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5화 (485/521)

⚔️

콰앙!

요란한 소음과 함께 강한 충격파가 근방을 휩쓸었다. 층의 양 끝에 서 있던 엑토와 반의 거리가 빠르게 좁혀지다, 고작 한 뼘을 사이에 두고 가까스로 멈췄다. 그들의 앞에는 형체조차 제대로 살필 수 없던 고위 마족이 한 명씩 자리하고 있었다.

“너희는 우리를 막을 수 없다.”

“무한의 원을 벗어날 수 없다.”

똑같은 얼굴에 똑같은 체격. 하지만 목소리는 달랐다. 두 개의 대검에 가로막힌 두 마족이 온몸으로 눈앞의 인간을 밀쳐 냈다.

그렇게 엑토와 반이 고위 마족의 이동을 저지한 사이. 루멘은 외벽을 두른 마족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두 동료의 부재에도 아무렇지 않게 회전하고 있었으나.

“빈틈이 생겼어. 총인원수는 정해져 있다. 빈자리는 채워지지 않아.”

“그런 결론이 났으면 빨리 죽이라고! 이대로 나이 든 귀족 놈이랑 같이 찌그러지기 싫으니까!”

“나이 든 귀족 놈이란 건 설마 나를 말하는 건가? 반 경. 예전부터 그렇게 보긴 했지만 입이 참 험하군.”

오라까지 개방해 막아서고는 있지만, 밀어젖히는 힘이 장난이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대검이 부러질 것 같은 압력에 반은 필사적으로 검날의 위로 오라를 둘렀다.

그들의 필사적인 노력을 등에 업고, 나머지 인원이 동시다발적으로 마족을 공격했다. 마력과 검기, 암기가 충돌하며 마구잡이로 마족의 몸뚱이를 난도질했다. 그러나.

“공격이…….”

“어떻게 된 거지?”

“뭐야, 이건? 유령이라도 되는 거야?”

그들의 공격은 모조리 마족의 몸을 통과했다. 단 한 대도 마족에게 닿지 못한 것이다. 그에 반해 반과 엑토를 압박하는 힘은 점점 더 강해지기만 했다.

공격할 수 없다면 검을 빗겨 쳐 놈들의 이동 반경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검을 빗겨 치기도 어려운 힘이었을뿐더러, 뒤에 사람이 있으니 떨쳐 내는 각도까지 계산해야 했다.

“다시 시작될 거야! 몸을 숙여!”

또 한 번의 돌진 예고와 동시에, 완전히 밀려난 반과 엑토의 등이 맞부딪혔다. 안전지대는 아직 확보하지 못했고, 앞뒤로 몸이 막힌 탓에 엎드릴 수조차 없다. 절망적인 상황에도 마족은 반과 엑토의 처지를 봐주지 않았다. 곧 무수한 그림자들이 제자리를 찾아 쏘아지고.

“어쩔 수 없군.”

작게 중얼거린 루멘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이렇게 빨리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건만. 카델이 넘기고 간 물건이니 효과는 확실할 것이고, 그렇다면 마왕과 대면했을 때 사용하는 게 최고이지 않겠는가. 이왕이면 카델이 돌아왔을 때, 다시 돌려주어 그가 안전을 챙기게 하고 싶었다.

[미니 분사기]. 직육면체의 분사기 위에 달린 스위치를 누르자, 미세한 입자들이 공기 중에 퍼졌다. 육안으로의 확인이 불가능했기에 루멘은 몇 번이고 스위치를 눌러 대야 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뭐, 뭐지?”

모든 마족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들의 표면에는 돌처럼 딱딱한 무언가가 뒤덮여 있었다. 반과 엑토는 자신들의 코앞에서 굳어 버린 마족을 보며 당혹감을 드러냈다.

콰직. 쿠드득.

그러나 곧 굳은 마족의 위로 균열이 일며, 안쪽의 몸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금방 움직임을 재개할 겁니다. 이 틈에 다들 제대로 몸을 숙이십쇼.”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면 마족을 죽여 안전지대를 만든다는 계획도 무용해진다. 빠르게 엎드린 채 마족의 동태를 살피는 기사들 사이. 홀로 바닥에 이마를 댄 요젠이 미간을 좁혔다.

‘……작아. 아주 작다.’

지금까지는 마족들을 이루고 있는 기운을 면밀하게 살피지 못했다. 놈들의 움직임이 원체 빠르기도 했고, 내내 외곽에서 회전하는 적들의 공격 신호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놈들이 모조리 굳어 버린 지금. 요젠은 여태 눈치채지 못했던 사실 하나를 알아낼 수 있었다.

“이곳에 있는 마족들, 심장이 엄청나게 작아.”

요젠의 말에 옆에서 뒹굴거리던 라이돈이 눈썹을 치켜들었다.

“지금의 나보다?”

“응. 너보다. 정확히 말하면 몸속에 품고 있는 기운의 핵이 아주 미세해.”

