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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대체…….”
“무시해, 도련님! 무시하고 달려!”
무시가 가능하단 말인가. 루멘은 잠시 뒤처졌던 속도를 높이면서도, 하늘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성이 움직이고 있었다. 틀어지고 비틀리며 몸부림쳤다. 차례차례 천장이 무너졌으나, 외벽은 멀쩡했다. 견고하게 형태를 유지하며 하늘로 떠올랐다.
그들이 선 위층도, 그 위층도, 그 위층의 위층까지. 뻥 뚫린 천장의 위로 비친 것은, 분리된 채 떠오르는 성의 상층부. 떨어지는 천장의 파편을 따라 성의 상층부와 하층부 사이의 거리는 멀어지기만 했다.
‘이런 식으로 라이돈의 자폭에서 벗어나려는 건가? ……아니. 처음부터 계획된 일이었을 거다. 인간들이 성으로 침입하는 순간, 성을 분리해 도달하지 못하게 할 작정이었던 거야.’
타고 오를 계단조차 없는 하늘 성에 들어갈 수 있을 리 없다.
‘아무래도 평화의 돌은 저곳에 있나 보군.’
허의 허를 찔러 돌을 하층부에 남겨 둔 것이 아니라면, 인간군이 원하는 보물은 필시 저 하늘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들이 가야 할 곳은 하늘이 아니다.
“더럽게 복잡하게도 만들어 놨군.”
요젠의 분신은 한시도 쉬지 않고 질주했다. 숨겨진 통로를 지나고, 구석에 박혀 있던 문을 부수고, 여러 갈림길을 헤치며 아래로 향했다. 그렇게 개미굴처럼 복잡한 성내를 쉼 없이 달려간 결과.
“……드디어 도착했다.”
반과 루멘은 앞에 자리한 화염의 벽을 응시했다. 뜨겁게 불타오르는 불꽃은 너머의 무엇도 비추지 않았다. 이 불꽃이 얼마나 깊고 길게 이어져 있을지, 그들로서는 알아낼 방도가 없었다.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 너머에 카델이 있다는 것. 그리고 라이돈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겁나면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어라.”
“혼잣말을 시끄럽게도 하는군. 닥치고 따라와.”
이 불덩이 속에 몸을 던져야만 그들을 구할 수 있다면, 고통쯤은 기꺼이 감내할 수 있다. 화염 너머로 사라진 분신을 따라 반이 거침없이 몸을 던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피해!”
이글거리는 화염을 뚫고, 날카로운 얼음 결정이 폭발하듯 솟구치기 시작했다. 반사적으로 반을 끌어 얼음을 피한 루멘의 미간에 금이 갔다.
“도망쳐라!”
“시끄러워! 나도 눈이 있다고!”
강렬한 화염을 모조리 집어삼킨 얼음이 창날처럼 위협적으로 몸집을 불리기 시작했다. 두 남자는 빠른 속도로 면적을 넓히는 얼음을 피해 반대편으로 내달렸다. 하지만 폭발하는 얼음의 냉기는 그들의 몸을 순식간에 둔화시켰고, 넓게 깔린 빙판 위에서는 속력을 낼 수도 없었다.
그렇게 두 남자의 등 뒤로 새하얀 마수가 뻗친 순간.
쾅! 콰과과광!
안쪽에서부터 울린 엄청난 폭음과 함께, 그들의 몸 위로 뜨거운 열기가 휘몰아쳤다.
마력관이 허용하는 마력의 흐름 그 이상. 카델이 바라는 위력은 시전자의 몸을 극심하게 손상시켜야지만 실현이 가능했다. 자살이나 다름없는 방식이었으나, 그는 그렇게라도 제 한계를 뛰어넘길 바랐다. 미래에 대한 계획은 없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라이돈의 목숨이었으니.
한 번의 폭발에 장기가 터져 나가는 듯한 끔찍한 고통이 번졌다. 실제로 터져 나갔을지도 모른다. 연속된 고통의 절정은 빠른 속도로 그를 무아지경의 상태로 몰아갔다.
절제라곤 찾아볼 수 없는 마법에 그가 끌어안은 얼음 고치에선 조금씩 균열이 일었고, 그만큼 강해진 냉기는 지하 감옥을 뚫고 성을 집어삼키려 했다.
