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4화 (454/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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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치를 타고 넘어와 반사적으로 감은 눈을 뜨기 전까지. 가르엘은 자신이 라이돈을 찾게 되리라 확신했다. 왜냐하면 그가 도착한 장소에선 끔찍한 비명과 피 냄새가 진동했으니까. 라이돈은 아마 인질로서 붙잡혔을 테고, 인질이 된 요정에게 포근한 잠자리와 따뜻한 차가 주어졌을 린 없다.

하지만 눈을 뜬 가르엘을 반기는 것은, 고문당하다 동료를 발견해 기뻐하는 라이돈도, 그런 라이돈이 있을 법한 고문실도 아니었다.

“대체 어디서 나는 비명이려나.”

비명은 여전하다. 피 냄새도 진동한다. 하지만 그가 선 공간의 어떤 것도 이 두 가지와 연관이 없었다. 이곳은 누군가의 연구실처럼 보였다. 곳곳에 약재로 추정되는 약초와 물약, 가루, 심지어는 수술 도구까지 정갈하게 진열돼 있다. 줄줄이 늘어선 책장의 무수한 책들 역시 온통 치료와 관련된 것들.

“불사의 약이라도 개발하고 있는 건가.”

안 그래도 목숨줄이 긴 녀석들이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영생을 꿈꾸는 걸 수도 있었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가설이다.

가르엘은 책과 약재들로 가득한 연구실을 조심스럽게 거닐었다. 구석에 자리한 책상에는 연구 일지로 추정되는 노트들이 몇십 권씩 쌓여 있다. 그 옆에 놓인 기다란 테이블에는 배합하다 만 약초들이 나뒹굴었고, 완성된 물약도 몇 개 놓여 있었다. 그중 한 물약의 뚜껑을 열어 깊이 냄새를 들이마신 가르엘이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뭐가 이렇게 독해?”

머리를 강타하듯 아찔한 향이었다. 이곳은 상당히 흥미가 돋는 공간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제게 마족들의 은밀한 실험을 파헤칠 시간은 없다. 대충 책상을 더듬어 가장 얇은 일지 하나를 품에 넣은 가르엘이 퍼뜩 고개를 돌렸다.

“……아하. 저기서 나는 소리였나 보네. 실험체라도 가둬 둔 건가? 라이돈 경은 없었으면 좋겠는데.”

갈라진 책장 사이, 지하로 내려가는 좁고 긴 계단이 보였다. 불빛 하나 비치지 않는 계단이었으나, 저 아래에 숨겨진 장소가 있음은 분명했다. 하지만 가르엘은 곧장 계단을 내려가는 대신, 숨을 죽인 채 건너편에 자리한 책장 뒤에 몸을 숨겼다.

‘원래는 숨겨져 있어야 할 계단이다. 그게 훤히 드러나 있다는 건, 이 방의 주인이 아래로 내려갔다는 말일 테니……. 숨어들려면 녀석이 나가는 걸 확인한 뒤가 좋겠지.’

괜히 적을 마주쳤다가 소란을 일으키면 곤란하다. 저 혼자 들키는 것이라면 몰라도, 자신이 발각됨으로써 다른 동료들까지 위험에 처할 수 있었으니.

‘너무 오래 걸리면 곤란한데.’

가르엘의 걱정과는 달리, 곧 계단에서부터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가르엘은 책장에 바짝 몸을 붙인 채 소리에 집중했다. 책 한 권을 빼 그 사이로 시선을 옮기자, 정확히 계단의 입구가 보였다.

규칙적인 발소리를 따라 바깥으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등불을 들고 있는 듯, 환한 불빛이 계단의 입구를 비추며 기다란 그림자를 새겼다. 가르엘은 숨도 쉬지 않은 채 그 모습에 집중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한 명의 고위 마족이 계단을 빠져나왔다.

“쯧. 이런 때까지 떨거지들을 돌봐야 하다니. 위신이 떨어지니 잡일을 도맡는 게지. ……폐하께서 들르실 수도 있으니, 간단히 정리만 해 둘까.”

아주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를 닮은 눈부신 백발과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사내.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가르엘의 친족.

‘로렌스 하이웨일…….’

예상치 못한 백부의 등장에, 가르엘의 눈빛이 거칠게 흔들렸다.

서재. 요젠이 판단한 이 공간의 정체는, 마왕의 서재였다. 정갈하게 정리된 책과 문서, 은은하게 감도는 커피 향과 체취를 따라 하듯 넘실대는 마기. 마왕의 서재이니 무언가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요젠은 앞을 보지 못한다. 무엇에 중요한 정보가 담겼는지, 종이를 매만진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아쉽네.’

