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4화 (444/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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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말 할 때 놔. 지금 놓으면 죽기 전에 삶을 되돌아볼 시간 정도는 줄 테니까.”

가슴을 관통한 팔을 통째로 얼어붙였으나, 셀레브는 오로지 완력만으로 팔을 뒤틀었다. 살벌한 소리를 내며 구멍을 헤집는 팔에 하이론의 입 밖으로 왈칵 피가 흘렀다.

“넌 절대 내 아들을 해칠 수 없어.”

“아들? 하……. 그 짜증 나는 놈이 요정의 핏줄일 리는 없고. 착각하고 있어, 너. 난 요정을 노리던 게 아니었거든.”

대꾸한 셀레브가 짜증스레 인상을 구겼다. 무너진 미로의 바깥에서 카델을 발견한 순간. 셀레브는 이곳에 적룡을 데려온 이가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인간계에 그런 짓이 가능할 만한 인간은 카델밖에 없을 테니.

그래서 죽이려 했다. 마침 훤히 등을 보인 녀석의 심장에, 열심히 갈고닦은 주먹을 박아 주려 했다. 알아챈대도 방어할 수 없을 만큼, 재빠른 속도로. 그런데 어디서 튀어나온지도 모를 요정이 앞을 가로막아 카델을 놓쳐 버린 것이다.

“내 공격을 맞고도 깔끔하게 구멍만 뚫린 걸 보면, 너도 꽤 쓸 만한 요정인가 보네. 뭐, 이참에 죽여서 나쁠 건 없겠지.”

눈앞의 요정은 제법 강한 마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렇대도 가슴에 구멍이 뚫린 이상 오래 버티지는 못할 터. 본 실력도 내지 못할 요정 따위가 감히 자신의 앞을 가로막을 순 없다.

셀레브는 붙잡힌 왼쪽 팔 대신, 오른팔의 위로 마기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금세 새까맣게 물든 주먹에서 날카로운 공명음이 퍼지고. 곧바로 하이론의 목숨을 끊어 버리려던 순간.

“누가 됐든 쫓을 수 없을 거란다. 내 모든 걸 걸어서라도, 네가 그 아이들에게 가도록 놔두지 않을 거니까.”

하이론의 몸에서부터 대량의 마력이 방출되기 시작했다. 새하얀 빛을 띠는 순도 높은 기운. 기운이 닿은 대지는 설원이 되었고, 건조한 공기를 얼어붙여 눈발을 만들었다.

순식간에 뒤바뀐 풍경에 셀레브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그녀와 하이론을 감싼 원형의 공간 속에선, 오로지 하이론의 기운만이 범람하고 있었다.

“……뭐야, 이거.”

초 단위로 내려가는 기온이 경악스러울 정도였다. 범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임을 직감한 셀레브가 마기의 장막을 둘렀으나.

“뭐, 뭐냐고! 당장 멈추지 못해?”

숨결마저 얼어붙는 설원의 추위는 장막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에 당황한 셀레브가 공간의 허점을 찾아 마기를 난사했다.

“젠장, 젠장! 너 대체 정체가 뭐야?”

내던진 마기는 그대로 눈발에 떠밀렸다. 살인적인 추위에 온몸에 성에가 끼어, 눈동자조차 마음대로 굴릴 수 없었다. 뭔가를 제대로 시도할 수도 없이, 온몸을 얼어붙이는 마력은 점점 거세지기만 했다.

이젠 어떤 적이 찾아와도 결코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 장담하며 전쟁을 기다렸건만. 이토록 쉽게 제압당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죽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 죽었다간 에밀리아를 볼 면목이 없다.

공간을 부수는 것을 포기한 셀레브가 직접 탈출하기 위해 팔을 비틀었다. 그러나 하이론의 가슴에 난 구멍과 하나처럼 얼어붙은 팔은 마음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팔을 움켜쥔 하이론의 악력 또한 필사적이었다.

“이 빌어먹을 요정 새끼가! 그냥 죽어!”

급하게 휘두른 주먹이 하이론의 얼굴을 마구 강타했다. 평소였다면 셀레브의 주먹은 단 한 대만으로 상대방을 곤죽으로 만들었을 테고, 하이론 역시 쉽사리 공격에 맞아 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얼어 가는 셀레브의 공격은 확연히 약해졌고, 하이론에겐 보호에 마력을 쓸 만한 여력이 남지 않았다.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하이론의 고개가 맥없이 돌아갔다. 그러나 하이론은 셀레브를 붙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온 신경을 셀레브에게 집중했다. 그녀를 막는 것이 자신의 마지막 임무임을 잘 알았으니까. 이 차갑고 좁은 설원 속에서, 셀레브와 함께 죽음을 맞이하는 것. 그것이 하이론의 목표였다.

그러나.

“큿……!”

발목에서부터 갑작스러운 통증이 번졌다. 다급히 시선을 옮기자 보이는 것은.

“으으, 으……!”

