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친 몸으로 가르엘을 부축해 로렌스의 시체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겼다. 그나마 튼튼해 보이는 나무둥치에 그를 기대어 둔 카델이 부드러운 백색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가르엘의 눈동자는 본래대로 돌아왔으나, 몸에서는 아직도 갈무리되지 못한 마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가르엘의 상태가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증거나 다름없다.
“조금 더 진정이 되면 움직이자.”
계속 무리하게 놔둔다면 그의 정신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 것이다. 카델은 이 이상 가르엘을 혹사할 마음이 없었다. 가르엘은 대꾸 없이 제 옆자리에 앉은 카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렇게 쳐다봐도 안 버리고 갈 거야. 죽이지도 않을 거고. 포기해.”
나무 기둥이 원체 좁아 가르엘과 함께 머리를 기댈 수도 없었다. 카델은 지친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여 스트레칭했다. 계속 긴장 상태를 유지한 탓에 온몸이 뻐근했다.
가르엘은 그런 카델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주춤한 카델이 그를 바라보자, 뻣뻣해진 근육을 어루만지는 기운이 느껴졌다.
“……몸 좀 뻐근하다고 치유술까지 써 줄 필욘 없어. 낭비야.”
“제가 해 주고 싶어서요.”
가르엘의 표정은 잔뜩 지쳐 메말라 있었다. 저런 얼굴로 치유술을 해 주고 싶다는데, 뜯어말릴 엄두도 나지 않았다. 카델은 순순히 조금씩 가벼워지는 몸을 받아들였고, 치유술을 마친 가르엘은 천천히 손을 떼어 냈다.
여전히 입가에는 닦이지 않은 핏자국이 지저분하게 번져 있다. 가르엘은 무의식적으로 굳은 핏자국을 뜯어내다,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뭐야, 좀 쉬었다가 움직이자니까. 앉아, 빨리.”
“셀레브가 형제 한 명을 데리고 갔다고 했잖아요. 이미 늦었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쫓아가 봐야죠.”
몸도 마음도 엉망인 상태에서 그런 것까지 걱정한단 말인가. 카델은 한숨과 함께 가르엘의 팔을 잡아끌었다.
“신경 쓰지 않도 돼.”
“그 형제들을 전부 죽이지 못하면 전쟁이 계속 반복될 거라고 했잖아요.”
“그래.”
“그런데 어떻게…….”
“전부 죽였으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건조한 대답에 가르엘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카델은 그런 가르엘을 끌어당겨 억지로 자리에 앉혔다.
“넌 몰랐겠지만, 지하를 탈출하기 전에 이미 한 놈을 죽여 놨어. 정확히 말하자면 곧 죽을 놈으로 만들어 놨지. 셀레브가 데려간 건 그놈이니까, 아마 슬슬 죽지 않았을까 싶은데.”
화마의 검으로 마족의 심장을 겨눴을 때. 그 검이 놈의 심장을 꿰뚫지는 않았으나, 심장 깊숙한 곳에 뜨거운 불덩이를 심어 뒀다. 단칼에 죽일 시간이 없으니, 시한폭탄을 심어 둔 셈이었다.
그 시간이 다하기 전에 두 명의 형제도 죽여 두었고.
‘마지막 형제를 죽였을 때 시스템이 창을 띄웠어. 내가 처음 시도한 공격이 확실하게 녀석을 죽이게 될 거라는 증거지. 셀레브는 시체를 들고 간 셈이다. 무사히 에밀리아의 앞까지 도착했으면 좋겠는데.’
시큰둥하게 말한 카델이 안도하는 가르엘의 눈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넌 네 몸 상태에만 집중해. 얼른 회복해야 성으로 돌아가지.”
‘움직여. 움직여, 움직여!’
셀레브는 필사적으로 날개를 펄럭였다. 자꾸만 늘어지려는 몸에 힘을 주고, 헐거워지는 팔을 단단히 그러모아 에밀리아의 큰오빠, 달린을 끌어안았다.
뒤를 살피는 짓도 그만둔 지 오래였다. 그녀는 오로지 앞을, 에밀리아가 있을 드높은 마왕 성만을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불꽃이 튀어나와 자신을 낚아챌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끓었으나, 셀레브는 어떻게든 무시하려 애썼다.
두려웠다. 그것은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듯한 자신의 상태가 아닌, 에밀리아를 향한 두려움이었다. 그녀가 명령을 수행하지 못한 자신을 꾸짖을까 봐. 꾸짖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커다란 실망감을 드러내며 자신을 버릴까 봐. 그것이 두려웠다.
‘다 왔어……!’
성이 지척이었다. 셀레브는 미친 듯이 고도를 높여 가며 헐떡였다. 그녀의 시야에는 오로지 마왕 성의 꼭대기만이 들어찼다. 정중히 노크하고, 대답을 기다릴 여유는 못 되었다. 그대로 창문에 몸을 박은 셀레브가 요란스럽게 에밀리아의 방 안을 뒹굴었다.
“셀레브!”
곧장 침입자의 정체를 알아본 에밀리아가 경악하며 달려갔다. 셀레브는 유리 파편이 박힌 몸을 꿈틀거리더니, 이내 제가 품 안에서 보호하고 있던 이를 내보였다.
“……데려왔구나.”
달린의 얼굴을 확인한 에밀리아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셀레브는 그런 에밀리아의 앞에서 숨도 고르지 못한 채 납작 엎드렸다.
“미, 미안해. 네가, 폐하가 준 팔찌로도 나는……. 고작 한 명을 구하는 게 전부였어.”
