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5화 (445/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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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찢긴 몸이 넝마 같았다. 어딘가에서 두들겨 맞고 온 것처럼 초라한 꼴이라니. 자연스레 패배의 과거가 떠오르며, 기분이 몹시 저조했다.

“……웃기는군.”

저조해져야 했다, 원래라면. 하지만 어두운 공동의 벽에 몸을 기댄 쿤라는,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이론을 지키는 데에 실패하고, 시스템에게 견제당한 탓에 4할의 기운을 몽땅 소모했다.

그 4할은 전부 카델을 통해 마계로 들어갔던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카델의 상태도 확인할 수 없었다. 다시 그에게 기운을 나눠 주려면 약간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고, 그동안 전쟁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그조차 예상하지 못한다.

실로 암담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모든 게 네놈의 계획대로 흘러가지는 않을 거다. 네 생각과는 달리, 이곳의 생명은 네놈이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 꼭두각시가 아니거든.”

쿤라의 얼굴에선 긴장이나 초조함의 기색이 전혀 비치지 않았다. 되레 개운해 보였다. 그것은 바로, 시스템이 그에게 제약을 걸었던 그 순간.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놈이 내게 제재를 걸었던 건 고위 마족을 모조리 소탕했을 때도, 더 강력한 기술을 준비했을 때도 아니었다.’

바로 시스템이 하이론의 죽음을 확신한 순간. 쿤라가 한 존재를 하이론의 죽음에 개입시킨 때였다.

‘라이돈. 그 요정에게 마족의 위치를 알린 순간, 시스템은 뒤늦게 제재를 걸었다. 나로 인해 라이돈이 아버지의 죽음과 완전히 연관되는 상황이 만들어졌어. 그걸 막으려고 했겠지만, 한발 늦어 버렸지.’

우습게도 시스템이 걱정했던 것은 하이론도, 쿤라도 아니었다. 바로 라이돈. 아버지에게 영향을 받게 될 그의 행보를 우려했던 것이다. 그랬기에 하이론을 없애려 했고, 하이론의 죽음에 라이돈이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게 꾸미려 했다.

‘반쪽이의 기사인 이상, 시스템은 녀석에게 깊게 관여하지 못한다. 그런 상황에서 녀석이 하이론 수준의 힘을 얻게 된다면…….’

아주 볼만해질 것이다. 본인의 억지에 발목을 잡힐 이세계의 신을 생각하며 신나게 웃어 대던 쿤라가 천천히 숨을 고르고. 낮은 한숨을 내쉰 그가 중얼거렸다.

“걱정은 되는군. 제 기사가 강해지건, 이세계의 신에게 문제가 생기건……. 너는 내내 아파할 테니.”

무수히 포진해 있던 적들이 사라지고, 정원에는 마족의 죽음이 만연했다. 인간 측의 사상자는 열댓 명에 불과한 데다, 주요 전력들의 힘도 크게 아꼈다. 전부 적룡의 덕이었다.

그러나 쓰러지듯 추락한 적룡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상태를 확인하거나 자초지종을 들을 새도 없이, 흩어지듯 모습을 감춘 것이다. 게다가 인간들이 압도적인 승리에 기뻐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세찬 눈보라와 지독한 한기, 날붙이처럼 몰아치는 얼음 결정이 뻑뻑해진 살갗을 거침없이 할퀴어 댔다. 마법사들의 장막, 심지어 마밀의 화염 장막마저 눈보라의 추위를 완전히 막아 주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눈보라에 모두가 원흉을 찾아내려 했으나, 마땅히 보이는 적은 없었다. 몇몇 기민한 자들은 눈보라가 마력으로 이루어졌음을 알아챘으나, 알아도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절망적으로 몰아치는 눈발 속에서는 한 걸음 옮기는 것조차 고역이었으니.

그리고 그것은, 적린 기사단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요정 놈 짓이 틀림없어. 요정 왕이 이런 막무가내 마법을 사용했을 리는 없으니까.”

반은 마밀과 성기사들이 만든 이중 장막 속에서 짧게 혀를 찼다. 굳이 마력의 주인을 찾지 않아도 누가 이 사태를 만들었는지 빤히 들여다보였다. 라이돈이 앞뒤 없이 일을 벌이는 데 얼마나 능통한진 질리도록 겪어 보았으니까.

그 말에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루멘의 옆에서, 가르엘이 말했다.

“하지만 라이돈 경의 곁에는 단장님이 계실 텐데요. 막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그런데도 라이돈 경이 아군까지 위험해지는 마법을 전개했다는 건……. 요젠 경. 뭐 보이는 게 없나요?”

요젠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의 그는 기운을 과도하게 소모해 상태가 좋지 못한 데다, 카델과의 거리도 멀어 분신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한 가지 알아낼 수 있는 사실이 있었으니.

“라이돈의 마력, 굉장히 불안정해. ……자칫하면 폭주가 시작될 거야.”

“폭주……? 하지만 폭주할 정도로 마력을 사용했을 리는 없는데요. 위험한 고위 마족들은 전부 정원에 몰려 있었고, 그마저도 쿤라 님의 공격으로 몰살당했는데…….”

“……나도 이유는 모르겠어.”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다면 바로 카델의 안위를 확인해 보았을 텐데. 아쉬움에 절로 표정이 굳어 갔다. 카델의 곁에 두 요정이 있으리라는 사실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대장은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아. 돌아올 때까지 죽지 않고 버티는 게 우리의 일이지.”

혹한 속에서는 제대로 된 사고를 하는 것조차 체력 소모였다. 누가 뭐래도 카델은 이런 사태를 오래 방치하진 않을 테니. 카델에 대한 믿음으로, 기사단은 살을 에는 추위를 묵묵히 인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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