전쟁의 승리와 가까워질 정보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카델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가져가지 못한다는 사실에 아쉬움이 느껴졌다.

‘라이돈도 이곳엔 없어. 숨겨진 공간도 없고. ……여긴 탈락이야.’

완전히 허탕이었다. 차라리 자신이 아닌 다른 동료가 이곳에 도착했다면 좀 더 쓸모가 있었을 테다. 불편한 심기를 따라 반듯한 미간에 금이 갔다.

‘별수 없지. 빠져나가자.’

아무리 아쉬워도 이곳에서 꾸물거릴 시간은 없다. 요젠은 서재를 빠져나가 라이돈을 찾거나, 다른 동료들과 합류하기를 택했다. 그러나 그가 서재의 출구를 향해 한 걸음을 뻗은 순간.

‘……기척.’

서재를 향해 다가오는 발소리가 감지됐다. 성의 구조도 제대로 모르는 채 은밀히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잠시 고민하던 요젠은 서재의 한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짙은 암기를 흩뿌리고, 숨소리를 포함한 모든 기척을 죽였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서재의 문이 열렸다.

“…….”

안으로 들어선 그녀는 문을 닫고 잠시 그 앞에 멈춰 섰다. 뭔가의 낌새라도 느낀 듯 자리를 지키던 그녀가 이내 아무렇지 않게 걸음을 옮기고. 그녀의 기운이 서재의 마기를 가로지르는 순간. 요젠은 깨달을 수 있었다.

저 여자다. 저 여자가 바로 마계의 왕. 정확한 신분을 알고 싶다면 암기를 묻혀 윤곽을 더듬으면 되겠지만, 요젠은 그러지 못했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것은 그가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지독할 만큼 순도 높은 마기. 악질적이기까지 한 마기는 고민할 것도 없는 마왕의 기운이었다.

이게 마왕의 기운이 아니라면, 이보다 더 지독한 기운이 있다면. 인간은 마족을 이기지 못한다. 그런 생각이 들 만큼 강한 힘이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마기만으로도 그 사실을 절감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낮은 한숨과 함께 서재의 책상에 앉아, 미지근해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의 모든 행동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요젠은 실로 오랜만에. 원초적인 공포를 느꼈다.

그것은 어릴 적, 핏물을 뒤집어쓴 채 마물에게 쫓기던 때의 공포였다. 어떤 수를 써도 격차를 좁힐 수 없는 상대와의 갑작스러운 대면. 그 상대가 뿜어내는 살기가 자신을 향하고 있을 때의, 주체할 수 없는 생존 본능과 무력감.

‘내 존재를 눈치챘어.’

이 서재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에밀리아는 요젠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다. 기척을 눈치챘다기보단, 그의 암기를 감지한 것이다. 경지에 오른 뒤로는 그 어떤 적에게도 발각당한 적이 없건만. 에밀리아는 본인이 마계의 왕임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단박에 이질적인 기운을 찾아냈다.

대놓고 살기를 드러내면서도 섣불리 공격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녀가 여유를 가졌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때문에 요젠은 먼저 행동에 나섰다. 그가 구석에서부터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자, 에밀리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녀는 요젠에게 훤히 등을 보인 채, 문서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살아 나갈 생각은 마. 내 공간에 발을 들인 인간을 살려 줄 만큼, 난 너그럽지도, 멍청하지도 않아.”

“…….”

“혼자 들어왔을 리는 없고. 친구들과 함께 왔나 보구나. 아마도…… 셀레브를 위해 열어 둔 문을 통해 들어왔겠지. 정말이지, 못 말리는 아이라니까.”

조곤조곤, 듣기 좋은 목소리가 서재를 울렸다. 그러나 요젠은 느낄 수 있었다. 서재를 채운 마기가 점점 짙어지고 있음을. 그 기운이 그의 숨통을 옥죄어 왔다.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 생각하면서도 한 걸음을 뻗기가 어려웠다. 움직이는 그 순간, 마왕과 대적하게 될 테니.

에밀리아는 잔에 남은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신 뒤, 문서를 내려 두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느긋하게 몸을 돌려 정확히 요젠을 바라본 그녀가 책상을 짚은 채 미소 지었다.

“다행히 훔쳐 간 건 없네. 가진 게 있으면 죽일 때 신경 쓰이거든.”

그와 동시에, 그녀의 몸에서부터 암흑의 마기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반사적으로 암기를 끌어 올린 요젠이 서재의 문을 향해 몸을 던졌으나.

“말했잖아. 살아서는 못 나간다고.”

눈 깜짝할 새 문 앞으로 위치를 옮긴 에밀리아가, 요젠의 복부로 손을 뻗었다.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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