“…….”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부활을 앞두었던 세 형제 중 둘이 죽었고, 겨우 구해 온 한 명조차 생명유지장치에서 벗어났다. 달린의 상태를 복구시키려면 큰 힘과 까다로운 과정이 필요한데, 지금은 그럴 경황이 되지 못했다.
입을 다물어 버린 에밀리아에, 셀레브는 두려움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용서해 줘. 용서해 줘, 에밀리아. 네가 용서해 준다면 난 뭐든 할 수 있어. 뭐라도 할게. 죽으라면 죽을 테니까……!”
웅크린 등은 피와 상처로 엉망이었다. 재생도 하지 못한 몸뚱이는 그야말로 걸레짝 같았다. 로렌스는 대체 뭘 한 것인가. 셀레브를 구하라고 보내 놨더니, 셀레브의 꼴은 엉망이고 본인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다.
셀레브를 바라볼 때마다 점차 분노가 차올랐다. 그 감정을 따라 일렁이는 마기를 감지한 셀레브가 부산스럽게 눈을 굴렸다.
“에단과 오필리아는? 죽은 게 확실해?”
“으, 응. 확인했어. 내가 갔을 때는 이미 늦은 상태였어…….”
“……그렇구나.”
굳이 따지자면 잘못은 제게 있었다. 인간군이 형제들이 있는 장소에 도달할 수 없으리라 속단하고, 그쪽으로는 아무런 대비도 해두지 않았으니까. 적룡의 힘까지 낀 무리로부터 한 명이라도 살려 데려온 셀레브가 대단한 것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형제의 소생보다 중요한 일이 있지 않은가. 이대로 셀레브를 휴식하게 놔두고, 인간들이 아래층에서 허덕이는 동안 달린에게 응급 처치를 해 두면 된다. 침착하자. 침착해야 한다.
에밀리아는 치솟는 격노를 억누르며 숨을 골랐다. 그녀에게는 꼭 필요한 안정의 시간이었으나, 그런 에밀리아를 바라보는 셀레브에게는 숨통을 옥죄는 고문의 시간이나 다름없었다.
그녀의 눈치를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던 셀레브가 황급히 고개를 치켜들고는, 빠르게 바닥을 기어 달린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축 늘어진 달린의 상체를 끌어안아 일으키고는, 그를 에밀리아의 앞에 내보였다.
“다, 달린 님은 멀쩡해. 심박수도 고르고, 어디 공격당한 흔적도 없어! 카델 라이토스가 공격하기 전에 내가 구해 냈거든. 그러니까 에밀리아, 너무 상심하지 마. 달린 님이 있다면……!”
셀레브의 말이 끊기고, 에밀리아의 눈이 크게 벌어지며, 달린의 몸이 작게 들썩였다. 순식간이었다. 너무도 순식간이라 아무런 대처도, 대응도 할 수 없는 사고였다.
“셀레브……?”
“어, 어억…….”
에밀리아의 시선이 달린의 가슴을 향했다. 정확히 심장을 꿰뚫고 솟아난 화마의 장검. 누군가 그를 찌른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속에서부터 달린의 심장과 뼈, 살과 가죽을 뚫고 튀어나온 것이다. 자신의 앞에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달린의 몸에는 검이 박혀 있던 것이다.
그런 거였으면 진즉에 죽어 버리지. 왜 여태 살아 있다, 왜 하필 저 아이의 앞에서.
“셀레브!”
찢어지는 외침과 동시에, 달린의 몸이 바닥으로 기울었다. 셀레브는 그런 달린을 붙잡지도 못한 채 구부러진 손끝을 달싹였다. 드러난 그녀의 심장에 깊은 상흔이 새겨져 있었다. 불꽃에 타들어 간 상흔에선 재생을 위한 마기가 피어나지 않았다.
왈칵 쏟아진 피가 셀레브의 턱과 가슴을 적셨다. 떨리는 눈빛이 에밀리아를 향하고. 다급히 주저앉아 셀레브를 끌어안은 에밀리아가 마기를 개방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살려 줄게. 죽지 않아. 괜찮아.”
“에, 밀리아…….”
“아무 말도 하지 마. 네가 죽을 리 없잖아. 우리 함께 마계의 해방을…….”
말을 잇던 에밀리아가 짧게 숨을 들이켰다. 셀레브의 치료를 위해 끌어 올렸던 마기가 가라앉으며, 그녀를 끌어안던 팔에서 힘이 풀렸다. 느리게 몸을 떼어 내자, 셀레브의 몸이 뒤로 훅 기울었다. 에밀리아는 그녀를 잡아주지 않았다.
쿵 소리를 내며 떨어진 셀레브. 에밀리아는 채 감지 못한 그녀의 눈과 시선을 맞췄다. 한 번, 두 번, 숨을 내쉴 때마다 호흡이 가빠지며 어깨가 크게 오르내렸다.
“아, 아아…….”
죽었다. 셀레브가 죽었다. 심장에 뜨거운 검을 박고 죽었다. 인간의 마력이었다. 카델 라이토스의 마력이었다.
“아아아아악! 아악! 아아악!”
광기에 휩싸인 고함과 함께 마기가 폭발하며, 방 안이 진동했다. 부릅뜬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렀고, 바닥을 내리치는 주먹에선 뼈가 으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절대로……. 절대로 용서하지 않아…….”
가녀린 음성에 표독스러움이 더해졌다. 분노에 찬 얼굴에선 단 한 방울의 눈물도 떨어지지 않았다. 오로지 증오와 살기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에밀리아는 손톱이 뒤집어질 만큼 강하게 바닥을 긁어내렸다.
“카델 라이토스……. 네가 가진 모든 걸 부숴 버리겠어. 내 목숨을 걸고, 기필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