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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 ‘카델 라이토스’가 운명의 궤도를 이탈하고 있습니다.」
「스토리의 흐름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경고합니다.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십시오.」
갑작스럽게 떠오른 시스템 창의 내용은, 이전과는 무언가가 달랐다. 이제까지 일방적으로 결과를 통지하던 것과는 달리, 지금의 시스템은 마치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운명을 바꾸지 말라고 하고 있어요. 스토리의 흐름이 달라질 수 있다면서요.”
시스템이 처음 보이는 적의에 본능적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단호하게 의지를 다져도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카델에게 쿤라는 무심히 말했다.
[똥줄이 타는 모양이지. 무시해라.]
참으로 쿤라다운 발언이었다. 카델은 참지 못한 헛웃음을 흘리며, 더욱 강한 마력을 불어넣었다. 주기적으로 떠오르는 경고창도 무시했다. 드디어 투명한 장막 위로 새하얀 균열이 새겨지고 있었다.
그렇게 카델이 장막 파괴에 박차를 가할 무렵. 그의 뒤편에서는, 어느 때보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네깟 게 마음대로 사용해도 될 약이 아니야! 이리 내놔! 아니, 그냥 널 죽이고 빼앗겠어!”
“제법 약발이 좋은 것 같으니, 돌려줄 생각은 없어.”
마왕 성에서 약효가 돌았을 때와는 달리, 지금은 정신이 멀쩡하기만 했다. 너무 멀쩡해서 어색할 지경이었다. 머리는 상쾌하게 맑았고, 몸은 가벼웠으며, 기운은 넘쳐났다. 가르엘은 본래보다 몇 배는 강해진 육체를 느끼며 셀레브를 향해 달려들었다.
등 뒤로 뻗친 마기의 날개는 셀레브의 모든 공격을 방어했고, 날쌘 검격은 그녀의 단단한 피부를 가차 없이 찢어발겼다. 그는 그야말로 셀레브를 압도하고 있었다.
‘젠장, 젠장, 젠장! 이 빌어먹을 혼혈 새끼가 각성제를 얻었을 줄이야! 팔찌의 힘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계획 변경이었다. 가르엘을 먼저 해치운 뒤, 아무런 방해 없이 카델을 제압하고 에밀리아의 형제들을 구출하려 했으나. 이런 상태로는 되레 자신이 제압당하게 생겼으니.
‘이 굴을 부숴 두 놈의 발을 묶어 둔 다음, 에밀리아의 형제들을 데리고 성으로 이동한다.’
결정한 셀레브의 시선이 카델을 향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봐서는 안 될 것을 목격한 것처럼, 셀레브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대체 어떻게 장막을……!”
카델이 장막을 부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가르엘을 상대했다. 부수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과격한 무력으로도, 매서운 마력으로도 허물어지지 않는 장막이라 했건만. 카델은 당당하게 장막을 부수고 그 너머로 발을 뻗고 있었다.
“안 돼!”
단숨에 가르엘을 포기한 그녀가 카델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러나 그녀는 카델에게 가 닿을 수조차 없었다.
“어딜!”
곧장 셀레브를 뒤쫓은 가르엘이 그녀의 뒷덜미를 잡고 땅에 처박았다. 강렬한 마기가 그녀를 묶듯이 감싸들었다. 자신을 짓누르는 기운에도 바득바득 고개를 치켜든 셀레브의 눈빛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그렇게 가르엘이 셀레브를 막아 낸 사이. 기어이 장막을 뚫고 새로운 공간에 발을 디딘 카델이 인상을 찌푸렸다.
“숨만 쉬는데도 온몸이 아파. 공기 중에 마기가 농축돼 있다더니…….”
[기운을 둘러 줄 테니 고통은 신경 쓰지 마라. 시스템이 행동하기 전에 어서 녀석들을 죽여.]
마왕의 형제들과는 달리 카델의 몸은 공중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순백의 공간 속에서 부유하는 그들을 올려 보며 마력을 끌어 올렸다.
‘마왕의 혈육이래 봤자 어차피 빈사 상태인 몸. 쿤라의 말대로 단숨에 죽여야 해.’
그래도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그들을 가까이 두어야 했다. 팔을 들어 올린 카델의 손끝에서 불꽃이 피어나며, 기다란 [화련]이 세 형제의 몸을 묶었다. 카델은 그대로 형제를 바닥까지 끌어 내렸다. 그들의 몸은 계속해서 떠오르려 했으나, 카델의 마력이 그를 억눌렀다.
[정확히 심장을 노려야 한다. 놈들의 재생력을 무시하지 마.]
그런 건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카델은 [화련]으로 단단히 동여맨 마족들을 응시하며 손을 펼쳤다. 그 안으로 기다란 화염의 줄기가 생성되며 조금씩 수를 늘려 갔다.
‘다들 생긴 게 닮았군. 형제 아니랄까 봐.’
