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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이 사라진 마족은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소멸한 것은 아니다. 요젠이 핵을 완벽하게 베어 내자, 단숨에 흩어진 기운이 포물선을 그리며 한 마족의 위로 스며들었다. 다음 마족도, 그다음 마족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곧 기운을 빨아들인 마족이 본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젠장, 더는 못해.”
반은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씨근덕거렸다.
“수고하셨습니다, 반 경. 본체를 없애면 제대로 봐 드리도록 할게요.”
“됐습니다. 그쪽 마력은 아껴 두십쇼.”
끊임없이 부서지는 장막과 원거리 치유술에 기대어 죽음의 강을 질리도록 건너고 왔다. 회복된 몸보다도 정신이 더 아플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런 반의 노력으로, 그들은 마족 소탕을 코앞에 두었다.
“본체의 위에 불꽃을 달아 두었다. 이거면 괜찮은 게냐?”
마밀이 달아 두었다는 불꽃은 회전하는 마족의 잔상을 따라 커다란 원을 그리고 있었다. 요젠은 아무 문제 없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런 요젠의 옆에 루멘과 소린이 섰다.
“소린 경, 준비는 됐습니까?”
“됐소. 시작하지.”
본체를 없앤다면 심장을 나누어 육체의 수를 늘리는 저 기묘한 힘도 소용없다. 겨우 확보한 안전지대의 위에서, 요젠은 차분하게 숨을 골랐다.
본체가 있다는 것은 알아냈지만, 속도가 원체 빨라 위치를 즉각 쫓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그 위치를 찾아 찰나라도 움직임을 멈춰 줄 인물이 필요했다.
짧은 들숨과 동시에, 마족이 돌진을 시작했다. 자신은 그 움직임을 쫓아가지 못하지만, 상관없었다. 옆에 있던 루멘의 신형이 사라졌다. 이곳에서 마족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기사.
그가 본체의 앞을 가로막은 찰나. 빠르게 내던진 단검이 놈의 등에 닿았다. 하지만 등을 꿰뚫은 단검이 심장에 다다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소린 경!”
루멘의 외침에 그제야 위치를 파악한 소린이 달려 나갔다. 미리 본체의 이동 지점을 안전지대로 만들어 두었다. 소린은 루멘과 함께 본체를 가로막았고, 그들에게 저지당한 본체의 심장으로 단검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너희는… 무한의 원을, 벗어날 수… 없…….”
놈의 말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단검이 완벽하게 심장을 꿰뚫으며, 그와 동시에. 외벽을 두른 채 회전하던 마족들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흩어진 마기는 사망한 본체에 흡수되는 대신, 바깥의 하늘로 퍼져 나갔다.
마족의 사망을 확인한 소린이 뒤를 돌아 고개를 끄덕이고. 대기하던 이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뭐 이런 귀찮은 놈들이 다 있대?”
한 것이라고는 바닥에 누워 장막을 둘러 준 것뿐이지만. 라이돈은 한껏 피로감을 드러내며 다시 몸집을 늘렸다. 반은 그런 라이돈을 황당하게 바라보며 짜증스레 몸을 일으켰다.
“다음 층으로 올라가려면 결계를 지나야 한댔나? 그건 또 어떻게 부숴야 하는 거야?”
요젠이 인정한 강력한 결계였으니, 벌써부터 막막하기만 했다. 하지만 미리 계단으로 이동해 위를 살피던 마밀이 뜻밖의 얘기를 전했다.
“결계가 사라졌다. 계단에선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아.”
“왜 안 주겠다는 건데?”
카델이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가르엘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쓸모가 있을 테니까요.”
“필요 없어. 셀레브를 몰아낸 것만으로도 그 약은 쓸모를 다했어. 이제 그냥 버려 버리자고.”
“싫습니다. 거절하죠.”
가르엘은 제 앞에 쫙 펼쳐진 카델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구부려 주었다. 어이가 없어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좀 전까지 그 빌어먹을 각성제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이젠 버리기 싫다며 고집을 부리고 있다. 헛웃음을 뱉은 카델이 강제로 그의 가슴팍을 향해 손을 뻗자, 가볍게 회피한 가르엘이 미간을 좁혔다.
