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8화 (468/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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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평범한 유령 마을이 아니다. 하나의 거대한 장치지. 높은 곳에서 올려다보면, 이 무너진 건물들이 독특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거다.”

그런 말을 할 거면 등에 얹고 날아 주기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본인만 봤다고 끝이라니.

“무슨 형탠데요? 저도 좀 보고 싶은데.”

“알 거 없다. 어떤 식으로 장치를 조절해야 하는지는 내가 알아냈어.”

“아니, 혼자서 진행하지 말고 나도 좀…….”

“너희는 남쪽으로 이동해라. 반쪽이, 너는 왼쪽. 마족 혼혈, 너는 오른쪽을 맡아. 내가 신호를 주면 불덩이가 떠오른 건물을 찾아가 가장 높게 솟은 벽을 힘껏 밀어라.”

“사람 이름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요!”

배려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호칭에 발끈했으나, 쿤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되레 가르엘이 자신은 괜찮다며 카델을 다독여 주었다.

“진짜 짜증 나는 용대가리…….”

“친근하게 부르지 마라. 거기 마족 혼혈이 질투하지 않겠느냐.”

“정신 나갔어요?”

비웃음을 흘린 쿤라가 설렁설렁 손을 휘저었다. 더 이상 말 얹지 말고 지시에 따르라는 뜻이었다. 그 거만한 태도가 더욱 거슬렸으나, 더 이상의 시간 낭비는 사절이었다.

“상종을 말아야지. 가르엘! 이동하자!”

“그러죠.”

카델과 떨어지게 된 가르엘은 그가 하다 만 설명들이 아쉬운 눈치였으나, 더 캐묻는 대신 지시에 따르기를 택했다. 카델은 그런 가르엘의 시선을 느끼지 못한 척 걸음을 서둘렀다.

‘전부 말하는 건 좋지 못해. 하지만 세계의 반복을 숨긴 채로 마왕의 형제를 찾는 게 왜 전쟁만큼이나 중요한지 설명하는 게 가능한가?’

생각을 거듭할수록 괜히 운을 뗐나 싶어졌다. 카델은 저 멀리서 이글거리는 불덩이를 따라 걸으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렇다고 세계의 소멸과 재생을 곧이곧대로 알렸다가는, 결국 시스템과 내 세계에 대해서도 설명해야 하잖아. 빙의에 관해서도! 그렇게까지 낱낱이 까발릴 생각은 없는데…….’

쿤라가 불덩이를 띄워 둔 건물에는 둥근 바닥과 듬성듬성 솟은 외벽이 자리하고 있었다. 면적이나 생김새를 보아 곡물이나 사료를 보관해 두는 일종의 사일로였던 것으로 예상됐다. 카델은 그곳을 빙 둘러보며 가장 높은 벽면을 찾았다.

‘이세계에서 빙의된 영혼이라니. 반은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결국 사실을 받아들여 줬지만, 가르엘까지 그런 고통을 겪게하고 싶진 않아. 뭐…… 빙의된 이후에 만난 녀석이니까 반만큼 힘들어하진 않겠지만.’

‘가장 높은 벽’이라고 하면 한눈에 띌 줄 알았건만. 카델은 생각보다 고만고만한 외벽의 높이에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빙의에 대해선 말할 수 있다고 쳐. 하지만 세계가 계속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은? 뭐…… 그것까지도 이세계의 농간이라고 대충 둘러댄다고 치자. 하지만 가르엘이 겪어 왔던 그 끔찍한 고통이 전부 이세계인의 유흥거리였다는 사실을 알린다면……. 나까지 혐오하게 될 거야. 마지막을 그렇게 장식할 순 없어. 그것보다 끔찍한 이별 선물은 없을 거라고.’

눈대중으로 열심히 높이를 가늠해 두 개의 벽을 골라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어느 쪽이 더 높은 쪽인지 확신을 내릴 수 없었다. 그에 잠시 생각을 멈춘 카델이 쿤라에게 도움을 요청해 보려 했으나.

[지금이다. 외벽을 밀어라.]

기다렸다는 듯 쿤라의 신호가 들려왔다.

“자, 잠깐만. 지금 당장?”

당황하며 움찔거리던 카델의 머릿속으로 서두르라는 재촉이 들려왔다. 결국 허둥지둥 벽을 선택한 카델이 벽면을 밀기 시작했다. 단단하게 버틸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부드럽게 밀려난 벽은 어느 지점에서 덜컹거리며 멈춰 섰다.

