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6화 (456/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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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하군요, 시시해. 고작 이 정도 실력으로 마왕 성을 노렸던 건가요? 이야, 이 어찌나 우둔한 종족인지. 감탄이 나올 정도군요.”

부채로 입을 가린 아틀라스가 조롱하듯 눈을 휘었다. 그의 앞에는 도발에 반응하듯 눈을 치뜨면서도, 중심 하나 제대로 잡지 못하는 드레프가 있었다. 온몸에 가시처럼 박힌 깃털을 단 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연신 휘청거렸다.

그러나 쓰러질 수 없었다. 이곳에 있는 누구도 함부로 적들의 앞에 무릎을 꿇지 않았으니.

“4대대는 장막을 준비해라! 곧 음파 공격이 시작될 거다!”

머리에서 흐르는 피가 얼굴의 반절을 덮은 엑토도.

“화살이 준비됐다! 2대대, 주변을 정리해!”

한쪽 어깨를 베이고도 활을 놓지 않는 모리톨도.

“날개를 노려라. 놈들을 전장으로 끌어 내리는 거다.”

“부상자를 우선으로! 마력을 아끼지 마라!”

함께 싸우는 동맹군의 단장들, 그들의 기사들도. 온몸이 꺾이고 부러졌음에도 결코 쓰러지지 않았다. 그러니 언젠가 아버지를 뛰어넘을 기사가 될 자신이 이곳에서 무릎을 꿇을 순 없었다.

하지만.

“여러분은 절대 이 문을 넘지 못합니다. 성의 문턱조차 밟아 보지 못한 채, 볼품없이 쓰러지게 되겠지요. 그런 결말을 바랍니까? 물론 저는 바랍니다!”

성문을 지키는 고위 마족은 너무도 강력했다. 전투 내내 마족들은 여유를 잃지 않았고, 기사들은 필사적이었다. 그런데도 정문에 흠집 하나 내지 못하고 있었으니.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에 드레프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아니. 만약 우리가 정문을 열지 못한다 해도, 방법은 남았다.’

죽지 않고 버티는 것만으로도, 어쩌면. 매번 이런 상황에서 그 녀석들에게 희망을 건다는 점이 자존심이 상했지만. 인간계의 명운이 걸린 전투에 자존심을 운운하는 것도 우스웠다.

드레프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 몸을 바로 세웠다. 교차한 쌍검에 기운을 불어넣은 그가 아틀라스를 조준하자,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공격의 대상이 조소를 흘렸다.

“한 뼘조차 떠오를 수 없는 하찮은 종족이 어떻게 마족을 상대하겠다는 건지.”

“닥쳐. 자만하는 것도 거기까지다.”

응축된 검기에서부터 공명음이 퍼졌다. 한 번, 두 번, 공명음이 늘어날 때마다 검기에 맺힌 빛이 거대해지고. 이제까지와는 다른 공격의 전조에 아틀라스의 눈빛으로 흥미가 스쳤다.

본래 기운의 다섯 배를 담은 검기. 아틀라스는 지금 자신을 완전히 얕보고 있다. 그의 말대로, 이 ‘하찮은 종족’의 일격을 피할 리 없다. 오만한 마족은 어떻게든 이 일격을 받아치려 할 것이다.

‘이 일격에 내 모든 걸 담는다.’

성문과 가장 가까이 있는 아틀라스를 해치울 수 있다면. 문에 몸을 던져 밀어 보기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뒈져 버려!”

드레프의 혼신의 일격이 아틀라스를 노리고. 그의 예상대로, 아틀라스는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펼쳐져 있던 부채를 접어 거대한 검기를 튕겨 내려 했다.

“……오호라.”

하지만 검기는 튕겨나지 않고 계속해서 아틀라스를 밀어붙였다. 그가 쥔 부채에 떨림이 더해지며, 내내 여유롭던 표정에 균열이 일었다. 모든 기운을 뽑아낸 드레프는 땅에 검을 처박은 채 아틀라스를 지켜보았다.

서 있는 것이 고작인 몸이다. 저 일격이 먹히지 않는다면, 자신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리 생각한 순간.

“제법 흥미롭지만, 이게 마지막이겠죠?”

강한 충격파가 대지를 휩쓸며, 기어이 검기를 튕겨 낸 아틀라스가 호쾌하게 부채를 펼쳤다. 튕겨 낸 검기는 성벽에 처박혔으나, 그 위를 감싼 마기를 살짝 흩뜨렸을 뿐. 벽을 허물어뜨리지조차 못했다.

“젠장…….”

목숨을 걸어도 이길 수 없단 말인가. 잊고 있던 절망감이 몰아치며, 드레프가 탄식 같은 숨을 몰아쉬었다.

