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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자국은 성벽을 지난 뒤 얼마 걷지 않아 감쪽같이 사라졌다. 육안으로는 식별이 불가능했으므로, 그들은 요젠의 후각에 의지해 라이돈의 흔적을 쫓아야 했다.
“우리가 지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문이 사라지길래 함정인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닌 것 같군. 여긴 이상할 만큼 기척이 없어. 마족이 돌아다닌 흔적도 보이지 않고.”
루멘의 말대로, 그들이 거니는 성의 뒤편은 놀라울 만큼 고요했다. 요젠조차 느껴지는 기척이 없다고 하니,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곳이 맞는 듯했다.
“문제는 성으로 들어갈 문도 보이지 않는다는 거지만요.”
여러 개의 첨탑을 겹쳐 둔 것처럼 높게 솟은 성. 꼭대기는 어두운 안개에 뒤덮여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이 성의 가장 높은 곳에 에밀리아가 머물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라이돈이 에밀리아와 같은 장소에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끈기 있게 문을 찾던 가르엘이 곤란하다는 듯 입가를 문질렀다.
“이거, 안으로 들어가려면 벽을 부수는 수밖엔 없겠는데요.”
“그랬다간 성안에 있는 마족들이 몰려올 거야. 기사들이 전부 성벽 바깥에 있는 상태에서 우리끼리 적들을 상대하는 건 위험해.”
“흠……. 그렇다고 기사단 전원이 성 외곽을 빙 둘러 정문으로 이동하는 것도 우습죠. 금방 발각당할 건 분명하고, 라이돈 경의 신변을 확인할 방도도 없어지니까요.”
성으로 들어가는 뒷문이 없다면 작전의 난이도가 심각하게 올라간다. 한숨을 삼킨 카델이 요젠을 향해 물었다.
“요젠. 라이돈의 흔적은 어디까지 이어져 있어? 피 냄새를 따라가다 보면 문이 나오지 않을까?”
“……문제가 생겼어.”
“문제?”
우뚝 걸음을 멈춘 요젠이 표정을 굳혔다. 그에 카델이 불안감을 드러내며 마른침을 삼켰다. 심각한 문제라도 생긴 걸까. 그새 라이돈에게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 건? 요젠의 반응에 간신히 멈췄던 끔찍한 상상이 날개를 펼치려던 차.
“입구가 너무 많아.”
예상치 못한 답변이 돌아왔다.
“너, 너무 많다고? 어디? 어디에 있는데?”
까치발을 들어 길게 목을 빼 봐도, 손차양을 만들어 게슴츠레 눈을 떠 봐도. 이렇다 할 문은 보이지 않는다. 혹시라도 마족에게 들킬까 최대한 몸을 사리며 건너편까지 살펴본 카델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한참을 침묵한 채 뭔가를 가늠하던 요젠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다섯 개……. 입구는 총 다섯 개야. 전부 다른 곳으로 이어져 있는 것 같은데, 도착지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어.”
다섯 개의 입구. 그 말을 들은 기사단은, 반사적으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딱 다섯 명이네요.”
작게 중얼거린 반이 염려스러운 눈빛으로 카델을 바라보았다. 이미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카델의 대답은 반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럼 한 명씩 흩어져서 찾아보는 수밖에. 도착지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다 같이 몰려다니는 건 시간 낭비야. 요젠. 입구가 어디 있는지 보여 줄 수 있어?”
“근처야. 따라와.”
요젠의 걸음이 멈춘 곳은 아무것도 자리하지 않은 성의 벽면이었다. 근처에 문이 숨겨져 있을 만한 장소도, 구멍도 없다. 의아해하는 동료들의 앞에서, 암기를 두른 요젠이 벽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벽의 위에서, 스며든 암기가 어떠한 형태를 이루기 시작했다.
다섯 개의 원. 손바닥만 한 크기의 검은색 원이 일정한 간격을 둔 채 일렬로 늘어섰다.
“원하는 곳에 서. 이 부근에 손을 올리면, 장치와 이어진 장소에 도착하게 될 거야.”
어느 곳에 라이돈이 있을지, 어느 곳이 가장 위험할지. 알아낼 방법은 없다. 단원들은 카델을 가장 안전한 곳에 보내고 싶어 했으나, 장치를 찾아낸 요젠조차 이어진 장소를 알지 못했다. 그들은 선뜻 위치를 잡지 못한 채 심각한 얼굴로 고민했다.
그리고 그런 단원들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거침없이 나선 카델이 중앙의 원을 선택했다.
‘가운데가 가장 손이 잘 가니까. 이곳이 에밀리아와 연관이 깊은 장소일 확률이 높겠지. 에밀리아가 라이돈을 옆에 두고 있을 것 같진 않지만, 다른 사람이 에밀리아를 상대하는 것보단 나아.’
물론 라이돈을 찾는 게 가장 중요하지만, 뿔뿔이 흩어진 단원들이 마왕을 맞닥뜨리는 위험도 피해야 했다. 잠시 고민하던 카델이 부하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들 에밀리아의 얼굴은 기억해 뒀지? 만약 도착한 곳에서 에밀리아를 만나게 된다면, 상대하지 말고 바로 도망쳐. 동료를 찾을 생각도 말고, 벽을 부숴서라도 정문으로 뛰쳐나가. 죽을 각오로 정문을 부순다면 아군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여기까지 와서 부하들의 안전을 위한답시고 물러날 수는 없다. 하지만 무턱대고 그들을 사지로 몰아넣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정작 본인은 에밀리아를 상대할 계획을 세우면서도, 카델은 부하들에게 안전을 당부했다.
“그럼 나는 가장 왼쪽에 있는 원을 고르도록 하지.”
루멘이 고른 원을 첫 번째로, 두 번째 원은 가르엘, 세 번째는 카델, 네 번째는 요젠, 다섯 번째는 반의 차지가 되었다. 순서대로 자리에 선 그들이 원의 위로 손을 올리기 직전. 크게 숨을 들이쉰 카델이 말했다.
“라이돈은 살아 있어. 그러니 어떻게든 되찾아서, 함께 성을 빠져나가자.”
모두의 눈빛으로 결연함이 스쳤다. 뿔뿔이 흩어져 적의 거처에 침입하는 행동은 분명 성급하고 경솔한 짓이다. 그럼에도 단원들은 동료인 라이돈을 위해, 그리고 사랑하는 카델을 위해 무모한 선택을 강행했다. 가장 먼저 벽에 손을 올린 카델을 선두로, 짙은 암기가 그들의 전신을 휘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