“된…… 건가?”

잘 밀려난 것을 보아 아무래도 맞는 벽을 선택한 듯했다. 그리 생각한 카델이었으나.

[어느 놈이지? 눈이 장식으로 달린 놈은.]

짜증스러운 쿤라의 목소리와 함께, 벽이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 때문이야? 내가 틀렸어?”

50 대 50의 확률에서 틀린 쪽을 고르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머리를 헝클인 카델이 빠르게 건물을 빠져나왔다. 점점 거세지는 진동을 따라 벽면에 균열이 일며 틈새가 벌어지고 있었다.

“뭐가 이렇게 요란해, 무너질 거면 빨리 무너지라고.”

이 사달의 원인이 자신이라는 생각에 괜스레 성질이 났다. 카델은 증거 인멸을 꿈꾸며 직접 벽을 부숴 버리려 했으나. 그가 화염구를 장전하기 직전.

“단장님!”

다급한 가르엘의 목소리와 함께, 강한 힘이 그의 손목을 낚아챘다.

“뭐, 뭐야?”

힘이 이끄는 대로 맥없이 끌려가며 당황스럽게 눈을 깜빡이자, 마찬가지로 당혹감에 젖은 가르엘의 얼굴이 보였다.

“죄송해요, 단장님. 분명 그 벽이 더 높아 보였는데……. 안대를 벗을 걸 그랬어요. 한쪽 눈으로 대충 살핀 탓입니다.”

“어? 아니, 그건 아마도 네가 아니라…….”

“벽 안쪽에서 뭔가가 나오고 있어요.”

“벽 안쪽에서……?”

가르엘은 처음부터 카델이 틀렸으리라는 가정은 생각하지도 않은 듯했다. 변명의 기회조차 놓친 카델이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움직인 시야 가득, 폐허에서부터 빠져나오는 검은 점이 무수히 들어찼다.

“저게 대체…….”

눈을 가늘게 뜨며 그것들의 정체를 가늠하기도 잠시. 다시금 쿤라의 음성이 울렸다.

[장치 발동에 실패할 때마다 성가신 것들이 등장할 거다. 전부 해치우거나, 그것들이 지나갈 때까지 숨어 있어라.]

어떻게 이렇게까지 불친절할 수 있단 말인가. 처음부터 그 사실을 알려 줬다면, 딴생각할 시간에 벽에 코를 박고 살폈을 거다. 하지만 카델이 실패의 원인을 쿤라에게 돌리기도 전. 가르엘이 그를 훅 잡아당겼다. 일순 몸의 중심이 앞으로 기울며, 그대로 카델을 들어 어깨에 둘러멘 가르엘이 뜀박질의 속도를 높였다.

“저놈들이 지나갈 때까지 숨어 있긴 어려워 보이는군요. 일단 거리를 벌려 보겠습니다.”

미친 듯이 흔들리는 어깨 위에서, 가까스로 고개를 치켜든 카델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박쥐? 벽 안에 저렇게 많은 박쥐가 숨어 있었다고?”

벽의 균열을 비집고 나온 검은 점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박쥐였다. 날개를 펼친 놈들은 거대한 먹구름처럼 한데 모여 비행했다. 유연하게 활공하는 그들의 타깃이 무엇인지는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벽을 건드린 인간을 추격하는 걸까요?”

“근처에 있는 생명체라면 전부 공격하는 걸지도 몰라. 이곳에 마왕의 형제들이 있다면, 장치를 작동할 줄도 모르는 불청객은 절대 들여선 안 될 테니까.”

순식간에 하늘을 새까맣게 물들인 박쥐 떼. 카델은 부지런히 마력을 끌어 올리며 숨을 골랐다.

‘쿤라의 기운은 최대한 아껴 둬야 해. 한번 사라졌던 기운을 어떻게 다시 들여왔는지, 쿤라는 설명해 주지 않았어. 분명 커다란 리스크를 감수하고 돌아온 걸 거야. 내 실수를 만회하겠다고 쿤라를 위험하게 만들 순 없어.’

적어도 이런 박쥐 떼를 해치우는 데 쿤라의 기운을 소모할 수는 없었다. 물량은 질릴 만큼 압도적이지만, 놈들은 마족이 아닌 박쥐에 불과하다.

[화접몽]. 카델의 마력을 따라 붉은 나비들이 솟구치며, 박쥐 떼의 틈새로 섞여 들었다. 놈들에게 마력을 감지하는 힘은 없다. 요란한 날갯짓이 거침없이 나비를 두드리고.