캐시. 그는 온 힘을 다해 하이론의 발목을 물어뜯고 있었다. 빨갛게 얼어붙은 얼굴 위로 줄줄 눈물을 흘리며, 안간힘을 다해 턱을 벌렸다. 납작 엎드려 입만 움직이는 꼴임에도 그의 모습은 전혀 우습지 않았다. 오히려 섬뜩했다.

뒤늦게 그의 존재를 알아챈 하이론이 일순 주의를 흩뜨리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셀레브가 이를 악물고 팔을 비틀어 빼냈다. 함께 솟구친 핏물이 그대로 얼어붙으며, 하이론의 가슴 위로 그림처럼 피어났다. 탁하게 흐려진 안광과 반동을 따라 비틀거리는 몸뚱이.

“별 같잖은 게……!”

질린다는 듯 하이론을 떨쳐 낸 셀레브가 눈보라의 바깥으로 몸을 던졌다. 그녀를 막아야 한다. 모든 것을 쏟아 셀레브를 얼어붙여야 한다.

그리 생각하는 하이론의 시야 속으로, 점점 멀어지는 셀레브의 뒷모습이 뿌옇게 번졌다.

‘어때. 죽는 길에 위안이라도 되었니? 곧 같은 곳에 도착할지도 모르겠구나.’

하이론의 시선이 완전히 얼어붙은 캐시에게로 향했다. 떡 벌어진 입에 어떻게든 나아가려 쭉 뻗은 팔다리. 깊은 분노와 어렴풋한 공포의 흔적이 남은 표정. 죽음의 순간을 박제한 얼음덩이는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잠시 씁쓸한 눈빛을 건네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등허리에 닿은 바닥은 딱딱하고 거칠었다. 시야 가득 들어찬 하늘은 우중충하기 짝이 없어, 일평생을 숲의 하늘만 바라보고 살았던 하이론에게는 영 현실감이 떨어지는 풍경이었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멀찍이서 느껴지는 기척에 어렴풋한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

“하이론 님!”

안타깝게도 더 이상 몸을 움직일 기력은 남지 않았다. 가만히 그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리자, 곧 어두운 하늘을 대신한 반가운 얼굴이 들어찼다.

“안 돼…….”

카델은 꼭 본인이 죽음을 맞이하기라도 한 듯 절망스러운 표정이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나 암담한 것일까. 그리 볼품없진 않을 텐데. 어쩌면 기력 없이 늘어진 꼴이 걱정스러운지도 몰랐다.

하이론은 제 앞에 무릎 꿇은 카델의 손을 그러쥐었다. 손을 쥔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많은 힘이 필요할 줄은 몰랐다. 그러나 꼭 잡아 주고 싶었다.

“죄송해요, 하이론 님, 죄송해요…….”

이미 예상한 일이지 않은가. 카델은 충분히 경고해 주었고, 자신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고집을 부려 예상된 최후를 맞이한 것은 다름 아닌 자신. 그러니 미안해할 것 없다. 그 말을 해 주고 싶은데도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대신 마음을 담아 카델을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도 가르엘에게 가요. 가르엘이라면 살릴 수 있을 거예요. 어떻게든, 어떻게든…….”

고개를 저었다. 단호하게 저었다고 생각했는데도 막상 움직이는 범위가 별것 없어, 스스로도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 작은 움직임만으로 카델은 의사를 알아챘다. 그래, 영특한 아이. 이미 끝난 몸을 살리겠다고 산 자의 기운을 뽑아 먹기는 싫었다.

금세 눈물이 차오르는 말간 얼굴에 해 주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동안 고마운 게 무척이나 많았다고, 함께 싸워 줘서 고맙고, 라이돈을 데려가 줘서 고맙고, 날 이곳에 불러 줘서, 마지막 순간을 아들과 함께할 수 있게 해 줘서 고맙다는……. 온통 감사 인사뿐이었다. 자신이 인간에게 이토록 커다란 감사를 느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이 긴 생애를 살며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고마웠다. 카델은 제게 참으로 고마운 인간이었다. 이런 몸으로는 그를 한 번 세게 안아 주는 것조차 불가능했지만.

조심스럽게 손을 떼어 내고, 유일하게 움직임이 자유로운 눈을 굴렸다. 바로 옆에서 바닥을 짚은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요정.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어찌할 바를 모르는 표정이나, 충동을 참듯 움찔거리는 몸이나. 하나같이 어린 시절과 똑같다. 라이돈은 죽었다 깨나도 모르겠지만, 자신은 라이돈의 이런 미숙한 모습이 참으로 사랑스러웠다. 가능하다면 모든 것을 사랑으로 알려 주고 싶었다.

“아, 아버지……. 죽는 거, 그런 거 아니죠? 네? 왜… 왜 말이 없어요? 말 좀 해 봐요, 나 여기 있잖아요. 아버진 안 죽을 거잖아요.”