“적극적인 건 좋지만 강제적인 건 싫습니다. 자제해 주시죠, 단장님.”
“뭐라는 거야? 빨리 내놔!”
“로렌스가 얼마나 까다로운 고위 마족이었는지 잊은 겁니까? 그 까다로운 상대를, 고작 이 각성제의 냄새를 맡은 것만으로 해치웠습니다.”
“그래, 대단해. 하지만 그 부작용도 대단했지. 난 네가 힘들어하는 꼴 더는 못 봐.”
특수한 상황이었을 뿐이다. 본래라면 가르엘의 역할은 치유사 쪽에 가까웠다. 전투는 나머지 단원들의 몫이고, 가르엘이 그렇게 무리하면서까지 나설 필요는 없다. 이제 마왕의 형제들은 전부 죽였고, 남은 건 동료들과 합류해 평화의 돌을 확보하는 것뿐이니.
“네가 그 약을 다시 사용해야 할 순간은 오지 않아, 가르엘. 무슨 생각으로 약을 내놓지 않겠다는진 알겠는데, 그러지 마.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어쩌면 단장님이 옳을지도 모르죠.”
중얼거린 가르엘이 나무 기둥에 기댄 몸을 편하게 늘어뜨렸다. 그러고는 카델의 앞에 손을 펼쳐 보였다. 그 위로 마기가 일렁였다. 평소 가르엘의 기운보다 훨씬 색이 진해진 마기였다.
“로렌스의 심장을 먹어 치운 덕인지, 기운이 강해졌습니다. 각성제를 사용했을 때만큼 극적인 변화는 아니지만, 훨씬 강해졌다는 걸 느낄 수 있어요. 어쩌면 이 정도의 변화만으로도 마왕과의 전투를 무리 없이 해치울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럼 왜…….”
“아직 설명을 끝마치지 않았잖아요.”
“설명?”
무슨 뜻이냐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카델의 앞에서, 가르엘은 주먹을 쥐어 마기를 거뒀다.
“신여환의 이야기요. 마왕의 형제를 없앴으니 이제 전쟁이 반복될 위험은 없는 건지. 당신이 살고 있던 세계에선 어떻게 이쪽 세계의 이야기가 전해졌던 건지. ‘빙의’라는 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아직 듣지 못한 게 많아요.”
“…….”
“이 약이 필요할지, 필요하지 않을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직접 판단하겠습니다.”
가르엘의 충격적인 변화에 잠시 잊고 있었다. 그에게는 자신이 충동적으로 뱉은 진실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 와 어물쩍 넘어가기엔, 진정한 결말이 다가오는 작금의 상황에선 더 미룰 곳도 없었다.
카델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버릇처럼 매만지는 펜던트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그저, 이전보다 미약하게 충만해진 기운이 존재감을 드러낼 뿐이었다. 당장 쿤라가 나타나 잡담할 시간에 성으로 돌아가라는 얘기를 해 줬으면 좋겠는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 줘야 할지 모르겠네. 너무 많은 이야기가 있고, 주어진 시간은 적어서.”
“그럼 이것부터 대답해 주세요. 이 전쟁이 끝난 뒤에도 단장님의 설명을 들을 시간이 있나요?”
이렇게나 정곡을 찌를 것까지는 없지 않나. 꾹 다문 입술에 힘이 들어가고, 경직된 어깨가 높게 솟았다. 복잡한 심경을 따라 머리를 헝클인 그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내가 있던 세계에서 나는 너희의 세계를…… 일종의 ‘게임’으로써 향유했어. 실존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더 가볍게 즐겼지. 너희의 성장과 갈등, 세계의 전쟁까지 전부 다. 거짓이라고, 꾸며 낸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이 세계에 들어오게 된 거야. 카델 라이토스라는, 게임 속 주인공의 몸에 빙의 돼서.”
스스로 너희의 세계를 ‘향유’했노라 말하면서, 도저히 가르엘의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카델은 죄인의 기분으로 지금껏 숨겨 왔던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기 시작했다.