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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론도 카델도. 전부 잃은 라이돈에게 이 세계는 더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세계의 멸망. 정확히 말하자면 마계의 몰락이었다.
그는 제가 가진 모든 마력, 핀하이족의 능력, 물려받은 헤소니아의 권능, 타고난 생명력. 그 모든 것을 끌어내 방출했다. 과도한 기운의 방출을 이미 넝마가 된 몸이 버텨 줄 리 만무했고, 온몸을 적신 피는 마를 새가 없이 그의 전신을 타고 내렸다.
“카델, 카델, 카델……. 나, 이러고 싶지 않았어…….”
얼굴을 감싼 손 틈새로 일그러진 눈매가 비쳤다. 울음을 따라 하고 있으나, 망가진 몸뚱이는 눈물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붉은색의 얼음송곳이 그의 피부를 찢고 튀어나왔다. 끊임없는 고통에 일일이 반응하기도 질릴 정도였다.
이성은 한 가닥이 남았을 뿐이고, 그마저도 끊어지기 일보 직전. 간신히 남은 이성이 유지하고 있는 것은 지하 감옥을 틀어막은 얼음벽이었다.
그 벽이 무너지는 순간, 라이돈은 이 땅의 모든 것이 얼어붙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랬기에 분노하고 있음에도 섣불리 벽을 허물어뜨리지 못했다. 이곳에는 하이론도, 카델도 없는데.
그를 망설이게 하는 것은 여전히 살아 있을 동료들이었다.
포악하고 한심한 반과 재수 없고 잔소리 많은 루멘, 냄새나고 짜증 나는 가르엘, 칙칙하고 내숭만 부려 대는 요젠.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는 그들이, 마지막 이성의 끈을 붙들게 했다.
“일어나 줘, 카델……. 날 좀 막아 줘…….”
동료들의 존재가 아른거리는데도 어째서 계속 그들이 떠오르는지 알 수 없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머릿속이 흐려졌다. 내면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생각도, 감정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되어 갔다.
“나, 이제 곧…….”
하얗게 얼어 가는 눈동자 위로 다소곳이 누운 카델의 시체가 새겨졌다. 조금 전 올려 두었던 심장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어째서 심장이 보이지 않는지, 사라진 심장이 어디로 갔는지. 고민할 만한 이성은 지금의 라이돈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라이돈의 고통스러운 절규와 함께, 얼음벽에 균열이 일었다.
눈을 뜨자마자 느껴지는 것은, 의식을 되찾은 보람도 없이 다시 기절할 것 같은 추위였다. 카델은 서둘러 불의 장막을 두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가 두 발을 딛고 서기가 무섭게, 강력한 냉풍이 충격파처럼 몰아쳐 몸을 떠밀었다.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올린 카델이 너머의 풍경을 담아냈다.
“라이……!”
이름조차 제대로 부를 수 없었다. 입을 여는 즉시 혓바닥을 난도질하는 듯한 추위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카델은 자신의 맞은편에 자리한 단단한 얼음 고치를 살폈다. 투명한 얼음 결정 속에는 아이처럼 웅크린 라이돈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에서부터 강력한 기운의 파동이 끊임없이 번졌다.
몸의 절반 이상이 얼음송곳에 꿰뚫려 만신창이가 됐다. 완전히 의식을 잃은 그에게선 모든 생명력을 뽑아내겠다는 듯 살벌한 마력이 들끓었다.
초 단위로 강해지는 마력은 카델조차 감당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폭주와는 달랐다. 라이돈이 폭주의 위협에 시달렸을 때, 카델은 어렵게나마 그의 곁에 다가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한 발짝도 다가갈 수 없어. 다가가는 순간 죽는다.’
이 상태로는 그에게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이를 악문 채 필사적으로 라이돈을 바라보던 카델의 시선이 움직였다. 얼음으로 뒤덮인 하얀 복도의 끝. 감옥의 유일한 출입구를 봉쇄한 얼음벽. 벽에 새겨진 균열이 서서히 벌어지며,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위태롭게 흔들렸다.
‘저게 무너지면 성은 물론 근처에 있을 아군까지 얼어 버릴 거야.’
라이돈의 마력이 감옥을 벗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 그전에 라이돈의 마력 방출을 멈춰야 했다. 하지만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빼앗긴 심장을 돌려받는 동안, 카델은 라이돈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광기 어린 행동과 표정, 두려울 만큼 생생한 살기. 동시에 그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지독한 슬픔과 두려움을 감지했다.
그것은 카델만이 알아챌 수 있는 라이돈의 진심. 의식을 잃기 직전, 라이돈은 제게 도움을 청했다. 소리가 들리지 않음에도 알 수 있었다. 이 불쌍한 요정이 원치 않는 위기에 직면했음을.
‘한계 돌파 같은 게 아니야. 이건…….’
슬픔의 표출이었다. 상실의 고통이었고, 무력함에 대한 분노였다. 그 끔찍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이겨 내지 못했기에 라이돈은 무너졌다. 그리고 자신은, 라이돈의 심장이 바스러지는 동안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한 채 그를 두렵게 만들었다. 만약 라이돈이 이곳에서 죽는다면 그것은 온전히 자신의 탓.