처음으로 이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 어찌나 감정이 북받쳐 오르던지. 동시에 어찌나 죄스럽던지. 영원히 숲에 가둬져 아비와 똑같은 생을 살아가게 될 이 아이가, 몹시도 안타까웠다. 그런데도 이쪽을 바라보며 방긋방긋 웃는 얼굴이 미치도록 사랑스러워, 결국 함께 웃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죽으면 안 되잖아요. 멜피스 할아버지한테 무사히 돌아가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여기서 이렇게 죽을 분…… 아니잖아요. 아버진 강하잖아요. 나보다도 훨씬 더…….”

이렇게나 사랑스러운데도 매번 혼을 내기만 했다. 사이가 멀어지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동족의 미래를 위해서라며 매번 다그쳤다. 그러고선 화해의 손길도 내밀지 않았다. 하나밖에 없는 아이에게 제대로 된 애정을 주지 못했다. 이 어찌나 한심한 아비인가.

해 준 것 없는 아비이니, 죽을 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대도 별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빠, 가지 마…….”

자그마한 울먹임에 하이론의 눈에 이채가 맺혔다. 살짝 일그러진 눈이 라이돈을 응시하다, 아주 느리게 손을 뻗었다. 온 힘을 짜내 움직인 손이 눈물 젖은 흰 뺨에 닿았다. 차마 감싸지도 못하고, 쓸지도 못하고. 그저 닿았을 뿐인 손길엔 미약한 온기가 맴돌았다. 희미한 온기가 라이돈의 눈물을 훔치고, 메마른 입술이 작게 달싹였다.

“너무 많이… 사랑했고……. 앞으로도, 사랑할 거란다……. 나의 아들, 라이돈……. 마지막으로 볼 수 있어… 기쁘, 구나…….”

마지막 생명을 쥐어짜 내뱉은 진심과 함께, 툭 손이 떨어졌다. 반짝거리던 눈이 한순간에 탁하게 질렸다. 완전히 핏기가 가신 얼굴이 하얗게 번지며, 옅은 미소를 매단 얼굴이 꼭 인형처럼 생기를 잃었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라이돈의 입 밖으로 짧은 숨이 빠져나왔다. 그는 숨쉬기가 버겁다는 듯 뚝뚝 끊긴 호흡을 뱉어 내며, 혼란스러운 눈을 움직였다. 딱딱하게 굳은 몸을 쓸어내리고, 잠시 제 뺨에 닿았던 손을 움켜쥐고, 종국에는 납작 엎드려 그의 가슴 위로 귀를 가져다 댔다.

“흐, 흐으……. 안 돼… 안 돼, 안 돼…….”

일그러진 얼굴로 믿을 수 없다는 듯 연신 그의 코밑에 손을 가져다 댔다. 잴 줄도 모르는 맥을 재 보겠다고 목을 더듬고, 미동 없는 몸을 잘게 흔들었다. 한참을 버둥거리다, 마지막으로 그는 카델을 바라보았다. 슬픈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는 카델을.

“아니지? 카델, 해결할 수 있는 거지?”

그는 축 늘어진 하이론의 손을 쥐고 카델에게 내밀었다. 뻣뻣하게 굳어 가는 몸을 모른 체하며, 무작정 잡아당겼다.

“데려가자. 응? 내가 안고 갈게. 가르엘이라면 고칠 수 있겠지? 고쳐 줄 거야.”

“……라이돈.”

“그렇게 보지 마, 카델. 왜 그런 표정이야? 왜 꼭 다 끝난 것처럼…….”

무슨 말을 꺼내야 할까? 사과를 해야 할까? 네 아버지를 지켜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처음부터 이 전쟁에 끌어들여선 안 됐는데. 아니, 네게 이렇게 큰 슬픔을 안길 줄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함께해선 안 됐는데. 내 곁에 있는 죄로 이런 아픔을 겪어야 할 줄은 몰랐다. 네겐 차라리 나 없는 삶이 훨씬 나았을 텐데.

모든 게 자신의 탓인데, 라이돈은 그걸 몰랐다. 그런 것도 모르고 도와 달라며 죽은 아버지의 손을 내밀고 있다. 미쳐 버릴 것 같은 와중에도, 버려진 아이처럼 울고 있는 그가 안쓰러워서. 카델은 하이론의 손 대신, 라이돈의 팔목을 잡아끌었다. 맥없이 당겨진 몸을 꽉 끌어안고, 답답하게 틀어막힌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세상을 누비며 살게 돼서 다행이라고, 하이론 님이 그러셨어. 생의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건 바로 네 얼굴이니까, 위험한 걸 알면서도 마계에 가시겠다고 한 거야. 널 무척이나 사랑하셨어. 그러니까…….”

“…….”

“그러니까…… 미안해, 라이돈. 지켜 드리지 못해서.”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사과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카델은 흐느끼는 라이돈을 강하게 안아 주며, 차오르는 눈물을 억지로 집어삼켰다. 자신은 울 자격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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