이 방대한 마력을 모조리 압도해야만 라이돈의 폭주를 막을 수 있다. 때문에 카델은 제 생명력을 끌어다 마구잡이로 난사했다. 결국 그의 기운이 라이돈의 자폭과 다를 바 없는 양상을 띠기 시작한 순간.
[언제쯤 네 목숨을 소중히 할 셈이냐.]
비늘 갑옷이 전신을 감싸며, 계속된 폭발과 냉각에 너덜거리던 살갗을 보호했다. 카델은 자신의 안에 들어차는 풍족한 기운을 느끼며 멀어지던 의식에 힘을 주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믿기 어렵겠지만 굉장히 서두른 거다. 이 몸이 눈을 뗀 사이에 반쪽이, 네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상상하니 간담이 서늘해지더군.]
다시 돌아와 살핀 카델은 상상 그 이상의 미친 짓을 감행하는 중이었다. 쿤라는 자신의 기운으로 서둘러 카델을 회복시키고는, 인간형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시선이 자연 발화라도 하듯 지독한 화마에 잡아먹힌 카델을 향했다.
“나, 나오지 마요……. 나에게 기운을…….”
“요정의 각성에 이 이상 개입할 순 없다. 네가 계속 녀석을 도우려 한다면 더는 힘을 보태지 않을 거다.”
“쿤라……!”
괴롭게 일그러진 표정과 달달 떨리는 몸. 가만히 서 있는 것조차 끔찍한 고통이라는 듯 사지를 비틀면서도, 자신을 향한 원망의 눈빛만큼은 선명했다. 쿤라는 그런 카델의 원망을 고스란히 받아 내며 말했다.
“라이돈을 돕지 마라, 반쪽이. 네가 죽는다면 녀석 역시 살아남을 수 없어.”
“놔뒀다간 라이돈이 죽어요! 죽어 버린다고……!”
“네 죽음은 무엇도 구원할 수 없어. 그 사실을 인정하고, 녀석이 스스로 일어서도록 도와라. 그래야 너희 둘, 모두가 살 수 있을 테니.”
어떻게 스스로 일어서도록 돕는단 말인가. 이미 의식을 잃은 라이돈을 대체 어떻게. 카델은 쿤라에게 반항하듯 더욱 강한 마력을 끌어 올렸으나, 그 행위가 오래가지는 못했다.
“단장! 거기 있어요?”
“대답해, 대장!”
저 멀리서 반과 루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본능적으로 그들의 음성에 반응한 카델이 흠칫 몸을 떨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방출하던 마력에 제동이 걸리자, 냉기가 더욱 거세지며 기운의 파동이 어지럽게 휘몰아쳤다.
“부, 부하들을 지켜 줘요, 쿤라.”
“선택해라.”
“쿤라, 제발……!”
반과 루멘이 이곳에 도착하면 지켜 줄 방도가 없다. 제대로 된 보호막이 없는 몸으로는 아무리 그들이라도 버티지 못한다. 반과 루멘까지 잃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카델이 간절하게 쿤라를 바라보았다. 고집스럽게 끌어안은 얼음 고치를 놓지 않고, 제 몸을 끝장내서라도 라이돈을 구해 내겠다는 집념을 드러낸다.
그제야 무감할 정도로 건조하게 카델을 응시하던 쿤라의 표정에 균열이 일었다. 비틀어진 입매와 엄한 눈빛엔 점점 짙어지는 분노가 새겨졌다.
“기운을 거둬라. 그래야 내가 널 지켜 줄 수 있어.”
“필요 없어요! 난 괜찮으니까, 내 부하들을……!”
말을 잇던 카델이 멈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쿤라가 얼음 고치 위로 손을 뻗은 것이다. 그의 손끝에서 피어오른 불꽃은 라이돈의 냉기에도 얼어붙지 않았다. 그러나 쿤라는 그 불꽃으로 얼음을 녹이지 않았다.
“제 세계는 물론 인간 하나 지키지 못하는 수호신. 그딴 수식어를 달고 연명할 생각은 없다. 네가 선택하지 못하겠다면 이 몸이 해 주지.”
“뭘 하려는 거예요.”