‘네가 죽으면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의 죽음이 곧 세계의 종말이었다.
‘만약 이 세계를 구하지 못한대도, 너희만큼은 구할 거야.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라도 살아가게 할 거야. 나를 기억하는 너희가 죽도록 놔두지 않아.’
바람에 밀려나는 몸에 굳이 힘을 주어 버티지 않았다. 카델은 라이돈이 매달려 있던 벽면에 등을 대고 앉아 정좌를 틀었다. 그리고 차분하게 마력을 끌어 올렸다. 장막은 얼어죽지 않을 정도로만 유지하면 충분했다.
맞은편에 자리한 라이돈을 똑바로 응시하며 자신이 가진 모든 마력, 그 이상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라이돈이 목숨을 걸고 자신을 살리려 했으니, 자신도 보답해야 했다. 그의 심장이 얼어붙지 않도록. 그의 생이 허무한 끝을 맞이하지 않도록. 목숨을 걸고 구해 내리라.
라이돈의 기운을 상대하려면 그만한 마법이 필요했다.
‘네가 살아 있다면 결국 해피엔딩이야.’
지하 감옥의 진동이 극심해졌다. 라이돈의 마력 때문이 아니었다. 카델을 둘러싼 대기가 눈에 띄게 불안정해지며, 그가 앉은 땅이 미친 듯이 진동하고 있었다. 검은 머리칼과 긴 속눈썹, 뺨과 손등으로 선명한 불씨가 튀어 올랐다.
카델의 숨결에선 더 이상 입김이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가 들어간 감옥에는 얼음이 녹아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 물방울을 모조리 증발시키며 벽면을 타고 오르는 불. 온통 하얗게 얼어붙은 지하 감옥 속에서, 카델이 앉은 방만이 뜨겁게 불타고 있었다.
카델은 그 열기를 생생하게 느꼈다. 몸이 오그라드는 듯한 끔찍한 열기. 내장이 타들어 가고, 피부가 그을리고, 모든 감각이 몸부림치는 고통.
그는 불타고 있었다.
“끄으…… 윽…….”
이를 악물고 버텨도 어쩔 수 없이 신음이 새어 나왔다. 몸이 비틀렸고, 손발이 덜덜 떨렸으며, 우악스러운 고통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럼에도 카델은 마력을 끌어 올리는 것을, 불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라이돈을 생각하면 그것이 가능했다. 그가 겪었을 고통을, 견뎌야 했을 모든 불행을 생각하면. 몸이 불타는 것쯤은 견딜 수 있었다.
그러니 이 마법은 [연심戀心]이다. 모든 고통을 딛고도 그를 사랑하는, 절망에 빠진 그를 구해 낼 유일한 마음.
붉은 불꽃이 카델의 몸을 뒤덮었다. 그는 여전히 불탔으며, 고통 또한 사그라질 줄을 몰랐다. 그러나 그의 몸은 재가 되지 않았다. 온몸이 불타는 고통 속에서도 끝끝내 일어섰다.
그렇게 똑바른 걸음이 이어지고, 그가 감옥의 바깥을 디뎠을 때. 발끝에서부터 번진 화염이 불의 파도처럼 삽시간에 복도를 휩쓸었다. 라이돈의 얼음 위에서 춤을 추듯 하늘거리고, 위태롭던 얼음벽을 완전히 깨부순 뒤, 새로운 화염으로 뒤덮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강렬한 냉기가 감옥을 휩쓸며 불꽃을 꺼트렸다. 그것을 시작으로 두 마법사의 마력이 서로 경쟁하듯 몸집을 불려 댔다. 초 단위로 공간을 압도하는 힘의 종류가 뒤바뀌었다. 얼어붙이고, 불태우고, 꺼뜨리고, 녹여 냈다.
카델은 조금씩 라이돈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럴수록 냉기는 거세졌고, 화염 또한 강해졌다. 충돌하는 기운의 파동을 견디지 못한 지하 감옥의 천장에 균열이 일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아슬아슬한 공간 속에서, 카델의 손끝이 기어이 얼음 고치에 가 닿았다. 일순 감옥을 불태우던 화염이 모조리 사그라지며, 폭풍처럼 몰아친 냉기가 몸집을 불렸다.
카델의 시선이 얼음 고치를 짚은 왼팔을 향했다. 뾰족한 얼음 가시에 뒤덮인 만신창이의 팔. 왼팔을 얼어붙인 얼음은 화염조차 가둔 채 더 이상의 접근을 금했다.
그럼에도 카델은 제 오른팔과 배, 가슴, 그리고 뺨을 가져다 대었다. 결국 남은 것은 얼음 속에 파묻힌 한 움큼의 불꽃. 얼음 고치와 한 몸처럼 얼어붙은 카델은, 그의 얼음 속에서도 여전히 불꽃을 머금은 입술을 달싹였다.
“구해 줄게, 라이돈. 너는 손만 뻗으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