이니까, 절대 죽지 않아.”
그의 정신을 잠식한 어두운 감정이 선명하게 전해졌다. 라이돈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자신이 뒤돌아 있던 동안, 라이돈은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벌어져선 안 될 비극의 장면을. 라이돈에겐 눈앞의 장면을 이해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적신 핏자국에선 열기도 채 가시지 않았으니.
흐려진 현실감은 그를 회피의 늪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