이젠 끝이었다. 자신에겐 아틀라스를 상대할 힘이 없다. 놈이 다른 기사들을 방해하기 전,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끄는 것이 최선이겠지.

그러나 아틀라스는 드레프를 공격하지 않았다.

“음……?”

끼기긱. 끼긱.

굳게 닫혀 있던 정문에서부터 쇳소리가 울리며, 문을 감싸던 마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반사적으로 정문을 바라본 드레프의 눈빛이 멍하게 흐려졌다.

“열리고… 있어……?”

조금씩 벌어지는 정문의 틈새로, 익숙한 얼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뭘 멀뚱멀뚱 서서 쳐다보고 있어. 봤으면 도우라고, 망할 귀족 놈들.”

반 헤르도스. 피 칠갑이 된 그의 얼굴을 알아본 드레프의 얼굴로 경악이 스쳤다.

“무, 문을! 문을 열어라! 적린 기사단이 정문을 열었다! 어서 도와!”

다급하게 외친 드레프가 없던 힘까지 끌어모아 허겁지겁 정문으로 달려들었다. 틈새로 손을 집어넣어 힘껏 당기자, 짙은 피 냄새가 진동을 했다.

“대체 어떻게……. 안쪽의 놈들은 뭘 한 거지?”

잠시 얼빠진 채 정문을 바라보던 아틀라스가 미간을 좁히며 부채를 휘둘렀다. 대체 뭘 어떻게 하면 인간이 성벽 안쪽에서 문을 연단 말인가.

성벽 너머에도 대기 중인 인원은 있다. 그런데도 고작 인간 몇을 막지 못해 문을 뚫리게 만들었단 말인가? 지금 같은 상황에 잠이라도 자는 것인지.

분노를 담아 마구 부채를 휘두르자, 매서운 깃털 비가 정문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하지만 등을 보인 드레프도, 문 틈새로 얼굴을 내민 반도. 아틀라스의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돌격! 돌격해라!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

그들의 위로 몇 겹의 장막이 드리웠다. 드레프의 외침을 들은 아군이 기세를 높이기 시작한 것이다. 각 단장의 호령을 따라 기사들은 미친 듯이 정문을 향해 달려들었고, 그들의 눈빛에는 광기마저 어렸다. 두 번 다신 찾아오지 않을 기회. 적린 기사단이 만들어 준 이 기회를 붙들어야만 마왕 성에 들어설 수 있다.

“뭣들하고 있는 거야, 막아!”

정문이 열린 좁은 틈. 그 얄팍한 가능성 하나에 전세가 완전히 뒤집혔다. 답이 보이지 않는 전투에 지쳐 있던 기사들은 하나의 희망에 매달려 악귀처럼 검을 휘둘렀다. 마법사들 역시 제 방어는 뒤로한 채 정문을 밀어 내는 이들을 우선으로 보호했다. 이 기세를 이어야 했다.

“망할, 더럽게 무겁군……!”

온몸의 체중을 실어 밀어 대도 문은 생각만큼 빠르게 열리지 않았다. 전부 문을 감싼 마기 때문이리라. 반은 바득바득 이를 갈며 너머에서 문을 당기고 있는 드레프를 노려보았다.

“힘이 그것밖에 안 돼? 빨리 당기라고!”

“최, 최선을 다하고 있, 거든……! 그쪽 기사들이야말로, 밀고 있는 거 맞아?”

반박하듯 따지는 드레프에게 반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안됐지만 여긴 나 혼자거든. 나머지는 아직 성안이다.”

“뭐? 혼자?”

일순 문을 당기던 손에 힘이 빠져 버릴 만큼 황당한 발언이었다. 드레프는 똑바로 안 당기냐는 반의 윽박에 뒤늦게 자세를 가다듬었다.

‘혼자서 정문을 뚫었단 말이야? 그게 가능해? 이 자식은…… 괴물인가?’

피를 다루는 광전사라는 점도, 언제든 폭주해 아군을 공격할 수 있다는 점도.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지만 한 번도 그 위험성을 실감한 적 없었다. 그를 완벽히 통제했던 카델이라는 존재 때문이었다. 카델의 명령 아래, 반은 언제나 묵묵히 기사들을 도와 왔다. 물론 지금도 역시 그는 기사들을 돕고 있었으나.

“서두르라고. 까딱하면 사지가 날아갈 위기니까. 빨리 열어서 적이 있는 곳으로 보내 달란 말이야.”

카델이 없는 반 헤르도스는, 그야말로 광전사. 피에 미친 괴물처럼 살기로 가득했다. 드레프는 반의 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도 못했으면서 필사적으로 문을 당겼다. 그동안 도착한 다른 기사들이 합류하며, 정문의 틈새가 빠르게 벌어지고.

“우와아아아!”

“달려라! 마왕 성이 코앞이다!”

기어이 입을 벌린 정문에, 기사들이 환호하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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