마족의 몸에 난 균열이 굵어지며, 아래로 모래 알갱이들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엑토는 제 머리에 섞인 모래를 털어 내며 요젠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마족을 공격하지 못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는 건가? 아주 작은 기운의 핵을 부수지 못했기 때문에 공격이 몸을 통과한 거라고?”

“……아마도. 핵을 제외하고도 몸의 형태를 따라 기운이 퍼져 있긴 하지만, 아주 옅어. 난 앞이 보이지 않으니 너희가 얼마나 또렷한 형상을 보고 있는지는 몰라. 하지만 이 정도 선명도라면 유령을 보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야.”

말을 마친 요젠이 무언가를 신중하게 가늠하는 듯하더니, 낮은 자세로 어딘가를 향해 기어갔다. 그가 향한 곳은 반의 옆자리. 의아하게 표정을 찡그리는 그의 옆에서 요젠이 단검을 꺼내 들었다.

“뭐야?”

“핵을 없애 볼 거야. 시간이 얼마 없어. 녀석을 붙들어 줘, 반.”

당당한 요구에 반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붙들어 달라니. 한 마리를 붙들고 있으면 곧 사방팔방에서 마족이 포탄처럼 날아들 텐데. 거의 죽으라는 말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황당함을 표하면서도, 결국 반은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납작 엎드려 있는 이들을 향해 말했다.

“터져 죽지 않게 잘 막아 주십쇼. 특히 요정 놈. 넌 그만 빈둥거리고 힘 좀 써라.”

라이돈이 무어라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반은 깔끔하게 무시하며 손을 털었다. 훅, 숨을 뱉고, 비장하게 눈을 빛낸 그가 앞에 자리한 마족의 양어깨를 강하게 그러쥐었다. 단단한 손바닥 아래로 맹렬한 진동이 전해졌다.

“내가 반대쪽 마족을 막아 보겠소.”

“됐습니다.”

반과 요젠의 작전을 알아챈 소린이 황급히 몸을 세우려 했으나. 반은 딱 잘라 거절했다.

“마력이 두 군데로 나뉘면 살 것도 죽습니다. 전부 나에게 마력을 쏟아부으십쇼.”

몸에 바짝 힘을 주고, 오라를 개방해 전신에 둘렀다. 뒤이어 얼음과 화염 장막이 둘렸다. 모들렌은 반의 근처로 기어 와 치유술을 위한 빛 마력을 준비했다. 그렇게 반이 이어질 충격에 대비하는 동안. 단검에 암기를 두른 요젠이 핵의 위치를 파악했다.

핵의 크기는 아주 작았고, 마기의 농도까지 상당했다. 무작정 힘을 주어 부순다면 파괴의 충격이 코앞에 있는 반을 해칠 것이다. 그러니 가장 약한 지점을 찾아 깔끔하게 절단 내야 했다.

“모래가 무너진다. 준비해.”

루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미니 분사기]의 효력이 다했다. 반은 황소처럼 돌진하는 고위 마족을 단단히 붙들어 맸다. 하지만.

“크윽……!”

총 일곱. 반이 붙들고 있는 마족을 제외하고도, 총 일곱의 마족이 그가 선 지점을 교차하며 달려들었다. 온몸을 짓누르는 강한 압력. 반은 꼭 어린아이의 손에 들린 찰흙처럼 무자비하게 뭉개지는 몸뚱이를 느끼며 이를 갈았다.

마밀과 라이돈의 장막에도 간단히 균열이 일며, 장막이 복구되는 사이에 그의 뼈와 내장이 상했다. 당장 의식을 잃는데도 이상할 것 없는 고통이었으나, 반은 끔뻑끔뻑 넘어가는 정신을 간신히 다잡을 수 있었다. 바로 앞에서 전개되는 모들렌의 치유술 덕이었다.

“반 경의 내장이 파열되는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요젠 경, 서두르세요!”

원거리 치유술의 효력에는 한계가 있다. 모들렌은 반의 위로 벌 떼처럼 달라붙은 마족을 바라보며 다급하게 외쳤다. 하지만 요젠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묵묵히 힘을 모으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의 준비는 고요했고, 차분했으며, 그랬기에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을 애태웠다.

“반의 피는 별로 뒤집어쓰고 싶지 않은데.”

“이 정도 압력에서 사람을 지키려면 장막 가지고는 택도 없다. 당장 핵을 터뜨릴 게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저 녀석을 빼내야 해.”

“단장님, 반 경을 이대로 둬도 괜찮은 겁니까?”

“……농담으로라도 괜찮아 보이지가 않는군.”

반의 한계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뭉개지고 회복되길 반복하는 처참한 모습에 모두의 표정이 굳어 갔다. 그렇게 묵묵히 지켜보던 루멘조차 인상을 찌푸릴 무렵.

콰드득.

조용히 솟구친 요젠의 단검이, 타깃의 심장을 꿰뚫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