“네가 라이돈이 스스로 일어날 기회를 빼앗은 탓이다. 기어이 손을 내민 탓이고, 그런 주제에 저승에 몸을 담근 탓이야.”
“하지 마요! 라이돈 털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정신 차려라, 카델!”
쩌렁쩌렁한 호통에 카델이 질끈 눈을 감았다. 그를 바라보는 쿤라는 더없이 살벌한 표정으로 생생하게 분노를 쏟아 내고 있었다. 그것은 카델의 미련함에 대한 분노. 이야기의 종장까지 다다랐음에도 여전히 본인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질릴 정도로 맹목적인 희생에 대한 분노였다.
쿤라는 카델을 잃을 생각이 없었다. 만약 그가 라이돈을 죽인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세계를 구하길 포기해 버린대도. 그가 이런 식으로 목숨을 내버리게 두진 않을 것이다. 그것이 이세계의 감시자이자, 원치 않은 운명을 짊어지겠노라 맹세한 구원자에 대한 예의였으니.
쿤라는 살기를 드러내기를 망설이지 않았고, 카델은 그가 진심으로 라이돈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차오르는 배신감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어떻게 당신이 우리한테…….”
“네 사랑이 항상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건 아니야.”
쿤라를 막아야 한다. 그리 생각한 카델이 반사적으로 주의를 돌린 순간이었다.
“컥……!”
얼음 고치에서부터 마력이 폭발하며, 강력한 충격파가 카델의 몸을 튕겨 냈다. 미처 대비하지 못한 충격에 밀려난 몸이 지하 감옥의 복도를 가로질렀다. 아득해지는 의식과 함께 몸을 불태우던 불꽃이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안 돼……!’
어떻게 끌어모은 기운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마법을 끝낼 순 없었다. 그러나 한 번 힘이 빠진 몸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끝도 없이 날아가는 몸뚱이에 절망감을 느끼던 때.
“단장!”
단단한 무언가가 몸을 받치며, 익숙한 목소리들이 귓가를 울렸다.
“단장, 몸이……!”
“정신 놓지 마, 대장. 절대 눈을 감으면 안 돼.”
눈을 굴릴 기운조차 없다. 카델은 축 늘어져 자신을 받친 온기에 기댔다. 다소 충격적인 등장에도 반은 서둘러 그를 안아 들었고, 루멘은 카델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저곳에 라이돈이 있는 모양이지.”
“나는 일단 단장을 바깥으로 빼갈게. 이런 곳에 단장을 놔뒀다간 의식을 놓아 버릴 거야.”
“그래. 라이돈에겐 내가 가 보…….”
반과 루멘은 처참할 정도로 엉망인 상태의 카델을 우선적으로 빼내려 했다. 하지만 그들이 행동을 개시하기 전, 가까스로 몸을 움직인 카델이 반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나도…… 데려가…….”
“네……? 이런 몸으로 뭘 하겠다고요, 단장! 라이돈은 루멘 녀석이 알아서 구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쿤라가, 쿤라가 라이돈을 죽이려고 해.”
전혀 예상치 못한 발언에 반과 루멘의 눈빛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카델은 마법의 후유증이 남긴 고통에 몸을 움츠리면서도 꾸역꾸역 말을 이었다.
“자폭을 막아야 해. 그러지 못하면 쿤라가……. 날 데려가. 어서.”
데려가지 않는다면 기어서라도 갈 태세였다. 잠시 시선을 교환한 두 남자는 결국 카델과 함께 라이돈을 찾아가기로 결정했다. 그런 그들에게 불의 장막을 둘러 주려던 카델은, 이내 그들의 몸을 덮은 비늘 갑옷을 발견하곤 입을 꾹 다물었다.
‘당신이 하는 얘기가 무슨 뜻인지는 알아. 왜 지금 그런 말을 꺼냈는지도 알고. 하지만 나는…… 나는 절대 라이돈을 포기하지 않을 거야.’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사랑이래도, 전부 자기만족일 뿐이래도 상관없다. 카델은 몇 번이고 라이돈에게 손을 내밀 것이었다.
“저기 있다!”
앞서가던 루멘의 외침과 함께, 폭풍 같은 눈보라가 그들의 시야를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