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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레브…….”
성을 오르는 인간들은 뒷전이 된 지 오래였다. 에밀리아는 수정 구슬에 비친 셀레브의 모습을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조심스럽게 감싼 구슬 위로, 마구 난도질당하는 셀레브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팔찌의 힘을 잃은 그녀는 무력하게 공격에 노출되었다.
마족의 날개를 따라 한 가르엘의 마기가 구슬에 비칠 때마다, 에밀리아는 분노를 견디지 못했다. 그녀의 분노를 따라 방이 진동하며, 검은 마기가 불길하게 일렁였다.
그리고 구슬 속 셀레브가 기어이 힘을 잃고 무릎을 꿇었을 때. 주춤거리며 입을 가린 그녀가 발작하듯 외쳤다.
“로렌스!”
찢어지는 외침에 문밖에서 짧은 기척이 울리더니, 곧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주먹 쥔 그녀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문을 열어젖혔다. 그 앞에는 고개를 숙인 로렌스가 자리하고 있었다. 에밀리아는 그대로 로렌스의 멱살을 움켜쥐고는, 아래로 잡아끌어 강제로 눈을 맞췄다.
형형한 분노와 살기가 가득한 눈빛. 잔뜩 굳어 있는 로렌스를 향해, 그녀가 전에 없이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 가서 셀레브를 구하세요. 만약 셀레브가 경의 조카에게 죽임을 당한다면, 경의 집안은 이 전쟁을 끝마치기도 전에 피로 물들게 될 겁니다.”
가르엘이 밑창을 문지르듯 발에 힘을 주자, 아래에 깔린 셀레브가 울컥 피를 토해 냈다. 자신을 짓밟은 자를 향한 시선은 표독스러웠으나, 늘어진 몸은 제대로 된 반항을 하지 못했다.
“잘 어울려. 깔보던 혼혈에게 짓밟혀 죽음을 기다리는 모습.”
“입… 닥쳐……!”
셀레브는 어떻게든 가르엘에게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 자신이 죽는 것은 상관없다. 녀석의 말대로 깔보던 반쪽짜리 마족에게 죽는다는 사실은 제법 치욕스러웠지만, 괜찮았다. 에밀리아의 명령을 수행하지 못해 그녀의 실망을 사는 것보다는.
벌겋게 충혈된 눈이 가르엘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금방이라도 제 목을 베어 낼 듯 검을 치켜든 그의 앞에서, 셀레브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 약, 지금처럼 냄새만 맡는 게 좋을 거야.”
“……죽기 전에 선물이라도 주려는 건가? 그렇다고 덜 고통스럽게 죽이진 않을 텐데.”
“선물 같은 소리. 네가 영광을 얻는 걸 막는 것뿐이야.”
“영광?”
셀레브의 말에 흥미를 느낀 듯, 가르엘이 검을 늘어뜨렸다. 당장의 죽음은 면했다. 셀레브는 차오르는 안도감을 숨기며 여유와 분노를 꾸며 냈다.
“그 약을 마시면 네 안에 있는 인간의 피는 깡그리 메말라 버릴 테니까.”
“…….”
“지금도 봐. 고작 냄새를 맡았을 뿐인데도 넌 온전한 마안을 가지게 됐지. 네가 가진 마족의 피가 네 안의 인간성을 밀어 내고 본능을 일깨우고 있기 때문이야.”
가슴팍을 짓누르던 발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의 말이 불쾌하다는 반응이었다. 셀레브는 울컥울컥 차오르는 피를 삼켜내며 눈을 부릅떴다.
“그딴 감각은 느껴지지 않는데. 난 아주 인간적으로 널 상대했어. 그러니 지금도 네 유언을 얌전히 들어 주고 있지.”
“부정하지 마. 너로서는 그냥 그 힘을 받아들이는 편이 좋겠지만, 난 추천하지 않겠어. 되도록 인간으로 죽어 줬으면 하거든.”
“……이봐, 아가씨.”
다리를 구부려 가볍게 몸을 숙인 가르엘이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더해진 무게감에 셀레브가 고통스럽게 바지락거렸으나, 가르엘의 눈빛에 자비는 없었다.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난 인간으로 살다, 인간으로 죽을 거야.”
“마족의 힘을… 컥……! 비, 빌어 싸우고 있는 주제, 에……!”
“힘을 쓰는 건 별개의 문제지. 가진 걸 안 써먹고 방치하는 것도 아깝잖아. 어쨌든, 팁은 고마워. 아무래도 내가 이 약을 마시면 대단히 강해지나 본데. 유념할게.”
만면에 퍼지는 미소는 아름다웠으나, 가르엘의 마안에는 짙은 살기만이 아른거렸다. 몸을 세운 가르엘이 다시금 검을 치켜들자 셀레브가 그의 발목을 붙든 채 마구 몸부림쳤다.
“우리 요정 왕자님에게 전해 줄게. 네 최후는 아주 볼품없고, 초라했다고.”
마기를 두른 검날이 가차 없이 셀레브의 목을 노렸다. 다가오는 날카로운 파공음에 셀레브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셀레브의 말을 믿지 않는 건가? 나도 말했던 것 같은데. 그 약을 마시고 인간이길 포기한다면, 너는 살 수 있다고.”
들려서는 안 될 목소리가, 가르엘의 몸을 경직시켰다. 삐걱삐걱 돌아간 고개가 뒤편을 향했다. 분명 죽었어야 했는데. 죽음 외의 다른 결말은 없었을 텐데. 로렌스 하이웨일. 그가 가르엘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의 연이 길구나. 이곳에서 끊어 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