쾅! 콰과광!

연달아 귀를 울리는 우렁찬 폭음. 박쥐 떼가 이리저리 흩어지며, 그 아래로 타들어 간 시체가 후드득 떨어졌다. 그러나 폭발이 멈추자마자 박쥐 떼는 언제 흩어졌냐는 듯 다시 뭉쳐 한 몸처럼 달려들었다.

“수가 너무 많아. 견제는 계속해 볼 테니까, 넌 몸을 숨길 만한 곳을 찾아 줘.”

“이런 곳에서 몸을 숨길 만한 곳을 찾으라고 해도 말이죠…….”

“마력을 모을 시간이 필요해. 어서!”

가르엘은 곤란한 척 눈썹을 늘어뜨리면서도 분주하게 눈을 굴렸다.

‘이런 곳에서 숨을 곳이래 봤자 무너진 건물의 벽 정도다. 하지만 이 박쥐들은 벽에서 튀어나왔어.’

흔들리던 폐허의 벽에서 박쥐가 튀어나왔으니, 다른 건물에서도 언제 박쥐가 나올지 모른다. 그리 생각했으나, 가르엘은 곧 자신이 내달리는 방향에선 더 이상 박쥐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긴……. 남쪽 구역을 벗어난 건가?’

한참을 내달린 덕에 그들이 장치를 작동시킨 방향과 멀어졌다. 어쩌면 박쥐들은 남쪽 장치의 근방에서만 튀어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몸을 숨길 벽은 충분하다.

가르엘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폐허를 주시하며 뜀박질의 속도를 높였다.

“저쪽 벽으로 가겠습니다. 하지만 아시죠? 이 정도 거리라면 박쥐들이 저희를 찾는 건 시간문제라는 걸요.”

“네 단장을 바보로 아는 거야?”

“당연한 사실이래도 짚어 주는 게 도움이 될 때가 있거든요.”

숨소리 섞인 낮은 웃음을 들으며, 카델이 하늘을 향해 한 손을 뻗어 올렸다.

“굳이 크게 만들 필요는 없겠지.”

팔을 타고 오르는 붉은 마력 줄기. 뱀처럼 똬리를 틀며 쭉쭉 나아가던 마력이 카델의 손끝에 고여 둥글게 뭉쳤다. 그리고 점점 크기를 불린 마력 덩어리가 주먹만큼 부푼 순간.

피잉―

날카로운 공명음과 함께, 마력이 총탄처럼 쏘아졌다.

“지금이야, 숨자!”

신호와 동시에 가르엘이 폐허의 벽 뒤로 몸을 던지고. 다음 순간, 박쥐 떼를 파고든 마력 덩어리가 거미줄처럼 펼쳐졌다. 덫에 걸린 박쥐들이 혼란스럽게 날개를 펄럭였다. 놈들의 비행이 저지된 동안 두 남자는 벽에 몸을 기댄 채 거친 숨을 가다듬었다.

“이제 어쩌죠? 계속 붙들어 둘 수도 없고.”

“묶어서 던져 버릴 거야. 그물에서 빠져나온 박쥐들은 네가 처리해 줘.”

어디서부터 날아왔는지도 모르도록 아주 멀리 던져 버릴 작정이었다. 카델이 마력을 모으는 것을 확인한 가르엘이 검집에 손을 올렸다.

“단장님.”

“왜?”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은 많지만……. 함께 있으니 기분이 좋군요.”

“허……?”

상황과 맞지 않는 헛소리에 하마터면 모으던 마력이 흐트러질 뻔했다. 카델이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자, 가볍게 눈을 맞춘 가르엘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러니 그대가 무슨 뜻을 품었든, 어떤 미래를 선택하든. 원망하는 일은 없을 거란 얘깁니다.”

순간 말문을 잃은 카델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그리고 그가 무언가 대답을 꺼내기도 전. 기어이 덫을 빠져나온 박쥐를 발견한 가르엘이 마기를 개방했다.

“전 앞에서 놈들의 주의를 끌겠습니다. 마법을 준비해 주세요.”

벽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는 박쥐들의 주의를 끎과 동시에 공격을 시작했다. 카델은 그런 가르엘의 모습을 눈에 담지도 못한 채, 벽에 기댄 어깨를 옹송그렸다.

“……일단은 이것부터야.”

스스로를 다독이듯 중얼거린 그가 큰 들숨과 함께 마력을 끌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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