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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호해라, 엄호! 기사들이 계단을 오를 수 있도록 공격을 막아!”
“우리의 희망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
그들의 목적은 고위 마족의 소탕이 아닌 평화의 돌. 지상에서의 전투에 집중해 봤자 얻는 것은 없다. 그리고 평화의 돌은 분명히 마왕의 손아귀에 있을 테니. 그들은 어떻게든 계단을 타고 올라 마왕이 있을 성의 꼭대기에 도착해야 했다.
그 엄중한 임무에 투입된 기사는 엑토와 소린, 모들렌, 마밀, 카델과 가르엘을 제외한 적린 기사단원이었다.
“계단을 오르는 일에만 집중하게. 공격은 전부 장막이 막아 줄 테니.”
그들을 향해 쏟아지는 맹공은 마밀과 라이돈의 몫이었다. 마밀은 높이 오를수록 점점 강해지는 공격을 따라 장막을 견고히 했고, 아래에 자리한 얼음 장막에도 마력이 더해졌다. 그 싸늘한 기운의 증량을 감지한 마밀의 시선이 라이돈을 향했다. 그는 기사들의 측면에서 그들을 호위하듯 비행하고 있었다.
‘분명 죽는 것이 당연한 폭주였다. 그런데 그 위기를 딛고 살아 나온 것으로도 모자라, 이전보다 훨씬 밀도 높은 마력을 방출하고 있어. 아주 기묘하군.’
요정만의 비책이라도 있었던 걸까. 어쩌면 전쟁의 위기 속에서 만개한 잠재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태는 여전히 좋지 못하겠지. 마왕과의 대면에서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라이돈뿐만 아니다.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성까지 도달하는 동안 너무나 많은 마력과 체력을 소모했다. 이어질 전투에서 마법사의 역할이 중요한 만큼, 이 불안정함은 치명적인 독이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라이돈 역시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슬쩍 시선을 옮긴 그가 속도를 늦춰 마밀의 옆으로 다가왔다.
“장막을 거둬. 내 것만으로도 충분해.”
“됐다. 거둘 거라면 네가 거두거라. 난 적어도 폭주를 겪지는 않았으니.”
“난 너보다 강해.”
난데없이 도발이라도 하는 것인가. 그리 여기기엔, 라이돈의 표정에선 자만이나 농담의 기색이 일절 비치지 않았다. 그는 진심으로 본인이 마밀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고, 그 판단에는 오로지 이성만이 자리했다.
“그러니까 내 말을 들어. 카델이 없는 동안 너와 내가 빈자리를 메꿔야 할 테니까. 카델의 스승이라면 똑똑할 거잖아?”
“말 한번 잘했군. 카델은 대체 언제 돌아오는 게냐?”
“우리가 가진 모든 걸 쏟아 냈을 때. 끝까지 죽지 않고 버틴다면, 카델은 마무리를 지으러 올 거야.”
“영웅의 등장이 따로 없군.”
황당하다는 듯 말하는 마밀에게, 라이돈은 크게 웃으며 답했다.
“맞아! 그러니 난 카델이 돌아올 때까지 아무것도 잃지 않을 거야. 내 영웅이 안심하고 싸울 수 있도록.”
“이게! 대체! 뭐! 냐고!”
거칠게 발을 구른 셀레브가 씩씩거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성난 눈빛은 분리된 성의 상층부와 하층부를 잇는 얼음 계단을 담아내고 있었다. 아무리 주먹을 때려 박아도 소용없다. 얼음 계단은 수많은 공격에도 굳건하게 자리를 지켰다.
‘그 요정 놈, 살아났다는 것만으로도 어이가 없는데 이런 짓거리까지 했다는 거야? 대체 목숨줄이 얼마나 질긴 건데?’
진즉에 죽여 버렸어야 했다. 분하다는 듯 이를 간 셀레브가 휙 뒤를 돌자, 그 앞에 자리한 두 고위 마족이 모습을 드러냈다. 짙은 잿빛의 머리칼과 검은 피부를 가진 남자. 그리고 눈부신 금발과 하얀 피부를 가진 여자였다.
“뭣들 해? 내려가서 인간들이 못 올라오게 막든지, 이 계단을 부숴 버리든지 해!”
“여전히 할 줄 아는 건 시끄럽게 구는 것밖에 없네.”
새초롬한 인상의 여자가 조소를 흘리자, 셀레브의 표정이 대번에 구겨졌다.
“지금 뭐라고 했어, 엘리나?”
“그 경박함은 태생이야? 천박함이 줄줄 흘러내리는 몸으로 용케 폐하의 곁에 머무는구나.”
“하. 이게 죽고 싶어서 환장을……!”
주먹에 마기를 두른 셀레브가 당장이라도 엘리나에게 달려들 기세로 발을 뻗었으나.
“지랄하지 말고 비켜, 루소!”
“여기서 소란을 일으키면 우리 모두 낙오된다. 폐하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은 건가?”
루소가 엘리나의 앞을 막고 섰다. 셀레브는 그런 루소를 올려 보며 살벌하게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그뿐. 더 이상 나서지 않고 마기를 거뒀다. 셀레브는 짜증스럽게 바닥에 침을 뱉었고, 루소는 엘리나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인간들이 더 가까워지기 전에 우리가 처리하겠다. 넌 얼음 계단을 없앨 방법을 찾아보도록 해.”
“명령하지 마!”
“분업이다, 셀레브. 흥분을 가라앉혀.”
“아악! 짜증 나! 꺼질 거면 빨리 꺼져 버려!”
그녀의 신경질적인 고함에 엘리나가 무어라 말을 얹으려 했으나. 루소가 눈짓을 보내 저지했다. 그들은 셀레브를 남겨 둔 채 계단 아래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뿌연 구름과 짙은 안개를 통과해 내려가자, 저 멀리서 계단을 타고 오르는 인간들의 모습이 보였다.
“방심하지 마라, 엘리나. 녀석들은 성까지 살아 들어온 인간계의 전사들이다.”
“가여운 루소. 저런 인간들까지 경계하고 살면 삶이 얼마나 팍팍할까? 어디, 이 아리따운 누님의 품에서 안정을 취해 볼래?”
“널 잃고 싶지 않다. 죽음에 관한 작은 가능성도 남겨 두지 마라.”
“……정말이지, 농담이 안 통한다니까.”
입술을 삐죽인 엘리나가 검지와 엄지를 펼쳐 총 모양을 흉내 냈다. 쭉 뻗은 검지의 끝으로 아주 작은 마기가 생성되며, 빠른 회전을 따라 진동이 울렸다. 엘리나는 조금씩 가까워지는 인간들에게로 시선을 고정한 채, 그리 싫지는 않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재미없게.”
반동을 따라한 손의 흔들림과 함께 마기가 발사됐다. 아무런 소리도, 기척도 없는 고요한 마기의 탄환. 그녀의 시선은 전방의 한 인간을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