셋 다 짙은 보라색의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고, 여자 쪽은 에밀리아와 상당히 흡사한 외형이었다. 두 명의 남자 역시 비슷한 생김새였으나, 한 명의 뺨에만 기다란 흉터가 남아 있었다. 카델의 시선이 흉터가 남은 마족에게로 향했다.
“정확히 심장.”
화염의 줄기는 서로 맹렬히 얽히고설키더니, 이내 화마로 뒤덮인 장검이 되었다. 카델은 불타는 검 끝으로 그의 가슴팍을 긁어내리며 심장의 위치를 가늠했다. 얕은 상처를 따라 짙은 마기가 피어오르며, 빠른 속도로 화상과 자상이 회복됐다.
“……여기다.”
눈을 번뜩인 카델이 꼿꼿이 세운 검날에 힘을 주고. 금방이라도 마족의 가슴을 꿰뚫을 듯 장검의 불꽃이 부풀었다. 그러나 카델은 놈의 심장에 검을 꽂지 않았다.
“단장님!”
뒤편에서 들려오는 가르엘의 다급한 외침. 뒤이어, 우렁찬 굉음이 울려 퍼졌다.
순식간에 시야가 어두워졌다. 있지도 않던 불이 꺼졌다거나, 의식을 잃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카델은 빠르게 검을 거두고 뒤를 돌았다. 그곳에는 셀레브의 하체가 있었다. 거대한 석상처럼 우뚝하게 솟은 다리가 점점 크기를 키우며 굴을 깨부쉈고, 카델의 위로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거인화…….”
셀레브가 거인화를 택할 줄은 몰랐다. 물론 거인화는 그녀의 주요 기술 중 하나였지만, 이곳은 그녀의 본진이 아니던가. 거인화는 적진을 부수고 적군을 섬멸하는 데 효과적인 기술이다. 그만큼 본진에서 사용했을 때의 피해량도 엄청나기에, 지금처럼 중요한 공간에서 사용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마왕의 형제들을 빼내려는 거야.’
그렇게 둘 순 없었다. 카델은 [화련]으로 묶은 형제들을 공중에 띄우곤, 굴을 부수고 있는 셀레브의 다리 사이로 달려 나갔다.
“단장님, 이쪽으로!”
그에게 달려오던 가르엘이 서둘러 카델의 팔을 낚아챘다. 이곳은 장치를 타고도 한참은 내려와야 했던 지하 공간이다. 셀레브가 이곳을 무너뜨린다면, 그들에게 남은 미래는 고독한 죽음뿐이었다.
그들은 처음 타고 왔던 발판을 향해 미친 듯이 내달렸다. 그러나 그동안 거인화를 마친 셀레브가 본격적으로 그들을 노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묵직한 걸음이 카델과 가르엘을 향하며, 천장이 빠른 속도로 허물어졌다. 카델은 어마어마한 흙먼지의 폭풍을 몰고 오는 뒤편을 일별하곤 이를 악물었다.
“바람 마력으로 속도를 높일게!”
미친 듯이 내달리는 두 남자의 뒤를 돌무더기가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떨어졌다. 셀레브의 발소리에 맞춰 바닥이 울리며, 몸이 크게 흔들거렸다.
“쿤라, 장치를 작동시켜 줘요!”
가까스로 발판에 올라탄 그들이 쿤라를 불렀다. 그에 펜던트가 붉게 빛나며, 새어 나온 기운이 발판 아래로 스며들었다. 카델은 초조하게 장치의 작동을 기다리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셀레브의 거대한 발과 무너지는 천장이 그들의 코앞까지 다다라 있었다.
“어서요! 어서!”
카델과 가르엘이 무의식적으로 서로의 손을 맞잡고. 훅 끼쳐 오는 흙먼지에 날개를 펼친 가르엘이 카델을 보호한 순간.
덜컹.
짧은 흔들림과 함께, 발판이 빠른 속도로 솟구쳐 올랐다.
“꽉 잡아요.”
카델은 가르엘의 날개 속에서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엄청난 속도감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으나, 그 와중에도 셀레브의 공격은 계속됐다. 마기를 두른 거대한 주먹이 발판이 지난 자리와 지날 자리를 마구잡이로 꿰뚫었다.
사정없이 덜컹거리는 발판에 가르엘은 카델을 꽉 끌어안으며 하늘을 올려 보았다. 자그마한 점에 불과했던 구멍이 점점 넓어지며, 빛이 새어 들고 있었다.
“곧이에요. 조금만 버텨요.”
“……가르엘.”
요란한 폭격을 버티며 하늘을 주시하던 가르엘의 시선이 움직였다. 고개를 내리자, 자신을 올려다보는 카델의 얼굴이 보였다. 이유를 묻듯 눈을 맞추는 가르엘에게, 카델은 당혹스럽게 물었다.
“너…… 눈이 왜 그래?”
“네? 제 눈이요?”
발판이 완전히 바깥으로 빠져나오며, 컴컴하던 시야가 밝아졌다. 외부의 빛을 따라 가르엘의 얼굴에서도 그림자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 완벽하게 대칭을 이룬 한 쌍의 역안이, 당황한 카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